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시험을 식년시(式年試)라 하며, 대비과(大比科)라고도 한다. '대비'는 〈주례〉에 나오는 말로, 3년마다 그 덕행과 도예(道藝)를 고찰하여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뽑아 등용했다는 문구에서 비롯되었다.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으로 하여 3 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과거시험을 치르었다. 식년시는 소과(小科) ·문과(文科) ·무과(武科)로 나눈다. 부정기적으로 보는 시험으로는 증광시(增廣試) ·별시(別試) ·알성시(謁聖試)가 있다.
소과의 경우는 생원 ·진사의 복시, 문과는 복시 ·전시, 무과는 복시 ·전시, 잡과는 역과(譯科) ·의과(醫科) ·음양과(陰陽科) ·율과(律科)의 복시를 식년에 실시하였다. 초시를 거친 합격자는 예조에서 복시(覆試)를 거쳐 33명을 뽑고 전시(殿試)에서 성적순으로 갑과(甲科)에 3명, 을과에 7명, 병과에 23명을 급제시켰다.
즉, 문과에 있어 초시에는 관시(館試)·한성시(漢城試)·향시(鄕試)가 있는데 시험은 식년 전해의 9월초에 일제히 거행되었다. 시험을 치를 때는 초장(初場)·중장(中場)·종장(終場)으로 나누어 관시·한성시·향시에 각각 인원을 배분했고, 향시에서는 각 지방별로 다시 인원을 배정했다. 그리고 관시·한성시·향시의 합격자를 식년 봄 서울에 모아 시험보게 하고 그 가운데 33명을 뽑는 것을 복시 또는 회시(會試)라고 했다. 복시에서는 초장에서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암송시켜 일정 수준 이상에 달한 자를 뽑고, 이들을 다시 중장과 종장에서 시험보아 종합점수를 내어 급락을 정했다. 또 복시에서 선발한 33명을 시어소(時御所)의 전정(殿庭)에서 시험보게 하여 순위를 정하는 것을 전시(殿試)라고 했다.
시험의 과목은 초시·복시·전시 모두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 및 유교이념에 바탕을 둔 문학적 재능, 논술 능력을 시험하는 것이었다. 즉 사서의(四書疑)·오경의(五經義)는 유교경전에 대한 지식을 측정하는 시험이고, 부(賦)·송(頌)·명(銘)·잠(箴)·기(記)·표(表)·전(箋) 등은 유교이념에 근거한 문학적 재능을 알아보기 위한 것이며, 전시에서 가장 많이 채택되었던 대책(對策)은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한 논술능력을 알아보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시험과목은 모두 관리의 실무적인 능력의 측정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 이유는 당시의 국가통치가 철저하게 유교이념을 기반으로 덕치(德治)와 교화(敎化)를 표방하는 가운데 행해지고 있어 국가는 관리에게 실무적 능력보다는 유교이념의 구체적인 실현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무과는 28명, 잡과는 역과가 19명, 의과 1명, 율과 9명, 음양과 9명 등 총 38명을 뽑았다. 식년시가 처음 실시된 것은 1084년(선종 1)이지만, 1393년(태조 2)에 가서야 비로소 제도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국가적 변고나 국상(國喪), 또는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에는 식년시를 연기하거나 시행하지 않았다.
식년시는 그 해 1~5월에 시행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농번기와 겹치는 이유로 생원 또는 진사의 초시는 식년 전해 8월 15일 이후에, 문과 ·무과의 초시는 같은 해 9월 초순에 각각 실시하였다. 생원과 진사의 복시와 문과 ·무과의 복시는 식년의 2월과 3월에 각각 실시하였다.
즉, 처음에는 소과(小科)의 초시(初試)·복시(覆試), 문무과(文武科)의 초시·복시·전시(殿試), 잡과의 초시·복시 등 모든 시험을 식년 정월에서 5월 사이에 치렀으나, 시험기간의 촉박성, 농번기와 겹치는 등의 문제가 생겼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472년(성종 3)부터 잡과 초시는 상식년(上式年 : 寅·申·巳·亥) 가을에, 복시와 전시는 식년 봄에 시행하기로 했다. 소과 초시는 상식년 8월 15일 후에, 문무과 초시는 9월초에 각각 시행하고, 소과 복시는 식년 2월, 문무과 복시는 3월에 시행하게 되었다.
첫댓글 회장님, 문과 시험에 병과도 있었나요?
전체 응시자의 등급인데 문신은 11등부터 23등 합격을, 무신은 9등부터 20등을 병과라고 한답니다.서북지방 관뷱지방의 한미한 집안의 인사가 서울에 와서 명문 성균관 유생과 실력 대결을 하여 11등은 달걀로 바위를깬 기개라고 보아야 합니다. 특히 金必宣,都事公은 정묘호란 시기 순절하신 정묘순절의 한분이신 휘 德蔓공의 高孫이신 동시에 삼전도 치욕 후 소현세자가 볼모로 胡京 심양으로 끌려 가실제 호위 팔장사로 수행하신 휘 俊哲공의 손자이시기도 하며 우리 족보에 영문 해석을 달아주신 병호종친의 직계조상이 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