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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그 분을 믿지 않는 이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천지창조와 그 지속적인 통치에서 빛을 발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 안에 본성적으로 ‘신앙의 씨앗’을 심어주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미신’과 자신의 ‘악한 생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명백하게 명시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인간은 왜 알려고 하지 않고, 그 분을 경배하려고 하지 않은 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것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지식을 이미 우리 가운데 심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 심어 놓으신 지식이 비록 겨자씨만큼 작더라도 그 분을 아는데 충분합니다. 그런데 왜 인간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습니까?
제1절 창조 사역을 통하여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복은 오직 하나님을 아는 데서 시작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진행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안으로부터도 하나님을 알고, 또 밖으로부터도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 속에 ‘신앙의 씨앗’을 심어 주셨고, 또 날마다 우주 만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명백히 보여 주셨습니다. 온 세계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과 거룩하신 성품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무지해서 모른다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1. 하나님께서 명백하게 나타내셨으므로 변명할 수 없다.
[기독교강요1권5장1항]
축복된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데 있습니다.
[요 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 데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 속에 이미 말한 바 있는 ‘신앙의 씨앗’을 심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자기를 계시하셨으며 매일 매일 자신을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그 결과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의 신성은 인간의 모든 지각을 훨씬 초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위에 명백한 영광의 표적을 새겨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너무나 뚜렷하고 분명하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무지해서 모른다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시 104:2] 2.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셨다’고 찬양했습니다. 이 말은 우주 창조 이래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화려한 복장으로 자신을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지 자신의 영광의 훈장들을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시 104:2-4] 2.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 하늘을 휘장 같이 치시며 3. 물에 자기 누각의 들보를 얹으시며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4. 바람을 자기 사신으로 삼으시고 불꽃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시 11:4] 4.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도다.
시편 기자는 광대한 하늘을 ‘왕궁’에 비교하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의 영광이 하늘에서는 더욱 찬란하게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눈을 어디로 돌리든지 이 세계 어디를 보아도 지극히 적으나마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빛나지 않는 곳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우주가 너무 광대하고 아름다운 질서를 가지고 있어서 그 무한하고 빛나는 힘에 완전히 압도 당하지 않고는 잠시라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히 11:1-3]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2.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3.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정교하게 조화와 균형을 이루고 있는 이 세계야 말로 우리가 하나님을 똑바로 볼 수 있게 하는 일종의 거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세계가 너무도 명백하게 하나님을 증거해 주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미련한 사람이라도 그것을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이고,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핑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롬 1:19-20]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2. 하나님의 지혜는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제시되었다.
[기독교강요1권5장2항]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를 보여주는 수 많은 증거는 하늘과 땅에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것은 천문학이나 의학, 또는 일체의 자연 과학의 세밀한 관찰을 하고자 하는 자들만이 아니라, 가장 배우지 못하고 가장 무지한 자라도 보지 않을 수 없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눈을 뜨기만 하면 반드시 그것들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학문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들이라면, 그 도움으로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을 보다 더 깊이 통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학문에 무식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솜씨를 충분히 관찰할 수 없다든가, 하나님을 마음껏 찬양할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더 한층 나아가 별의 운행을 조사하고, 그 위치를 정하며, 그 간격을 측정하고, 그 특성들을 기술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기술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들을 관찰할 때 하나님의 섭리가 한층 더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의 마음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더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합니다. 오로지 눈으로만 배운 일반 대중이나, 가장 배우지 못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솜씨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수하면서도 분명하고 질서 정연한 천체의 변화가 하나님의 솜씨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모두에게 자신의 지혜를 풍부하게 보여 주셨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는 ‘인체의 구조’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체의 관절, 균형, 미, 효용 등을 정확히 조사하기 위해서는 해부학적 기술과 같은 전문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체의 구조가 너무나 오묘하기 때문에, 그것을 만든 분은 마땅히 창조주이심을 모든 사람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인간은 신적 지혜를 가장 잘 입증하는 존재이다.
[기독교강요1권5장3항]
오래 전에 어떤 철학자들은 인간을 가리켜서 ‘하나의 소우주’라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권능과 자비하심과 지혜의 특별한 표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것들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하여 등한히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경이로움이 얼마든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소경이라도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행 17:27] 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사람은 자신을 깨우쳐 주는 하늘의 은혜에 대한 증거를 자신 안에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것에서 삶의 활력을 느끼며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그를 찾은 일을 즐거워해야 합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면 어떻게 용서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도처에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이름과 영광을 간단히 찬양하고, 곧 이어서 ‘사람이 무엇이 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십니까?’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다시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셨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시 8:4] 4.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시 8:2] 2.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이와 같이 인류는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맑은 거울일 뿐만 아니라, 어머니 가슴에서 젖 먹는 어린아이들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는 데 충분한 웅변적인 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웅변가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도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고 말했습니다.
[행 17:28]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뛰어난 은사를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증명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세속의 시인들도 상식과 경험의 지시를 따라 하나님을 ‘인간들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맛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끌리기 전에는 아무도 자기가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없습니다.
4.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을 배반한다.
[기독교강요1권5장4항]
여기서 인간의 파렴치한 배은망덕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안에 하나님의 무수한 사역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작업장과, 동시에 측량 할 수 없는 부요함이 넘쳐 흐르는 창고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그와는 반대로 더욱 더 교만으로 가득 차 우쭐대고 스스로 잘난 체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놀라운 방법으로 그들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들은 또한 각종의 많은 은사가 하나님의 관대하심에서 왔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이것들이 신성의 표시임을 그들은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들을 자기 안에 감추어 버리고 맙니다. 실제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자신에게 귀속시키고, 하나님을 분명히 볼 수 있도록 마음을 비추어 주는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탈선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이 지상에는 많은 괴상한 정신의 소유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파괴하기 위하여 인간성 안에 뿌려져 있는 신성의 모든 씨앗을 그릇되게 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인간이 자신의 영혼과 육신에서 수백 번을 되풀이 해서 하나님을 발견함에도 불구하고, 이 탁월성 자체를 구실로 삼아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데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광란이야말로 얼마나 가증한 것입니까?
그들은 인간이 우연히 동물과 구별되었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만물의 창조주를 ‘자연’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 버립니다. 그들은 극히 절묘한 하나님의 솜씨를 입과 눈에서부터 심지어는 발끝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각 지체 전체를 통하여 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기서도 하나님을 자연으로 대치시킵니다. 그러나 영혼의 신속한 움직임과 그 뛰어난 기능들과 그 특수한 은사들은 쉽게 감추어질 수 없는 신성을 그 면전에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더 뻔뻔스럽게도 하나님을 대항하여 싸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5. 피조물과 창조주의 혼동
[기독교강요1권5장5항]
그러나 그런 돼지 떼와 같은 것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여기서 관심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어리석은 논리에 빠져 영혼의 불멸을 부정하며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권리를 박탈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냉소적인 말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혼은 유기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들은 이것을 구실로 삼아 영혼을 육체에 구속시키고, 육체 없이는 영혼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을 찬양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최대한 억압합니다. 그러나 영혼의 능력들이 육체를 돕는 기능에만 제한되어 있다는 것은 전혀 맞지 않는 말입니다.
천체를 관측하고 별의 수를 계산하며, 그 크기를 결정하고 별과 별 사이 거리를 알며, 그 운행의 신속함과 완만함을 알고, 궤도의 여러 모양의 기울기의 정도를 아는 것이 도대체 사람의 육체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천체에 대한 이러한 깊은 연구에는 영혼과 육체의 유기적인 조화가 있는 것이 아니고 육체와는 구별된 영혼의 활동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혼의 밀접한 활동은 하늘과 땅을 관찰하며, 과거와 미래를 결합시키며, 오래 전에 들은 것을 계속 기억에 담아 두며, 즐겨 하는 것은 무엇이나 다 생각해냅니다. 또한 영혼은 많은 신기한 것들을 발명해 내는 기술을 다양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히 인간에게 신성이 있다고 하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 외에도 사람이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영혼이 여기 저기를 떠 다닐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유익한 것들을 생각하며, 여러 가지 문제를 추리하며, 심지어는 미래의 일을 예언하기까지 하는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심어져 있는 영혼에 불멸성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신적 존재이므로 창조자를 기억할 수 밖에 없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판단력에 따라 정의와 부정을 구별하도록 하셨는데 하물며 하늘나라에 심판자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잠자는 중에도 우리에게는 지능의 어떤 부분이 활동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깨어 계셔서 세계를 통치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연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의 활동이라는 열등한 과정에 혼동하여 포함시키는 것은 백해무익한 일입니다.
나가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사람도 행복에 이르는 데서 제외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 속에 ‘신앙의 씨앗’을 심어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주의 전 창조 속에서 자기를 계시하셨으므로 인간은 눈을 뜨기만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은 하나님을 가장 잘 입증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배은망덕하게 하나님을 배반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는 모든 것들을 땅에 묻어 버리고 감추었습니다. 만물의 창조주를 ‘자연’으로 대치시키고 하나님의 이름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신적 존재이므로 창조자를 기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육체와 영혼이 활동하고,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가운데 운영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계심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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