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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를 믿은 후, 그 사람이 과거에 범한 모든 죄는 주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해 다 사함을 받게 된다. 그러나 주님을 믿고 거듭난 후에 그가 다시 죄를 범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이나 죄를 범한 것은 또한 사실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죄를 범하는 것은 사실이고 누구도 부인할 수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실패하지 말아야 하고 악을 행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실패가 있고 좋지 않은 일을 행할 때가 있음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우리는 죄를 어떻게 대적해야 하는가?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죄들을 어떻게 처리하시는가? 지난 며칠 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잠시적인 질책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말한 적이 있다. 만일 우리가 배도(背道) 한다면 천년왕국에서 형벌이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죄를 처리하고 씻음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죄는 어떻게 해야 깨끗케 되고 사함받을 수 있는가? 신구약 전권에서 이 문제는 서너 군데에서만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우리에게 분명한 빛을 주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이 몇 군데를 잘 읽어보아야 한다.
보혈의 씻음은 오직 한 번 뿐이다.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시작부터 보기로 하자. 우리가 다 알듯이,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그분은 피를 흘려 우리 모든 죄를 씻으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사하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셨다. 오늘 문제는 구원받고 우리 죄를 사함받은 후, 다시 죄를 범하고 더럽혀지고 좋지 않게 되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주 예수님께 다시 한 번 우리를 씻어달라고 말할 수 있는가? 사람은 자기가 죄를 범하면 주 예수님의 피가 다시 그의 죄를 씻어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이러한 진리가 없다. 피의 씻음은 두번이 아니라 오직 한 번 뿐이다. 결코 사람의 죄를 다시 씻는 일이 없다.
히브리서는 우리에게 죄 정결케 함이 한 번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히브리서 10장 1절~14절 :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케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하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세상에 임하실 때에 가라사대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시니라 위에 말씀하시기를 주께서는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셨고 (이는 다 율법을 따라 드리는 것이라)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시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였으니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나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을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
또 9장 25절, 26절, 28절을 보기로 하자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그분의 두번째 나타나심은 죄와 상관 없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9장 12절~14절 :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9장 9절 :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9장과 10장을 읽은 후, 우리는 구약에 있는 사람과 신약에 있는 사람의 차이점을 보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구약의 때에 살고 있다면, 죄를 범했을 때 방법은 오직 한 가지이다. 만일 내게 돈이 많으면 황소 한 마리를 사고 돈이 적으면 송아지 한 마리를 산다. 이것도 저것도 살 수 없으면 비둘기 한 마리를 사면 된다. 그런 다음 제사장에게 가서 내 죄를 속량하도록 황소나 송아지나 비둘기로 제사를 드려 달라고 하면 된다. 이 소나 양을 볼 때, 그것이 나의 형벌을 대신 했기 때문에 내 마음은 아주 기쁘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사람이고 나의 죄는 이미 사함받았다. 본래 나는 죄 있는 사람이었으나 이제 내 양심 속의 흑암은 제해지고 나의 고통은 사라졌다. 그러나 며칠 후 내가 『만일 그 날 드린 제사가 합당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라고 생각한다 하자. 이 때 나는 근심하기 시작할 것이다. 나중에 나는 다시 소나 양을 잡아 제사장 앞에 끌고 가서, 『그 날 나의 죄가 잘 속량되지 않은 것 같으니 다시 한 번 나를 위해 제물을 드려 주십시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제사장은 그 소나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린다음 나에게 이 소나 양은 당신의 죄를 위해 불태워지고 바쳐졌다고 말할 것이다.
구약 때에는 당신의 양심에 불안을 느낄 때 다시 소나 양 한 마리를 잡아서 제사장으로 당신을 위해 속죄제를 드리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히브리서 9장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이다. 이 장은 소나 양의 피가 온전케 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10장에서는 만일 그것들이 온전케 하였다면 섬기는 자의 양심에 다시 정죄함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소나 양으로 드린 것은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은 양심에 불안을 느낄 때마다 그의 죄가 처리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다시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있지 않은가 하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도는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신약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화목제물은 소나 양이 아니라 그분의 아들이다. 그분의 아들은 이 땅에 오셨을 때 분명히 『하나님은 소나 양을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나를 위해 한 몸을 예비하셨으며 이 몸을 통해 나로 죽을 수 있게 하시고 영원한 속죄의 일을 이루게 하셨다.』고 말씀하셨다.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은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렸는데 이는 우리로 영원히 속조함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분이 영원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심으로 영원한 속죄의 일을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영원히 완전하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단번에 영원한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속죄제를 딀 필요가 없게 되었다. 우리는 결코 같은 죄를 위해 다시 속죄제를 드릴 필요가 없다. 이는 주 예수님이 이미 모든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 없고,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짓밟아 속된 것으로 여길 수 없다. 어떤 것이든 둘이 되면 곧 일반적인 것이 된다. 오직 하나인 것만이 진귀한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의 피를 일반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바로 그분의 피를 소나 양의 피같이 보는 것이다. 당신이 그분을 둘도 없는 분으로 존중한다면, 그것은 당신께 진귀한 것이다. 당신은 그분이 속죄제를 이루신 후 하나님께서 다시 일하실 수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또다시 죽으실 수 없음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역사는 이미 완성되었다. 그것을 얻으려면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거기에 무엇을 추가할 수 없다. 이것을 얻으려면 그분을 의지해야 하고, 얻고자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사람이 진리를 안 후에는 더이상 그를 위한 속죄제가 없다. 오직 하나의 속죄제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바이다. 사람이 이것으로 말미암아 예배하면 양심에 정결함을 얻게 되고 다시 죄가 있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모든 죄가 이미 정결케 되었기 때문에 다시 죄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있고 두번째 정결케 될 필요가 없다. 성경에서는 두번째 씻음받는 교리를 찾아볼 수 없다. 주 예수님의 피는 거듭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없는데 이는 한 번 씻음으로써 영원히 정결케 되었기 때문이다.
구원받은 후에 계속 씻음을 받아야 함
이제 문제는 만일 우리가 다시 죄를 범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더럽혀지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구원받기 전의 죄는 그분의 피로 씻어졌다. 그러나 구원받은 후의 죄는 어떻게 되는가? 나는 질책당하지 않고 싶고 왕국을 잃고 싶지 않으며 둘째 사망의 해를 받고 싶지 않은데,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요한 일서 2장 1절을 보자.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죄를 범하지 않는 것이다. 요한이 이 말을 한 것은 우리로 범죄치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격으로 말하면, 그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리스도인의 역사로 말하면, 그는 자주 죄를 범한다. 우리의 위치로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의 체험상으로는 자주 죄를 범한다. 죄를 범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나 또한 뒤집을 수 없는 사실이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은 그리스도인의 범죄의 문제를 말한다. 여기 하나님께 속한 한 사람이 죄를 범했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여기서는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지 않고 「아버지 앞에서」 라고 했다. 이것은 이 구절이 하나님의 자녀에 대해 말한 것이고 이미 구원받은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임을 우리에게 뚜렷이 보여 준다. 구원받은 사람 곧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서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 한 대언자가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법정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의 문제이다.
여기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고 말한다. 「대언자」라는 단어는 원문에서 「paracletos」로서 「para」는 평행(平行)을 뜻한다. 평행이란 당신이 어디에 있으면 그도 어디에 있다는 것이다. 당신이 상해에 있으면 그도 상해에 있고, 당신이 광주(廣州)에 가면 그도 광주에 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차의 철로와 같이 결코 한 쪽은 사천(四川)에 있는데 다른 한 쪽은 남경에 있을 수 없다. 「cletos」는 돕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paracletos」는 계속 병행하면서 돕는자라는 뜻이다. 당신이 도망칠지라도 당신이 어디로 가든 그는 거기에 있다. 많은 도움의 손길이 있어도 때가 맞지 않으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 상해에 쌀이 많아도 남경(南京)은 바로 그 옆에 있지 않기 때문에 도움을 받지 못한다. 헬라어 「paracletos」는 법정에서 사용되는 언어이다. 법정에서 당신에게는 변호사가 필요하다. 당신이 법률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남이 당신을 욕해도 모르고 당신이 그를 다룰 길도 없다. 이제 한 「paracletos」가 당신을 돕기 위해 왔다면,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죄가 있다고 말할 때, 당신의 「paracletos」는 당신이 무죄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변호사와 같이 당신을 위해 답변할 것이다. 여기의 뜻은 당신 곁에 당신을 위해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범죄한다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대신하여 말씀하는 한 분이 계신다.
사탄은 영원히 그리스도인을 참소하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계시록 12장 10절은 그가 밤낮으로 우리를 참소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밤낮으로 참소를 받고, 그는 밤낮으로 우리를 계속 참소한다. 그러나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한 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다. 여기서는 그분을 대언자(중보)라고 했다. 그분은 은혜를 베푸시는분이 아니라 의로운분이시다. 왜 여기서는 그분을 은혜로운 분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는 땅의 법정에서도 은혜를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을 용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법관은 다 의롭지 못하다. 공의를 말하는 자만이 법관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도 공의를 말씀하신다. 그분은 우리 죄를 간과하거나 소홀히 하지 않으시고 경솔하게 대하지도 않으신다. 그분은 공의로 우리 죄를 심판하셨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변호하시는 방법은, 어떤 시험이 너무나도 커서 어린 아이들인 우리가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은 힘이 작고 지식이 얕으며 육신이 심히 연약한 반면 사탄의 유혹은 맹렬하고 사탄의 궤계는 아주 간교한데 어떻게 그들이 거절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주 예수님은 이렇게 변호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구하지도 않으신다. 이점에서 그분은 은혜를 베푸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이 이미 역사를 이루셨기 때문에 그분은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실 수 없는 것이다.
이 중보자는 우리를 위해 어떻게 변호하시는가? 다음 구절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 준다.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요 2:2). 주 예수님은 그분이 성취하신 일 곧 십자가에서 그분이 화목 제물이 되신 것에 근거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위해 변호하신다. 이것은 완전한 화목 제물로서, 동서고금의 모든 그리스도인의 죄를 포함한다. 그분이 이 화목 제물을 하나님께 보이실 때 하나님은 다시 그리스도인들을 형벌할 다른 이유를 가지실 수 없다. 주 예수님의 화목 제물은 과거의 모든 죄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오늘, 심지어 장래의 모든 죄를 위한 것이다. 여기의 동사는 현재 시제이지 과거 시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탄의 참소로 인해 우리를 정죄하실 수 없다. 이는 그분이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구속 역사 안에 현재의 모든 죄와 주님이 다시 오실 그 날까지 우리가 범할 모든 죄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죄가 그분의 역사 안에 포함되어 있다. 거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사하실 것이고, 사함의 근거가 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사하지 않으실 수 없다.
주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위해 중보가 되신다
주 예수님의 구주로서의 모든 역사는 죄인을 위한 것이고 중보로서의 역사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것이다. 주 예수님의 구주되심은 십자가의 역사를 적용하신다. 죄인의 죄가 사함받은 것은 십자가의 구속으로 인한 것인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죄가 사해진 것은 십자가의 구속에 대한 변호에 근거한 것이다. 주 예수님은 십자가의 역사를 하나님 앞에 두사 그분이 이미 모든 것을 이루었으니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형벌하실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는 한 중보자가 계신다. 그분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 놓여져 있다.
주 예수님은 일찍이 모든 범죄한 사람을 위해 구주가 되신 것처럼 범죄한 그리스도인을 위해 중보가 되셨다.우리가 회개하고 거듭나야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분은 이미 우리를 위해 구주가 되어 주셨다(롬 5:8).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회개할 때에야 그분이 중보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범죄할 때에 그분은 이미 중보가 되셨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자백할 때 그분이 우리의 중보가 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범죄할 때에 그분은 이미 우리의 중보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중보)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죄를 자백하며 하나님의 사하심을 구해야만 그분이 우리의 중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한 중보가 계신 것이다. 언제든지 당신이 죄를 범할 때, 주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중보가 되신다. 그 때 주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 위에서의 그분의 역사를 보이면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당신의 죄를 지나가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자백하고 회개할 수 있는 이유는 주 예수님이 중보가 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우리의 중보이신 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변호하며 말씀하시기 때문에,우리가 마침내 통회하고 죄를 자백하며 용서하심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 예수님의 중보의 역사는 당신이 범죄할 때 시작된다. 언제든지 당신이 죄를 범하면 주 예수님은 중보가 되신다. 그럴 때 당신은 회개하고 죄를 자백할 수 있게 된다. 주 예수님이 그 날 이루신 역사 안에 모든 것이 이미 포함되어 있다. 오늘 주 예수님은 그 역사를 하나님 앞에 두셨다. 우리의 모든 빚이 다 갚아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이상 우리를 벌하실 수 없다. 과거의 빚과 장래에 우리가 지게 될 빚이 이미 다 갚아졌다. 우리의 모든 죄는 주 예수님의 보혈 아래서 이미 정결케 되었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함
그분이 중보가 되신다면 우리 편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다시 요한 일서 1장 7절을 보기로 하자.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빛 가운데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사람은 죄가 없고 거룩한 것을 빛 가운데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여기의 뜻은 그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빛 가운데 행하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말이 없다. 만일 이렇게 쓰여졌다면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 이 구절은,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이라고 말한다.
그 차이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를 들어, 지금 집회소 안의 많은 전등이 빛을 내고 있는데, 이것을 빛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우리들은 빛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집회를 하고 있는 동안 자주 옆 건물의 계단에 사람들이 앉아 있곤 했다. 그들은 어두움 가운데 있다. 그들은 겉으로 죄를 범하지 않았고 남의 물건을 도둑질 하지 않았다. 혹 그들은 당신보다 선하고 거룩할 것이다. 그러나 빛 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선명하게 볼 수 있고 흑암에 앉아 있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신다는 말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분명히 보실 수 있다는 말이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휘장으로 쌓인 은밀한 곳에 계셨다. 사람들은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었다. 성소 안에는 등이 있고 바깥 뜰에는 햇빛이 있었으나 지성소 안에는 전혀 빛이 없었다. 사람들은 지성소 안에 계신 하나님을 알 길이 없었고 오직 상상으로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오늘 하나님께서 나사렛 사람 예수에게서 나타나셨다는 것이다. 오늘날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신다. 오늘 하나님은 더이상 휘장으로 싸인 캄캄한 곳에 계시지 않는다. 오늘 하나님은 알려진 하나님이요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오늘 당신이 그 분을 볼 때 그분이 곧 하나님이심을 알게 된다. 나사렛 사람 예수의 복음은 곧 하나님의 계시이다. 복음의 빛이 비췸으로써 하나님을 비추어 내었다. 복음의 빛이 비췸으로써 우리로 하나님을 보게 하였다(고후 4:4).
내 말은 우리가 거룩케 될 필요가 없다거나 죄를 멀리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이 구절이 우리에게 하나님이 빛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해야 함을 알려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음 안에서 나타나셨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복음의 빛 안에서 하나님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된다. 오늘 하나님은 나타나셨다. 만일 그분이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어떠한 길도 없었을 것이다. 만일 그분이 나타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분인줄 모르고여전히 마음 속으로 상상하고 추측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것은, 그분이 오늘 나타나셨다는 사실이다. 오늘 하나님은 무대 뒤에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무대 앞에 계신 하나님이며 계시되신 하나님이다. 「apocalypsis」는 중국어로 「계시」라는 뜻이다. 「apo」는 「열다」를 뜻하고 「calypsis」는 휘장을 뜻한다. 그러므로 「apocalypsis」는 「휘장을 열다」라는 뜻이다. 전에 나는 중국 연극을 본 적이 있다. 무대에는 몇 겹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당신은 알 수 없다. 「apocalypsis」는 바로 휘장을 여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신다. 오늘 그분은 이미 열려진 분이시다. 그럼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빛 가운데 행해야 한다. 오늘 빛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구약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추측하는 것과 다르다. 오늘 하나님이 이미 나타나셨으므로 더이상 추측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이미 빛 가운데 계신다. 복음 안에서 그분은 이미 자기 자신을 계시하셨다. 만일 내가 이 계시 안에서 행한다면 결국 교통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사이에도 서로 교통이 있게 되고 그리스도인과 하나님 사이에도 교통이 있게 된다.
내가 이 복음 안에 있고 하나님도 이 복음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내 모든 죄를 씻을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복음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안다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지속적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는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원문에서 여기의 뜻은 영구적으로 우리의 죄를 씻고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우리를 정결케 한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예수의 피가 「다시」 우리 죄를 깨끗이 씻는다는 말씀을 발견할 수 없다. 성경은 주 예수의 피가 「계속적으로」 우리를 씻는다고 말해 준다. 주 예수의 피가 우리를 씻는 것은 반복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다. 성경에는 반복해서 씻는다는 사상이 없다. 성경의 진리는 지속적으로 씻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는 계속적으로 우리 죄를 씻는다. 이것이 그분의 중보의 역사이다. 십자가의 역사는 단번에 이루어지지만, 죄를 씻는 그분의 보혈의 효능은 지속적인 것이다. 십자가는 영 단번에 우리 죄를 정결케 하지만, 그 효능은 영원한 것이다.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분의 효능이 영원한 것인가?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분께서 이루신 역사를 계속적으로 하나님 앞에 두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죄를 다시 씻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그분이 이미 죽었고 이 죄인들이 이미 처리된 사람임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오늘 그분은 계속 우리 죄를 씻고 계신다. 우리의 모든 죄는 이미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 주 예수님이 하늘에서 계속 중보로 계시기 때문에 보혈의 효능은 영원까지 지속된다. 중보로서의 그분의 역사는 한 번이나 이 역사는 중보로서의 역사로 말미암아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방면이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자복함으로 말미암아 사함받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편의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지만 우리 편의 일을 잊어버려서도 안 된다. 주 예수님이 계속적으로 그분의 보혈과 성취하신 역사를 하나님 앞에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만일 우리가 고의로 죄를 범하고 지속적으로 죄를 범하며 계속 회개하지 않고 그 죄들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우리 몸에서의 주 예수님의 보혈의 역사는 그 효능과 기능을 잃게 된다. 이것은 마치 십자가 상에서의 주 예수님의 못 박히신 역사가 우리를 위할 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을 위한 것과도 같다. 그때 주 예수님의 역사는 모든 사람을 포함한 것이다. 그러나 오직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만 주 예수님의 역사가 실현될 수 있다. 중보로서의 그리스도의 역사도 이와 같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죄를 자복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더라도 죄를 씻는 그분의 역사는 지속적인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역사가 어떻게 우리에게 실현되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요한 일서 1장 7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함받는 것을 알려 주는 반면에 9절은 우리 편에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을 보여 준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2장 1절은 주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가 되신다는 것을 말하고, 여기서는 우리 편에서 또한 우리가 죄를 자백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죄의 자백이 사함을 가져다준다는 뜻이 아니다. 만일 죄의 자백 자체가 우리로 사함을 얻게 한다면, 그 사함은 불의한 것이다. 가령 내가 마(馬)형제에게 백 원을 훔친 뒤, 그에게 가서 그의 돈을 훔친 것을 자백한다 하자. 내가 자백했다고 해서 그가 나를 용서하겠는가? 이것이 의로운가? 만일 이것이 의로운 것이라면, 다음에 나는 또다시 백 원을 훔치고서 똑같이 자백하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게 된다. 만일 죄를 자백하기만 해도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면, 이것은 불의한 것이다. 그럴 때 당신은 하나님을 의롭고 신실하시다고 말할 수 없다. 당신은 하나님을 불의하고 죄를 간과하시며 우리의 죄를 소홀히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 사하심을 의로운 사하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는 주 예수님이 중보가 되시고, 그분의 피가 이미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으며,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에게서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 것이다. 내가 훔친 마(馬)형제의 돈을 어떤 사람이 갚아 주었기 때문에 내가 그 사실을 시인하기만 하면 사함을 받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없다면, 그분의 사하심은 불의한 것이 된다. 오늘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이미 흘려졌고 하나님 앞에서 그 아들이 이미 중보가 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하지 않으실 수 없다. 오히려 사하지 않으실 때 그분은 의롭지 못하게 되신다. 오늘 내가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심으로 우리 죄를 사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주 예수님이 이미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은 그분의 말씀에 대해 미쁘시고 주 예수님의 역사에 대해 의로우시기 위해 반드시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셔야 한다고 한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심은 완전히 주 예수의 피로 인한 것이다. 죄인의 죄가 사함받는 것은 주 예수의 피에 근거하고 그리스도인의 죄가 사함받는 것도 주 예수의 피에 근거한다. 주 예수님이 구주이시므로 하나님이 죄인의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고, 주 예수님이 중보이시므로 하나님이 믿는이의 죄를 사하시는 것이다. 구주이든 중보이든 다 주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 죄가 사함받고 우리가 의롭게 될 수 있다.
그러면 죄를 자백한다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사도는 죄의 자백이 우리 죄를 사하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 사함을 구하는 기도 중에 참된 자백이 아닌 것이 얼마나 많은지! 사도는 우리가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곧 죄의 자백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도는 죄를 자백하기 위해서는 죄를 죄로 여겨야 한다고 말한다. 죄의 자백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어떤 것이 정말 죄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당신이 이렇게 당신의 죄를 인정할 때, 당신은 사함을 받게 된다. 자백은 사함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사함의 여부는 주 예수님께 달려 있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 죄를 심판하는 것이다. 당신은 그 죄를 심판하고 단정하며, 틀렸다는 것을 자백해야 한다. 당신은 죄를 죄로 생각하고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죄로 인정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실 것이다. 죄인이 주 예수의 역사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듯이 그리스도인도 죄를 죄로 심판하고 주 예수의 역사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사하심을 받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죄라고 하신 것을 나도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마(馬)형제의 아들이 길가에서 다른 나쁜 애들과 좋지 않은 말을 하며 나쁜 짓을 하고 있다고 하자. 마(馬)형제가 자기 아들을 꾄 아이들을 찾아 그들에게 다시는 자기 아들과 같이 놀지 말라고 타이르고 나서 자기 아들에게 돌이켜 다시는 그 애들과 같이 나가 놀지 말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의 아들은 자기 잘못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가 입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조금 있다가 뒷문을 열고 나가서 그들과 같이 놀 것을 궁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럴 때 그는 아버지 편에 서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함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죄를 죄로 인정하는 문제이다.
죄를 자백하는 것은 하나님이 죄라고 하시는 것을 나도 죄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면 나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것을 틀렸다고 하시면 나도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죄의 자백은 바로 죄를 죄로 인정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죄를 사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당신을 깨끗케 하실 것이다. 당신이 죄를 자백했기 때문에 당신을 사하신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역사로 인해 당신을 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근거는 그분의 피에 있다. 그러나 이 피는 자백을 통해 사함을 받는다. 구원은 피에 근거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함은 피에 근거하고 자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는 수도물이 수원지에 있고 수도관을 통해 공급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사함은 피에 근거하고 자백으로 말미암아 오는 것이다.
구약에 있는 붉은 암송아지 재의 예표
구약에 신약의 믿는이의 죄가 어떻게 사함받는지를 예표하는 일종의 씻음이 있다. 신약 요한 일서 1장, 2장의 말씀은 구약에 이미 예표가 있다. 이제 우리는 그 성경 구절을 읽어보자. 이 단락은 구약에서 유일하게 그리스도인의 죄가 사함받는 것을 다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민수기 19장 1절~13절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여호와의 명하는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 끌어오게 하고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그는 그것을 진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번 뿌리고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취하여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 가운데로 던질 것이며 제사장은 그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에 들어갈 것이라 그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에 정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 밖에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로 만드는 데 쓸 것이니 곧 속죄제니라 암송아지의 재를 거둔 자도 그 옷을 빨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과 그 중에 우거하는 외인에게 영원한 율례니라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그는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민수기 19장에서 언급된 제물은 구약에서 가장 특별한 제물이다. 민수기는 제물에 대해 말하는 책이 아니다. 제물에 대해 말한 책은 레위기이다. 그러나 이 제믈은 레위기에서 언급되지 않고 도리어 민수기에서 언급되었다. 우리는 유월절 어린 양이 애굽에서 죽임 당한 것을 안다. 이것은 주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임당한 것을 예표한다. 시내 산에 이를 때에 하나님은 또 다시 유월절 양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레위기의 다섯 가지 제물은 어린 양을 분석하여 우리에게 주 예수의 여러 방면과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키고 어떻게 사람의 죄를 속량하셨는가를 보여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죄인을 위한 것으로 시내 산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이다. 민수기는 광야에서의 책으로서 우리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바란 광야에서 표류했는지에 관한 역사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들은 광야에서 나그네였고 우거하는 자였다. 그들은 열국 가운데서 표류하고 있었다. 거기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의 제물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붉은 암송아지의 제물이다.
하나님께 드린 모든 제물의 피는 다 쏟아내야 했지만, 오직 이 제물의 피는 조금 찍어서 회막 앞에 뿌려야 했다. 그런 다음 그 피를 불 살라야 했다. 모든 제물은 다 수소나 수양이었으나 오직 이 제물만은 암송아지이다. 다른 모든 제물에 있어서는 색깔을 말하지 않았는데 오직 이 제물만은 색깔을 말했다. 이 제믈은 반드시 붉은 암송아지여야 했다. 모든 제물은 제단 위에서 드려졌으나 오직 이 제물만은 진 밖에서 불살라졌다. 다른 모든 제물은 죄를 사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이 제물의 두번째 부분만은 정결케하기 위한 것이었다. 레위기 다섯 가지 제물은 유월절 어린 양을 묘사한 것으로서 죄인을 위해 예비된 것이기 때문에 출애굽기와 레위기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이 제물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예비된 것이기 때문에 민수기에 기록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광야에서 길을 갈 때에 길에서 체험하는 제물이다. 다른 모든 제물은 죄를 위한 것이나 오직 이 제물만은 광야에서의 더럽혀짐을 위한 것이다. 모든 제물은 다 수컷인데 오직 이 제물만은 암컷이다. 죄인을 위한 것은 다 수컷이고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것은 모두 암컷이다(신 21:3~9). 레위기 5장 6절은 암염소를 드릴 수 있다고 말했다. 속건 제물은 죄인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많은 경우에 믿는이를 위한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죄인을 위하는 속죄제와는 다르다. 속건제는 죄인과 믿는이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뭔가를 드릴 때에는 암컷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것이 구약의 규정이다.
여기에 하나님께 득죄한 것을 처리하기 위한 한 제물이 있는데, 이 제물은 믿는이를 위한 것이다. 붉은 색은 하나님 앞에서의 속죄를 가리킨다. 이것은 죄인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단 위에 드려지지 않았다. 이는 죄인은 제단을 거쳐야만이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제물은 진 밖에서 불살라졌다. 진은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으로서 곧 교회의 예표이다. 진 밖으로 나가는 것은 교통에서 끊어지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교통을 잃었다면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한 제물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죄를 위해 있고, 그 목적은 교통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제물이 무엇인지를 보기로 하자. 이 제물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부분은 이 제물의 피를 드림이고, 둘 째 부분은 이 제물을 불사르는 것이다. 첫 부분은 2절 하반절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 끌어오게 하고 』. 성경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이것이 주 예수를 가리킴을 알 것이다. 히브리서 10장은 이 암송아지가 주 예수님을 언급함을 지적한다. 주 예수님이 이 제물이 되실만한 자격은 무엇인가? 여기서 이 제물은 흠이 없고 멍에를 메지 않았다고 말한다. 흠이 없음은 그분의 생명을 가리켜 말하고, 멍에를 메지 아니함은 그분의 역사를 가리켜 말한다. 흠이 없다는 것은 생명과 관계되고, 멍에 메지 않음은 행위와 관계된다. 그분의 생명과 인격 안에서 주 예수님은 아무런 흠이 없으시다. 그분은 흠이 없을 뿐 아니라 체험에 있어서도 정결하며 멍에를 메지 않셨다. 그분은 정결한 사람으로서 정결한 체험을 가지고 계신다. 많은 사람은 흠이 없을 수 있지만 멍에를 멘 적이 있다. 그분은 죄를 만져 본 적이 없고 죄의 압박을 받아 본 적이 없으며 죄의 지배를 받아 본 적이 없고 죄의 자극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분은 완전히 자유자이셨다. 오늘 저녁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죄의 압박을 받아 보았고 죄의 지배와 자극을 받아 보았다. 우리는 스스로 주장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점이 없으시고, 오직 주 예수님만이 죄의 멍에를 메지 않으셨다.
암송아지를 잡은 후에는 어떻게 했는가? 4절 :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번 뿌리고』. 그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다만 피를 찍어 하나님 앞에 가져가 회막 앞에서 뿌렸다. 이것은 주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케 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피는 이스라엘 백성 몸에 뿌려지지 않고 회막 앞에 뿌려졌다. 회막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거하시는 곳이다. 회막은 하나님과 사람의 교통의 표시이다. 하나님의 회막이 있는 곳에 하나님도 계신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 가운데 함께 계시는 회막이시다. 그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시고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분이다(요 1:14). 그러므로 거기에 교통이 있다. 어떻게 이러한 교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피가 있어야 하고 죄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 만일 피가 없다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오는 오직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죄가 없거나 피를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에게 죄가 없다면 당신은 가슴을 펴고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다. 하나님도 당신에 대해 어떻게 하실 수 없다. 만일 당신에게 죄가 있다면 피 흘림이 필요하다(히 9:22). 이는 하나님은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기 때문이다. 만일 죄가 심판을 거치지 않았다면, 사람은 결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다. 하나님은 임의로 사람의 죄를 소홀히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그냥 통과시킬 수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반드시 피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한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는 분이시다. 그분은 심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죄를 그냥 통과시키지 않으신다. 심판은 피를 요구하기 때문에, 피가 있어야만이 회막의 교통이 회복될 수 있다. 여기의 일곱 번은 완전의 숫자로서, 주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을 만족케 했고 그분의 피가 충분히 우리를 깨끗케 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의 모든 문제는 다 완전히 해결되었다. 하나님의 공의의 요구가 이미 만족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역사가 다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신 역사로서 영 단번에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다른 붉은 암송아지가 다시 죽을 필요가 없다. 붉은 암송아지 한마리가 죽은 것으로 충분하다. 피를 뿌린 것은 죄인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입증한다. 이것은 첫번째 부분으로서 구약의 다른 제물과 같이 유월절 어린 양과 동등하다.
이제 우리는 두번째 부분을 보기로 하자 두번째 부분은 우리에게 믿는이가 어떻게 죄를 처리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다.
5절 :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이 부분의 말씀은 매우 특별하다. 단순히 불사른다고 하지 않고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취하여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 가운데로 던질 것이며 』라고 했다. 하나님은 죄를 심판하는 분이시다. 피를 뿌리는 일을 마친 후 남은 것은 모두 불에 던쟈야 한다. 제사장은 암송아지 전체<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를 다 불살라야 한다. 이뿐 아니라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함께 불살라야 한다. 9절 : 『이에 정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 밖에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로 만드는 데 쓸 것이니 곧 속죄제니라』이 암송아지가 살육당한 후에 사용된 것은 그 '피'이나 태워져서 재가 된 후에 사용된 것은 이 '재'이다.
「재」란 무엇인가? 이 세상의 있는 모든 물질의 최종 상태가 곧 재이다. 나는 화학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물질의 최종 상태는 재이다. 끝까지 변하여 더이상 변할 수 없는 단계를 가리켜 재라고 한다.
이제 암송아지의 모든 부분은 다 불살라졌다. 여기서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피이다. 이 재 안에 가죽과 피와 고기가 있다는 것은 이 재 안에 그리스도의 속죄와 속죄의 영원한 효능이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는 계속 효능을 갖고 계시며 그분은 이미 불살라져 재가 되셨다. 그분의 피 흘리신 역사는 영원한 효능을 갖고 있다. 여기서 피는 이미 재가 되었다. 속죄의 역사가 이미 완성된 것이다. 붉은 암송아지는 바로 주 예수님의 구속의 역사가 이미 재가 되었음을 묘사한다.
거기에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이 추가 되었다. 성경에서 백향목과 우슬초가 함께 언급될 때 이것은 피조된 우주 전체를 가리킨다. 열왕기 상 4장 33절은 솔로몬의 지혜가 높아서 모든 나무 곧 백향목에서 우슬초까지 말하고 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우주 전체를 다루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백향목에서 우슬초를 불에 던졌다는 것은 주 예수님이 죄의 심판을 받으실 때 그분 자신이 불살라졌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다 함께 불살라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사렛 사람 예수 안에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셨다. 그분이 불을 통과하실 때 당신과 나, 백향목과 우슬초도 다 불을 통과하였다. 큰 자이든 작은 자이든, 향기로운 것이든 냄새나는 것이든, 부한 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온 우주가 그분에게 놓여져 하나님께 심판을 받았다. 여기서 또한 홍색실을 불 속에 넣었다고 말한다. 이사야 1장 18절은 우리의 죄가 주홍 같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주홍은 죄를 나타낸다. 여기서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우리 죄를 심판하셨다. 모든 죄가 주 예수 안에 포함되었다. 하나님이 그분을 심판하실 때 우리의 죄도 심판을 받았다. 우리의 모든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러므로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불 속에 넣은 것은 온 세상 사람들과 모든 죄 문제가 주 예수 안에서 불태워짐으로 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재는주 예수님의 모든 역사를 포함한다. 재는 또한 우리 자신과 우리의 죄를 포함한다. 재는 영원히 효능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역사는 효능이 있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모든 요구를 만족케 할 수 있다. 이 재는 진 밖에 정결한 곳에 두어졌다.
11절부터는 이 재의 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일을 부정하리니 그는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 9절은 부정을 제하는 물이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 정한 자가 암송아지의 재를 거두어 진 밖에 정한 곳에 둘지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 회중을 위하여 간직하였다가 부정을 깨끗케 하는 물로 만드는 데 쓸 것이니 곧 속죄제니라 』여기의 부정은 시체를 만진 부정을 뜻한다. 왜 시체를 만지면 부정하게 되는가? 사망은 죄에 근거한다. 죄가 없으면 사망도 없다. 사망이 있다는 것은 죄가 있다는 증거이다. 죽은 시체는 죄가 역사했다는 것을 가리키고, 죄가 역사한 결과 사람은 죽게 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문둥병자는 치료될 수 있는 죄를 상징하고 죽은 시체는 치료될 수 없는 죄를 상징한다. 사람이 죄와 허물로 죽고 육체 가운데 죽었다면, 그는 죽은 시체인 것이다. 주 예수님은 이러한 사람을 죽은 사람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죽은 사람으로 죽은 사람을 장사하게 하라고 하셨다(마 8:22). 당신이 죽은 사람을 접하고 세상과 왕래하며 세상과 사귀며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산다면, 당신은 죽은 시체를 접하는 것이다. 죽은 시체를 만질 때 당신은 오염되지 않기가 매우 어렵다. 죽은 시체를 만지면 당신은 부정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세상과 접촉하기 때문에 죄를 범하고 실패하는 것이다. 이 때 그에게는 이 재가 필요하다.
여기서는 이 재 곧 십자가의 역사를 흐르는 물과 함께 섞어 놓으면(17절) 부정을 제하는 물이 된다고 말한다. 흐르는 물(생수)은 성령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이 길을 가고 있을 때 반석을 침으로 그 안에서 생수가 흘러나왔다(출 17:6). 고린도 전서 10장 4절은 이 반석이 곧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따라서 생수는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 것 곧 성령을 가리킨다. 생수로 부정을 제하는 물을 만든다는 것은 우리 위에 성령의 능력이 가해진다는 뜻이다.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주 예수님의 역사는 공허한 것이다. 암송아지의 재만 있고 생수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십자가의 역사에 성령의 오심이 더해져 이 두 가지가 섞일 때 비로서 우리는 정결케 될 수 있다. 주 예수님이 다시 한번 오셔서 죽으실 필요가 없다. 주 예수님이 영 단번에 이루신 그 역사의 효능을 적용하여 정결케 하면 된다. 붉은 암송아지의 재는 십자가 상에서 이루신 주 예수님의 역사가 영원하고 변치 않는 효능임을 나타낸다. 그 효능이 나를 정결케 하는 것이다. 주 예수님이 이미 죽으셨고, 그분의 죽음의 효능이 영원하기 대문에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효능을 우리에게 적용시킬 수 있다.
우리는 죄를 범할 때마다 다시 소를 하나님 앞으로 가져갈 필요가 없다. 이천 년 전의 주 예수님의 역사의 효능은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그 재로써 우리는 정결케함을 받을 수 있다.
만일 사람이 정결케 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12절 : 『 그는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이 잿물로 스스로 정결케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제 삼일과 제 칠일에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 왜 제 칠일에 가서야 정결케 되는가? 여기서 사람이 제 삼일에 정결케 해야 하나 제 칠일에 가서야 정결케 된다고 말한다. 목적은 제 삼일이 아니라 제 칠일이다. 제 삼일은 주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이다. 부활하신 후 주 예수님은 죄 사함의 도를 우리에게 전해 주셨다. 제 칠일은 무엇인가? 성경에서 제 칠일은 안식일이다. 히브리서 4장 9절은 또 다른 안식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주적인 큰 안식 곧 천년왕국의 때를 가리킨다. 이것은 주님 부활 시에 정결케 되지 않은 사람은 왕국 때에도 정결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주님의 부활 시에 정결케 되었다면 오늘 정결케 된 것이고, 제 칠일 곧 왕국 때에도 정결케 된 것이다. 제 삼일은 제 칠일을 위한 것이다. 오늘 문제는 제 칠일에 있다. 영원의 문제는 지나갔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문제도 해결되었으며, 기타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되었다. 오늘 남은 유일한 문제는 왕국 때에 정결케 될 것인가이다.
이 부분의 종결인 13절은 이렇게 말한다. 『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 여호와의 성막이란 무엇인가? 오늘 여호와의 성막은 집회 장소나 어떤 예배당이 아니다. 오늘 여호와의 성막은 바로 당신의 몸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은 당신을 멸하실 것이다.(고전 3;17). 만일 사람이 자기 몸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 결국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이다』. 즉 당신은 이스라엘에게서 거절당하게 될 것이다. 애굽으로부터 거절당한다고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에게서 거절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하나님의자녀가 왕국 안에서 왕 노릇 할 때 당신은 밖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정결케 되지 않았다면 장래 왕국에서 밖에 갇히게 될 것이다.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 모든 자백하지 않은 죄들과 주 예수의 보혈 아래 두지 않은 죄들과 당신의 몸 안에 남아있는 부정들은 당신으로 하여금 장래 왕국에 참예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바꿔 말해서, 부정을 제하는 물에 의해 정결케 된 사람은 왕국 안에서 정결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거니와, 회개한 죄들과 자백한 죄들과 주 예수의 보혈 아래 둔 죄들과 재를 적용한 죄들은 심판대 앞에서 다시 거론되지 않는다. 부정을 제하는 물이 더러움을 제거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안에 피의 효능과 속죄의 능력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의 속죄의 효능을 적용하지 않은 죄들은 제 칠일에 그 부정이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전의 죄들을 남겨 두지 말라. 주 예수님의 재로 말미암아 부정을 제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다시 나를 위해 죽으실 필요가 없고 나는 그분의 재로 말미암아 정결케 될 수 있음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부정을 남겨 둔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짓이고 또한 위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