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잊혀진 충절』 요약 -
I. 비밀(秘密)의 門
1. 충민공(忠愍公) 諱 두신(斗信) 행장
기미보(己未譜) 출전내역은 “태종조 문과 관 공조판서(太宗朝文科官工曹判書), 병자육신옥 적장흥 시충민공
(丙子六臣獄謫長興諡忠愍公)” 즉 ‘태종조문과 관직이 공조판서에 이르렀고, 병자육신옥에 연루되어 장흥으로 유배되었으며,
시호는 충민’ 이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2. 장흥도호부지(長興都護府誌) 출전 史料
“이두신(李斗信)
“廣州人 有學問志節 官 工判 謫居本府 子孫仍居”
“광주인 유학문지절 관 공판 적거본부 자손잉거”
“본관은 廣州로서 학문이 높고 지조와 절개가 있었다. 관직은 공조판서를 역(歷)하였으며, 장흥도호부로 유배 되었는데,
자손들도 따라서 거주하였다.”
3. 장릉(莊陵) 배식단사(配食壇祠) 배향 인물
장릉(莊陵) 배식단사(配食壇祠)에 배향되어 있는, 충신 268인에 관한 기록은, 우리 廣州李氏 十韻科公派 宗史에 있어서
최대 사건이자 풀리지 않은 숙제였던 충민공 휘(諱) 두신(斗信) 선조의 ‘장흥 유배사건’과 그 사건에 관련된 수 많은 宗史의
비밀을 밝혀낼 수도 있는 마지막 비밀의 門인 것이다.
II. 장릉 충신 배식단(忠臣配食壇)
가. 정단(正壇) :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등 32人
나. 별단(別壇)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趙遂良),
충청도 관찰사 안완경(安完慶),
경성도호부사(鏡城府使) 이경유(李耕㽥) 등 12인
이상의 사람들의 죽음은 정단(正壇)에 배향된 여러 사람들과 차이가 없으나 사실이 조금 소략하여서 별단(別壇)의 맨 앞에
배향하되, 또 죽음의 선후로 서열을 정하였다. 모두 十二人이다.
III. 인연(因緣)의 끈은 다시금 이어지고
1. 인연(因緣)의 시작
대동보 출전, 파(派)를 확인할 수 없는 분들은 이유한(李維翰), 이학례(李學禮), 이태건(李台健), 이용유(李庸逌), 이용건
(李鏞健) 이상 다섯 분이다.
그 중 성종 十年 별시 문과급제자 이유한(李維翰) 선조는 조선조 초기 인물로서 파(派)가 不明하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러한 제반 정황을 놓고 볼 때, 이유한(李維翰) 선조께서는 이 분만의 어떤 특별한 사정이나 곡절(曲折)이 있어야만 될 것이며,
그래야만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이런 제반 상황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2. 인연(因緣)의 끈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에는 또 다른 “이유한”이 출전한다.
세조실록 기사에 출전하는 이유한(李維漢)은 “계유년의 난신에 연좌된 사람”으로 이경유(李耕㽥)의 조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만약에, 성종 十年 별시 문과(別試文科) 급제자 이유한(李維翰) 선조가 세조실록에 이경유(李耕㽥)의 조카로 출전하는
이유한(李維漢)과 동일인(同一人)이라면, 경성도호부사(鏡城都護府使) 이경유(李耕㽥)의 본관(本貫)이 ‘廣州’라는 것이
자연스럽게 증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명백한 거증자료(擧證資料)가
반드시 있어야만 될 것이다.
3. 인연(因緣)의 끈은 다시금 이어지고
만약에 문과방목에 출전하는 이유한(李維翰)과 이경유의 조카 이유한(李維漢)이 同一人이라면, 이유한(李維翰)의
문과방목에 부(父)로 출전되는 이경주(李耕疇)는 경성부사 이경유(李耕㽥)와 형제지간(兄弟之間)이 되어야만 한다.
결국 이경유(李耕㽥)와 이경주(李耕疇)가 형제지간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장릉 배식단사(配食壇祠) 별단의
12충신조사위(十二忠臣朝士位)에 배향되어 있는 경성도호부사 이경유(李耕㽥)의 본관(本貫)이 廣州라는 것이 명명백백
(明明白白)하게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경주(李耕疇)와 이경유(李耕㽥)가 형제지간(兄弟之間)이라면, 이경주(李耕疇)는 조선왕조실록에 ‘계유정난 난신의
연좌인’으로 출전되야한다
그리고 아들인 成宗朝 별시 문과 급제자 이유한(李維翰) 보다 더 엄중한 벌(罰)에 처해 졌어야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모반에 대한 죄목에, 연좌인은 촌수(寸數)가 가까울수록 더 엄한 벌(罰)에 처해 졌기 때문이다.
이유한(李維漢)은 계유정난 당시 경성도호부사였던 이경유(李耕㽥)와 叔姪간으로서 삼촌(三寸)이지만, 형제지간일 것으로
추정되는 이경주(李耕疇)와 이경유(李耕㽥)는 이촌(二寸) 간이 되기 때문이다.
실록에 의하면 이촌(二寸) 간은 영구히 외방 관노로 삼고, 삼촌(三寸) 간은 외방에 안치(유배)된다.
이 기록대로라면, 이경유(李耕㽥)의 조카인 이유한은 ‘외방 안치’라는 처벌을 받았어야 하며, 이경유(李耕㽥)와 형제지간으로
추정되는 이경주(李耕疇)는 ‘외방 관노’ 라는 처벌을 받았어야만 한다.
이제 이경유(李耕㽥)와 형제지간으로 추정되는 이경주(李耕疇)가 계유정난에 연좌되어 ‘외방 관노’ 라는 처벌을 받았는지
여부(與否)를 확인해 보아, 이경주(李耕疇)가 癸酉靖難에 연좌되어 ‘외방 관노’ 라는 처벌을 받았다면, 이경유와 이경주는
형제지간(兄弟之間)임이 완벽하게 증명되는 것이다. 아울러 이경유(李耕㽥)의 조카로 출전되는 이유한(李維漢)과 성균관
박사로 출전하는 이유한(李維翰) 역시 동일인이라는 것이 명증되는 것이다.
세조 4년(1458년) 2월 2일 3번째 기사 중 또 다른 기록을 보면,
“영속 관노인 이수로(李壽老)··윤처신(尹處信)·이미민(李靡敏)·이시민(李時敏)·이경주(李耕疇)·이임(李任)·원규(元規)·조리”라는
기록이 출전한다.
이는 곧 ‘이경유(李耕㽥)와 兄弟之間일 것으로 추정하였던 이경주(李耕疇)가 ‘외방관노’라는 처벌(處罰)을 받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인 것이다.
결국 이는 이경유(李耕㽥)와 이경주(李耕疇)는 형제지간(兄弟之間)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는 것이며,
아울러 李耕㽥의 조카로 출전되는 李維漢과 문과방목에 출전하는 李維翰이 동일인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로말미암아 충민공(忠愍公) 휘 두신(斗信)께서는 경성도호부사 경유의 조부로서 연좌되어 장흥으로 유배되셨던 것이며,
비로서 휘 두신(斗信)께서는 단종 조 절의신이셨음을 분명하게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태안군수공 지분의 묘지명에 따르면, 휘 斗信의 정확한 관직명은 공조판서가 아닌 고려 말 조선 초기 관직인 봉익대부
전공판서(奉翊大夫典工判)이셨음을 또한 확인할 수 있다.
▲ 소목도(昭穆圖)
## 계유정난 당시 이경주(李耕疇) 등 삼형제 관직
이경주(李耕疇) 관직 : 우령사직(右領司直)
이경유(李耕㽥) 관직 : 경성도호부사(鏡城都護府使)
이경치(李耕畤) 관직 : 지고성군사(知高城郡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