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이 춤추는 땅
최 중 호
해거름에 향일암을 떠나 화순에 도착한 것은 어두운 밤이었다. 우선 숙소부터 정해 놓고 쉬면서 다음 일정을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밝은 불빛이 비치는 한 모텔로 들어갔다.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내부가 깔끔했고 방도 따뜻하여, 추위에 떨고 온몸을 쉽게 녹일 수 있었다.
며칠간의 여행으로 쌓였던 피로를 목욕물로 씻고 지도를 꺼내 운주사를 찾아보았다. 운주사로 가는 도중 능주라는 곳에 유적지 표시와 함께 “적려지(謫廬地)”라 적혀 있다. “적려지”란 처음 보는 낱말로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 운주사로 가기 전, 먼저 그곳부터 들러 보기로 하였다.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다는 적려지. 그 뜻이 무엇인지 그곳에 어떤 유적이 있는지조차 모른 채 능주로 향했다. 능주 길가 우뚝 세워진 자연석에, “목사(牧使) 고을 능주(綾州)”란 표지석을 본 후에도 그곳을 찾지 못해 몇 번을 헤맸다. 외곽 도로가 새로 나 그곳을 그냥 지나쳐 버렸던 까닭이다.
그곳은 조선왕조 중종 시대를 살았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선생의 귀양지였다. 성리학의 대가이자 개혁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선생이, 훈구세력의 모함을 받아 이곳 능주로 귀양 온 지 한 달 만에,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다는 유서 깊은 곳이었다.
선생이 돌아가신 후 149년 뒤인 현종 때, 능주 목사로 있던 민여로(閔汝老)가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 송시열의 글을 받아 이곳에 적려 유허비(謫廬遺墟碑)를 세웠다고 한다.
이곳에 와서 비로소 적려의 뜻이 귀양 왔던 집임을 알게 되었다.
능주로 귀양 온 선생은, 북쪽 하늘만 바라보며 한양으로 다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선생의 기대와는 달리, 금부도사가 “죄인 조광조는 나와 어명을 받으라.” 소리치니, 이 어인 말이던가. 선생은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고별인사를 올린 후 눈물로 시 한 수를 지어 읊었다.
“임금을 아버지같이 사랑하였고, 나라 걱정을 집안 걱정과 같이하였는데, 밝은 해가 이 땅을 굽어보니, 충성스런 내 마음도 밝게 비춰 주리라(愛君如愛父 憂國如憂家 白日臨下土 昭昭照丹衷).”
사심 없이 임금을 섬겼던 충직한 신하의 마음을 나타낸 시라 하겠다.
선생의 적려 유허비를 보는 순간, 붉은 색깔의 글자가 가슴을 섬뜩하게 한다. ‘당시 선생이 흘렸던 피의 색깔과 같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선생의 억울한 죽음을 나타내려 그리하였을까.
유허비 뒤쪽으로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어 놓은 사우(祠宇)가 있다. 그곳으로 가 조심스레 방문을 열어 보니 그 안에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게 아닌가. 선생은 머리에 네모진 사방관(四方冠)을 쓰고 조선 시대의 유생들의 예복인 도포를 입고 서 계셨다. 들어가 선생 앞에 무릎을 꿇고 문안 인사를 올렸다.
선생은 조정의 잘못된 정책을 과감히 개혁하고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셨다. 양반과 천민(賤民)의 구분이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천민들이 춤추는 세상을 만들려 했던, 선생의 높은 뜻은 그 당시로선 이상에 가까운 주장이었다. 하지만 선생은 그 이상을 실현해 보려고 하셨다.
그로 인해 선생은 많은 훈구세력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그들의 모함을 받아 이 곳 능주로 귀양 온 지 한 달 만에 임금이 내린 사약을 마시고 돌아가셨다.
선생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목적지인 천 불 천 탑의 도량 운주사로 향했다. 운주사는 그곳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운주사 입구에서부터 산과 들에 탑과 불상이 보인다. 다른 사찰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었다. 다른 사찰의 탑과 불상은 하나같이 정결한 곳에 모셔져 있어, 그 앞에 서기만 해도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을 느껴야 했다.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산이나 언덕, 들 가운데에도 있어 친근감마저 들었다.
다른 사찰의 탑 지붕(屋蓋石)은 사각이나 육각이었는데 이곳은 다르다. 사각으로 된 탑도 몇 군데 있었지만, 원형으로 된 자연스러운 형태의 탑들이 있어 더욱 마음을 끌었다.
다른 사찰에 있는 탑과 불상이 품위 있는 양반의 모습이라면, 운주사의 탑과 불상은 소박한 서민의 모습이었다. 심오한 불법과 계율을 잘 몰라도 쉽게 불상과 탑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숨바꼭질하듯 푸른 산언덕에 숨었다가 소나무 가지 사이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탑, 머리에 하얀 모자를 쓰고 미소로 다가오는 불상에서 친근한 우리네 이웃을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불 천탑의 중심인 석조감실에서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불상도 그러했다.
산의 서쪽 능선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올라가 본다. 그곳에 있는 불상(臥佛)은 아예 누워 있었다. 비바람을 막아 줄 전각이나 울타리 하나 없이 천연 암반 위에 두껍게 돋을새김을 한 채 누워 있는 게 아닌가. 누워 있다는 것은 곧 마음이 편안한 상태를 의미한다. 누워 있는 불상은 누구나 쉽게 찾아갈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그래서 나물 캐던 처녀도, 나무하러 가던 나무꾼도, 두 손을 모아 작은 소원을 하나씩 빌고 갔을 것이다.
선생이 그토록 추구했던, 백성이 춤추는 세상이 바로 이곳이 아니던가. 선생의 적려 유허지 가까운 곳에 그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1998. 한국수필. 3·4월호)
첫댓글 <운주사 와불>은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에도 나옵니다. 저는 장길산 10권을 도경에 근무할 때 독파했습니다. 불교의 미래불 <미륵>이 소설 속에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곰곰 생각하면서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와불의 뜻을 좌파들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民衆을 앞세운 좌파들의 <세상 뒤집어 바꾸기>가 떠올라, 운주사 와불상을 보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저 와불상이 상징하는 것은 요즘 좌파들이 꿈꾸는 基層 民衆만의 세상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역사의 현장을 생생하게 수필로 보여주시고 자상한 해설까지 해주시는 최중호 회장님은 역사수필의 대가이십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세상보다 저는 조선시대 양반과 천민의 엄격한 계급사회에서 정암 조광조 선생이 보여준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을 묘사해 봤던 것입니다.
@최중호 성리학의 대가였고 개혁의 우두머리였던 선생이 훈구세력의 모함으로 死藥을 마셨다니 오늘날처럼 3심 재판도 없었던 그 시대에 사신 것이 불행입니다. 하기야 오늘 날에도 정권이 바뀌면 줄줄이 감옥 가는 것을 보면 벼슬이 높으면 한 개인의 능력이나 공적보다 정치적으로 재단하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시대를 앞서 살다가 천명을 누리지 못한 옛 학자의 불행한 삶을 조명해주신 의미있는 역사수필, 읽게 주셔서 고맙습니다.
길가에 서 있거나 하늘을 우러르거나 소박하기 짝이 없는 운주사의 석상과 와불들... 미륵을 기다리던 당시 기층민들 같아서 더욱 정감이 가더군요.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백성이 춤추는 땅'을 읽으니 다시 운주사에 가보고 싶네요~~~~~^^*
오래 전에 쓴 글입니다. 그 후 용인에 있는 조광조 선생 묘소를 다녀 와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을 썼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주사를 돌면서 와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나물캐던 처녀도 나무하던 초동도 빌고 갔을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광조선생이 꿈꾸던 세상이 아직은 멀었지만 평등사회를 만들어 모두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희망사항이겠지요. 그러나 아직도 어려운 이웃들을 보면 안타깝고 마음 아플 때가 많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같아질 수는 없겠지요. 부지런히 노력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수완이 좋은 사람과 좋지 않은 사람 등 사람의 특성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어느 정도 노력에 따라 자신이 살아 갈 수 있는 사회가 그런 세상이라 하겠지요. 한 사람의 팔에서 나온 손가락도 그 길이가 다르 듯 말입니다.
졸작을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유명한 운주사 와불이 저렇게 소박하네요. 철저한 계급사회..권력을 가진 이에 의해 불시에 사람의 운명과 목숨이 좌우되는 사회란 끔찍하다는 생각을 합니다.과연 시대를 앞서 가신 분입니다.
남보다 앞 서 간다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많은 사람의 견제와 시기 등이 따르며, 때로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하는 일들이 우리 역사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곳꼿한 지조와 절개를 지킨 분들이 있지요.
정암 조광조의 올곧은 시대정신이 당쟁의 휘몰이로 인해 좌초될 수밖에 없었음이 참으로 안타깝네요. 아울러 운주사 전경과 와불도 즐감하고 갑니다.^^
병자호란 때의 삼학사, 조선말기에 황현, 최익현 등의 선비들이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킨 사람 사람들이겠지요.
재미없는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우리나라가 지금처럼 번영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조광조 선생 같은 위대한 선각자가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운주사, 와불 같은 유적지 현장을 통해서 알지 못하고 있던 역사를 일깨워 주신 최중호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같은 유적지를 답사하고도 사람마다 다른 생각을 하게됩니다. 저는 어떤 생각이 떠오르지 않으면 답사를 하고도 글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곳을 다녀왔지만 글로 쓰지 못한 곳이 더 많이 있습니다.
시간 내어 저의 졸작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진을 보시면 알 수 있듯 운주사도 한 번 간 것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