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167B8D4D4F745B9E1C)
![](https://t1.daumcdn.net/cfile/cafe/163FA73F4F746A9C23)
광나루 표시석 뒷면는 광나루(너븐나루)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광나루는 광장동에 있던 도선장으로 강폭이 넓은
곳에 나루가 있다하여 얻어진 이름이며
너븐나루라고도 불렸다.
옛날부터 강원 충청 경기 등지의 곡류 및 목재 등의
운송길로 이용되었고 행인과 상인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교통요충지로서 고려조에서는 이 곳에
수참을 설치하였고 조선조에서는 좌수참을 두어
별감을 파견, 세곡을 관리, 감독하고 범죄자등의
출입을 감시케 하였었다.
한양에 많은 사람이 모이고 물화가 집산되면서 광나루를 오가는 행인들이 많아져
더욱 번성하다가 1936년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잃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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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사진은 동아일보에서 낸 광나루 백사장의 피서인파다.
인파가 끝자락에 옛 광진교가 보인다. 광진은 한자로 ]넓을 광(廣)을 써서 광진이라고 했다. 광나루 넓은 나루 실제로 대단히 강폭이 넓었다고 한다. 백사장이었을 지금의 푸른강변 초원지대로 변모한 백사장까지 감안한다면 짐작이 가긴 간다.경기도 광주 이천 여주로 가는 뱃길 장호원 경상도 안동 영주 강원도 양구땅 인제 원주 제천 모두 이길 이 뱃길 이용했을
것이다.서울에서 지방으로 이동하기 위해서 모든 주민들은
한강을 건너야 하기 때문에 배를 이용해야만 하였다.
오늘날은 다리가 건설되어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반드시 배를 통해서만 이동할 수 있었다.
한강의 여러 곳에 나루가 생겨나게 되었다.
한강의 나룻배는 1970년대 이후 강 위에 많은 다리가
개통됨에 따라 점차 그 자취를 감추어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 갔다.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오늘날 많은 다리들이 가설되면서 나루가 사라졌지만
가설된 다리의 위치가 대부분 조선시대 나루가 있었던
곳이라는 점이다.
광나루에는 광진교와 천호대교가 들어섰다.
조선시대 서울에서 중랑천을 건너 이곳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넌 후 광주를 거쳐 남쪽 지방으로
왕래할 수 있었다. 이 나루는 강원도와 남쪽 지방으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던 곳이다. 오늘날은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으나 현재의 광진교가 놓여져 있는 한강 북쪽이다.
광진은 처음에 중급의 나루였으나 곧 승격하여 태종 때에
별감이 배치될 만큼 요충지로 발전되었다.
조선시대 한강과 남한강 및 북한강 유역을 관리하면서
수운을 담당하고 있던 곳이 좌도수참(左道水站)이며 좌도수참의 별감이 이곳 광나루에 상주하면서
한강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기찰하고, 한강의 조운을 관장하였다.
세종 때 삼밭나루가 개설되면서 광나루의 기능이 약화되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송파나루가 번성하여 광나루 삼밭나루
송파나루 순으로 발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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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교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을 잇는 총연장 1,056m의 한강 다리이다.
한강에서 세 번째 도로 교량 중에서는 두 번째로 1936년에 건설 되었으나 다리가 노후되고
교통량이 크게 늘어 1994년에 철거되고 현재 2003년 4차로로 새로 놓인 다리가 들어섰다.
2009년 7월에 걷고 싶은 다리 조성공사를 하여 4차로 중 2차로가 보행로와 자전거 전용도로로 새로이
조성되고 다리 중간부분에 하부 전망대를 설치하여 한강 교량 유일의 걷는 다리와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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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교가 위치하고 있는 광나루는 예부터 충주를 거쳐 동래로 또는 원주를 거쳐 동해안으로 빠지는 요충지로
유명한 나루터였다. 1920년대에는 화물차나 버스를 발동기선에 실어 도강할 수 있었으나
홍수로 인해 교통이 두절되면 그 불편함을 헤아릴 수 없었다.
1930년을 전후에서 교통량이 격증하여 하루에 도강하는 자동차 우차 손수레 등이
수백대에 달하게 되어 도로교통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1936년 교량을 건설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양주목에 속하였다가 1895년(고종32) 개편되어 한성부 양주군 고양면 광진리가 되었으며
1914년 고양군 독도면 광장리가 되었다. 1949년 경기도 고양군 독도면에 해당되던 광나루 일대가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되었다가 1995년 광진구에 편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