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신앙의 표상, 로제타 셔우드 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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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타 홀과 두자녀
윌리엄 제임스 홀(William James Hall)과 로제타 셔우드 홀(Rosetta Sherwood Hall)은
복음의 불모지였던 조선에 의료 선교사로 왔다. 홀 선교사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891년에 한반도로 들어와 평양을 거점으로 의료 선교에 삶을 불태웠다.
그런 중 청일전쟁이 발발하자, 부상자 치료에 전념한 윌리엄 제임스 홀 선교사는
전염병에 걸려 1894년 11월 24일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시에 로제타 홀은 29세였고 결혼한 지 2년5개월 만의 일이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로제타 홀은 갑자기 당한 슬픔 앞에 견딜 수 없어 1894년 12월에
두 살 난 아들과 뱃속에 유복자를 품고 잠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남편 홀 선교사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그가 설립한 평양남산현교회는 한국에서 가장 큰 감리교회가 되었고,
장대현교회와 더불어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시키는 모태가 되었다.
로제타 홀은 미국으로 돌아간 지 3년이 되는 1897년에 남편이 생명을 바쳐 사랑했던 조선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평양을 거점으로 광혜여원을 설립해 부녀자들과 아동을 위한 의료 사업에 착수했고
한편으로 맹인 교육도 실시했다. 남편이 남겨 둔 몫까지 다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헌신했다.
애석하게도 평양 선교 사역 중에 사랑하는 딸마저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로제타 홀은 슬픔을 뒤로 하고
남편과 딸이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조선의 평양과 서울에서 남편이 다하지 못한 사역까지 너무도 훌륭히 감당해 냈다.
지금은 사학의 명문인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으로 발전한 최초의 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한 것도 로제타 홀이었다.
그녀의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은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의료 선교사로 한반도에 들어와 해주에 최초의 결핵 전문 요양원을 설립해 죽어 가던 영혼들을 살리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우리나라에 '크리스마스실'을 처음 도입한 사람도 셔우드 홀 선교사였다,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교회의 기적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피 묻은 복음을 가슴에 품고
오직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해 생명을 바쳐 희생한 로제타 홀과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복음의 불모지였던 조선에 남아 일생 동안 흔들리지 않고
이 땅에 복음을 뿌린 로제타 홀은 이 시대에 우리 모두의 표상이다!
박용규 /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교의 피
서울에서 선교사인 아버지 윌리엄 제임스 홀(W.J. Hall)과 어머니 로제타 셔우드 홀(R.S. Hall)의
장남으로 태어난 아들 셔우드 홀(Sherwood Hall, 1893. 11. 10~1991. 4. 5, 한국명 하락(賀樂))도
부모님의 조선 사랑을 이어갔다. 어린시절 그의 놀이 상대는 거의가 조선아이들로
아이들에게서 조선놀이를 배웠고, 그들처럼 행동했으며, 사고방식도 조선 사람과 다름이 없었다.
13세 되던 1906년 8월 원산의 캐나다 의료선교사인 하디(R.A. Hardie)를 초청하여
평양의 남산현교회에서 예배하던 중 큰 감동을 받고 인생의 목표를 바꿨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영적인 힘이 없다면 수행하기 어렵다. 기억하라. 이러한 영적인 힘은 계속적인
기도로만 얻어질 수 있다. 이때 우리의 목적은 인간의 영광으로부터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 초점이 바뀌어진다."
부친과 같은 조선의 의료선교사였던 닥터 하디의 설교가 비수처럼 소년의 가슴에 꽂혔다.
"나도 저분처럼, 아니 우리 부모님처럼 의료선교사가 되어 조선으로 돌아와 일하리라."
1900 년 평양외국인학교가 설립되자 첫 입학생으로 들어가 1908년까지 수학했다. 1911년
본국으로 돌아가 매사추세츠 주의 마운트허몬학교에 입학, 1915년 졸업.
같은 해 오하이오 주에 있는 마운트유니온대학에 진학하여 1919년 졸업하였다.
셔우드는 서울과 평양에서 자라면서 한국인이 결핵으로 젊은이와 어린이들까지 죽는 것을 보았고
의료선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하여 캐나다의 토론토대학교 의과대학에서 흉부질환과 폐결핵을 전공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졸업 1년 전 같은 의과대학 출신의 산부인과 전공 여의사 마리안 버텀리(Marian Bottomly)와
결혼하여 아내와 함께 1926년 4월19일 선교를 위해 한국에 왔다. 부부는 곧 해주 구세병원(일명 노튼기념병원)에
부임해 의료선교를 시작했다. 또한 해주 남학교인 의창학교의 교장직을 겸임하였다.
이 엄청난 책임 앞에 셔우드는 깊은 고독감과 공포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이때 마음속 깊은 데서 들리는 소리가 있었다.
"너는 지금 홀로 서 있는 게 아니다. 너의 주님이 도와주시고 너와 함께 계시지 않느냐?"
이 순간 그는 자신을 얻었고 확신을 갖고 앞으로 나갈 수 있는 용기가 생겼다.
여러 방면으로 모금운동을 하면서 어릴 때부터 꿈꾸어 오던 결핵요양원 설립을 추진해
어머니와 선교부의 적극적인 후원을 얻어 한국 최초의 결핵요양원인 해주 구세요양원을 건립하고
1928년 10월27일에 헌당식을 거행 했다.
또한 요양원 안에 결핵위생학교를 설립, 결핵퇴치를 위한 제도적인 교육도 실시했다.
1930년 6월27일 그는 아내와 함께 안식년으로 귀국하여 감리교 선교부의 소개로 미국에서 크리스마스 씰의 창안자
비셀(Emily P. Bissell) 여사를 만나 크리스마스 씰 운동에 대한 정보를 얻고 돌아왔으며 총독부 당국의 협조를 얻어
1932년 크리스마스 때 한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의 새 기원을 마련했다.
1938 년 두 번째 안식년 휴가를 얻어 본국에 갔다가 1939년 가을에 돌아왔으나 국내 사정은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인해 선교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1940년 8월 화진포 그의 별장에서 영국 신부 캐럴을
만나고 동해안지역 사진을 촬영했다는 혐의로 간첩 누명을 쓰고 일본의 재판에 회부되어,10월 재판에서
3개월 징역형이나 1천달러의 벌금형이 언도되었고 강제로 조선을 떠나야 했다.
그는 결국 병원 일을 한국인 의사 문창모에게 맡기고 1940년 11월 한국을 떠났다. 선교본부의 명으로
인도에 부임하여, 파키스탄 접경인 마다(Madar)에 있는 마다 유니온요양원에서 23년간 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크리스마스 씰을 시작하였고 결핵퇴치운동을 하였다. 1963년 은퇴한 후 인도 정부의 표창을 받았으며
귀국 길에 한국에 들러 대한결핵협회에서도 금메달을 받았다. 은퇴 후 캐나다에 머물면서
자선의사로 봉사하며 여생을 보냈다. 1991년 별세하여 양화진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