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방장 이중언李中彦, 참모에는 이빈호·이중엽, 종사 이장규 등이었다.
예천회맹에는 안동의병을 비롯하여 선성·풍기·순흥·영천·봉화·제천의병 등 7개 의병진이 참여했다. 이들 의병진은 3월 28일 예천의 산양에서 회맹하고 함창을 향해 출동하였다. 의진의 공격은 3월 29일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저녁까지 치열한 전투를 감행했으나 의병진은 일본군의 공격에 밀려 퇴각하고 말았다. 선성의진은 김도현과 함께 퇴각한 병사가 3~4명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4월 1일 안동의병의 구원 요청에 의병 50명을 이끌고 안동으로 갔다. 안동부는 이미 일본군의 방화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중군장을 사퇴하고 영양으로 돌아왔다.
김도현은 강릉의병의 소모사 이호성의 권유를 받고 6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4월 하순경에 강릉으로 들어갔다. 강릉의 병장 민용호는 김도현을 선봉장에 임명하고 군사들에게 당포唐布를 주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였다. 김도현은 민용호의진에 합류한 후 서울에서 온 관군과 대공산성에서 일대 접전을 벌였으나 우세한 화력에 밀려 패산하였다.
김도현은 민용호의병과 함께 삼척으로 이동하여 김헌경이 이끄는 삼척의병과 연합하여 활동했다. 이때 민용호부대 편제는 대장 민용호, 선봉장 김도현, 수성장 민동식, 유진장 김헌경, 중군 최중봉·강우서·이영찬·전치운·신무섭 등으로 구성되었다. 연합의진은 5월 31일 삼척에서 관군과 큰 전투를 수행하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시작된 이날 전투에서 의병은 처음에는 유리한 지형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세하였으나 점차 탄약이 고갈됨에 전세가 역전되어 결국 오십천변으로 밀리고 말았다. 의병은 관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으나 결국 삼척을 떠나 정선지
역으로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삼척전투에서 퇴각한 김도현은 남은 군사를 이끌고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검산성劍山城을 쌓고 항전을 계속하였다. 이 산성은 석성으로 성둑이 1.5㎞, 면적이 3만 5천여 평에 달하는 크기였다. 이처럼 요새를 이용하여 지구전을 감행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김도현은 각 지역의 의병 해산과 패산을 보면서 결국 총 113자루를 숨겨 후일을 기약하면서 1896년 중양절인 9월 9일양 10월 15일 영양군 청기면에서 부대를 해산하였다. 당시 심정을 그는 다음과 같이 토로했다.
아, 이 한 몸으로 어찌 불공대천의 원수를 갚으리까. 천신만고 수 없는 죽을 고비를 겪고 나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살고 있으나, 세상 일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하늘을 우러러
첫댓글 귀한 자료를 올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벽산 김도현 선생 후손과 영양군청 관계자에게 건의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