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북방선교 -- 전 미주장신대총장 김인수목사.
만주 선교는 감리교회에서도 장로교회와 같이 시작하였다. 1908년 9월 제12회 남감리회 선 교 연회는 간도 선교를 결정하고 같은 해 이화춘(李和春-주, 1895엘라싱 전도, 이화실 형제? 1907 간도김영진, 김규면,1908 최성업, 이종근, 이종만, 장진규) 전도사 와 매서인 2명을 북간도에서 용 정을 중심으로 선교 사업을 시작 하여 많은 선교의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후에 장·감 선교지 분할 협정에 따라 이 지역을 캐나다 장 로교회에 넘겨주고 이곳을 떠났 다. 이후 1919년 배형식(裵亨湜) 목사가 현지를 시찰하였고, 이듬 해 양주삼 목사와 선교사 크램 (W.G.Cram, 奇義男)이 현지를 시 찰한 후에 만주 선교를 다시 시작 하기로 결의하고, 1921년 정재덕 (鄭在德), 최수영(崔壽永) 목사를 파송하여 선교를 재개하였다. 미국 감리회(북감리회)에서도 만주 선교를 결정하고 1910년 5월 한국 연회에서 손정도(孫貞 道) 목사를 북만주에 파송하여 전도케 하였는데 1912년 ‘가쯔라 수상 암살음모사건’에 연루되어 국내로 압송되는 바람에 중지되 었다. 그 후 1918년 내외국 선교 회가 조직되면서 배형식(裵亨植) 목사를 파송하여 만주선교를 재 개하였다. 그러나 1930년 미국 감 리회와 남감리회가 통합되는 계 기로 이듬해 12월에 만주 선교 연 회가 조직되어 감리교회의 만주 교회들은 행정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되었다. 넓은 만주 지역을 장·감 양 교 파가 함께 선교하는 과정에서 중 첩되는 경우가 발생하자 두 교회 는 1924년 선교 지역을 분할하기 로 합의하였고, 1924년에는 장·감 협의회를 조직하고 전도, 교육, 청 년 사업 등의 협조가 이루어졌다. 1939년 9월에는 일제의 교회 통합 정책에 따라 장로교계 재 만 한국인교회들이 ‘전만야소교 장로회연합회’(全滿耶蘇敎長老 會聯合會)로 통합되었다. 그 산하 에 영구(營口), 안동(安東), 화북( 華北)노회가 증설되었고, 1942년 만주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만주 조선기독교회’로 통합되어 일제 의 통제 하에 들어갔다. 해방 이 후 중국과 이북이 공산화되면서 만주의 모든 노회들은 자연히 소 멸되고 말았다. 만주 지역은 기독교 활동이 무 척 활발한 곳이기도 하였지만 이 지역교회들은 이 지역에서 활동 하던 독립투사들과 독립군들을 음, 양으로 도와주고 활동할 수 있는 은신처도 제공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교회 들의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은 그 어느 곳보다 더욱 강렬하였다. 만주 선교 역사에 있어서 봉천 신학교 문제도 언급하고 지나야 한다. 만주국이 형성되고 이에 따 라 만주국 조선기독교연맹이 결 성되자 자연히 교역자 양성을 위 한 신학교 설립문제가 제기되었 다. 이에 따라 봉천에 봉천신학교 를 세우게 되었다. 먼저 서탑교회 안에서 개교되어 교장에 정상인 목사, 교수로는 신사참배를 피해 도피한 박형룡, 박윤선, 그리고 일본인 국지일랑(菊池一郞) 등이 었다. 8·15 해방까지 3회 졸업생 을 배출하였다. 몽골에까지 흘러들어 간 동포 들과 몽골인들을 위한 한국 교회 의 선교는 1925년 감리교회의 최 성모(崔聖模) 목사에 의해 시작 되었다. 그는 어려움 속에 선교를 계속하여 그가 그곳에 들어갔던 1925년에 내몽골(內蒙古)의 백음 태래(白音太來)에 화흥교회(華興 敎會)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최목 사는 이곳에서 선교를 계속하지 못하고 귀국하였으므로 일시 중 지되었다. 다음으로는 침례교회 목사 이 현태(李賢泰)는 몽골 선교를 위 해 목숨을 바친 순교자이다. 그 는 침례교신학교에서 공부하고 19세에 러시아 침례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러시아 교회 가 공산당에 의해 해산된 뒤 무 소속 독립 전도자로 만주, 몽골 땅에서 22년간 조선, 만주, 몽골 3족에게 복음을 전하고 30여 곳 에 교회를 설립하는 등, 몽골 전 도의 사명을 띠고 한국인 방범룡( 方範龍)과 중국인 이달고탁(李達 古鐸)과 함께 몽골인 전도를 시작 하였다. 그는 몽골 지방으로 이주 하여 그곳에 살면서 전도하여 신 자 400명에 예배 처소 4, 5처를 세 우고 성경학원을 세워 전도인 양 성에 힘썼다. 이 목사는 독립 선교사로 선교 하였기에 재정적 후원자가 없어 무척 핍절한 상태에서 말할 수 없 는 고통을 당하면서 전도하였다. 부인과 자녀들이 기아로 인한 영 양부족으로 결국 아이는 굶어 죽 고 말았다. 몽골인들의 위협과 도 적의 위험 속에서 마지막까지 전 도하다가 1938년 10월 몽골인에 게 맞아 병석에 누웠다. 그 후 이 목사는 자기가 입은 옷을 벗어 가 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몽골 전도를 위해 기도하면서 선교지 몽골 땅에 그 시신을 묻었다. 그 러나 그가 어느 교단에도 속해 있 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남겨둔 부 인과 자녀들은 아무도 돌보아 주 는 사람이 없었다. 고 김린서 목 사는 한탄하는 글을 남겼다. 그 후 동아기독교회는 이충신(李忠 臣) 등을 보내어 일제 말엽까지 계속 선교 하였다. 1935년에는 내몽골과 열하(熱 河)에 있는 동포들이 장로교 총회 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였으므 로, 총회는 1935년 의산노회(義山 老會)에 선교를 지시하였고, 의산 노회는 이듬해 의산노회에서 분 립한 봉천노회를 통해 조보근(趙 普根) 목사를 내몽골에 파송, 전 도케 하였다. 그는 통요(通遼, 퉁 랴오)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여 많은 결실을 얻었다. 그러나 몽골 에 설립된 교회들은 1941년 만주 기독교연맹에 흡수되었다. 몽골 선교는 중국이 공산화되 면서 자연히 소멸되었고, 반세기 가 지난 후 중국이 개방 정책을 펴 면서, 이제는 조금씩 몽골 땅에도 다시 선교의 길이 열려 우리 선교 사들이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김 인 수 목사 전 미주장신대 총장 초
첫댓글 장로교 감리교에서 처음 만주간도 전도인으로 언급한이가 이화춘인데 이분은 우리 동아기독교의 공주간경 지역에서 첫 침례자인 지병석과 제씨가 전도의 열매로 얻은 장기영, 나오미부부와 이화춘, 이화실 형제?? 중의 한분이다.
거기에다 용정은 우리 침례교의 성지 같은 곳으로 포항중앙침례교회의 선조이신 김영진목사님과 그형제들 김영국감로, 김영관목사(침례교 4대 총회장) 제씨가 1907년 충청도 칠산의김경춘, 단양 김재형의 전도에 의해 믿음을 받아들인 곳이고,
1908에는 펜위익선교사가 직접 최성업, 이종근(5대 감목), 이종만, 장진규 제씨를 전도 하였다.
교사 최성업목사는 나의 이모부, 김영국감로는 고모의 시부이시고,
김영국, 김영진목사는 1932년 용정 종성골 교회에서 공산당에 의해 탈피 순교하신분들이다.
이현태교사는 전북익산 망성면 신작리분으로 우리 침례교역사에는 분명하게 우리의 교사라고 기록이 남아있다,
재산을 팔아 2번에 걸쳐 몽골로 이주 하였다,
순교후 '그 후 그의 처자만 남아있어 몇해동안 선교를 계속하였었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참고로 울릉도정동에는 1909년에 김석규, 연해주역시 같은 해에 최성업에의해 시작되었다,
그 유명한 연해주 신흥동에도 1910년에 박윤근이 그 첫 기록으로 나와 있다.
이충신선교사가 1941년도 5월 4일 와방시라는 곳에서 찍은 기념사진이 안희열저 말콤펜익 56p에 있는데 사진의 출처가 궁금하다.
사실 모든 기록이 1964년 김용해목사에 쓰여진 침례회사에 의존하는데,
실제로 펜위익선교사의 자서전의 기록에 의해 훨씬 앞당겨질수도 있다.
어떤 사람이 전도를 받거나 침례를 받았을 경우 이미 그 전도가 들어가서 활동을 하고 있을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