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지옥마궁의 기연(奇緣) -2
천환인마(天幻人魔)! 그는 칠백 년 전의 거마였다.
그의 유급(遺 )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지옥마궁의 서고로
들어서게 되었다. 서기(書記) 하나가 우연히 그것을 보고 몰래 익
히려다가 지옥마후가 스스로 멸궁(滅宮)하는데 휘말려 죽게 되었
던 것이다.
"대단한 화신술법(化身術法)이다!"
백리웅은 얼굴을 매만졌다. 거추장스러운 면구를 벗어 버리고 싶
은 충동이 느껴졌다.
"훗훗, 나같이 더러운 자에게 잘 맞는 재간이 아니겠는가!"
백리웅은 소책자도 품에 갈무리했다.
한 시진 후, 백리웅은 한 상자의 야명주(夜明珠)를 찾을 수 있었
다. 그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것을 소중히 간직한 채 연공관으로
되돌아갔다.
우르르르르르-릉- 그르르르-릉-.
그가 나간 후, 지옥마궁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마궁은 토사로 뒤덮였다. 백리웅이 반나절만 늦게 비밀통로를 발
견했더라면 발견하나마나한 일이 되었을 것이다.
이 년.
백리웅은 영주가 배려해 둔 모든 것을 익힐 수 있었다. 하나, 그
는 이 장 두께의 한철벽을 단칼에 가를 만한 실력은 되지 못했다.
혈흔마검(血痕魔劍)이 제 아무리 날카롭기는 해도 그것을 쓴다는
것은 무사의 신의에 어긋나는 일이기에 쓰지 않았다.
미광(微光)에 젖은 석실 안, 백리웅은 양피지 한 장을 보고 있었
다.
사대천서(四大天書).
그 위에 있는 네 명의 형상, 사천마왕도(四天魔王圖)!
그것은 언제부터인가 살아 백리웅을 지배했다.
'무엇인가가 숨겨져 있다.'
백리웅은 정기신(精氣神)을 하나로 모았다. 마음의 문을 활짝 열
자, 의혹이고 뭐고 모든 것이 사라지며 다만 맑고 차가운 느낌만
이 뇌리에 남게 되었다.
- 글로 전하는 것은 글로 배우고 그림으로 전하는 것은 그림으로
배운다.
백리웅은 구태여 형상의 의미를 찾으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림
이 주는 느낌만을 모두 취하려 하는 것이다.
우웅- 웅-, 그림 속 무엇인가가 그를 빨아들였다. 무수한 검환
(劍環)이 고리고리 이어지는 환각이 나타났다.
십방(十方)에 검우(劍雨)가 뿌려지고 있었다. 정지되어 있던 한
자루 검이 갑자기 투명한 검강(劍 )을 내며 십방을 휩쓰는 것이
었다.
십방혈(十方血)! 그것은 사대천서(四大天書) 안의 사대마검결(四
大魔劍訣) 중 가장 쉬운 검결이었다.
사대천마(四大天魔). 이들은 네 쌍둥이였다.
이들은 병기로 검(劍)을 선택했다는 점에서는 같았으나, 검을 어
떻게 쓰느냐에 대해서는 각기 택한 길이 달랐다.
- 뇌(雷)! 나는 그 강함을 검결에 담겠다. 흐흐, 검을 떨치면 우
주가 벼락에 맞은 듯 으스러지게 하리라!
- 나는 건곤(乾坤)을 대번에 끊는 가장 웅장한 검결을 만들겠다.
허공처럼 거대하고 산악처럼 웅장한…….
- 한번 내치면 십방(十方)이 모두 피(血)에 젖게 하리라.
- 가장 빠른 것이 가장 강한 것이 아니겠는가! 시전했다는 흔적
조차 남지 않는 쾌검(快劍)을 만들리라! 그 어떤 초식이라도 시전
되기 이전, 내가 만든 쾌검 아래 제압당하리라!
네 형제는 그렇게 언약하며 백 년 이상 검을 갈고 닦았다.그리고
모두 뜻하는 바를 얻게 되었다.
- 십방혈(十方血). 우주에서 가장 잔혹한 검결(劍訣).
- 전광인(電光印). 천하의 어떤 존재보다도 강력한 검!
- 건곤진(乾坤鎭). 가장 무거운 검!
- 무류흔(無流痕). 속도에서 가장 빠른 검결!
십방혈도는 다만 상대를 처단하기 위한 검초였다. 그것은 일반 검
초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다.
반면 전광인(電光印)은 하나의 내공(內功)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심오한 단계에 도달한 검결이었다.
건곤진(乾坤鎭)과 무류흔(無流痕)에 대해서는 창안자의 천재성(天
才性)을, 그리고 그 오랜 나날의 각골연마를 찬탄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사대천마! 이들은 천 년 전의 강호계에서 무적(無敵)으로 군림했
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들은 쌍둥이들답게 똑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살기(煞氣)! 이들은 자신들의 적이 한날 한시에 태어난 형제들밖
에 없음을 영적(靈的)으로 알고 한 곳에 모였다. 그리고 누구 누
구를 가리지 않고 서로 싸웠고, 차례대로 죽어갔다.
십방혈결(十方血訣)을 만든 자가 제일 먼저 죽었다. 그 다음에는
전광인결(電光印訣)을 만든 자가! 그 다음에는 건곤진결(乾坤鎭
訣)을 만든 자가!
최후의 승자는 무류흔결(無流痕訣)의 창조자였다.
- 이제 나의 적은… 단 하나! 바로 나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심장에 칼을 꽂았고, 거기서 흘러내리
는 피로 사대천서를 만들었다.
구결은 없고 그림만 있는 이유, 그리고 그림이 그림이라기보다 혼
백을 지닌 사람처럼 보이는 전대비사(前代秘史)는 그런 것이었다.
백리웅은 십오 주야(晝夜)를 사대천서와 지냈다. 길다면 긴 시간
이나, 인서일합경(人書一合境) 도중혼재(圖中魂在)의 경지에 있는
백리웅에게는 탄지지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이것은 하늘(天)이다!"
백리웅의 두 눈이 북두성(北斗星)처럼 번쩍거렸다.
야광주로 밝혀지고 있는 장방형(長方形)의 석실. 백리웅이 입을
벌리지 않는다면 열흘이 지나도 경미한 소리조차 나지 않을 완전
한 침묵의 장소이다.
"훗훗, 드디어 검(劍)을 얻은 것이다!"
백리웅은 손을 쳐들었다. 허리띠처럼 걸려 있던 묵색(墨色)의 혈
흔마검(血痕魔劍)이 오른손에 쥐어지며 풀렸다. 검신이 나타나며
석실 안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보라, 위이이-잉- 혈흔마검의 검신(劍身)이 일 장 이상 길이로
검강(劍 )을 늘이는 가운데 광파(光波)가 일어나 백리웅의 몸을
감추고 있지 않는가.
스읏- 읏-, 월광(月光)이 고즈넉한 호수 위로 드리워지듯 흑천
(黑天)이 갑자기 갈라지며 창궁(蒼宮)이 나타나듯, 파팟- 팟-!
수천 수만 갈래의 검우(劍雨)가 육합팔방(六合八方)으로 폭사되기
시작했다.
백리웅. 그는 검기(劍氣)에 몸을 감출 수 있는 검신(劍神)의 경지
로 돌입한 것이다.
"십방혈(十方血)!"
파팟- 팟- 팟-!
사면 벽과 천정, 바닥에 거북이 등가죽 같은 균열이 만들어졌다.
"건곤진(乾坤鎭)!"
꽈꽝- 꽝-! 피의 무지개가 쭈욱 쭉 뻗어 나간다.
아아, 검강은 이제 하나의 혈주(血柱:피의 기둥)와 같았다.
우르르-릉! 꽈르르릉-꽝!
천정이 쩍쩍 갈라지다가 돌덩어리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푸하핫, 바로 이것이었다. 푸하핫, 그림 안에는 천육백식(千六百
式)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백리웅은 선물꾸러미를 안은 삼척동자(三尺童子)처럼 좋아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던 백리웅. 그런 그에게도 사랑하는 것이
하나 생긴 모양이다. 무도(武道)라는 것. 무사(武士)가 되었다는
것이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쁨은 한순간의 열파(熱波)로 스쳐지나갔고, 백리웅은
다시 차고 비감(悲感)어린 눈빛의 주인공이 되어 갔다.
"떠날 때가 되었다. 나를 버린 세상으로 돌아갈 때가 된 것이다!"
그는 혈흔마검을 쥔 채 터벅터벅 걸었다.
십오실(十五室). 백리웅은 그 안에 들어가 두 다리를 적당히 벌리
고 섰다.
표정이 없는 누런 얼굴, 두 눈은 아무런 감정도 담고 있지 않았
다.
벽(壁). 백리웅은 벽을 바라보다가 눈을 반개(半開)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순간부터 살기(煞氣)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었
다.
무념무상지경(無念無想之境)! 백리웅은 살성(煞性)조차 잊는 망아
지경(忘我之境)에 들어 본능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츠으-읏-, 핏빛이 노을처럼 뿌려졌다.
무류흔결(無流痕訣). 천하에서 가장 빠른 검결이 천 년 만에 재현
된 것이다. 백리웅은 언제 검을 썼더냐 싶게 검을 허리띠로 만들
어 회삼 허리를 비끄러매고 있었다.
그 앞, 그그- 그으으-응-, 만년한철벽(萬年寒鐵壁)이 아가리를
벌리며 붕괴되고 있었다. 백리웅은 찰나지간에 열다섯 가지의 변
화를 일으켜 철벽을 산산이 부숴 버린 것이었다.
벽 뒤, 한 사람이 정좌하고 있었다. 그는 걸어 나오는 백리웅을 보
고 있는데, 눈빛에는 생기(生氣)가 없었다.
'살기(煞氣)와 활기(活氣)가 없다. 사람이 아니다, 인형(人形)이
다.'
백리웅은 그 사람의 눈을 보기도 전, 그 사람이 진짜 사람이 아니
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본능은 인간의 본능이라
기보다 야수(野獸)의 그것에 가까웠다.
백리웅의 걸음걸이는 사람의 걸음걸이라기보다 날렵한 고양이(猫)
의 걸음걸이였다. 그는 걸을 때 절대 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리고
두 어깨를 펴 자신의 기도(氣度)를 내세우지도 않았다. 그러저러
한 것은 그가 연공실 안에서 본 한 권의 두툼한 책에서 배운 것이
었다.
<고금칠살수비급(古今七煞手秘 )>
영주는 백리웅을 위해 오백 년 이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무림
계에 이름을 떨쳤던 일곱 살수의 독문무공, 그리고 활약이 적힌
비급 한 권을 마련해 두었다.
야래사신(夜來死神).
청부(請負)만 있으면 제 어머니라도 죽이는 자.
천중일점혈(天中一點血).
자객이기는 하나, 무림법(武林法)을 지켜 뒤에서는 절대로 공격하
지 않았던 사람으로 항상 도전장을 보내 상대를 끌어낸 다음 죽였
다.
그는 무공이 없는 사람은 죽이지 않아 세월이 오래 지나도록 자객
중의 자객이라고 평가되었다.
비도혈화(飛刀血花), 흑건수라(黑巾修羅), 금면도부(金面屠夫) 일
견멸(一見滅), 최명낭중(催命郎仲), 무정자객(無情刺客).
백리웅은 그들 일곱의 능력을 모두 갖고 있는 한 사람보다도 훨씬
뛰어난 살인 수법을 익혔다. 그는 영주가 기대했던 것보다 세 배
강하게 된 것이다.
밀랍인형(蜜蠟人形)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그 모습은 백리웅이
단 한 번 본 영주와 같았다.
그는 왜 자신을 닮은 밀랍인형을 놓아두었을까?
"훗훗, 나를 기다리느라 수고가 많았다!"
백리웅은 잔혹하게 내뱉으며 손을 내밀었다. 꽝! 폭음이 나며 밀
랍조각이 편편(片片)이 날아 흐트러졌다. 그러는 가운데 밀지(密
紙)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치밀하군. 인형의 뱃속에 봉서를 남겨 두다니!"
백리웅은 밀랍인형의 뱃속에 숨겨져 있다가 밖으로 나온 밀지를
손에 취했다.
<이제 너는 대살수(大煞手)가 되었다!>
밀지를 작성한 사람은 영주였다.
<너의 능력과 무공에 대해서는 회의가 없다. 하나, 네가 본좌에게
충성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심이 든다.
물론 너는 남아(男兒)답게 신의를 지킬 것이다. 하나, 중차대한
일인 이상, 네게 한 가지 일을 맡겨 너를 시험할 수밖에 없다.
우선 걸어나가라. 통로 끝에 이를 때 휘파람 소리를 내면 거조(巨
鳥) 하나가 날아내릴 것이다. 그 새를 타고 날아가라.
너의 영주(令主)가!>
글은 백리웅이 입관(入關)할 때 쓰여진 듯했다. 백리웅은 밀지를
훼손시킨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는 안에서 배운 바대로 언제나 청력을 돋우고 행동했다.
'사람이 없다. 아아, 최소한 죽이고 싶은 총관 하나 정도는 마중
을 나올 줄 알았는데…….'
백리웅은 습기찬 굴을 따라 걸었다. 가끔 벌레가 신발에 밟혔다.
뚝, 뚝, 천정에서는 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백리웅은 지옥에서 빠져 나오는 유령처럼 굴 밖으로 나갔다.
밖은 한낮이었다. 백리웅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훗훗, 나를 마중하기에는… 너무 밝다!"
그는 눈을 찌푸리며 앞쪽을 살폈다. 그의 눈앞에는 망망대호가 있
었다.
동정호(洞庭湖)! 그 물은 깊이를 모를 정도로 깊다고 했다.
꾸우- 꾸우-, 저 먼 곳 갈매기들이 오락가락거리고 있고 운무
(雲霧)가 뽀얗게 일어나 호면을 뒤덮고 있었다.
'여름이다. 내가 제남부(齊南府)에 돌아간 그날 같은…….'
백리웅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행자방 형제들이여, 약속하겠소. 복수할 것을!"
그는 짧게 끊어 말했다. 장부는 말로 내세우지 않는다. 장부는 행
동으로 보여 준다.
백리웅. 그는 벌써 약관(弱冠)의 청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다가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이-익-, 예리한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마 후, 허공
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아주 거대한 흑응(黑鷹)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