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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기나의 들국화는 고려청자에 피어날지어이
디온에서 테살로니키로 가는 A1 고속도로(유로피안 루트 E75)는 테라마이코스 만(에게 해)에 접한 너른 평원을 남북방향으로 가로지르는 도로이다. 그리스는 산악 국가이지만 이곳은 지평선도 볼 수 있을 정도로 시야가 탁 트여 있어 운전하는 내내 눈 맛이 시원하였다. 우리는 크리디 근처에서 내륙으로 진입하는 동서방향의 A2 고속도로(유로피안 루트 E90)로 옮겨 타고 한동안 달리다 클루라 근처에서 좁은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길옆에 억새가 우거진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9km 정도 더 들어가니 베르기나(Vergina) 마을이 나타났다. 중부 마케도니아 주의 이마티아 군에 속해 있는 이 작은 마을은 그리스-터키 전쟁(1919-1922년)이 끝나고 그리스와 터키 사이에 인구교환 협정을 맺는 과정에서 터키 영토에서 쫓겨난 그리스 주민이 정착한 마을이다. 베르기나란 마을이름은 할리아크몬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베로이아(Veroia) 현에서 제안한 이름으로, 전설에 의하면 이 강 근처 어딘가를 지배했다고 전해지는 베르기나(Vergina)란 여왕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참고) 신약성경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의 기독교 전도지로 언급된 베레아(Berea)의 현재지명이 베르기나에서 14km 떨어진 베리아(Veria) 또는 베로이아(Veroia)로 불리는 마을이다. 그는 AD 50년-57년에 이곳을 두 번 방문했다.
오늘날 터키공화국의 전신인 오스만제국이 그리스를 포함한 발칸반도를 약 400년간 지배를 한데다 종교마저 다르기 때문에 그리스-터키 관계는 우리나라-일본 관계보다 더 나쁘다고 한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베르기나는 이런 가슴 아픈 사연보다는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의 첫 수도였던 아이가이(Aigai)가 있는 곳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아이가이에서 발굴된 왕궁과 왕실무덤은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 등재사유로 “고전기 도시국가에서 헬레니즘과 로마시대로 대표되는 제국구조로 전환되는데 있어서 유럽문명의 획기적인 발전을 보여주는 탁월한 증거”라고 언급했듯이 유럽 문명사에서 마케도니아 왕국이 차지하는 위상은 인류문명이 도시국가 규모에서 거대한 제국으로 확장되어 가는 길을 닦아놓았다는데 있는 것 같다.
(참고-1) 디온-베르기나-테살로니키 방면 지도
E90 고속도로를 벗어나 베르기나 마을로 진입하는 길. 길 좌우에는 가끔 억새가 우거지고 차량통행이 없어 너무 한산했다.
(참고-2) 베르기나 유적지 지도: 베르기나 마을의 공용주차장을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면 아이가이 고대극장과 복원중인 왕궁이 나타난다.
우리는 아이가이 왕실무덤 박물관(Museum of royal tombs at aigai)에서 가까운 마을 유료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먼저 왕궁 터를 찾아 나섰다. 조금 전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주차장에 도착한 대형 관광버스에서 일단의 서양 관광객이 내리면서 그들의 왁자지껄한 소리에 시골마을에는 잠시 활력이 돌았지만 금방 어디론가 흩어져 거리에는 다시 정적만이 감돌았다. 왕궁 (The palace of Aigai) 표지판에 그려진 화살표 방향으로 걸어가니 널따란 공용주차장이 나타났고 주차장을 오른쪽에 끼고 돌아나가니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윗길이나 아랫길이나 너무 한적해서 방향을 정하기가 어려웠다. 정작 있어야 될 장소에 안내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 나는 스마트폰의 구글지도를 켜봤지만 신호가 잡히질 않아 소용없었다.
관광지치곤 너무나 한산한 베르기나 마을 풍경
이정표가 없어서 아이가이 왕궁으로 가는 길과 성벽으로 가는 길이 나뉘는 갈림목에서 잠시 헤맸다. 사진에서 보이는 길은 성벽 방향으로 가는 길이다.
갈림목에서 잠시 헤매다, 어느 서양 관광객 부부와 함께 아이가이 왕궁으로 가는 언덕 길을 따라 올라갔다.
아이가이 왕궁으로 가는 언덕 길 왼쪽에는 누렇게 뜬 풀이 가득한 너른 공터가 있었다. 근처에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인 에우클레이아 지성소가 있다.
현재 발굴이 진행중인 에우클레이아 지성소
여기서 나이 지긋한 어느 외국인 부부와 함께 왕궁으로 가는 길을 찾느라 잠시 헤매다가 저쪽인 것 같다는 소리에 윗길로 올라갔다. 오르막길의 왼쪽으로는 아직 발굴중인지 철조망 울타리가 쳐진 에우클레이아 지성소(Eucleia sanctuary) 터가 보였고, 조금 더 올라가 길이 다시 왼쪽으로 꺾어지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왕궁 안내판이 나타났다. 이곳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드넓은 마케도니아 평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거칠 것 없는 호쾌한 풍경이다. 많은 인구가 모여 사는 수도에는 식수와 해운에 이용할 강이 있게 마련이다. 이곳도 북쪽으로 5km 떨러진 곳에 그리스에서 가장 긴 알리아크모나스 강(Aliákmonas)이 동쪽 테라마이코스 만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참으로 아이가이는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이 수도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비옥한 땅이었다.
(참고) 알리아크모나스 강을 영어로는 할리아크몬(Haliacmon) 강이라 부른다. 우리도 베르기나로 가는 좁은 시골길로 접어들었을 때 이 강을 건넜는데 강 중간을 댐으로 막아놔서 그런지 댐 아래쪽은 강이 아니라 개울 수준이었다.
1. 아이가이 왕궁 앞길에서 내려다 본 마케도니아 평원 풍경. 아이가이는 고대 마케도니아 왕국이 수도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비옥한 땅이다. 이곳에서 직선으로 5km 떨어진 곳에 그리스에서 가장 긴 알리아크모나스 강이 흐른다.
우리보다 조금 앞서 오솔길을 걸어간 서양인 부부가 길가 풀숲에서 뭔가를 발견한 듯 멈춰 서서 얘기를 나누더니 뒤따라 온 우리에게 풀숲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을 걸어왔다. “이걸 보세요. 사프란 꽃입니다.” 그가 가리키는 풀숲을 살펴보니 사프란을 빼닮은 화초 너덧 포기가 마른 잎과 잡초사이로 꽃대를 쭉 올려 연보랏빛 꽃을 활짝 피우고 있었다. “와우, 맞아요. 사프란입니다.” 나는 그에게 머리를 끄덕이며 활짝 웃어주었다. 사프란 꽃에는 붉은색의 암술대가 세 개 있다. 이것을 채취하여 말린 것을 손가락으로 비벼 살짝 부순 다음 음식이나 차에 넣으면 황금빛 색깔이 난다. 스페인식 볶음밥으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파에야(Paella)의 샛노란 색깔은 조리 중에 사프란 암술대를 한 옴큼 넣어서 만든 색깔이다. 사진으로만 봤던 사프란 꽃을 뜻밖에 직접 보게 되니 무척 기뻤다. 나는 사진을 몇 장 찍고 여행을 다녀와서 구글 검색을 통해 이 꽃이 진짜 사프란인지 확인을 해보았다. 아쉽게도 우리가 본 아이가이 사프란 꽃의 암술대는 붉은 색이 아니었고 사프란 화초 특유의 뾰족한 이파리도 없었다. 나는 이름 모를 이 꽃에 ‘너도 사프란’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2. 아이가이 왕궁 터 앞 풀숲에 핀 ‘너도 사프란’ 꽃. (왼쪽) 사프란 꽃에는 붉은색의 암술대가 세 개 있다. 이것을 채취하여 말린 다음 가루를 내서 음식이나 차에 황금빛 색깔을 내는데 사용한다. (오른쪽) 우리가 본 아이가이 사프란 꽃의 암술대는 아쉽게도 붉은 색이 아니었고 이파리도 없었다. 나는 이 꽃에 ‘너도 사프란’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솔길은 복원 작업이 한창인 왕궁 터 입구 매표소로 연결되었다. 입장료를 내고 아이가이 왕궁 터에 들어섰는데 작업자의 개인정보 보호를 위해 사진촬영을 금한다는 안내판이 서 있었고 여성안내원 한명이 우리에게 사진촬영은 안된다고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아이가이 왕궁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의 집권기(BCE 359-336)에 건설되었는데 파르테논 신전과 더불어 고전기 그리스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건물이라고 한다. 피에리 산맥 아래 나지막한 언덕에 세워진 이 거대한 왕궁은 크기가 파르테논 신전의 세 배에 달할 만큼 고전기 그리스에서 가장 컸으며 마케도니아 평원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이 건물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권력과 아름다움의 상징이자 경이적인 랜드 마크였다. 아이가이 왕궁은 그 당시에 완전히 혁명적이고 아방가르드적인 독특한 건물이었는데 할리카르나쏘스의 마우솔레움(Mausoleum·마우솔로스 영묘)을 지은 것으로 알려진 당대의 천재적인 건축가, 퓌테오스(Pytheos)가 필리포스 2세를 위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건물은 헬레니즘 시대와 그 이후에 지어진 모든 바실레이아(Basileia·왕궁)의 원형이 되었다.
미음자(ㅁ) 형태로 지어진 이 독특한 건물의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독창적인 건축 개념이다. 즉, 미음자 건물구조에서 한가운데 위치한 사각형 중정(Courtyard)을 열주로 에워싸고 건물의 파사드(Facade·정면)는 삼각형 박공을 기둥으로 떠받친 포르티코(Portico·현관 정문)와 기와지붕을 덮은 열주로 구성하였는데, 이것은 당대 건축양식에서 혁신적인 설계기법이었으며 오늘날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왕궁의 원형이 되었다는 것이다.
3. 아이가이 왕궁 유적지 전체 모습(자료사진) 2020년 완공을 목표로 부분 복원작업이 진행 중인 왕궁 터와 왕궁으로 향하는 오솔길 옆에 극장이 보인다.
4. 아이가이 왕궁(복원도) 기원전 4세기 후반기에 건설된 이 왕궁은 파르테논 신전과 더불어 고전기 그리스를 대표하는 중요한 건물이었다. 건물의 출입현관(붉은색 화살표)과 그리스 모자이크가 복원된 식당(노랑색 화살표)의 위치를 각각 표시해 놓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군이 마케도니아 왕국의 옛 수도(아이가이)와 새 수도(펠라)를 완전히 파괴하고 모든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것은 나당연합군이 백제 사비성을 함락시킨 후 불을 지른 것과 마찬가지로, 한 때 세계의 절반을 차지했던 마케도니아 왕국이 재기하지 못하도록 아예 뿌리를 뽑아버린 것이었다. 폐허가 된 도시는 로마제국 시기에 재건되기는 했으나 기원후 1세기경 산사태로 인해 다시 파괴되었고, 2-5세기 무렵에는 주민들이 점차 옛 도시가 있던 피에리 산맥의 산기슭을 떠나 평원으로 내려감으로써 이곳은 땅속에 묻힌 전설 속의 고대도시가 되었다. 19세기에 프랑스 고고학자의 발굴 작업으로 드러난 건물 잔해(석재)의 상당수는 터키에서 쫓겨난 그리스 난민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집을 짓는데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 부분적으로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왕궁을 넓게 조망할 수 있도록 한길 높이의 관람대가 왕궁 터 측면에 설치되어 있어 올라가 보았다. 미음자형 왕궁은 플랫폼과 몇몇 방바닥의 모자이크만 복원된 상태라서 사실 크게 볼만한 것은 없었지만 아테네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그리스 모자이크를 여기서 처음 볼 수 있었다. 나는 몇 년 전 소아시아의 고대도시 에페소스를 구경할 때까지만 해도 모자이크 양식을 로마인이 창안한 줄로만 알고 있었기에 아이가이 왕궁 터에서 우연히 그리스 모자이크를 보게 되었을 때 약간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반가웠던 이유는 오래된 나의 궁금증(고대 그리스에도 모자이크가 있었을까?)이 싹 풀렸기 때문이었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처럼 평소에 갖고 있었던 궁금증이 우연찮게 풀리는 경험을 가끔 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한테는 여행의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 모자이크는 로마 모자이크하고는 약간 다른 맛, 마치 그리스식 요구르트의 새콤한 맛처럼 조금 더 생동하는 기운이 느껴진다. 이 모자이크가 용케 살아남은 방의 용도는 식당이었다. 정사각형 방바닥에 내접하는 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좋아했던 파도무늬와 만(卍)자가 있는 뱀 무늬로 치장했고, 원의 안쪽은 로제트(들국화) 무늬를 한가운데에 두고 팔방으로 뻗어나가는 화초무늬로 채웠는데, 꽃이 활짝 핀 화초와 넝쿨에서 힘찬 생동감과 생명력이 느껴진다. 사각형의 네 모서리에는 스타벅스 로고와 비슷한 여인이 있어 흥미롭다.
5. 아이가이 왕궁의 식당 바닥을 장식한 모자이크(자료사진) 로마식 모자이크만 보다가 왕궁에서 우연히 오리지널 그리스 모자이크를 보게 되었을 때 나는 마치 그리스 요구르트를 처음 맛 볼 때처럼 색다른 맛이 느껴졌다.
마무리 단계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복원공사가 진행 중인 이 왕궁을 일반인에게 공개한 때가 우리가 이곳을 방문하기 불과 3개월 전이었다. 사실 나는 베르기나에 필리포스 2세의 왕궁이 있는지도 모르고 와서 이정표를 따라 찾아갔다가 폐허가 된 왕궁 터에서 그동안 궁금하게만 여겼던 그리스식 모자이크 문양을 우연히 보았으니 고대문양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는 자그마한 행운이 따른 셈이었다. 왕궁의 복원공사 완료시기는 2020년 봄이라고 한다. 이때에는 베르기나에 새 박물관도 짓고 특별 전시실에는 독일의 페르가몬 박물관으로 통째로 옮겨다 놓은 소아시아 밀레토스의 아고라 출입문처럼 아이가이 왕궁의 정면 일부를 복원해 놓을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도 그리스·로마 복고풍으로 지어진 서양식 궁궐이 있는데 바로 1910년에 지은 경운궁(덕수궁) 석조전이다. 건물의 파사드를 보면 아이가이 왕궁을 많이 닮았다. 22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이가이 왕궁이 대한제국의 수도 한양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 경이롭기만 하다.
6. 아이가이 왕궁 복원도 (1) 건축학적으로 아이가이 왕궁의 독특한 면은 열주로 에워싸인 중정과 현관이 있는 건물의 정면부이다. 삼각형 박공을 머리에 이고 있는 포르티코와 지붕으로 덮인 열주행랑이 좌우로 대칭적으로 뻗어있는 건축양식은 아이가이 왕궁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2) 새로 짓는 베르기나 박물관에 복원될 왕궁의 정면부이다. (3) 우리나라 덕수궁 석조전은 19세기 유럽에서 유행한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1910년에 완공된 서양식 궁궐이다. 22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아이가이 왕궁이 대한제국의 수도 한양에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 경이롭다.
관람대 뒤쪽으로 나지막한 둔덕이 왕궁을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데 둔덕 중간지점에 그때까지 진짜배기 사프란으로 알았던 연보랏빛 화초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나의 관심은 화려했던 옛 영화를 찾아보기 힘든 쓸쓸한 왕궁 터에서 이 사프란 꽃으로 옮겨갔다. 나는 안내원의 허락을 받고 둔덕에 올라가 꽃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아까부터 관람객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안내원의 모습에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게 낫겠다싶었다. 이 왕궁으로 진입하는 오솔길 옆에 자그마한 고대극장이 있다. 철조망으로 둘러친 이 극장은 왕궁을 지을 때 함께 지은 건물로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이곳에서 열린 딸(클레오파트라)의 결혼식 때 자신의 경호원에 의해 살해된 비극의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이 극장은 왕궁의 부속건물이어서 그런지 다른 야외극장에 비해 규모는 매우 작다. 지위가 높은 분들이 앉는 첫 번째 열의 좌석, 계단, 배수구, 정면의 무대 건물은 돌로 지었지만 적당한 경사면에 지은 반원형 관객석은 나무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이곳엔 약간의 기초석과 잔디에 덮인 경사진 흙더미만이 남아있어 여기에 고대 극장이 있었음을 쓸쓸하게 알려줄 뿐이었다.
7. 아이가이 극장 기원전 4세기 아이가이 왕궁을 지을 때 함께 지은 것으로 왕궁의 부속건물이며 규모는 작다. 기원전 336년, 필리포스 2세가 이곳에서 열린 딸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경호원에 의해 살해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왕궁 터 구경을 마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서 마치 경주의 대릉원처럼 마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아이가이 왕실무덤 박물관(Museum of the Royal Tomb of Aigai)을 구경했다. 이곳은 원래 아이가이 성문 밖에 있는 왕실 공동묘지인 로얄 네크로폴리스 영역에 속한 곳으로, 경주 대릉원의 황남대총처럼 이곳의 고대무덤 가운데 가장 큰 봉분(the Great Tumulus)이 있던 자리였다. 1977년에 시작된 본격적인 발굴 결과, 작은 신전 형태로 지은 4개의 무덤과 1개의 히어로온(Heroon·영웅을 모신 신전형태의 작은 사당)이 서로 가까이 모여 있는 떼무덤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1호분에서 3호분까지는 필리포스 2세로 추정되는 인물과 그의 부인 및 손자의 무덤이며, 4호분은 필리포스 2세 가문(아르게아스 왕조)과 상관없는 후대 왕의 무덤이다. 도굴 당하지 않은 처녀분인 2호분과 3호분에서 엄청난 양의 진귀하고도 아름다운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기에 이곳에다 아예 지하 박물관을 짓고 건물 위를 흙으로 덮어 원래 봉분처럼 만든 후 아이가이 왕실무덤 박물관이라 이름을 붙인 것이다.
8. 왕실무덤 박물관이 지하에 있는 아이가이 대릉 1977년에 시작된 본격적인 발굴 결과, 처녀분인 2호분과 3호분에서 엄청난 양의 진귀하고도 아름다운 부장품이 쏟아져 나왔기에 이곳에 아예 지하 박물관을 짓고 건물 위를 흙으로 덮어 원래 봉분처럼 만든 다음 아이가이 왕실무덤 박물관이라 이름을 붙였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봉분의 왼쪽에 있는 입구로 들어갔다. 어두운 실내조명으로 인해 박물관 내부는 마치 하데스가 지배하는 지하세계에 내려 온 듯 엄숙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무덤에서 출토된 황금유물은 어둠 속에서 은은한 광채를 발하였다. 이곳도 사진촬영 금지구역이라 유물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지만, 자료사진을 이용하여 몇 가지 중요한 유물에 대해 소개한다.
마케도니아 왕국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에 살던 도리아인이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 반도의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여 세운 나라라고 한다. 그래서 나라를 세운 첫 왕조를 ‘아르고스의’, 또는 ‘아르고스로부터’란 뜻의 그리스어 ‘아르게아스 왕조(Argead dynasty)'라 부른다. 기원전 7세기쯤에 페르디카스 1세가 오늘날 베리아 현 주변에 첫 도읍인 아이가이를 세운 이후 이 도시는 약 400년간 왕국의 수도로써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4세기 초, 아르켈라오스 1세가 여기서 북쪽으로 58km 떨어진 펠라(pella)로 수도를 옮겼고, 마케도니아 왕국의 최전성기를 가져온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3세는 펠라에서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이는 여전히 마케도니아 왕국의 성스러운 도시, 전통적인 컬트 센터, 왕궁과 왕릉의 소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필리포스 2세는 여기에 새로운 왕궁을 짓고 그리스 전역의 유력자들을 자신의 왕궁으로 초대하여 딸의 결혼식을 개최하였으며 하객들로 꽉 찬 극장으로 들어설 때 자신의 경호원에게 살해되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는 부하장수들에 의해 곧바로 후임 왕으로 추대되었으며 그는 그리스 역사에서 가장 호화로운 아버지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9. 아이가이 왕실무덤 박물관의 내부구조 1호분에서 3호분까지는 필리포스 2세와 그의 부인 및 손자의 무덤이며, 4호분은 필리포스 2세 가문과 상관없는 후대 왕의 무덤이다. 이곳에서 가장 볼만한 것은 필리포스 2세와 그의 부인의 화장 후 유골이 담겼던 황금 유골함과 황금으로 장식한 갑옷이다.
1호분은 이미 고대에 도굴된 고분이지만, 기원전 350년에 제작된 도기와 25세의 젊은 여인과 갓 태어난 어린 아기의 뼈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마케도니아 왕가는 일부다처제를 실시하고 있었기에 필리포스는 7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 가운데 1명의 무덤으로 짐작되고 있다. 무덤의 네 벽면 중에 동쪽, 북쪽, 남쪽의 세 벽면에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다. 북쪽 벽면에는 저승의 왕 하데스가 네 마리의 말이 이끄는 이륜전차(Quadriga·쿼드리가)를 타고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신화의 한 장면이 그려져 있다. 벽화의 맨 오른쪽에 그려진, 화들짝 놀라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두려움에 떠는 여인은 페르세포네와 함께 꽃을 꺾으며 놀던 여자 친구이다. 사진에는 안보이지만, 벽화의 맨 왼쪽에는 죽은 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길잡이인 헤르메스가 왼손으로 말굴레를 쥐고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서쪽(죽은 자의 땅)으로 전차를 인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북쪽 벽화와 접해있는 동쪽 벽에는 페르세포네의 엄마이자 곡식의 신인 데메테르가 혼자서 바위에 걸터앉아 멍하니 납치 장면을 바라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고, 남쪽 벽면에는 운명의 세 여신, 모이라이(Moirai)가 모여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들의 이름은 ‘각자가 받은 몫’이란 뜻의 모이라(μοῖρα·moira)가 신격화된 이름이다.
10. 하데스에 의한 페르세포네의 납치(아이가이 고분벽화) 1호분의 북쪽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 그림이다. 하데스의 억센 왼손에 낚아 채인 반나체의 페르세포네가 비명을 지르면서 두 손을 허공에 뻗은 채 아버지(제우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은 전통적으로 그려왔던 페르세포네 여신의 모습이 아니다.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것은 단지 홀아비가 성욕을 해소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결혼하기 위함인가? 페르세포네의 납치 이야기가 등장하는 호메로스의 데메테르 찬가에는 하데스가 욕정을 못 이겨 여조카를 납치하는 나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페르세포네의 아버지 제우스에 의해 미리 정해진 결혼을 시행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대부분의 고대문화에서 그러했듯이, 고대 그리스의 딸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재산으로 간주되었기에 아버지에 의해 신랑이 결정되는 중매결혼을 하였다. 천하의 바람둥이 제우스는 어두컴컴한 지하세계에서 수많은 손님(죽은 자)을 혼자 응대하는 형님 하데스가 안쓰럽게 생각되어 자신의 딸과 결혼하라고 부추겼는지도 모른다.
비명소리만 메아리로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진 딸을 찾기 위해 데메테르는 먹지도, 마시지도, 목욕하지도 않은 채 아흐레 밤낮에 걸쳐 온 대지를 돌아다녔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열흘째 되는 날, 그녀는 지상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태양신 헬리오스로부터 딸이 하데스에 의해 지하세계로 납치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통에 잠긴 그녀는 페르세포네의 납치를 묵인하고 있는 제우스에 대해 심한 분노와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신들이 사는 올림포스 산을 내려와 노파로 변장한 채 세상을 떠돌아다니다 아테네 근교 엘레우시스(Eleusis)로 가 그곳 주민들에게 자신의 신전을 짓도록 하고 비밀스런 종교의식을 가르쳤다. 곡식과 추수의 여신이 돌보기를 포기하자 땅에서는 아무 것도 자랄 수 없었고 어떠한 생명도 태어날 수가 없었다. 급기야 올림피아의 신들을 위해 바칠 제물들과 희생양들도 모자라게 됐다. 신들이 회유에 나섰지만 그녀는 페르세포네가 자신에게 돌아올 때까지 절대로 올림포스 산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며 어떤 것도 자라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마침내 제우스가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데메테르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하고 자신의 전령이자 저승사자이기도 한 헤르메스를 하데스에게 보내 페르세포네를 데려오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에 있을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데스는 페르세포네를 속여 석류 씨앗 네 알을 먹도록 했고 그 결과, 페르세포네는 온전히 엄마 곁에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일 년 중 8개월은 지상으로 나와 어머니와, 나머지 4개월(겨울철)은 지하세계에서 하데스와 보내야만 했다. 데메테르는 제우스의 결정을 따랐고, 불모의 땅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마침내 바싹 메말랐던 대지에는 다시 꽃이 활짝 피고 과일이 풍성하게 맺혔다.
페르세포네는 고대 그리스인의 신앙과 제식에서 데메테르와 함께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의 많은 지역에서는 매년 테스모포리아 축제(Thesmophoria festival)를 열어 풍요의 신인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를 기렸다. 고대 아테네의 대표적 희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가 쓴 희극, 테스모포리아주사이(Thesmophoriazusae·테스모포리아 축제의 여인들)에 언급되고 있는 이 축제는 자유 신분의 여성 가운데 결혼한 여성만이 참가할 수 있었으며, 극히 일부지역을 제외하곤 밀알을 파종하는 10월말에 열렸다. 페르세포네는 또한 엘레우시스 밀교(Eleusinian Mystery)와 관련되어 숭배되는 신이었다. 이 종교조직은 페르세포네의 연례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비밀 종교의식을 거행했다. 페르세포네는 다산과 풍작을 가져오는 풍요의 신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죽음과 저승세계와 강하게 연결된 신이기도 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생명과 죽음이라는 이중적 속성에 매력을 느꼈는데, 그것은 자신들의 필요와 사정에 따라 여신의 어느 한쪽 신성에 기대어 호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대그리스 미술의 도상학에서 페르세포네 여신은 혼자 있거나 그녀의 배우자 하데스와 함께 등장하는데 편안한 자세로 권좌에 앉아 있는 안주인의 모습을 흔히 하고 있다. 그녀는 항상 옷을 입었으며 결코 상반신을 드러내거나 완전 나체로 나오는 경우는 없다. 아르케익 시기의 데메테르 찬가에 잘 묘사된 페르세포네의 납치 신화가 도기화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5세기 초였다. 기원전 5세기 후반에 이르러 아티카 지역에서 제작된 도기화에 여인의 납치 또는 강간 묘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처음으로 전차가 등장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 결혼식은 어둠이 깔린 후 신부가 얼굴을 베일로 가리고 전차나 수레를 타고 신랑 집으로 향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기에 전통 도상학에서 전차는 결혼식을 뜻하기도 한다. 기원전 4세기에는 그리스 식민도시가 있던 이탈리아 남부지방에서 제작된 도기화에서도 납치신화 그림이 자주 등장하였다. 이탈리아 남부의 고대도시 아푸리아(Apulia)에서 제작된 붉은 인물상 도기에 그려진 페르세포네 납치 그림을 살펴보자.
11. 하데스에 의한 페르세포네의 납치(붉은 인물상 도기화) 그리스 식민지가 있었던 이탈리아 남부 아푸리아 지방에서 기원전 340년에 제작된 크라테르의 표면에 그려진 그림이다. 이 도기화의 주제는 페르세포네의 납치이지만 풍기는 분위기는 페르세포네의 결혼처럼 보인다.
아푸리아의 페르세포네 여신은 마치 여왕과 같은 복장을 하고 보석으로 치장한 채 곧 남편이 될 하데스의 전차에 함께 올라탔다. 페르세포네의 얼굴표정에는 두려움이나 불안감, 또는 비통함이나 자포자기 심정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그녀의 얼굴은 평안해 보이기까지 하고 허리춤에는 권위의 상징인 홀장이 비끄러매져 있다. 그녀의 여자 친구는 마치 신부의 수행원처럼 횃불을 들고 전차를 뒤따라가고 있으며, 네 마리의 말 앞에서 저승길로 인도하는 헤르메스는 큰 목소리로 백성들에게 여왕의 결혼식을 알리려는 듯 아주 신이 났다. 이 도기화를 처음 보는 사람은 이 그림의 주제가 납치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머리를 갸우뚱거릴 것이다. 이 도기는 아이가이 무덤 벽화의 제작시기와 거의 비슷한 기원전 340년에 만든 것으로, 이 때까지만 해도 하데스의 납치에 저항하는 페르세포네의 이미지는 매우 드물었다.
다시 아이가이의 고분벽화로 돌아가 보자. 하데스의 억센 왼손에 낚아 채인 반나체의 페르세포네가 비명을 지르면서 두 손을 허공에 뻗은 채 아버지(제우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모습은 결코 이전에는 묘사된 적이 없었다. 이처럼 다소 무기력한 모습의 페르세포네는 전통적으로 그려왔던 여신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가이 무덤 벽화를 그린 화가는 이런 전통을 철저히 무시했다. 그는 하데스의 안주인이 될 페르세포네를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자가 마지막 삶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그리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그녀의 얼굴과 몸짓에서 공포감, 비통함, 자포자기, 그리고 위대한 여신의 파토스를 보여주는데 성공했다. 현재 1호분은 비공개라서 이 특별한 페르세포네 납치 벽화는 무덤의 어둠 속에 감춰져 있지만, 복제품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어 고대 그리스의 뛰어난 예술가가 그린 파격적인 작품을 충분히 감상할 수 있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정면을 구경할 수 있는 2호분은 정면부가 작은 신전처럼 지어진 고대 마케도니아 양식의 무덤으로 이 안에는 돌방이 두 개 있다. 이 무덤은, 고고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필리포스 2세와 그의 20대 젊은 왕비, 메다(Meda)의 유골을 안치한 곳이다. 필리포스 2세는 기원전 339년 그리스 북쪽, 흑해연안의 스키타이 유목왕국과 전쟁을 치르고 돌아올 때 트라키아의 공주 메다와 결혼했다. 필리포스 2세가 사망하자 당시 트라키아 지방의 풍습을 쫒아 메다 왕비는 자결을 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무덤 정면은 도리아 양식의 이주식(Distyle·二柱式) 건물이다. 신전 건물이라면 여기에 삼각형 지붕을 얹고 정면을 삼각형 박공으로 장식하겠지만 이 무덤은 원통형 천정(Barrel vault)으로 지붕을 씌웠기 때문에 일종의 정면 가림막으로 직사각형의 이오니아식 프리즈를 한층 더 올린다음 왕실 남자들의 사냥장면을 묘사한 벽화로 장식했다. 이 벽화 한 가운데에는 젊은 알렉산드로스로 추정되는 인물이 말을 타고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12. 아이가이 왕실무덤(2호분) 파사드(자료사진) 작은 신전처럼 지어진 2호분은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젊은 부인, 메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상단 이오니아식 프리즈의 노란색 동그라미 친 곳에 젊은 알렉산드로스 왕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말을 타고 사냥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서 고대그리스 유물 중에서도 명품으로 손에 꼽는 황금 유골함과 황금갑옷이 출토되었다. 고분 입구까지 이어진 내리막 계단을 따라가면 무덤 정면을 구경할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서양건축 양식에서 둥근 아치(Round arch)와 이를 이용한 원통형 천정은 로마인들이 맨 처음 고안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이가이 2호분의 천정이 둥근 아치구조였다. 필자가 알고 있던 상식을 단박에 뒤집어 버린 그리스 고분은 나에게 아치의 기원에 대해 다시 공부하라고 말해 주는 듯 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아치구조는 로마 이전에 레반트(오늘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와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고대문명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기원전 6세기 초에 세워진 신바빌론 제국의 이슈타르 문(Ishtar Gate)이 대표적인 예이다. 헬라스 세계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치형 다리는 로도스 섬의 성벽 앞 해자 위에 놓인 인도교(Footbridge)로 기원전 4세기 또는 헬레니즘 초기에 만든 것이라 하는데, 이는 아이가이 고분이 조성된 시기와 비슷하다. 이처럼 로마 이전에도 지중해의 여러 문명권에서 대문이나 다리, 무덤과 같은 건축물에 아치를 사용했다. 그러나 그 사용처는 매우 제한적이었고 사용빈도도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 무게를 어느 한곳에 집중시키지 않고 부드럽게 분산시킬 뿐만 아니라 석재의 파괴를 가져오는 인장응력을 크게 감소시켜주는 아치구조의 공학적 장점을 완벽히 이해하여 대형 석조건축물에 적극적으로 사용한 문명은 바로 고대 로마였다. 그들은 로마공화정 이전 이탈리아 반도의 선진문명이었던 에트루리아로부터 아치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사실 지중해의 여러 고대문명 가운데 로마문명은 한참 후발주자였다. 그들은 에트루리아, 페르시아, 그리스와 같은 선진문명으로부터 기술을 받아들인 후, 이를 더욱 정교하게 가다듬어 활용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기원전후 시기에 이르러 지중해를 호수처럼 에워 싼 ‘스페셜 원’, 로마제국을 건설하였다.
우리나라 고분에도 아치기술을 이용하여 무덤방 천정을 둥그렇게 만든 왕릉이 있다. 그것은, 로마가 지중해의 여러 선진문명으로부터 건축기술을 익힌 것과 마찬가지로, 6세기 초 백제가 중국 양나라 장인으로부터 아치형 벽돌무덤 축조기술을 배워 만든 무령왕릉이다. 우리나라 고고학계에서는 무령왕릉의 구조를 ‘굴식 벽돌무덤(횡혈식 전축분)’이라 부르는데, 이 용어는 무덤구조의 중요한 특징을 정확히 짚어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가 알기로 무령왕릉은 남한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치형 구조물이다. 영어의 ‘터널’이나 순 우리말인 ‘굴’에는 그 단면이 둥근 아치형이 아닌 사각형도 포함되므로, 무령왕릉의 무덤양식은 ‘아치’에 방점을 찍어 ‘아치형 벽돌무덤’ 또는 ‘둥근 천정 벽돌무덤’이라 불러야 그 건축학적 의미가 온전히 살아난다고 본다.
13. 아이가이 왕실무덤(2호분)과 우리나라 무령왕릉의 구조 두 나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아치형 구조물로 여겨지는 무덤이다. (왼쪽) 베르기나의 마케도니아 왕실무덤 2호분 (건축시기: 기원전 336년) (오른쪽) 충남 공주의 백제 무령왕릉 (건축시기: 기원후 525년)
다시 아이가이 2호분으로 돌아가 보자. 무덤 앞방에 해당하는 안티챔버(Antechamber)에서 왕비의 황금 유골함이, 그리고 벽을 사이에 두고 안티챔버와 대리석 문으로 연결된 안방(Chamber)에서 필리포스 2세의 황금 유골함이 각각 대리석관에 담긴 채 있었다. 두 황금 유골함 속에는 피장자의 화장 후 유골이 천에 담겨 있었고, 이 위에 황금화관(Golden wreath)이 놓여 있었다. 필리포스 2세의 황금화관은 제우스를 상징하는 도토리나무 화관(Oak wreath)이고, 젊은 왕비의 황금화관은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를 상징하는 은매화 나무(도금양 나무) 화관(Myrtle wreath)이다. 그리고 왕비의 황금 유골함 뚜껑 위에는 황금왕관(Golden diadem)도 놓여 있었다. 황금으로 만든 참나무 가지에 맺힌 68개 황금 도토리 열매의 깍정이엔 비늘까지 섬세하게 새겨놓았고, 황금 은매화 가지에 활짝 핀 황금 꽃에는 꽃술까지 일일이 심어놓아, 황금화관은 화려하면서도 마치 잘 만든 드라이플라워를 보는 듯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과연 이 황금화관은 수많은 그리스 고대유물 가운데 명품의 하나로 손에 꼽을 만했다.
14. 아이가이 왕실무덤(2호분)에 안치된 피장자의 황금유골함 (왼쪽) 필리포스 2세의 황금유골함과 이 안에서 나온 황금 도토리나무 화관. 유골함 뚜껑에 마케도니아 왕국의 엠블럼인 ‘베르기나의 별’이 보인다. (오른쪽) 왕비의 황금유골함과 유골함 뚜껑에 올려놓았던 황금왕관. (왕비의 대리석관 주변 바닥에서 발견된) ‘베르기나의 별’이 새겨진 황금 원판 수십 개를 뒤편에 부착해 놓아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느낌이 든다.
* 아이가이 왕실무덤 2호분 출토 황금유골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의 것으로 추정되는 화장후 유골을 담았던 황금 유골함. 뚜껑 한가운데에 16 방향으로 빛을 방사하는 '베르기나의 태양' 또는 '베르기나의 별' 문양이 있고, 몸체 한가운데와 양쪽 사자다리에 들국화 문양이 있다.
필리포스 2세의 화장 후 유골을 담은 황금유골함은 24k 순금으로 제작되었으며 무게만 8kg에 달하여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가장 재료비가 비싼 유물이라고 한다. 이 유골함은 장례식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이 아니라 실제 마케도니아 왕실에서 귀중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이 황금 유골함의 뚜껑에는 베르기나의 별(the Star of Vergina), 또는 마케도니아의 별(the Star of Macedonia)이라고도 알려진 베르기나의 태양(the Sun of Vergina)이 장식되어 있다. 이 문양은 그리스의 국가공식 태양 심볼로, 기원전 6세기에서 2세기 사이에 고대 그리스 미술에 처음 등장한 것이다. 황금 유골함의 몸체 가운데와 귀퉁이 다리에는 로제트 무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무늬를 간혹 장미문양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이는 고대문양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잘못된 번역이다. 왜냐하면 로제트란 마치 민들레처럼 이파리가 땅에 밀착해서 방사상으로 뻗는 식물을 일컫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로제트란 명칭도 장미와 마찬가지로 문양의 이미지에 딱 들어맞는 이름은 아니다. 필자는 이 로제트 문양이 가을 들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절초, 쑥부쟁이, 개미취와 같은 들국화를 쏙 빼다 닮았기에 그냥 들국화 문양이라 부르고 있다. 고대인들도 자연계에 존재하는 동식물의 형상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문양을 디자인했을 때, 아마도 보이는 대로 또는 경험한 대로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을까싶다.
그래서 필자는 한국이나 중국에서 부르는 추상명사인 칠보무늬(Seven treasury patterns)가 잘못된 이름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만큼 엉터리 이름은 없다고 생각한다. 칠보무늬는 말 그대로 일곱 종류의 복을 각각 상징하는 일곱 종류의 문양이란 뜻인데, 고려청자 칠보무늬(사실 중국을 포함해서 수많은 자기 표면에 그려지거나 새겨진 칠보무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똑같은 단 하나의 꽃무늬이다.)를 고고미술사학자에게 보여주고 칠보 가운데 무슨 보물문양이냐고 물어본다면, 장담하건데, 단 한사람도 정확하게 답변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곱 종류의 복 문양이란 게 애시 당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장에서도 이미 설명한 바 있지만,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칠보무늬라 부르는 문양은 원래 그리스·로마의 십자형 꽃문양이 실크로드를 따라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까지 건너온 것이다. 칠보무늬는 그 생김새가 우리나라 산야에서 5-6월이면 흔히 볼 수 있는 산딸나무 꽃을 쏙 빼 닮았기에, 필자는 본대로 경험한 대로 이름을 붙인다는 나만의 작명원칙을 적용하여 ‘산딸나무 꽃무늬’라 부른다.
우리나라 고고학계가 고대문양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예가 ‘동전무늬’라 부르는 문양이다. 우리와 중국 청자에는 이른바 '동전무늬'라고 불리는 문양이 있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옛 동전은 서양 동전과 달리 동그란 원판에 네모난 구멍이 있다. 이러한 형상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천원지방·天圓地方)’라는 중국의 전통 우주관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며, 통칭해서 엽전이라 부른다. 우리 고고학계에서 말하는 동전무늬는 사실 엽전처럼 생긴 문양을 일컫는 용어이다. 문양의 이미지에 훨씬 잘 어울리는 단어는 동전이 아닌 엽전이기 때문에 필자는 보이는 대로 이름을 짓는다는 작명원칙을 쫒아 엽전무늬라고 부른다.
사진 (15-1)은 신안 해저에서 건져 올린 중국 원나라 때 만든 향로로, 2017년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시회인 신안해저 유물전에 전시된 것이다. '향로 몸통에 동전무늬가 있다.'라고 특별전 도록에 설명해 놓은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고고미술사학계에서는 이 문양을 동전무늬(엽전무늬)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15-2)는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에 전시된 청자베개이며 몸통에 엽전무늬가 있다. 그런데 이 문양을 엽전무늬로 부르는 게 과연 타당한가? 결론부터 먼저 말한다면, 엽전무늬는 고대문양에 대한 지식이 짧은 학자가 잘못 지어낸 이름이다. 왜냐하면 엽전무늬는 사실 칠보무늬와 똑같은 문양이기 때문이다.
15. 동전무늬(엽전무늬)가 있는 중국자기와 꽃무늬가 있는 로마시대 유물 엽전무늬는 사실 칠보무늬와 똑같은 문양으로, 그리스·로마의 십자형 꽃문양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과 한국에 전래된 것이다. (1) 향로 몸통에 있는 엽전무늬 (중국, 원) (2) 청자베개의 몸통에 있는 엽전무늬 (중국, 청) (3) 십자형 꽃무늬 모자이크 (로마제국) (4) 십자형 꽃무늬가 새겨진 석조물 (로마제국)
필자가 산딸나무 꽃무늬라고 부르는 칠보무늬는 착시효과를 유발하는 문양으로, 보는 시각에 따라 십자형 꽃(칠보무늬)처럼 보이기도 하고 엽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진 15-3에 보인 로마시대에 제작된 기하문양 모자이크를 보면 이러한 착시효과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사진에 표시된 노란색 X를 기본으로 하여 이 모자이크를 살펴보면 십자형 꽃무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간 것처럼 보인다. 반면에 노란색 동그라미를 기본으로 해서 모자이크를 살펴보면 이번에는 엽전무늬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하나의 기하문양이 보기에 따라 십자형 꽃무늬로도 보이고 엽전무늬로도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양의 아키타입인 로마의 기하문양을 유럽인들은 보통 십자형 꽃무늬라고 부르기 때문에 엽전무늬는 십자형 꽃무늬(칠보무늬)의 착시문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아이가이 황금 유골함을 장식한 로제트(들국화) 문양으로 돌아가자. 이 문양은 미케네 문명 이래로 그리스에서 널리 사용된 문양이다. 물론 아시아 지역의 고문명인 히타이트, 아시리아, 바빌론과 페르시아 제국에서도 왕실문양으로 흔히 사용되었다. 특히 아시리아 제국의 부조에 자주 등장하여 서양에서는 ‘아시리아 데이지(Assyrian Daisy)’ 문양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이 문양은 기원후 12-14세기에 제작된 고려청자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고고미술사학계에서는 국화문양이라 부르지만, 누가 봐도 이 꽃은 국화보다는 구절초와 같은 들국화를 쏙 빼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고려청자의 들국화 문양 역시 그리스·로마 문명에서 널리 사용됐던 산딸나무 꽃문양이 실크로드를 타고 우리나라로 건너올 때 함께 어깨동무하고 온 문양으로 보고 있다.
16. 고대문명의 들국화 문양 지중해 연안의 고대문명에서 즐겨 사용한 들국화 문양은 권위, 고귀함, 번영을 상징하는 왕실문양이었다. (1)미케네 문명의 도기 (기원전 1500-1400년) (2) 아시리아 제국의 부조 (3) 히타이트 제국의 부조 (기원전 750년) (4) 신 바빌론 제국의 타일 (기원전 575년) (5) 페르시아 제국의 페르세폴리스 부조 (6) 고려청자 (기원후 13세기)
앞장에서도 언급했지만, 간다라 불상을 포함하여 고대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크게 받은 문물이 북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한반도까지 올 수 있었던 역사적 계기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이었다. 그는 중앙아시아와 북인도(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의 주요 거점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를 건설하여 그리스 문명과 토착문명이 융합된 헬레니즘 문명이 꽃피울 수 있도록 씨앗을 뿌렸다. 그의 사후, 제국은 곧바로 분열되어 몇 개의 크고 작은 왕국으로 나뉘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아무다리야 강 일대(옛 지명은 소그디아나)에는 그리스계 왕국인 박트리아(존립시기: 256-125 BCE)가 자리 잡았다. 이 무렵 아소카 대왕(생몰: 304-232 BCE)의 마우리아 제국은 인도를 최초로 통일하고 북인도까지 진출하여 박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아이하눔과 같은 그리스 접경도시로부터 헬레니즘 문명을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에 대한 증거를 마우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의 왕궁에서 발굴된 건물기둥의 주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진 (18-1)에 보인 파탈리푸트라 주두(Pataliputra capital)로 불리는 사암으로 만든 기둥꼭대기 부재를 살펴보자. 주두의 맨 위에서부터 아래로, 들국화, 염주, 파도형 소용돌이, 불꽃형상 팔메트, 주두 좌·우의 이오니아식 소용돌이무늬와 같은 그리스 문양을 볼 수 있다. 즉, 기원전 3세기 무렵에 들국화무늬를 포함한 아주 다양한 그리스-헬레니즘 스타일의 문양이 그리스-한반도의 중간 지점인 북인도와 인도 본토에서 널리 사용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후 기원 전후부터 신라의 혜초스님이 인도 본토와 북인도를 순례했던 8세기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인도-중국-한국 사이에는 불교의 전파와 더불어 헤아릴 수 없는 인적·물적 교류, 이른바 문명교류가 일어났다. 필자는 문명교류의 한 아이템으로 그리스-헬레니즘-로마 문양이 어떤 형태로든 포함되어 있었고, 이것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필자의 주장을 강력히 뒷받침해주는 유물로 북송시대(기원후 10-11세기)에 만든 도철무늬 청자향로가 있다. 사진 (18-2)을 보면, 청자향로의 몸통 위 부분에 파도형 소용돌이 문양이 띠를 두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띠 장식문양은 인도 마우리아 제국의 파탈리푸트라 주두를 장식한 파도형 소용돌이 문양과 완전 판박이다. 이것뿐 만이 아니라 청자향로에 새겨진 도철무늬라 하는 것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 고대 상나라의 전통 도철무늬가 아닌 이른바 뱀 문양으로 불리는 그리스 기하문양에 가깝다. 정말 소름이 끼칠 정토로 놀랍기 짝이 없다. 인도 마우리아 제국과 중국 송나라 사이엔 약 1300년이란 시간 차이가 있지만, 사실 이 소용돌이 문양을 포함한 다양한 그리스 문양은 이보다 훨씬 앞서 인도불교의 동점이 이루어지던 시기(기원후 1-8세기)에 이미 중국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중국에 전래된 그리스 문양은 이후 불교와 청자기술이 한반도에 유입될 때 함께 들어왔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볼 수 있는 당초무늬와 팔메트무늬이다. 이것은 그리스 문양 혹은 페르시아 문양에 기원을 둔 것으로 인도불교가 중국으로 들어오고 이어서 중국불교가 고구려에 전파될 무렵에 함께 들어온 장식문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자. 북인도-중국-한반도 루트를 통해서 유입된 그리스 문양이 당초무늬와 팔메트무늬, 달랑 두 개 뿐이겠는가? 필자의 조사에 의하면, 고려청자를 비롯한 우리나라 문화유산에서 이것 말고도 약 6종 이상의 그리스 또는 그리스·로마문양이 추가로 관찰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본 여행기 뒷부분에서 다시 설명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18. 인도 파탈리푸트라 주두와 중국의 도철무늬 청자향로 그리스 문양이 북인도를 거쳐 중국까지 전수되었음을 이 두 유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사진에서 노란색 화살표로 표시한 파도형 소용돌이 문양의 확대 사진(아래)을 보라! 두 문양은 완전 판박이다! (1) 파탈리푸트라 주두 (인도 마우리아 제국: 기원전 3세기) (2) 도철무늬 청자향로 (중국 북송: 기원후 10-11세기)
언젠가 베르기나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그 때는 마케도니아 평원에 들국화가 활짝 필 무렵이면 좋겠다. 나는 평원을 하얗게 물들인 베르기나의 들국화를 보면서 이렇게 찬미할 것이다.
황금 유골함의 가운데를 장식한 들국화 무늬 위쪽에는 고대 페르시아와 그리스에서 띠 장식문양으로 널리 사용된 연꽃-팔메트 무늬(Lotus-palmette pattern)를 둘렀고, 아래쪽에는 꽃봉오리, 꽃눈, 수선화, 히야신스, 백합으로 구성된 좌우 대칭의 화초무늬(Anthemion)로 아름답게 장식했다.
1977년 처녀분인 2호분을 발굴할 때 황금 유골함 옆에서 필리포스 2세의 것으로 짐작되는 무구일습이 발견되었다. 무구는 투구, 목 가리개, 흉갑, 정강이받이, 칼과 방패로 구성되었으며 지금까지 발견된 고대그리스의 무구 가운데 가장 귀하고, 가장 뛰어나고,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보물급 유물이라고 한다. 이 흉갑은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에서 발굴된 이소스 전투장면을 묘사한 모자이크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입고 있는 흉갑과 매우 비슷하게 생겼다. 철편으로 보강되어 있어 착용자의 몸을 철저히 보호할 수 있게 만든 흉갑은 7조각으로 구성되어 있고,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도록 서로 경첩으로 고정되어 있으며(가슴부위를 열고 닫을 수 있다!), 안감으로 가죽을 사용하여 착용감을 좋게 했다. 또한 흉갑의 모든 테두리에는 황금 띠를 둘렀고, 동그란 잠글 쇠는 사자머리 모양의 황금으로 만들어 화려하면서도 위엄이 느껴지도록 하였다. 필리포스 2세의 무구 일습은 단독 유리 진열장에 전시되어 이곳을 방문한 관람객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
19. 2호분에서 발견된 무구 모음 (왼쪽) 필리포스 2세의 것으로 짐작되는 무구일습(투구, 목 가리개, 흉갑, 정강이받이, 칼과 방패). (오른쪽 위) 상아를 깎아 만든 필리포스 2세의 얼굴부조 (오른쪽 아래) 황금 목 가리개
(참고-3) 이탈리아 폼페이에서 발굴된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이소스 전투장면이 묘사된 모자이크와 아이가이 왕실무덤 2호분에서 출토된 필리포스 2세의 흉갑
처녀분인 3호분은 알렉산드로스 3세의 아들(왕자)인 알렉산드로스 4세의 무덤이다. 그가 왕이 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원전 334년, 페르시아 제국 정벌에 나선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세 차례에 걸친 결정적인 전투(그라니코스, 이소스, 가우가멜라)를 승리로 이끌고 한 시대를 호령했던 페르시아의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하였다. 재기를 꿈꾸며 제국의 북쪽, 카스피 해 방면으로 피신한 페르시아 황제(다리우스 3세)는 부하(박트리아 태수인 베수스)에게 죽임을 당했다. 베수스는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의 힌두쿠시 산맥 북쪽에 있는 박트리아로 달아났는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그를 사로잡기 위해 박트리아로 출정하였다. 성공리에 원정을 마친 대왕은 박트리아 귀족의 딸인 록사나(Roxana)와 결혼하였고 그녀는 대왕의 첫 왕비가 되었다. 10년에 걸친 아시아 원정을 끝내고 바빌론으로 돌아온 대왕은 원인모를 열병에 걸려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다. 거대한 신흥제국은 곧바로 후계자 문제에 부닥쳤다. 왜냐하면 대왕은 자신의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은 채 서거했고 유일한 상속자는 아직 엄마 뱃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디아도코이(Diadochi·후계자들이란 뜻으로 알렉산드로스 휘하의 여러 장군들을 지칭한다.)가 모여 제국을 몇 개 지역으로 나누고 자기들이 태수가 되어 분할통치하기로 결정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으로 귀국한 록사나와 어린 알렉산드로스 4세는 디아도코이의 세력다툼인 내전에 휘말렸다. 결국, 왕권을 탐낸 마케도니아 왕국의 카산드로스 장군에 의해 암피폴리스(Amphipolis)의 어느 성채에 감금됐다가 기원전 309-310년 무렵에 독살되었다. 이 때 알렉산드로스 4세의 나이는 불과 14세였다. 이로써 약 400년간에 걸쳐 마케도니아 왕국을 지배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가계인 아르게아스 왕조는 대가 끊겼으며 카산드로스를 왕으로 하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섰다. 카산드로스는 완전범죄를 꾀했을까? 그는 할아버지 능 옆에 왕자의 묘를 마련하고 후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왕자의 화장 후 유골은 은제 히드리아(Hydria) 안에 담고 히드리아의 어깨 부위에 황금 화관을 걸어 두었다. 3호분에서 많은 수량의 연회용 은제 용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프라이팬과 똑같이 생긴 용기도 있어 관람객의 눈길을 잡아끈다.
(참고-4) 알렉산드로스 4세가 묻힌 3호분에서 발굴된 유골함과 부장품 (왼쪽) 알렉산드로스 4세의 화장 후 유골을 담은 은제 히드리아. 기다란 목과 몸통의 두 부분으로 제작하고 경첩을 달아 이어붙인 것이다. 히드리아의 어깨 부위에 황금화관을 걸어 두었다. (오른쪽) 3호분에서 발견된 프라이팬처럼 생긴 은제 용기. 기다란 손잡이에 양 머리 조형물이 있다.
조용하고 한적한 베르기나 마을 풍경
우리는 조명이 어두운 왕실무덤 관람을 모두 마치고 환한 밖으로 나왔다. 박물관 경내에는 가끔 관광객 한두 명만 보일 뿐, 마을이고 박물관이고 여전히 한적하였다. 유물도록을 사려고 박물관 기념품점을 찾았으나 보이질 않아 할 수 없이 정문 앞 가게에 들렀다. 서너 종류의 책자 가운데 책값이 19유로로 제법 비쌌지만 유물사진이 풍부하고 설명도 충실해 보이는 책을 한권 골랐다. 차를 세워두었던 마을 주차장으로 걸어가다 왕실무덤 유역을 빙 둘러친 펜스 끝자락에서 손바닥만 한 박물관 기념품 가게를 발견했지만 유물설명 책자도 이미 샀고 시간도 많이 지났기에 그냥 지나쳤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다 되었다. 이번 그리스 북부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테살로니키 가는 길에 마케도니아 왕국의 두 번째 수도였던 펠라에 들러볼까도 생각했지만, 오후 6시로 정해 놓은 차량 반납시간에 쫓길 것 같아 포기하였다. 차를 빌린 H렌터카 업체의 직원 퇴근시간에 맞춰 반납시간을 1-2시간 더 늦출 수도 있었는데 왜 오후 6시로 정했을까하고 후회가 살짝 밀려왔지만, 여행일정상 오늘 오후부터 내일 오전까지만 구경할 수 있는 테살로니키에 조금 일찍 들어가 여유 있게 시내구경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우리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영광과 비극을 간직한 베르기나를 뒤로 하고 테살로니키를 향해 서서히 차를 몰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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