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신의 작업실 벽 한 쪽에 붙어있는 글자다. 화가들의 작업실에는 가끔 그런 문구 하나씩이 걸려있다. 예를 들어 ‘정직’, ‘그림을 사랑할 것, 그림 앞에 오래 앉아 있을 것’ 등등이다. 나로서는 그런 문구를 슬쩍 엿보면서 그 작가의 인생관, 예술관 같은 것들을 응축해서 가늠해보는 편이다.
사명감 넘치는 화가
그는 일종의 사명감을 지니고 있는 듯 하다. 우리 국토와 자연에 대한 다소 애절한 사랑과 이 땅의 모든 문화유산과 전통에 대한 애착이 누구보다도 강한 그는 그 사랑하는 대상을 표현하고 지속시키는 일을 평생의 화업으로 삼은 이다. 그런 생각이야 많은 작가들도 가지고 있겠지만 이호신의 경우는 그 목적의식이 또렷하고 그 추구방법과 노력이 치밀하다. 그래서 늘상 감탄하듯이 그의 궤적을 돌아본다. 그는 동양화작가이다. 아니 그는 동양화, 한국화가 오늘날 가능한 지점을 묻고 이를 실천시켜나가는 것으로서의 그림을 그려나가는 동양화작가이다.
동양화를 통한 전통미술의 구현으로 가닥을 잡고 조선조의 겸재와 단원그림을 정점으로 삼으며 그 대상은 우리 자연과 문화유산으로 이루어진 것이 그의 그림이다. 그림 안에는 그 대상을 탐구하고 재현하며 이를 통해 한국미의 아름다움을 밝혀내는 한편 진정한 개인의 구도로서의 그림세계를 확립해나가고자 하는 의욕의 일단이 촘촘히 짜여져 있다. 그래서 그는 늘상 우리 문화, 미술을 공부하며 그 공부를 답사와 사생을 통해 자신의 몸으로 체득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게 국토순례와 깨달음, 그리기와 쓰기의 반복적인 행위가 수행적인 차원에서 분리되지 않고 함께 이루어지고 나아간다. 그 결과물의 그의 그림과 책이다. 그는 몇 권의 뛰어난 책(그림책)을 냈다. 애초에 그의 그림 자체가 일종의 화첩처럼, 책처럼 이루어지고 있음도 흥미롭다.
이호신은 1985년부터 우리 국토를 답사하기 시작, 90년대 들어와서 본격화되었다. 홀로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국토의 풍경을 담아왔는데 이때 그의 눈에 들어온 대상이 예사롭지 않은 장소에 자리한 뭇 사찰의 풍경, 그 공간이다. 그는 한국적인 사찰 배치, 그러니까 한국인의 공간의식에 주목한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장소인 공간은 인간이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가설하고 부려놓으면서 삶을 영위하는 곳이다. 문화란 문화가 성립되고 그 문화권 속에 민족구성원들이 존재하기 위해서 서로가 공유하는 땅에 대한 자연과 관련된 인식소가 있어야 하는데 이는 쉽게 말해 공통된 공간 즉 유토피아에 대한 생각의 공유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땅은 편안한 거주지의 장소이자 자기 실현의 장이 되고 모험의 장소이자 동시에 심미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의 전통미술, 사찰 등은 바로 그러한 땅, 공간에 대한 표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호신은 계절에 따라 사찰 100여 군데를 그렸다. 사찰을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문화유산이란 측면에서 절을 보는 그는 절을 짓던 그 당시 사람들의 자연관을 헤아린다. 천 년 전의 안목은 여전히 놀랍고 경이로워서 그 안에는 자연관, 풍수 등이 자연스레 녹아있고 살아있는 문화유산이 있다. 한국의 전통 사찰은 그 자체로 문화유산의 보고이자 박물관이다. 불교미술의 보고이자 한국미술의 원형이 숨쉬는 곳이다. 그는 가능한 옛 사찰의 원형이 온전히 보존된 장소를 찾는다. 그곳은 고미(古美)가 여전한 곳이자 자연과 인공이 숨쉬
는 곳, 역사성과 시간성을 함축한 곳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선조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유일한 종교요 철학이었으며 생활 그 자체였다. 조상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통하여 삶의 의미를 설계하였으며, 불교를 통하여 세계와 우주의 비밀을 풀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불교는 한국의 자존심, 그 정신의 밑바탕을 관통하는 핵심적 주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절 집의 모든 것들은 그저 아무런 이유없이 존재하진 않는다. 그런가하면 사찰에는 부처님의 뜻만이 아니라 오랜 세월 바라왔던 우리 민중의 염원과 민속, 무속, 도교사상과 풍수사상 등도 모두 담겨있다. 그래서 사찰, 사찰이 놓인 공간은 그 자체로 박물관이자 전통문화와 미술의 학습장이기도 하다. 이호신이 사찰을 그림에 담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가 그린 이 ‘가람(伽藍)의 진경(眞景)’은 산수와 조화를 이룬 곳에 자리잡고 있어 대자연과 고건축의 아름다움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곳이자 항시 살아 숨쉬는 겨레의 유산을 보여준다. 자연과 인공이 조화된 가람은 경배의 도량이자 누구나 찾는 마음의 안식처로 저마다 창건의지를 지닌 곳이자 당대의 안목과 지혜가 빚은 뛰어난 건축문화의 진수이다. 특히 한국인의 자연관, 생명관, 나아가 풍수사상을 우선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호신의 가람풍경은 바로 그런 장면을 총체적인 시각의 조합 속에서 보여준다.
옛 사찰에서 감탄하는 것은 그것이 놓인 기막힌 장소이다. 흔히 풍수가 절묘한 곳이다. 풍수란 ‘자연과 인간의 만남의 미학’이다. 인간의 마음가치와 자연가치를 잘 융합하여 이루어내는 자연과의 합일인 것이다. 불교사원이 ‘명산’에 들어선 것은 독특한 산악풍토와 여기서 생겨난 산악 숭배신앙이 배경이 되었다. 고대인들에게 명산은 신이 머물고 신령함이 깃들여 있는 곳이었는데, 불교가 들어오면서 그 산은 이제 불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때 들어선 명산의 사찰들은 불교와 풍수가 만났기보다는 고대의 산악 신앙 혹은 영지(靈地)관념이 불교와 만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여기서 영지관념이란 산천이 수려한 땅에 신령한 기운이 깃들여 있다는 전래의 생각이다. 신라 말 승려 도선 국사(827-898)는 불교와 풍수를 결합하여 ‘국토선(國土禪)’이라는 사상을 창안하였고 그 실천방안은 사탑비보(寺塔裨補)였다.
‘예술’이란 깨달음 얻기위해 구도정신으로 붓잡아
사탑비보란 불 보살의 힘으로 터의 지리(풍수)적인 부족함과 모자람을 보완하는 것이다. 도선의 국토선과 비보사탑설은 마음과 몸의 가치에 대한 풍수의 지혜를 융합하여 창안한 것으로서, 국토의 총체적인 성불(成佛)과 산천만다라(山川曼茶羅)를 의도한 것이다.
그것은 겨레와 국토환경의 상생相生과 조화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문화 생태사상이었고, 국토전체의 균형적인 발전을 이루려는 일종의 국토계획론이었다. 산천국토와 계레 얼과의 관계는 마치 사람에게서 몸과 마음의 관계와 같다. 국토에는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현수법장(賢首法藏)은 초목국토가 모두 성불할 수 있다고 하였고, 선 사상에서도 ‘무정물성불’을 말하고 있다. 이 사상은 불교적 환경사상의 극치이다.
우리 땅과 산천이 부처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호신은 그렇게 우리의 사찰을 마치 수행납자마냥 떠돌아다녔다. 스님이 수행을 위해서라면 작가란 존재도 예술이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의 차원에서 그림을 그리고 삶을 산다.
우리 산천의 곳곳에 자리한 가람을 찾아 배낭을 메고 열차와 버스로 인연이 닿은 절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리고 일기를 쓰기를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그 기록을 엮어 책을 내기도 했다. 좬풍경소리에 귀를 씻고좭 (해들누리,2001) 기왕에 사찰관련 답사기나 소개의 책자들이 많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스스로 찾아다니며 직접 그림을 그리고 이를 책자화 시킨 이 경우는 드물고 소중하다.
그러한 답사를 통해 살펴본 가람은 각 지역의 산세와 물의 흐름, 건축의 특성과 계절미가 주는 독특한 산사의 분위기로 저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아름다움이다. 그런가하면 치열한 구도의 삶을 살다 간 선사(禪師)들의 자취를 만나기도 하고 아울러 천년 사찰은 자연의 지형과 지세를 아우르는 풍수의 묘미와 가람배치를 지니고 있어 우리 산천의 원형을 살피고 우리 시각으로 그려보는 좋은 대상으로서의 사례이자 체험적인 공부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소재, 그러니까 그는 우리 그림을 그리기 위한 가장 좋은 사례였던 것이다. 아울러 그림으로 보존시키고
그 뜻을 헤아리고 원형을 간직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옛 사찰들이 오늘날 무분별하게 훼손당하고 소멸되어 가고 있다는 안타까움에서이다.
자신성찰하며 허욕도 버려
그래서 가람의 전경을 통해 산수와 조화로운 도량이 살펴지고 사찰문화의 진수인 우수한 건축을 통해 오늘날 무분별한 자연훼손과 삶의 터전을 되돌아보았으면 하는 바램을 그는 그림으로 전하고자 한다. 그와 함께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에서 사찰그림은 무슨 명분보다 도심에 찌든 작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비우고 산천과 도량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허욕을 버리는 길이기도 했단다. 상생적 삶의 다양성을 체득하고 예술가와 수행자는 삶의 본질과 진리를 추구하는 길벗이라는 생각, 비구의 걸사정신과 보살의 자비정신으로 작품과 생활을 이어가는 방편 및 생활철학 역시 그간의 답사와 기행, 그림 그리기를 통해 깨달은 것들이다.
주요작품 감상
<왼쪽그림>조계산 선암사(164*99cm, 2000) : 선암사의 도량은 만다라 형식이라 전경 파악이 쉽지 않은데 이를 성공적으로 형상화시킨 그림이다. 은은하고 담백한 먹빛과 한지의 색채가 어우러져 소박하고 야취가 짙은 산야와 적조하며 기품있는 가람의 특성이 잘 드러나 있다
<오른쪽그림>운주사 천불천탑(225.5*115cm, 1993) : 화순 운주사는 기묘한 사찰이다. 마구잡이로 제작된 듯한 불상들과 탑들, 벌렁 드러누워 있는 와불
은 그것 자체로 한국의 그 어느 사찰보다도 흥미롭고 인상적으로 자리매김된다. 그런 운주사의 전경을 한 눈에 가득 들어오게 그린 그림이다.
‘불교미술인을 찾아서’를 연재했던 장준석 평론가가 일신상의 이유로 연재를 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달부터는 박영택 평론가〈사진〉가 매월 한 번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박영택 평론가는 1963년생으로 성균관대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전공했습니다. 현재 경기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좬예술가로 산다는 것좭(마음산책)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