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행4:13-22
.제목:예수님의 이름
예수님을 축약하지 않고 더 정확하게 부른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행11:17,롬1:4)) 실제 이름은 예수이고 주와 그리스도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부를 수 있는 호칭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불신자들이나 더더욱 기독교를 비방하는 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정도는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나 예수님을 주님이라든가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와 만주의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뛰어넘어 분명한 두가지 고백을 가지고 삽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베드로입니다. 행2:36에서 성령받은 베드로가 복음을 전할 때 이렇게 선포합니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신분)가 되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주는 개인과 온 민족의 주인이란 뜻이요, 예수님의 이름 뜻은 마1:21-23에 보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마 1:21)’이시며, 임마누엘이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는 뜻입니다. 그리스도란 예수님이 사역하실 신분상의 호칭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성취하도록 위임을 받은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이름을 마음껏 쓸 수 있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이름의 실제를 가지고 계십니다. 그 이름이 공허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보다 더 구체적이고 더 확실한 삶의 실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으면 여러분의 마음은 예수믿지 않아 지금도 지옥에 떨어져 가고 있는 죽어가는 가족,이웃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오고, 이 나라와 민족의 현실을 보며 흐르는 눈물을 주시되 내 몸 하나 가누지 못해 어느 유행가의 가사처럼 뻥 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의 그런 눈물 흘리고 앉아 있는 처량한 신세와 마음이 공허하도록 살게 하지 않습니다. 또한 마음이 시끄러울만치 혼돈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면 흑암, 즉 어둠가운데 살도록 방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예수님 없이 그 누군가로, 아니면 그 무엇인가로 채우며 살겠다고 발버둥치는 것 때문에 문제입니다.
즉 내삶에 주인이 바뀌어진채 속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면 받게되는 놀라운 약속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이름으로 여러분이 무엇이든지 구하면 주님이 시행하신다고 약속하십니다. 요14:13입니다.“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또한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계시면 천국이 지금 여러분 마음속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495장이 그런 찬양입니다.
1절-내 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 짐 벗고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2절-주의 얼굴 뵙기전에 멀리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3절-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후렴>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이사야 9장 6절에 나온 예수님의 이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하나님 /평강의왕
[신약성경에 나온 예수님 이름] 나사렛사람 / 목수/ 우리의 보증/ 알파와 오메가/ 어린양 / 맏아들 /임마누엘 /예수/광명한 새벽별
오늘날 이름이 좋은 사람은 많지만 그 이름과 실제로 그 사람 능력이 달라 유명무실한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그 이름과 그 삶이 일치가 되는 명실상부한 분이십니다. 즉 구원자, 기름부음 받은 자,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이 모두가 그분의 실재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언제든지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의 본질을 내포합니다(G. 겔레만).
오늘 본문에서도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외쳤던 든든한 백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이 두사도가 외치자 병도 낫고 표적도 나타나는 등 거룩한 전염이 예루살렘 민간에 퍼져 갔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퍼뜨리지 못하도록 당시 종교지도자들인 공회회원들이 출두명령을 요구하여 정식으로 예수이름으로 말하거나 가르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습니다. 세상에 감염되지 말고 능력의 복음에 감염되어 이 거룩한 복음을 세상에 감염시키는 능력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두 사도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굽히지 않았던 말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행4:2,10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10절입니다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엊그제 9.11일 모인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월례회에서 각 교단별로 ‘십자가의 길’을 주제로 토론회를 가졌습니다. 여기서 발표한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2009-09-12 06:59]
‘장로교 목사가 바라보는 십자가의 길’을 발표한 손인웅 목사는 “십자가의 메시지가 약화되면서 한국교회는 덩치가 커졌지만 약해지고 말았다”고 지적하면서 “희생과 죽음의 길을 갈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손인웅목사)
“십자가 안에서 완성되는 것이 성결의 삶입니다(이정익 목사).”
“감리교의 오늘날 사태는 십자가의 길을 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최이우 목사).”
“여성들이 더욱 활발하게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는 것은 결국 더 험난한 제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김윤희 교수).”
인간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었는지 모르나 주와 그리스도로서의 주권과 기름부으심의 사역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몸된 교회를 통해 더 큰 능력으로 병든 사람들이 치유받고, 삶의 의미를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 살길을 찾게 되며, 무언인가에 눌려있고 하루하루 불안하게 살던 사람들이 정신적인 건강을 회복하게 되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 바로 그 때 부터입니다.
예수이름이 오늘 본문에서 어떻게 능력있게 증거되고 있는가를 보겠습니다. 주님은 오늘 누구를 통해 십자가의 복음이 증거되도록 일하고 계십니까?
베드로와 요한입니다. 믿음의 친구 또는 동역자를 만드십시오. 행2-4장에 베드로와 짝을 이루어 나온 사람이 있는데 그가 요한입니다. 항상 함께 다녔습니다. 믿음의 동역자였습니다. 여러분에게도 그런 사람이 필요합니다. 세상적인 친구는 많을지 모르나 영적으로 나와 함께 통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늘 바나바와 함께 또는 실라와 함께 다녔습니다. 모세는 여호수아가 늘 그 곁에 동행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요나단이 있었습니다. 에스더는 그의 삼촌 모르드개와 함께 자기 조국을 멸망시키려는 하만의 모함에서 건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다녔던 제자는 예수님이 기도하고 세우셨던 것처럼 가장 좋은 믿음의 짝은 여러분이 복음을 전해 낳은 사람이면 더 좋고 그렇지 않다면 주위에 주님께 헌신되고 교회를 사랑하는 영의 사람을 얻는다면 바람직합니다.
예수이름을 증거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간증입니다. 간증은 자주 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계속된 간증을 주실 것이라. 교회에 오고싶어지는 비결중의 하나가 무엇이냐고 하면 간증거리가 있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들어야 하죠. 주님의 역사의 현장을 보아야 하죠. 주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일이지요. 이렇게 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간증하고 싶어 교회에 모이기에 힘쓰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간증있는 신앙생활하게 하소서. 주님, 그 간증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하소서
주님, 저로 인해서 우리교회가 간증거리가 많은 교회 되게 하소서. 아멘.
간증은 주님이 내게 하신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해서 내가 대단한 사람이다 등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가 아닙니다. 그런가 하면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듣는 사람들이 내 약점을 듣고 흉을 보거나 비웃지는 않을까 염려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증하는 순간부터 여러분이 담대해지게 됩니다. 간증할 때 21절처럼 복음의 방해물이 되었던 사람들이나 원수마귀가 떠나게 됩니다. 간증할 때 또 다른 치유가 일어납니다. 오늘 본문 4:2-4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했을 때 말씀을 들은 사람중에 오천명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그중에 병 나은 사람이 있었는데 22절에 와서 40세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시간 40세가 된 사람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간증거리가 쏟아지게 될지어다. 그렇게 믿음으로 갈망하며 아멘한 사람들에게도 일생동안 그 간증거리 가지고 더 이상 믿음생활 함에 있어서 들쑥날쑥하지 않고 도리어 이 도시를 들썩들썩하게 만드는 성령의 불이 임하게 하시고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을 전도할 수 있는 복음의 위대한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여러분의 인생의 주인을 아직도 바꾸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어서 힘들게 사는 분들이 앉아 계시지는 않습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맞이하십시오. 여러분은 주님의 발앞에 내려 앉으십시오.
집안에 가구 하나만 새것으로 바꿔도 마음이 다르고 분위기가 달라지는데 그보다 비교할 수 없는 여러분 인생을 자가 운전했던 운전수를 예수님으로 바꾸십시오. 그리고 그 이름을 의지하여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구하지 말고 주님을 구하십시오 다시말해 주님을 목말라 하는 하는 그 마음을 구하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만들었으므로 우리가 당신 품 안에서 쉴 때까지는 진정한 안식은 없습니다.” 우리의 근원을 발견하기까지는 우리는 진한 행복을 가질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인간이 필요로 하는 영적인 갈증은 어떠한 것으로도 대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배고플 때 밥이 없으면 빵을 먹어도 되겠지만 하나님에게 대한 주림과 배고픔은 어떤 것으로도 대치할 수 있는 대용식품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면 다 가진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없으면 다 있어도 아무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삶의 전부가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