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 (디도서 3:9-15)
<설교>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에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증거하기 위해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세상이 비록 하나님에 대해 자기 멋대로 상상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이 오신 이후로부터는 예수님의 말씀과 그 행동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보여주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이 세상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외치니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과 마음은 외면한 채, 오직 자신의 취향을 따라 종교생활을 하는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애당초 세상의 마음에 들 수 없는 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치관과 세상의 가치관은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존 세상의 가치관에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말씀 하나하나는 듣기에도 괴로운 걸림돌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이 예수님을 칭송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상상하는 예수상을 하나 마음에 조각하고 그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내 속에 조각되어진 내가 원하는 예수 상이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에 나의 연약함을 담당하시고 모든 죄를 짊어지기 위해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으로 새롭게 세워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굳게 선 나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산 나를 소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은 왜 예수님을 믿고자 하십니까? 왜 십자가에서 피 흘리고 죽으신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십니까? 신자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자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피 흘리고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주신 영생이 너무 귀하고 가치 있기 때문입니다. 영생이 너무 귀해서 세상의 것들은 헛된 것으로 보여지기에 세상에는 내가 따라가야 할 길이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내 길이 되심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따르고자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신자입니다.
8절을 보면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는 말을 합니다. 사도가 말한 미쁘신 말이 어떤 내용의 말이었습니까? 3절부터 말한 대로 우리가 어리석고 순종하지 않고 속은 자로서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하던 자리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입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풍성하게 부어주심으로 그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고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굳세게 말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죄인이며 하나님의 원수로 행하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나타났다는 이 사실만을 굳세게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여러분을 살리는 진리임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 어떤 말보다도 사도가 전한 이 말만을 전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므로 신자가 끝까지 거부해야 하는 말은 인간의 공로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9절을 보면 사도는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왜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이 무익한 것이고 헛된 것입니까? 그것은 그 모든 것 중심에 인간의 공로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공로는 의가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공로가 충돌함으로써 변론이 발생하고, 족보를 따짐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고 율법을 지키는 행위를 자신의 의로 삼고자 하는 모든 것은, 의가 될 수 없는 것이기에 전혀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공로를 높이고자 하는 것이 무익하고 헛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자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되어집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우리에게 의가 되어짐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바 된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는 오히려 예수님의 의를 가리는 방해물일 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인간의 공로를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예 처음부터 예수님의 공로도, 피의 은혜도 믿지 않는 증거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처럼 무익하고 헛된 것을 높이는 자들을 이단이라고 말합니다. 10절을 보면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 하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말한 이단은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신 예수님이 아닌 인간의 공로를 높이는 무리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 주어지는 복은 예수님이 가신 길에 참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이 길을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예수님을 믿기는 하되 예수님이 가신 길은 피하고 싶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 덕분에 천국가고 복을 얻는 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일까요?
복음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알게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가신 십자가의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가실 때 기쁨으로 순종하게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왜곡해서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살면 예수님이 복을 주셔서 세상에서 만사형통하게 하시고 원하는 것을 이루게 하신다고 외치는 것이 곧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이단에 속한 사람들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가는 길에 결코 함께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가야 할 길은 예수님이 가신 길이요 그 길만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세상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알게 된 신자는 이미 가치관이 새롭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과는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세상에 그렇게 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는 참으로 귀한 관계입니다. 같은 교회를 출석하는 관계가 아니라 예수님의 같은 피를 나눈 형제이고 예수님의 같은 생명에 참여한 관계입니다. 한 몸으로 모였으며 지체로 불리는 관계인 것입니다. 이러한 지체가 모여서 할 일이 무엇일까요? 구원이 되시고 생명이 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나누고 함께 기뻐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혹시 믿음이 연약한 지체가 있을 때는 비판하기보다는 그 약함을 나의 약함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위해 권고하고 돕고 기도하는 것이 지체의 관계가 아닐까요?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 예수님의 용서의 기쁨이 교회에 신자가 서로 모였을 때 같은 기쁨으로 자리하게 되고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찬송하게 될 때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의 몸의 관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에게 그리스도 안에 참여된 관계로 모이는 신자는 서로에게 귀한 존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귀한 형제를 어떻게 비판하고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형제를 아무 생각 없이 비방하고 비판하게 된다면 그것은 내 속에 예수님의 용서가 귀한 은혜와 긍휼로 자리하지 않기 때문임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 역시 그리스도 안에서 지체된 형제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보이고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사도는 교법사 세나와 아볼로를 디도에게 보내어 디도에게 세나와 아볼로로 하여금 궁핍함이 없게 하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하라는 이유는 14절에서 말씀합니다.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바울이 말하는 우리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된 형제들을 말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우리 사람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된 관계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들이 형제가 서로 사랑하며 자원하여 돕는 좋은 일을 배우게 하기 위해 디도에게 세나와 아볼로를 궁핍함이 없게 대접하라고 한 것입니다. 형제가 서로 사랑하고 돕는 믿음의 열매가 없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결국 신자가 서로 사랑하고 돕고 어려운 형제에게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도 단지 그 당사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 있는 형제로 하여금 좋은 일에 힘쓰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고, 믿음의 열매가 있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15절을 보면 사도는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찌어다”는 문안으로 서신을 마치고 있습니다. 사도의 문안은 은혜가 모든 형제들에게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 신자라면 은혜가 있기를 원하는 문안이야 말로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임을 알 것입니다.
디도서를 마치면서 사도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는 우리가 어떤 자였는가를 알기를 원합니다. 즉 죄인이었으며 하나님의 원수된 자로 존재했던 것이 우리들의 본래 모습이었음을 알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 모습을 알아야 우리에게 나타난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우리의 어떤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오직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따라 주어진 것입니다. 그로 인해 죄 사함을 얻고 의롭다 함을 입어서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굳세게 붙들 것을 권고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와 의를 내세우는 거짓 사도들의 교훈에 이끌리지 말고, 십자가의 은혜를 훼방하는 이단을 멀리하면서 주님의 은혜 안에 머물기를 말합니다. 그것만이 신자에게 가장 귀하고 참된 인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이러한 진리를 아신다면,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귀함을 아신다면 여러분 역시 이 신실한 진리의 말씀을 나타내는 자로 살아가기를 주저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삶을 위해 여러분에게 그리스도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