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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19-2:13
찬송가 390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모압으로 향했던 엘리멜렉과 그 가족들은 10년의 세월 동안 아버지와 두 아들이 죽고 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 곧 오르바와 룻만 남겨지게 됩니다. 그러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사 양식을 주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결단하였고 두 며느리에게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권합니다. 두 며느리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결국 오르바는 거듭된 시어머니의 권면에 고향으로 돌아갔고,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가겠다며 굳은 결심을 보여 나오미와 함께 베들레헴을 향하게 됩니다. 이런 룻의 결단은 단순한 ‘효’를 넘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이후 베들레헴에 도착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아온 나오미(1:19-22절)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베들레헴으로 돌아오는 나오미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가족 4명이 함께 떠났는데 자기 혼자 살아 돌아왔고, 또 며느리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멀리하던 모압의 여인이었습니다. 게다가 이후 21절에 보시면 ‘풍족하게 나갔더니’라는 표현을 볼 때 나오미의 가족은 당장에 먹을 것이 없어 모압을 향해 간 것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 나은 삶, 곧 물질적 풍요를 누리기 위해 떠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으니 사람들이 아마도 뒤에서 뭐라고 말했을지 쉽게 예상이 가능합니다. ‘이이가 나오미냐’라는 이 표현은 나갈 때 나오미와 되돌아온 나오미의 얼굴, 행색, 표정이 겨우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내용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나오미처럼 더 나은 삶을 살고 싶어 신앙공동체를 멀리할 때가 있습니다. 학업 때문에, 취업 때문에, 회사 업무 때문에, 결혼하고 배우자와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핑계로 교회 공동체를 잠시 멀리합니다.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신앙공동체와 멀어져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는 시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몸이 아프거나 힘든 일을 겪거나 모든 일이 잘 풀림에도 불안감을 감출 수 없어 다시 공동체의 품으로 돌아오려 할 때 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까 염려가 되고 부끄럽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나오미의 심정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우리를 아버지의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에게 긍휼을 베풀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은 모른 채 사람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20-21)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나오미는 자신을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불러달라고 합니다. 나오미의 뜻은 ‘기쁨’이란 의미입니다. ‘마라’는 ‘쓴’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족 모두가 죽고 재산을 잃고 실패자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오미에게 ‘기쁨’이라는 이름은 오히려 자신을 두 번 죽이는 이름이 되고야 말았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마라’라고 불러주는게 더 속이 편했던 것입니다. 나오미는 그 십년의 세월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괴롭게 하셨고, 징벌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물론 우리는 나오미의 이 고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명확히 판단할 근거가 부족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나오미의 가정이 모압으로 향했던 이유와 과정이 분명 하나님 중심적인 선택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성읍 사람들이 모두 알 정도로 유력하고 풍족한 가정이었던 나오미의 가정은 더 나은 삶을 위해 모압으로 향했고, 그 선택의 결과 ‘텅 빈 인생’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엘리멜렉을 치시거나 두 아들을 죽이셨다고 보는 것은 타당하지 못합니다. 룻기 안에 그런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인생의 쓴 경험을 통해 나오미는 점점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바라보며 하나님께 나아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평범해 보이는 가정에 일어난 비극으로 나오미의 심령은 가난할대로 가난해졌고, 텅 비워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텅 빈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채우시는 은혜의 이야기들이 이제 펼쳐집니다.
(22)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 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
나오미가 롯과 함께 돌아올 때 그 시기는 ‘보리 추수 시작할 때’라고 합니다. 나오미가 그 시기를 알고 돌아왔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를 적어 놓은 것은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배경을 설명해주며 동시에 그들의 삶에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것임을 암시해주는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와 룻의 만남(2:1-7절)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처음으로 보아스의 이름이 언급됩니다. 그는 ‘유력한 자’라고 소개되는데 이 뜻은 ‘명성이 있는, 능력과 힘이 있는’ 정도의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보아스라는 사람을 통해 나오미의 텅빈 인생을 채워주실 것임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습니다. 룻기 1장은 죽음과 공허, 텅 빈 인생의 바닥을 보여주고 있다면 2장은 계속해서 희망적인 메시지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2-4)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베들레헴으로 온 룻은 이제 노동을 할 수 없는 노쇠한 시어머니를 대신하여 밭으로 나아가 이삭을 주워 오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룻을 보는 나오미의 마음은 고맙고 또 아려왔을 것입니다. 이삭을 줍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 중에서도 가장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었고 또 고약한 일꾼이나 주인을 만나면 희롱을 당하거나 어려운 일을 겪을 수 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배타적인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모압여인인 룻은 차별을 당하기 딱 좋았습니다. 그러나 룻이 나가 이삭을 줍는 것 외에 두 여인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에 나오미는 룻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룻이 이삭을 주으러 간 곳이 우연히 보아스의 밭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 보아스가 그곳에 방문합니다. 여기서 ‘우연히’라는 단어는 ‘미크레’라는 히브리어로 ‘우연한 만남이나 일어난 일’을 의미합니다. 이는 룻의 입장에서 ‘우연’이라는 말입니다. 룻은 계획한 것도 없었고, 의도한 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날 집을 나와 어느 밭으로 가야 할지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걸음을 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룻에게는 우연인 이 사건 뒤에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습니다. 룻은 계획할 수 없었고, 룻은 의도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룻의 길을 앞서 인도하고 계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 인생에 많은 일들이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사건들이라 생각하곤 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우연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는 우리의 무지에서 나온 표현이지만 그 모든 사건 뒤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을 기억할 때 불확실함과 온갖 우연의 산물처럼 느껴지는 우리의 인생길도 평안과 신뢰 가운데 하루를 걸을 수 있습니다.
(5-7)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밭에 방문한 보아스의 눈에 평상시 보이지 않던 한 여인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소녀냐’라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사환이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온 소녀임을 알려줍니다. 소녀라는 단어는 ‘나아라’라는 히브리어로 ‘젊은 여자’를 의미합니다. 이는 룻이 매우 젊은 나이의 여인이었음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삭을 주울 때도 열과 성을 다하여 성실하게 일하고 있음을 표현하며 룻의 성품을 보여줍니다. 보아스는 그 말을 듣고 룻에게 말을 건넵니다.
(8-9)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보아스는 룻을 부르며 다른 밭에 가지 말고 자신의 일꾼들과 함께 머물기를 권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꾼들이 혹여나 젊은 롯을 보며 희롱하거나 괴롭히지 않도록 주의를 주었고, 심지어 일을 하다가 목이 마르거든 자신의 일꾼들과 동일하게 길어온 물을 마실 수 있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이방인인 룻의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호의였습니다. 어찌 자기같은 이방인에게 이런 호의를 베풀어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룻은 보아스의 의도를 묻습니다.
(10-12)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룻의 질문에 보아스는 이미 룻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가 있다며 전해줍니다. 룻이 남편이 죽었음에도 어머니를 떠나지 않고 돌보겠다고 베들레헴으로 찾아온 일, 부모와 고국을 떠나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베들레헴으로 향한 결단의 모습을 언급하며 하나님께서 그런 룻에게 보상과 상 주시기를 바라고 축복하였습니다. 그 축복의 말을 들은 룻은 마음이 울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답을 합니다.
(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룻은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환영받지 못할 이방인, 남편이 죽은 약자, 하녀보다 못한 경제적 상태임에도 자신에게 은혜를 베풀어주는 보아스의 인애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통로가 되어 인애를 베푸는 보아스와 자격없는 자에게 주어진 인애를 진심으로 감사하는 룻의 첫 만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룻의 하루 시작은 참으로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에게 부탁을 해야 할지, 오늘 양식을 얻지 못한다면 자신은 고사하고 연로하신 시어머니를 굶길 수 밖에 없어 걱정과 염려 한 가득 떨리는 발걸음을 내딛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계획할 수 없었고, 누구에게도 기댈 곳이 없었던 룻을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셨습니다. 자신의 날개 아래 피하러 온 작은 새 한 마리를 하나님께서는 보아스라는 날개 아래 숨도록 지켜 주셨습니다. 상황과 물질과 환경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바라본 룻에게 하나님께서는 합당한 상황과 물질과 환경으로 보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환경과 상황이 최악이라 생각되며 오늘 하루 눈뜨기가 두려운 분들이 계시다면 조용히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하루 만날 사람과 환경과 모든 것을 우연이 아닌 섭리 가운데 선하게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보아스는 어떠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인생의 식탁에서 기꺼이 룻을 위한 의자를 내어 주었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에서 자신들만을 위한 화려한 식사를 준비했던 부자와 다르게 보아스는 주변에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통로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사랑의 식탁은 룻과 많은 이들에게 힘과 위로를 전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식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식탁은 어떠합니까? 주의 성찬의 식탁에 초대받아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게 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먹은 우리의 인생 식탁은 이제 나만을 위한 성공, 부귀, 영화의 식탁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의자를 놓고 초대할 수 있는 나눔과 섬김의 식탁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로 삼아 이 땅에 텅 빈 나오미와 같은 심령의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전하며 영생을 선물로 주실 것이며, 우리는 그 귀한 하나님 나라의 일들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디로 가야 할지, 누구를 찾아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어 하루가 두렵게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믿음으로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한 치 앞도 알 수 없어 우리의 인생이 캄캄한 밤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 하루의 삶도 주님의 섭리가운데 있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하나님께 의탁하며 시작하는 이 하루가 우리를 위해 예비해놓으신 은혜의 식탁을 경험하는 하루가 되게 하시고 또한 우리의 인생 식탁을 통해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복된 하루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텅 빈 우리의 심령을 사랑으로 가득 채우신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 흘려보내며 텅 빈 심령으로 고통하고 있는 이웃들을 성찬의 식탁으로 초대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약속의 땅을 떠나 더 나은 삶을 위해 모압을 향했던 나오미의 삶이 텅 빈 그릇과 같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그녀의 상실감을 떠올려보며 지금 내가 향하고 있는 길이 모압을 향한 길은 아닌지 묵상해 봅시다.
2. 나오미는 삶에 찾아온 여러 고난들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삶에 찾아오는 어려움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3. 베들레헴에서 유력한 자였던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인애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힘과 물질을 누군가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지 묵상해 봅시다.
4. 환경과 물질과 편안함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날아온 참새와 같은 룻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돌아보며 지금 내 삶의 중심은 무엇을 따르고 있는지, 또 무엇을 따라야 할지 묵상해 봅시다.
(작성: 강요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