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증문
김경희
어렸을 적에 동네 아이들과 놀고 있는데 몇몇 사람들이 다니며 전해주는 전도지를 받게 되었습니다. 겉에는 누군가 양을 안고 계신 사진이 보이고 안에는 글자가 적혀져 있었습니다. 함께 전도지를 받은 동네 언니가 "우리 예수님 믿자" 했습니다. 그러고는 집 옥상으로 데려가 전도지를 벽에 세워 놓고 절을 하며 "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며 맹세하라고 했습니다. 시키는 대로 절을 하고 ‘예수님을 믿노라’고 맹세하였습니다. 그 뒤 동네언니를 따라 몇 번 교회를 가보게 되었습니다.
중학생 사춘기가 되면서 인생이란 무엇인가 삶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고 ‘설교를 들으면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빠가 초등학교 때부터 기독교 재단의 학교를 다니면서 교회를 다니고 있었기에 오빠를 따라 교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삶의 제일 순위는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 제일 순위로 살기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고등부에 들면서 학습, 세례를 받았습니다. 믿지 않는 가정에서 신앙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녁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면 아버지께 야단을 맞거나 다시 교회를 가지 않겠다고 약속 할 때 까지 무릎을 꿇고 있어야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대문을 열어주지 않기도 하시고 금식하며 용돈을 모아 성경책을 처음으로 샀을 때 부모님이 불살라 버리기도 하셨습니다. 저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은 늘 예수 믿는 부모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고2때 성령체험을 하였습니다. 저는 죄인임을 깨달았고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죄가 얼마나 더러운지 벌레만도 못한 나를 보게 되었고 몸서리 쳐지는 더러운 죄를 담당하시어 십자가에 물과 피를 다 쏟으신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 감사하여 울고 또 울었습니다. 이후 나의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주님이 쓰시는 그릇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 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점점 마음속에 시원함이 없고 갈증이 느껴졌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도 채워지지가 않았습니다. 20대 중반 교회 선배로부터 선교캠프에 가자고 제안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부르심에 대한 첫 강의를 들은 후 오래전부터 예수님께서 나를 찾아오셔서 나를 부르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부르시니 순종하여 선교사로 헌신하겠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의 연약함도 고백하였습니다. 묵상 중에 하나님께서 왼손잡이 사사 에훗을 통하여 약한자를 들어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삿3:12-30)을 알게 하시며 용기를 주셨습니다. 이후 오랫동안 느끼던 갈증은 사라졌습니다.
선교단체에서 선교훈련을 받고 1999년 처음으로 우즈벡과 북카프카즈로 단기선교를 다녀왔습니다. 2000년에 북카프카즈로 두 번째 단기선교를 다녀온 후 선교지로 나가기위해 준비
하려고 피아노 학원을 접었습니다. 부모님은 예수에 미쳐 인생 망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
반주자로 섬기고 있었는데 다른 반주자가 없었기에 하나님께 반주자 두 명을 보내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명의 반주자들을 차례대로 보내 주셨습니다. 목사님께 반주자를 내려놓고 선교지로 나가겠노라 말씀드렸습니다. 선교단체 리더십과 인터뷰도 신청했습니다. 서류를 넣어놓고 기다리던 중 병상에 누워 계셨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천국가신 이후 새벽기도를 하는데 결혼하여 어머니의 짐을 들어 드리고 남편의 그늘에 살아야 한다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제가 내년 봄에는 선교지로 가려고 준비 하였는데 지금이 가을이라 언제 남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겠습니까? 다른 기도도 못하게 막으시고 나를 괴롭게 하시니 만일 올해 안에 남자를 주시면 주님의 뜻 인줄 알고 결혼해서 함께 선교지로 가겠습니다.”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그 주 주일날 평소 소통도 잘 없으셨던 한 교회집사님으로 부터 남편을 소개받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 후 저는 남편과 함께 순적하게 선교지로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선교사로 헌신한 후 저는 오직 한 가지 생각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르심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이 선교지라고만 생각 했습니다. 조급한 나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결혼 후 아이를 낳고, 남편과 선교훈련을 하며, 한뜻이 되어 선교지에 가기까지 5년 동안 저를 연단시키셨습니다. 마치 톱니의 모양이 다른 두 톱니바퀴를 맞물려 돌게 하여 잘 맞추어 돌때까지 돌리시는 듯한 힘들고 아픈 훈련의 시간을 보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주셔서 저에게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남편을 머리삼고 돕는 배필이 되어 아이들의 엄마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는 곳, 가정이 나의 부르심의 첫 번째 자리라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가정은 희생과 헌신, 인내를 배우게 하였고 저를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곳이었습니다. 한 번씩 신혼 때가 생각나면 남편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김갱희가 얼마나 나를 힘들게 했노, 김갱희 멋진 남편 만나 가꼬 사람 마이 됐다.” 그럼 제가 대답했습니다. “나도 힘 들었거든요.” 요즘은 “나도 힘 들었거든요” 대신 “그래”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정은 화평을 위해 자기 자존심 접는 법도 배워야 하는 곳이었고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대로 남편 중심의 가정을 세워 가셨습니다.
결혼 후 5년이 지나고 2006년 4월에 4살 5살 두 아이와 함께 캄보디아에 갔습니다. 남편은 함께하는 것을 좋아해서 캄보디아에서도 몇 번의 협력사역을 하였습니다. 협력했던 선교사님들은 대부분 목사선교사였습니다. 몇 가지 생각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 협력선교사님의 사역지에 한국에서 단기 팀이 왔습니다. 청년들이 “이 분들은 누구세요?”라고 우리 가정에 대해 물었습니다. 함께하던 선교사님이 대답을 못하셨습니다. 재차 질문을 하니 한참 만에 하신 대답은 “한국의 전도사처럼 생각하면 되겠네.”하였습니다. 동역자의 개념은 없었습니다. 다른 협력사역지에서 노방전도를 나갔는데 가난한 과부가 조그마한 자기 땅의 반을 내어 놓을 테니 교회를 지어 달라고 했습니다. 남편에게 교회 짓는 헌금을 하시겠다는 분이 있었기에 협력하는 선교사님께 ‘과부가 이렇게 땅을 내어 놓았고 교회 지을 헌금도 준비되어 있으니 지어도 될까요?’라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자신의 구역이니 자신이 알아서 짓겠다’ 라고 하셨습니다. 어느날 협력하던 선교사와 남편을 함께 알고 있는 권사님 한분이 오셨습니다. 협력하고 있던 선교사님 집에 하루 밤 자고 내일 만나 밥 한 끼 하자고 하시며 전화를 주셨습니다.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협력하고 있던 선교사님께 전화를 했더니 우리 가정이 ‘교회 위주의 사역을 안 한다고 말씀드렸다’고 하시고 권사님이 언짢으셔서 남편을 만나보지도 않고 한국 가셨다고 말했습니다. 저희 가정은 협력하던 선교사의 교회에서 찬양 인도를 하며 예배를 함꼐 드리고 있었는데 수요일엔 대학에 리코더를 가르치는 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수요예배가 생겼다며 와서 섬겨 달라고 하셔서 수요일엔 먼저 시작한 사역이 있어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그것이 교회위주의 사역이 아니었나 봅니다.
협력사역이 멈춰지면 남편은 ‘뭐가 문제였지’를 생각하며 등을 땅에 대고 몇 달씩 지냈습니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역의 열매는 없었습니다. 협력사역은 헌신과 희생이 필요했고 열매는 있었지만 상처도 남았습니다. 저는 협력은 깨질 수 있지만 분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흩어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습니다.
2015년 신학을 하려고 한국에 들어오면서 저는 남편이 목사가 되면 욕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 선교지에서 단독으로 사역하고자 다짐했습니다. 협력 많이 했으니 그만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교단선교 훈련을 받으려하니 팀 사역 할 지부를 정해야 한다는 소리에 말문이 막히고 밥맛이 없었습니다. “또, 주님 왜요.” 주님이 원하시면 못할 것은 아니지만 썩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남편이 훈련원 어떤 모임에서 말했다지요. “내가 영어만 됐어도 한국 사람들하고 일 안했다.”라고. 한국 분들과의 팀 사역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선교지에서는 팀 사역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남편이 요즘 훈련원에 들어와 훈련을 받으면서 자주 제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봐라 내 말 맞제. 강사님 말씀이 다 내가 생각했던 거 아이가. 나랑 다르게 말 하는 게 뭐 있더나? 팀 사역 밖에 답이 없다. 말 좀 들어라.”입니다. “말 좀 들어라”는 ‘내 말이 맞으니 내 말 잘 듣고 잘 따라와 주세요.’입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들을 수 있게 된 것이 가정을 주셔서 훈련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남편 말이 다 맞습니다. 남편 말을 잘 들어야 하지요. 저는 하나님을 머리 삼고 ‘팀 사역만이 답이다’라고 외치는 남편을 머리삼아, 남편의 말을 잘 듣고 잘 따라가는 돕는 배필로 남편과 팀 사역 하겠습니다.
첫댓글 김경희 선교사님 글을 읽으니 예루살렘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시던 예수님의 눈물이 생각납니다. 선교사님의 순종이 하나님이 간절히 찾는 잃어버린 양떼들을 예수님의 품으로 이끌 것입니다. 두분의 가는 길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와 성령님의 강한 역사로 죽어가던 영혼들이 에스겔 골짜기 마른뼈들이 다시 살아나서 하나님의 강력한 군대로 일어난것처럼 될 것을 믿고 감사드립니다.
아버지 하나님 두분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을 받으시고, 두분을 향하신 하나님의 모든 계획과 영혼 구원의 모든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역사하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분과 자녀들을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의 부르심과 주신 소명을 따라 날마다 성령님과 예수님을 따라서 지시하시는 모든 일을 행할때 기쁨이 넘칩니다. 아무도 그 기쁨을 빼앗아 갈수 없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우리가 행한 모든 순종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여주지 않고, 끊임없이 베풀어야만 하는 여정의 끝에는, 예수님의 품에 안길수 있는 특권과 하늘의 어마 어마한 상급이 기다릴 뿐입니다.
은혜로운 간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