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만을 기습한 일본군의 산소어뢰는 영국이 먼저 개발에 착수했다가 중단한 것이다. 산소는 폭발위험이 커서 다루기 어려운 물질이다. 영국이 쓸만한 어뢰를 개발했다는 언론의 오보 때문에 일본군도 다급해졌다. 영국이 하는데 우리 일본이 못한대서야 말이 되냐고? 산소 폭발이 무섭다고? 영국 신사도 한다는데 너희들의 사무라이 정신은 폼이냐? 겁내지 말고 몸으로 때워.
서구의 제강 기술도 마찬가지다. 아랍은 인도의 우수한 철광석을 수입해서 유명한 다마스쿠스 강을 만들었다. 십자군 원정에서 깨진 유럽인들은 원료인 철광석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고 따라잡기에 나섰다. 아랍도 하는 것을 우리 유럽이 못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그들은 무수히 시도한 끝에 제강 기술을 발전시켰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많다. 애플이 하면 갤럭시도 하고 한국이 하는 것은 중국도 한다. 인간들이 그렇다. 남이 안 하는 것을 먼저 개척하지는 못하는데 남이 하는 것을 보고 따라잡기는 잘한다.
인간은 단계를 뛰어넘는 문제에 약하다. 반면 주어진 단계 안에서는 막강하다. 상호작용구조 안에서 경쟁이 붙으면 강력하다. 단위가 다르면 판도라의 상자를 닫고 모르쇠를 시전한다. 포기하는 것이다.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인류문명은 1만 년 동안 사물의 단위에 갇혀 있었다. 구조론이 새로 사건의 단위를 열었다. 물질의 세계에서 성질의 세계로 넘어왔다. 안정의 세계에서 변화의 세계로 버스를 갈아탔다. 정적 세계관에서 동적 세계관으로 갈아탄 것이다. 인류는 루비콘강을 건너 완전히 다른 세계로 와버렸다.
사건 - 사물
성질 - 물질
변화 - 안정
동적 - 정적
사물의 고유한 속성을 따지는 세계에서 대칭과 짝짓기로 파악하는 세계로 넘어왔다. 고유한 속성이라는 말은 얼버무리는 말이다. 그런 것은 우주 안에 없다. 세상에는 오로지 짝짓기 간격이 있을 뿐이다. 체내수정이냐 체외수정이냐, 속씨식물이냐 겉씨식물이냐, 양성생식이냐 단성생식이냐, 진핵세포냐 원핵세포냐, 의사결정이 닫힌계 안에서 일어나는가 밖에서 일어나는가. 디지털이냐, 아냘로그냐. 우주 안의 모든 것은 이런 짝짓기 방식의 차이가 결정한다.
집단의 자발적 변화 - 개체의 수동적 변화
디지털 - 아날로그
체내수정 - 체내수정
속씨식물 - 겉씨식물
양성생식 - 단성생식
다세포 - 단세포
갈릴레이가 지구는 돈다고 말한 이후로 최대의 세계관 갈아타기다. 이왕 발걸음을 떼고 길을 나섰으면 끝까지 가봐야 한다. 지구만 돌겠는가? 우주도 돌고 물질도 돌고 소립자도 돌고 모든 것이 돈다. 돌지 않는 것은 없다. 도는 것은 중심이 내부에 있다. 내부를 바라본다. 관성력은 내부를 바라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찰이다. 인지충격은 내부를 바라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외부와의 불화다. 이 문제는 더 큰 껍질을 씌우는 방법으로만 해결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