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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 : 여호수아 3:7-3:17
제 목 : 그들이 알게 하리라
07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08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
09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10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11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12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13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1. 교훈의 변질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가장 주된 내용으로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성경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고 이야기 하니까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이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우하고,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그 인식체계나 행동양식, 혹은 의무사항을 기록한 책으로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관계에 대한 세상의 일반적인 교훈이나 가르침이 대부분 그런 형식으로 되어있고, 우리 모두가 이런 형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 혹은 덕목으로 널리 알려진 삼강오륜이 아주 적절한 예가 아닐까 싶습니다. 삼강오륜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했었고, 지금 현재까지도 우리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가르침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오륜 중에 군신유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금과 신하가 원활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의롭게 대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부자유친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관계는 서로 친밀함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그 관계가 아름답게 유지된다는 뜻입니다.
부부유별,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는 서로 구별이 있어야 하고, 장유유서, 어른과 아이 사이에는 서로 질서가 있어야 하고, 붕우유신, 친구와 친구 사이에는 서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 관계에 대한 세상의 교훈이나 가르침은 대부분 이런 내용, 이런 형식으로 되어있고, 표현 방식에서만 조금씩 차이가 날뿐 그 근본 취지, 근본 목적, 근본 내용은 동양과 서양, 옛날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자체로는 너무나 좋습니다. 사람들이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아주 좋은 내용들입니다. 이 내용들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아주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좋은 내용들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수단과 방법으로 변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조금 서글픈 일이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 속에는 어쩔 수 없이 강자와 약자와의 관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을 기준으로, 권력을 기준으로, 신분을 기준으로, 나이를 기준으로 강자와 약자와의 관계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자가 자신의 역할이나 책임을 강조하기 보다는 약자의 의무, 약자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약자를 원활하게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한 일종의 지배 원리로, 일종의 통치 원리로 이 좋은 내용들을 악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약자들을 그저 말 잘 듣는 순종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해 강자들이 이 좋은 내용들을 자신들에게만 유리하게 해석하고 있고, 자신들에게만 도움이 되도록 그 근본 취지나 목적을 왜곡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하가 먼저 임금에게 충성해야 하고, 자식이 먼저 부모에게 살갑게 대해야 하고, 아내가 먼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아이가 먼저 어른에게 양보해야 하는 것으로 그 의미가 변질되었습니다. 친구끼리도 서로의 위치를 잘 파악해서 낮은 위치에 있는 자가 자신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에게 믿음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으로 그 내용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랑이나 배려의 의미는 다 사라져 버리고, 오히려 그 약자들 위에 순조롭게 군림하고, 순조롭게 다스리려는 사회적 강자의 논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약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그저 강자들이 하자는 대로, 그저 강자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군신유의는 신하의 충성만을 일방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가 의로움에 기초한 인격적인 관계, 평등한 관계,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큰일 납니다. 그랬다가는 죽음을 면치 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장유유서가 단순히 찬물도 위아래가 있다는 순서의 의미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 자에 대한 어른의 역할, 어린 자에 대한 어른의 책임을 먼저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부유별이 남녀 간의 차별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남녀 간의 다름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기존의 사회질서에 도전하는 아주 싸가지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 약자는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강자의 논리, 강자의 주장, 강자의 명령에 따라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세상 속에 존재하는 약자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2. 교회의 변질
그런데 문제는 세상 속의 이러한 변질된 관계의 원리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높은 분, 강한 분, 통치하는 분이시고, 사람은 낮은 자, 약한 자, 섬기는 자이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은혜 갚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게 구원받은 사람, 즉 성도가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상과 벌이 주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누가 그렇게 강조하고, 누가 그렇게 주장합니까? 하나님께서 그렇게 강조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주장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전혀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당연히 그런 주장도 전혀 펼치시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후 심히 좋아하셨고, 사람이 죄를 범하자 심히 안타까워 하셨고, 그 사람을 너무나 불쌍히 여기셔서 친히 사람이 되어 죽기까지 하시면서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신 분이십니다. 예.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이상한 주장을 펼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럼 누가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누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까? 누가 사람에게 상벌이 따로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까? 바로 교회가 그렇게 강조하고 있고, 교회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바로 목사가 그렇게 강조하고 있고, 목사가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교회가 그렇게 주장하고, 왜 목사가 그렇게 주장할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도 간단합니다. 모두가 교회의 유익과 이익, 모두가 목사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입니다.
자신들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서,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위해서 하나님을 왜곡하고, 성경을 왜곡합니다. 자신들의 권위와 안위를 위해서 하나님을 왜곡하고, 성경을 왜곡합니다. 하나님을 무서운 하나님, 두려운 하나님, 공포의 하나님, 징계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 상벌의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잇속만 채우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역 당시 유대교가 그랬고,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지금 기독교가 그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교회에서 이런 걱정을 많이 합니다. ‘세상이 교회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어. 세상의 원리가 교회 안에서 너무 판을 치고 있어.’ 이런 걱정을 참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로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교회 스스로 누워서 침 뱉는 격입니다. 그 세상의 원리를 누가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습니까? 하나님께서 들여놓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럼 세상 스스로 들어왔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교회가 세상의 원리를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인 것입니다.
조금 전 삼강오륜은 꽤 괜찮은 내용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삼강오륜이 그 내용 자체로 괜찮은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내용 자체로 완벽한 것이 아니고, 그 내용 자체로 훌륭한 삶의 덕목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내용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그리고 그 내용을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하느냐에 따라서 꽤 괜찮은 내용이 될 수도 있고, 정반대로 완전히 쓸모없는 엉뚱한 내용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기준에서 그 내용을 해석하고, 하나님의 기준에서 그 내용을 우리 삶에 적용하면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남편과 아내, 어른과 어린이, 그리고 친구끼리의 관계가 서로 존경하고, 서로 존귀하게 대해주는 인격적 관계, 평등한 관계, 친밀한 관계, 아름다운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 됩니다. 그러나 죄의 원리로 해석하고, 죄의 원리를 적용하면 이 내용은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고 통치하고 착취하는 수단과 방법으로 변질될 뿐입니다.
그런데 그 변질된 원리, 오염된 원리를 교회로 끌고 들어와서 하나님께 충성하고, 하나님께 헌신하자고 주장하는 게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자고 주장하는 게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해 하자고 선동하는 게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예. 다 교회입니다. 그러면서 교회가 세상이 교회에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고, 세상의 원리가 교회에서 너무 판을 치고 있다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도 성경에서 순종을 강조하셨잖아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자는 내용,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의 영광을 위해 하자는 내용이 성경에도 있잖아요? 예. 이렇게 반문하실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예. 그런 내용이 성경에 있습니다. 그런데 삼강오륜을 설명할 때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하나님의 기준, 하나님의 원리에서 해석하느냐, 죄의 기준, 죄의 원리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해석과 의미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했습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도 어떤 기준, 어떤 원리를 적용해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기준 삼으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고, 하나님의 원리를 기준 삼으면 관용과 자비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원리를 기준 삼으면 무서운 하나님, 명령만 하는 하나님, 사람의 충성과 헌신만을 요구하는 하나님, 일만 시키는 하나님, 잘하면 상주고 못하면 벌주는 하나님만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가장 주된 내용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인정하고,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대우하고,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지 서로의 행동양식이나 의무사항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사람의 책무나 역할을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부인하고 떠나간 사람, 하나님에 대하여 변화된 사람을 끝까지 저버리지 않으시고, 사람을 지으실 때 심히 좋아하셨던 그 심정과 마음으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키시기 위해 수고하시고 애쓰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그 사랑을 내용으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의 변질된 원리, 세상의 오염된 원리를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그 변질된 원리, 오염된 원리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고, 성경 말씀을 왜곡하고 있고, 성도를 그릇되게 교육하고 있으니, 이게 얼마나 답답한 노릇입니까?
예. 교회로 인해, 그리고 종교인들로 인해 하나님의 본질, 성경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이 심하게 훼손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로 인해 성도들의 신앙생활이 자유롭지 못하고, 평안하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종교인들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의 삶이 불편하게 되었습니다. 인정합니다. 일차적인 책임이 모두 교회에게, 모두 목사에게 있다는 것 인정합니다. 절대로 부정하지 않습니다. 결코 부인하지 않습니다.
3. 성도의 역할
그렇다고 성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성도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는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읽으라고 주신 책, 성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시대에는 일반 백성이 종교인들에게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있는 그대로의 율법의 내용과 의미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접했던 율법은 언제나 종교인들에 의해 조작된 율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 시대에도 일반 백성들은 사제들로부터 넋 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제 이외에 일반 백성이 성경을 소유하는 것과 성경을 읽는 것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접했던 복음, 그들이 접했던 진리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언제나 사제들에 의해 조작된 복음이었고, 조작된 진리였습니다. 사제들의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인지 틀린 이야기인지 확인할 길도 없었습니다. 진리를 알고 싶어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마음먹고 속이려고 드는 자에게는 당연히 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이 그런 시대냐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종교의 자유가 100% 보장되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 번역본도 여러 종류가 있고, 원어 성경도 구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예.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성경을 통해 혼자서도 충분히 진리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억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생각나도록 도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친히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와주고 싶어도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가 성경 자체를 펼쳐보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감을 주시고, 조명을 주시려고 해도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성도가 성경을 전혀 읽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도가 진리를 알 수가 없고, 진리를 알지 못하니 속을 수밖에 없고, 속을 수밖에 없으니 엉뚱한 곳에서 육체적 피해, 정신적 피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엉뚱한 곳에서 시간적 피해, 물질적 피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예. 성도의 신앙생활은 헛수고의 연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자기의 신앙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자기의 신앙은 없고, 오로지 자기가 다니는 교회 담임목사의 신앙만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담임목사의 말만 믿고, 담임목사만 의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면 무조건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될지어다.’ 그러면 무조건 ‘아멘’이라고 화답합니다. 담임목사의 설교가 옳은지 그른지 확인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덮어놓고 아멘입니다. 그러니 신앙의 성숙이 없는 것이고, 그러니 신앙의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으로부터 기독교가 갈수록 손가락질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바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해서 진리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하나님, 바른 진리는 목사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목사의 설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속에 있음을 믿으시길 바립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바른 하나님, 바른 진리는 오직 성경 속에서만 확인할 수 있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확인, 누가 하는 것입니까? 바로 성도 자신이 확인하는 것입니다. 누가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하는 설교, 제가 하는 이야기가 맞는지 틀리는지 누가 확인합니까? 바로 여러분께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근거로 확인합니까? 바로 성경을 근거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기도 많이 합니다. ‘우리 목사님, 영육 간에 강건하게 해주시며, 늘 바른 말씀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두루마리를 덧입혀 주시옵소서.’ 이런 기도 참 많이 합니다. 그런데 언제나 기도로만 끝납니다. 언제나 말로만 끝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기도에 응답하시는지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기도 했으니 내 할 일 다 했다.’입니다. 나머지는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시라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미루어 버립니다. 기도를 했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시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언제나 기도만으로 끝납니다. 그게 우리 기도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우리 목사님, 영육 간에 강건하게 해주시며, 늘 바른 말씀 전할 수 있도록 성령의 두루마리를 덧입혀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참으로 좋은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에 대해 하나님은 절대로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시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누구를 통해 응답하시고, 누구를 통해 역사하십니까? 바로 기도한 그 성도를 통해 응답하시고, 기도한 그 성도를 통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응답하시고, 어떻게 역사하십니까? 기도한 그 성도가 성경을 통해 우리 목사의 설교가 바른지 그른지, 우리 목사의 이야기가 옳은지 잘못되었는지를 확인하게 하고, 분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가 있으면 정당하게 비판하게 하는 것입니다. 예. 성도가 그렇게 할 때, 성도가 그런 노력을 기울일 때, 그 성도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이고, 그 성도의 목사는 영육 간에 강건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른 말씀, 진리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목사를 강건하게 하는 이는 바로 성도입니다. 목사가 바른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하는 이는 바로 성도입니다. 목사가 세상 풍파에 흔들리지 않으며 오직 진리만을 선포할 수 있도록 하는 이는 바로 성도입니다. 즉 성도가 바로 설 때 목사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고, 바로 그때 기독교가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온전한 기독교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4. 구약의 방식
제가 오늘 이처럼 교회의 변질, 목회자의 변질을 안타까워하고, 성도의 역할에 대해서 강조를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에 기록된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 하나님의 의도를 보다 확실하게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에는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들로 하여금 언약궤를 메고 먼저 요단강에 들어가게 했고, 그들이 들어가자 요단강이 갈라져 이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본문의 내용보다는 본문의 기록형식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오늘 본문은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 3:7-8],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너는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요단 물 가에 이르거든 요단에 들어서라 하라.’라는 단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함께 하실 것과 요단강을 건너가는 절차에 관해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두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 3:9-13],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리 와서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하고, 또 말하되 살아 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에 계시사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히위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너희 앞에서 반드시 쫓아내실 줄을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이제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각 지파에 한 사람씩 열두 명을 택하라.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한 곳에 쌓여 서리라.’라는 단락입니다.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내용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단락은 [여호수아 3:14-17]까지의 내용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여호수아의 전달대로 그대로 이행했더니 과연 하나님의 말씀대로 요단강이 갈라졌고, 그 갈라진 곳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무사히 요단강을 건너갔다는 내용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여호수아,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세 단락으로 구분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구조가 처음이 아닙니다. 우리가 눈치를 못 채서 그렇지, 이전에도 이런 구조가 있었습니다. 우선 [여호수아 1:1-9]까지 ‘강하고 담대하라,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묵상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라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수아 1:10-15]까지 여호수아가 백성의 관리들과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고, [여호수아 1:16-18]까지 여호수아에게 충성을 다짐하는 백성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 말씀을 전달하는 여호수아, 그리고 그 말씀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세 단락으로 구분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조는 창세기에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에서는 이스라엘이 민족을 형성하기 이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가르침의 대상은 아브라함과 그의 혈통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땅을 주시고, 민족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 하나님은 사람을 위해 주시는 분임을 가르쳐서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달라집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민족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가르침의 대상이 이스라엘 전 민족으로 영역이 확대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누군가에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을 누군가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게 하시고,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케 하시며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원리, 하나님의 사역을 전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그 3단계 구조의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단계별로 핵심 말씀이 있습니다. 1단계, 즉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하시는 단계에서의 핵심 말씀은 [여호수아 3:7], ‘그들이 알게 하리라’가 되는 것이고, 2단계, 즉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단계에서의 핵심 말씀은 [여호수아 3:10], ‘이것으로서 너희가 알리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3단계, 이스라엘 민족이 반응을 나타나는 단계에서의 핵심 말씀은 [여호수아 3:17],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구조가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런 구조는 구약 내내 동일한 방식으로 반복적으로 전개 됩니다. 즉 말씀하시는 하나님, 전달하는 사람, 반응하는 이스라엘의 3단계 구조가 구약의 이야기를 끌어가는 기본 줄기가 되는 것입니다. 다만 전달하는 사람이 시대에 따라 변화될 뿐입니다. 즉 출애굽기 때는 모세가 전달자의 역할을 했었고, 여호수아에서는 여호수아가 전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고, 사사기에서는 사사들이, 역사서에서는 왕들이, 예언서에서는 선지자가 전달자의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구조 속에서 이스라엘이 좋은 결과를 이루어 낸 적은 거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수고하시고 애쓰시며 하나님을 가르치셨고, 하나님의 기준과 원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그렇게 수없이 말씀하셨건만 어떤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가 모든 일을 그르쳤고, 어떤 때는 이스라엘이 그릇된 반응을 보이며 결국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예. 구약은 창조 때의 사람, 즉 하나님 앞에 당당하고, 자신에게는 떳떳하고, 남에게는 부끄럽지 않은 사람으로 회복하는데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가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구약은 하나님의 실패라고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하나님께서 진행하셨던 일의 결과가 좋지 않게 나타났으니까 일견 타당성이 있는 의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단 한 번도 사람을 강제하시거나, 사람을 억압하시거나, 사람의 인격과 자유를 훼손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계획 자체를 이루어 내시는 게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게 목적이었다면 전지전능한 하나님께서 못 이루어 내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의 자유, 사람의 인격을 완벽하게 보장한 상태에서 사람 스스로가 변화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구약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정과 마음을 온전히 읽어내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준과 가치를 자신들의 삶 속에 온전히 구현하지 못한 사람의 실패가 되는 것입니다.
5. 신약의 방식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이루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사람의 행복, 사람의 자유, 사람의 평안을 옭아매고 있는 죄의 사슬로부터 사람을 해방시키기 위해 친히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십자가 사역을 통해 마침내 그 오신 목적을 다 이루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은 오늘 말씀과 관련하여 볼 때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하나님의 사역의 대상이 전 인류로 확대되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때는 아브라함과 그의 혈통이 하나님 사역의 대상이었고, 출애굽기 이후 구약시대는 하나님을 가르치기 위해 샘플로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사역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하나님의 사역의 대상이 전 인류로까지 확대된 것입니다. 사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사역의 대상은 전 인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 샘플로 선택된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고, 하나님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실패하자 신약시대에는 아예 하나님께서 직접 전 인류를 사역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두 번째 의미는 중간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빠지고 하나님께서 직접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성도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확인하셨던 것처럼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사역은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 그리고 그 말씀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이렇게 3단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중간에서 말씀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 빠지고, 하나님께서 아예 모든 사람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 삼은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성도를 한 지체로 묶어주시는 것이고, 성령을 통하여 각자 사람의 삶을 친히 보호하시고, 친히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의 역할을 맡은 사람이 아예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잘 파악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구약에서 전달자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 스스로에게도 많은 문제가 있었고,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인양 행세하는 거짓 전달자들도 있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를 이스라엘이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실패했었고, 이를 안타까이 여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전적으로 구원하시고, 돌보시는 것입니다. 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전달자의 역할은 구약시대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주 심각한 문제가 지금부터 발생합니다. 그 문제는 지금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자인양 행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인양 행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지한 성도는 교회를 떠받들고 있고, 목사를 우상처럼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폐한 내용이 오늘날 교회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모든 교회가 이런 것은 아닙니다. 모든 목사가 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모든 성도가 이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교회가 이런 흐름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도 부인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예. 지금 한국 교회는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해서는 안 될 일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교훈, 하나님의 가르침이 가득한 성경을 외면하고 세상의 가치, 세상의 교훈, 세상의 원리를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런 성도들의 욕구를 맞추어 주기 위해 오히려 그릇된 세상의 원리, 오염된 세상의 원리를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고, 그 세상의 원리로 성경마저 왜곡하고 변질시키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직접 구원하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직접 보호하시고,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 어떤 중간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럼 교회는 무엇인가요? 교회는 중간자가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는 중간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의 진리는 이미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나누고, 확인하고, 누리는 곳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배우려면, 교회에서 말씀을 나누려면, 교회에서 말씀을 확인하려면, 교회에서 말씀을 누리려면 우선 그 말씀의 내용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을 읽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러분 주위에 계신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성경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권면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도가 그렇게 할 때 성도는 빛과 소금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성도가 그렇게 할 때 목사가 바로 설 수 있는 것이고, 성도가 그렇게 할 때 기독교가 회복될 수 있는 것이고, 성도가 그렇게 할 때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구현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시는 우리 다누림 성도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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