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 엄원태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다. 가령 누군가의 말을 씹어서, 오물거리면서, 맛을 보고,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민물도요나 알락꼬리마도요는 갯벌에 미동도 없이 서 있다가, 염낭게나 두토막눈썹참갯지렁이가 구멍 밖으로 나올 때 날쌔게 잡아채 먹는다. 도요새들에겐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다만 마음의 어떤 집중이 필요하리라, 마음에도 정신적인 측면이란 게 있다면. 아마도 마음의 육체적 측면, 즉 말이 미처 되지 못한 생각은 거기도 고요와 침묵의 뒤범벅으로 붐빌 테지만.
주꾸미의 모성은 눈물겹다. 오십 여 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제 새끼들 곁을 지킨다. 다시 말하지만, 주꾸미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이 시를 처음 읽은 독자들은 ‘이것도 시냐?’고 할 것이다. 운문이어야 할 시가 줄글로 되어 있는데다가 설명과 함께 자기주장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는 중고교 교과서에 있는, 답을 찾기 위해 주어지는 텍스트가 아니다. 줄글 혹은 산문도 시가 될 수 있고, 때로는 자기주장도 가능하다. 그러한 것을 이 시는 잘 보여주고 있다.
혹자는 이 시에 등장하는 여러 바다생물에 집착하여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놓치게 된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 시 속에 등장하는 여러 바다 생물의 생태를 꼭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그것들은 소재로 작용하는 것뿐이지, 이 시를 통해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는 큰 관련이 없다.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 연에 한 마디씩 모두 세 마디뿐이다. ‘누군가의 말을 씹어서 (자양분을 섭취한 후) 다시 뱉어낼 수는 없을까’, ‘마음에도 정신적인 측면이란 게 있다면 마음의 어떤 집중이 필요하리라’ 그리고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이다.
1 연을 보자. ‘염낭게나 집게, 아무르불가사리나 바지락은 갯벌의 모래를 씹어서 유기물을 빨아먹고 깨끗해진 모래만 다시 뱉어낸다.’는 것은 시인의 눈에 비친 객관적 사실의 진술이다. 거기에 시인은 의미를 부여한다. 바로 그들은 ‘갯벌의 청소부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간 사회를 빗대어 본다. 우리들이 내뱉는 말 중에 정말 쓸 만한, 들어둘 만한 말들이 얼마나 될까. 들리는 말을 씹어서, 오물거리며 맛을 보고는 꼭 필요한 말만 가려내어 자양분 섭취하듯 듣고 나머지 쓸 데 없는 말들은 안들은 것처럼 뱉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결국 1연은 바닷가 생물들의 모래 청소에 빗대어 인간 사회에 얼마나 쓸 데 없는 말들이 많은가를 꼬집고 있는 것이다.
1 연을 이해하면 2 연은 그냥 쉽게 들어온다. 먹이를 날쌔게 잡아채기 위해서는 도요새들에게 말이 필요한 게 아니라 마음의 어떤 집중이 필요하다. 물론 그 마음의 집중이 ‘날쌔게 잡아 채 먹는’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시인은 마음에 정신적 측면과 육체적 측면이 있다면 도요새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적 측면이라고 강조한다. 왜냐하면 마음의 육체적 측면은 말이 미처 되지 못한 생각일 것이요, 그곳에는 고요와 침묵의 뒤범벅으로 붐빌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먹이를 날쌔게 잡아채기 위한 행동을 위해서는 집중이라는 정신적 측면이 강조되는 것이다. 즉 마음의 육체적 측면은 말이요 정신적 측면은 행동이다. 먹이를 잡아채기 위해서는 말이 아니라 행동이 필요한 것이다.
3 연은 간단하다. 주꾸미가 오십 여 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제 새끼들 곁을 지킨다는 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를 통해 시인은 주꾸미에게서 모성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렇기에 시인은 ‘눈물겹다’고까지 한다. 주꾸미가 자식을 키움에 말이 필요할까. 말이 필요 없다. 그저 ‘오십 여 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제 새끼들 곁을’ 지키는 것뿐이지 결코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이를 통해 시인은 두 번 강조한다. ‘다시 말하지만’이란 말까지 보태어 시 마지막 행에 한 번 더 강조한다, ‘주꾸미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고. 시인은 독자들에게 강조한다. 말이 필요한 게 아니라고, 행동이 필요하다고.
흔히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라고 한다. 물론 마음을 표현하라는 말이다. 그런 표현이 있을 때에 보다 가깝게 보다 정확하게 상대를 헤아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온 몸과 온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고 강조한다.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말이 아니라 눈빛으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시인이 강조하는 것처럼 사랑에는 말이 필요 없다. 눈빛을 보며 온 몸과 온 마음으로 하는 것이 사랑이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전혀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내뱉는 말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 시를 읽을 때면 그런 것들이 생각난다.
[출처] 엄원태의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작성자 이병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