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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구청 신우회 수요예배 메시지
일자: 2023년 2월 15일 수요일
설교 본문: 누가복음 24:47~48
설교 제목: 죄사함과 회개
https://www.podbbang.com/channels/1786760/episodes/24625758?ucode=L-DuGGQwYB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한 여인이 있습니다. 결혼을 하여 다섯 자녀를 낳아 양육했습니다. 남편은 환갑이 되어 별세했습니다. 여인의 나이는 남편보다 열 살 적습니다. 여인은 이제 팔순이 되었고 남편과 사별한 지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남편이 꿈에 나타나서 괴롭힙니다. 망치로 머리를 때리는데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남편의 무덤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이장을 결심합니다. 여인은 남편의 무덤을 옮기기 위해 지관을 부르고 인부를 샀습니다. 지관에게 100만원을 선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 묘 이장 공사가 끝나면 400만원을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꿈을 남편의 묫자리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먼 길을 다녀오고 500만원을 지불합니다. 자녀들은 아버님의 유골을 화장하여 가까운 납골당에 모시자고 합니다. 멀리 지방에 있는 산소에 벌초하러 가는 일이 이제는 버겁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 여인은 자기가 돈을 지불하여 굳이 남편의 묫자리를 명당에 옮겨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이장을 결심한 순간부터 꿈에 시달리는 일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여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한 사람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일을 해석하고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은 그 사람의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가 무엇을 어떻게 믿느냐 하는 것이 그의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그의 꿈자리에도 힘을 발휘합니다. 사람의 신념과 신앙, 또는 생각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는 자신의 세계와 자신을 이해할 때도 바로 그 기준과 틀로 바라봅니다. 그래서 한 개인이나 공동체에서 그 모든 판단과 인식의 기초를 이루는 생각을 세계관이라고 부릅니다.
세계관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가치 있게 여길까를 결정하기에 가치관이나 인생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세계관이나 가치관, 또는 인생관을 연구하는 학문을 철학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철학은 기본정신과 같은 것입니다. 철학이 무엇이냐, 또는 철학이 없다는 말은 기본정신에 대한 질문이며 평가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여인의 이야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무속적인 세계관입니다. 현실의 문제와 자손들의 운명은 묫자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500만원을 들여 이장하고 먼 거리를 가고 오는 일도 힘들다 하지 않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을 설득하여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면 참 좋지만,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절대로 뜻을 굽히지 않는다면 자녀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가정의 경우, 자녀들이 어머니와 크게 싸워서 어머니가 자녀들의 뜻을 따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자식들 간에 언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합니다. 그 자녀들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머니의 행동을 미신적인 것으로 보거나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는 것으로 여깁니다. 또 어떤 가정의 경우, 자녀들이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서 그대로 따릅니다. 어머니의 소원이기 때문에 살아 생전에는 그 뜻을 들어 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모의 묘소를 정리하여 납골당에 옮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은 부모의 묘소를 함부로 옮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결정을 합니다. 그 결정은 곧 그 사람의 신앙이나 가치관 또는 세계관에서 나옵니다. 우리들은 이렇게 다른 세계관이나 신앙관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해 이란에서는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22세의 마흐사 아미니가 도덕경찰에게 체포되어 9월 16일에 사망했습니다. 그후로 이란에서는 이를 비난하는 시위가 일어나 금년 2월 현재까지 500여명이 숨지고 2만여명이 체포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위스에서는 부르카나 니캅처럼 얼굴을 다 가리는 방식의 복장을 착용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벌금을 물리는 법을 만들고 있습니다.
신앙은 때때로 우리의 삶에서 복장이나 음식에 영향을 끼칩니다. 물론 장례문화와 물질의 사용에도 영향을 줍니다. 지금 우리는 다양한 세계관과 신앙관 또는 인생관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공공의 질서와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문제는 모든 나라의 과제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코로나 판데믹의 시대에 마스크 착용을 강제한 나라들도 있고 그것을 개인의 선택에 맡긴 나라들도 있습니다. 공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는 제한되어야 한다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나라에서는 독재자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공익을 무시하고 개인의 자유만을 강조하는 나라는 재난에 대한 효과적인 대처를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 하는 것은 그 사회의 성숙도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사회가 성숙한 사회입니까? 무속이나 현실에 맞지 않는 전통으로 재물이나 정신을 과도하게 허비하는 사회는 성숙도가 낮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생각이나 가치관 또는 신앙이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고 박해하는 사회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점수가 낮은 사회입니다. 세상은 무속신앙에서 합리적인 삶으로 발전해 왔으며, 씨족이나 민족 중심의 사회에서 보편적 세계질서를 고려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왕정이나 독재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지불해 왔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우리들도 신앙의 성숙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성숙이란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에서 청년으로 그리고 장년으로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성숙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의 신앙이 성숙한다는 것은 어떻게 되는 것을 의미할까요?
신앙의 성숙이란 한 사람의 성숙과 마찬가지로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서 다른 사람과의 원만한 관계를 이루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단순하게 생각하던 신조와 신앙 또는 의식이나 행동을 더 깊이 이해하여 그 근본정신을 이해하고 그것이 현실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유치원 아이들은 길을 건널 때 손을 듭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조금만 자라나면 그 행동이 길을 건널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이해없이 단순히 손을 들고 길을 건너야 한다는 행동만을 반복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우리의 신조와 교리, 그리고 예전과 의식에 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즉, 신앙의 중심이 되는 경전에 대한 공부와 이해, 그리고 묵상과 토론을 통하여 그 근본정신이 무엇인지를 알아가는 노력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노력을 멈출 때 신앙은 잘 맞지 않는 소라고둥의 껍질처럼 우리에게 고통을 줍니다.
오늘 저는 ‘죄 사함과 회개’에 대하여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24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을 인용하시면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을 가지고 설명하시기를, 세상 모든 민족에게 두 가지가 전파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죄 사함과 회개입니다(47절).
이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죄 사함과 회개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보았을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는 것과 회개하는 것은 우리들에게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는 죄를 용서받기를 원하며 이미 용서받았다고 믿기도 합니다. 우리는 회개했으며 앞으로도 회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늘 기도하면서 죄 사함과 회개를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 사함의 비밀이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자신이 깨달은 것을 큰 소리로 전파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모든 민족에게 전파되어야 할 소식은 죄 사함과 회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님의 이름으로 받는 죄 사함과 회개가 전파될 것입니다. 제가 죄 사함과 회개라고 말하는 이 대목은 개역한글판 성경에서는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라고 되어 있습니다(눅 24:47). 그러나 많은 영어성경과 헬라어 성경에는 ‘죄 사함과 회개’라고 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죄 사함과 회개가 왜 필요한가 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왜 죄를 용서받아야 합니까? 그러면 죄를 지었으니까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하면 어떻게 됩니까 라고 묻는다면, 죄를 용서받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지옥불에 떨어질 것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여기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덧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은 이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이 질문에 대하여 대답하기 전에 우리에게는 어떤 이야기가 있다는 점입니다. 즉, 인간은 죄인이며 죄의 결과는 사망이고 그 사망은 지옥불에 떨어지는 것이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마치, 현실에서 잘 되거나 못되는 것이 묫자리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를 마음에 간직하고 사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우리 안에는 이미 어떤 이야기가 있습니다. 물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이런 이야기를 붙들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죄 사함의 필요성을 이야기할 때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인 이야기가 없는 사람에게는 죄 사함 같은 것은 별로 마음에 감흥을 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을 가리켜 비신자 또는 불신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으며 인간이 죄인이라는 것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죄 사함이나 회개는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도 어떤 계기로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이야기를 듣다 보면 어느 새 그 이야기가 자기 속에 들어와 자리를 잡은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죄 사함과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교회는 세례를 주고 그를 신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제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이 이야기가 옳은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며 우리가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기초적인 이야기가 과연 타당성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것은 성경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 보자는 제안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버리자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자는 제안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기 위해 에덴동산에 두 나무를 만들어 놓으시고 인간이 실패하자 쫓아내시며 모든 인간이 다 죄를 범하므로 지옥불을 예비하셨다는 이야기가 하나님을 바르게 설명합니까?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시는 분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시고 세상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인간은 무엇을 꿈꾸는 존재라고 성경 이야기는 들려줍니까?
현재 기독교회에서 죄 사함에 대하여 설명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피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노력이나 율법으로는 결코 죄를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죄 사함이 곧 구원에 이르는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인간의 상태를 죄인으로 설명하며 인간이 바라보아야 할 이상과 꿈을 천국으로 상정합니다. 이 이야기는 인간을 죄와 씨름하는 존재로 소개합니다. 이것이 인간과 세상을 소개하는 성경의 방식입니까?
저를 포함한 설교자들은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에 대한 근거구절로 제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 자신의 주장이 정당하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늘 되새겨 보고 다시 묵상하면서 그 진정한 의미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이런 작업을 통해서만 우리는 성경말씀이 우리의 새로운 의복이 되어 우리를 빛나게 하기도 하고 따뜻하게 감싸주기도 할 것입니다. 낡은 옷과 해어진 옷 또는 작은 옷으로는 우리를 제대로 보호할 수도 없고 빛나게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이야기일진대 그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세계관과 인생관이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인간은 하늘에서 와서 이 세상에 잠깐 살다가 다시 하늘로 올라간다고 이해한다고 합시다. 그 사람에게 이 세상은 잠시 머물다 갈 나그네의 여관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인간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이 세상을 맡아 관리할 대리인이며 왕이자 농부라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이 세상은 자기가 가꿀 포도원이며 왕국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인이며 그 죄 때문에 결국 스스로의 힘으로는 어떤 선한 일도 할 수 없다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인간은 구제불능의 존재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지혜와 은총을 받아 그에게 주어진 구역을 생명으로 충만하게 관리하라는 임무를 맡은 존재라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인간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인간은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달을 뿐이라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죄인임을 깨달으라고 율법을 주신 분이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율법이 지혜롭게 하며 명철하게 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을 보여주는 등불과 같다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하나님은 율법을 선물로 주신 분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죄를 회개하면 용서받는다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사함과 별 관련이 없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예수님의 십자가가 어린 양의 피처럼 자기 백성을 깨끗하게 한다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죄사함을 먼저 선포하시고 돌아오라고 초대하시는 분입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죄사함을 통해 회개하여 구원받는 것을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에게 구원이란 죽은 후에 천당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죄사함과 회개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살 수 있는 권리와 자격을 회복한 것이라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구원이란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위해 계획하신 참 인간의 삶을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구약성경의 이야기를 감안하지 않고 하나님이 예수님의 피로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단지 죄를 용서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구약성경의 이야기에서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스스로 저버리고 포로된 상태에 빠진 존재임을 깨닫는다면, 그에게 예수님의 피는 그를 포로생활에서 해방하여 다시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를 붙들 수 있도록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능력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늘로 올라가셨으므로 우리를 데려가시려고 다시 오신다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신앙은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예수님이 하늘에서 하나님 오른쪽 보좌에 앉으셨으므로 이제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이시라고 이해한다면, 그에게 신앙은 예수님이 보내주시는 성령을 힘입어 주님의 일을 이 땅에서 실천하는 사명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성령을 단지 은사로만 이해한다면, 그에게 성령은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 받아야 할 조건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성경을 읽은 후에, 성령을 예수님이 하나님께 가서 보내주시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그에게 성령은 예수님이 만국을 다스리시는 분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이처럼 성경을 읽고 나서 어떤 이야기로 이해하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른 이야기는 그 사람을 이끌어 가는 지도가 됩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이야기가 그 사람의 운명이듯이, 신앙인이 성경을 읽고 나서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의 운명이 결정됩니다. 어떤 사람의 운명은 새로운 길을 개척해 나가는 모험이지만, 어떤 사람의 운명은 자신을 가두는 족쇄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마음 속 이야기를 갈고 닦아서 인생과 세상을 새로운 눈을 바라보고 더 나은 삶, 더 좋은 삶, 더 형통한 삶을 위한 길과 지혜를 찾는 과정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죄사함과 회개에 대하여 이런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 죄사함을 받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죄사함을 받은 후에 회개합니까? 이 질문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과 유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예루살렘으로부터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소식이 죄사함과 회개라고 하셨다면 그것은 분명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 이야기를 먼저 이해하고 그 위에서 죄사함과 회개를 생각해 본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리고 그것이 모든 민족들에게 죄사함과 회개를 위한 복음이 된다면,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과 부활이 어린 양의 화목제물처럼 만인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죄사함의 선물이 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라고 우리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경 이야기에 따르면 인간의 비극적인 운명과 포로상태는 죄로 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은 인간의 운명을 바꾸는 조건이며 포로상태에서 자유와 해방을 주는 조건이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처지가 포로상태와 같다는 것을 깨닫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죄사함을 의미하는 것임을 깨달은 사람에게는 이 소식이 삶을 돌이킬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그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는 삶을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누가복음 24장 47절의 단어 회개를 ‘완전히 새롭게 된 삶’(a total life-change)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죄사함이 가져다주는 것이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repentance for forgiveness of sins)로 옮긴 성경은 New American Standard Bible(NASB, NIV)이지만, 다른 많은 신약성경 사본(MSS)은 이 부분을 ‘회개와 죄사함’(Repentance and forgiveness)라고 옮겼습니다(RSV, NKJV 등등).
저는 오늘 한 사람의 세계관이 어떻게 가정과 국가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하여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으면서 사람들이 나름대로 이해하는 생각들이 어떻게 다를 수 있는지 비교해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둘로 나누는 일은 지나친 단순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둘로 나누어 생각해 보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점검해 볼 수 있게 하는 장점이 있습니다.
특별히 오늘 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죄사함과 회개의 복음이 어떤 의미인지에 대하여 저의 생각을 나누었습니다. 이 주제는 더 큰 이야기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때 구원파가 주장하는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 왜 그렇게 좁은 생각인지를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복음이라고 제시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더 풍성하고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걸어야 할 구도의 길 중에 하나입니다.
<끝>.
참고: 예수님이 풀어주신 구약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