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무아(無我)를 실천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를 내세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나’라는 아상이 한다고 여기지 말고
‘일체 모든 것을
주인공, 본래면목에 맡기라’라는 말을 하기도 하죠.
즉, 내가 잘나서
이렇게 모든 것을 이뤄낸다고 여기지 말고
잘하는 것도 우주법계가, 불성이 다 하는 것이고
잘 못하는 것도 부처님이 하는 것이니
시비분별하지 말고
그저 일체를 부처님께 돌려놓으라고 설합니다.
이 또한 하나의 좋은 방편이 될 수 있죠.
그 어떤 삶의 결정이라도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본연의 주인공이 할 수 있도록,
모든 내 안에 있는 본래 자리가
나를 이끌고 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죠.
즉, 내가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법계가 스스로 삶을 창조하도록 허용하라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조작해서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우주법계에서 행하는 삶의 신비가 그저 일어나도록
나를 열어두고 허용하라는 거죠.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해지도록 내버려 둔다는 겁니다.
그랬을 때 가장 지혜로운
본연의 자리로 가게 된다는 거죠.
그래서 진리에게
모든 것을 믿고 맡겼을 때
진리의 일이 펼쳐집니다.
아주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일들이 펼쳐지죠.
왜 그런가 하면,
이 우주법계는 나에게 근원적으로
도움이 되는 일만 하기 때문입니다.
겉껍데기의 ‘나’라는 아상은
당장에 도움이 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본질적인 도움이 아닌 일들을 벌입니다.
아상이 보기에는
남들을 돕는다기보다는
나 자신의 뱃속을 채우는 것이 더 좋아 보이겠죠.
그러나 우주의 근원적 지혜의 입장에서 본다면
남을 돕는 것이 곧 나를 돕는 것입니다.
믿고 맡겼을 때는
당장에 조금 부족해 보일지 모르겠지만
근원적으로 나를 돕는 참된 지혜의 일들을 합니다.
이처럼 우주법계의 계획은
광대하고 무한한 지혜를 담고 있고
무한히 나를 위한 자비를 담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만 도움이 되는
이기적인 성취를 잘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자기 이익에 기초해서 벌어들인 돈이고 성취이며,
타인을 밟고 일어선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이 죽고 나면
다음 생에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그런 경우라면 우주법계에서는
그런 계획을 잡지 않겠죠.
다음 생에까지 그 사람을 돕는 계획을 잡겠죠.
우주법계가 나를 위해 준비한 계획은
더 장대하고,
더 크고 넓고,
이 시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그 계획은
지금 나의 계획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당장은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절대 목표일 수 있겠지만
우주법계의 계획은 그게 목적이 아닌 것이죠.
우주법계의 계획은
내 계획과 다를 수 있지만 중요한 점은
항상, 전적으로 나를 위해
좋은 일, 옳은 일만 벌이고 있다는 겁니다.
우주법계에서는,
내 안에 자성 부처님께서는,
나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사랑,
그도 나 하나만이 아니라
온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를 위해서
항상 무한한 자비와 사랑과 지혜로
전적으로 좋은 일만 하고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법계라고 하는 거죠.
우주법계 본래적인 계획은
이 우주의 일체 모든 존재가
누구하나 빠뜨리지 않고 모두
참다운 지혜, 참된 깨달음,
열반과 니르바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계획입니다.
그리고 우린
바로 그 엄청나고 웅대한 우주법계의 계획을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서 쓰여 지고 있다라고도
방편으로 할 수 있겠죠.
우리 삶의 목적이라면 이런 걸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두 이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즉, 일체 모든 중생을
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죠.
그러려면 내 뜻대로
내 아상이 이끄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근원자리, 본래면목에
일체를 내 맡기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http://cfile258.uf.daum.net/image/2504B6415609C2E11E83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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