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초등학교와 호남비료공장의 숨은 역사 이야기
글/나천수
1. 역사의 흔적을 묻어둔 터 이야기
나주초등학교는 1907년에 신학문의 배움의 터로 시작을 했고, 호남비료공장(호비)은 우리나라 산업 발전사의 시작이란 점에서 양 지역의 터는 명당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학교란 인재를 배출하는 곳이라면 공장은 부를 창출하는 곳이다. 1960년대 가난했던 우리나라의 공업화 기틀로서 시작한 호비가 오늘날의 무역대국으로 국력을 신장 할 수 있는 모태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특히 나주지역 발전의 출발점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 지역의 터는 그야말로 명당 중에 명당이라 할 수 있다. 흔히들 지관들이 말하는 사람이 살만한 좋은 터를 양택이라 하고 죽어서 누울만한 좋은 땅을 음택이라 하여 살아서도 죽어서도 명당을 차지하려 한다. 혹여 산에 올라가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하면서 이 산속에 내가 집 짓고 살만한 위치를 찾아보면 대체로 그곳에는 묘가 있다. 글자의 뜻대로 해석하면 햇볕 있는 곳이 양택이고, 햇볕 없는 곳이 음택이 라는 뜻이다. 그러나 어느 묘지에 햇볕 들지 않은 묘가 있는가. 모두 다 양지바른 곳에 집 짓고 사람이 살만한 양지바른 땅에 묘를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은 양택과 음택은 같은 것이다. 과거 나주초등학교의 위치는 무학당으로서 죄인을 처형하는 장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을 양지바른 땅에 묻었으니, 나주초등 건너편 야산이었다. 수많은 사람이 운집하는 터이니 이 같은 명당 터가 어디 있겠는가. 수많은 영혼들이 모여든 곳이니 이 같은 명당 터가 어디 있겠는가. 명당 터는 반드시 명당 바람이 불어 사람이라면 귀인이 되고 땅이라면 큰 집이 들어서든지 돈을 불러 모우는 것이 된다. 나주초등학교 명당 터는 명당바람 때문인지 얼마나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었는지 셀 수 없다. 개교100주년인 2007년까지 2만여 명이 이 학교를 졸업하여, 정계, 경제계, 법조계 등 사회각계각층에 포진되어 국가와 지역발전에 힘쓰고 있다. 공동묘지라고 불렀던 명당 터는 해방 후 1960년대 가난한 나라를 부자나라로 만들어 21세기 무역대국 세계12위, 1인당 GNP 2만불을 달리도록 한 땅이 되었다. 그 땅이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차관으로 세운 공장, 나주호남비료공장이 들어서 80년대 기적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국가발전의 시발점이 되었기 때문이다.
2. 한국 공업화의 시발점 호남비료공장 건설배경
이승만 정권 시절인 1955년 10월8일 UN한국재건위원회(UNKRA)에서 인도 대표 메논(Menon)은 한국경제를 보고 “쓰레기통에서 과연 장미꽃이 피는가.”라고 혹평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를 취재한 영국 런던 타임즈의 사이몬즈 기자도 똑같은 말을 신문 헤드라인으로 썼다. 1960년 말 우리는 1인당 GNP 단돈 87달러였고, 외환보유고는 2,300만 달러에 불과하였다. 그러니 한국 땅에서 경제 재건을 기대하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 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혹평한 것이다. 1960년 4월19일 학생의거로 이승만 정권은 물러났으나, 사회 경제는 혼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1961년 5월16일 군사혁명으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선 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필자는 먼저 박정희 대통령의 역사평가에 있어서 정치적인 면과 경제적인 면을 나누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부분에서 경제사적인 부분만을 접근하고자 한다.
혁명정부가 혁명공약에서 밝힌 바와 같이 누대로 내려오는 가난을 물리치는 것인데, 국가경제발전의 자본력이 미약한 그 당시로서는 차관만이 방법이었다. 미국에 건너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손을 벌렸지만 차관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차관을 줄만한 나라를 선정한 것이 분단의 아픔을 같이하면서 2차 대전의 패전을 딛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룬 서독정부에 호소해 볼 것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서독 측에서 처음부터 우리나라에 투자나 경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도대체 우리나라 미래 경제에 희망을 찾아 볼 수 없었던 상황을 서독 정부는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정래혁 상공부 장관을 단장과 특별보좌관 백영훈(현 한국산업경제연구원 원장, 독일에서 경제학박사학위 받음) 등이 급조한 우리나라 국가개발 사업계획을 만들었던 바, (1) 나주비료공장 건설, (2) 인천 한국기계공장 확장, (3) 석탄공사 관산중장비, (4) 인천제철확장, (5)삼척 동양시멘트공장,(6)중소기업 기계공장 프로젝트였다. 여기에 소요되는 차관자금은 1억5천만 마르크였다. 서독 기업들은 그때서야 우리 측이 제시한 정부적 개발사업계획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 당시 서독 경제성 장관은 에르하르트 였다. 우리 정부의 경제사절단과 서독 경제성과의 마라톤 협상을 통해 우리 측에 제시한 사업계획을 서독정부가 모두 인정하고 1억5천만 마르크(약3,500만 달러)의 차관 승인을 받아 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서독측은 차관을 주되 담보 방안에 대해서 물었으나 그 당시 한국에 차관을 담보해 줄 어느 세계은행도 없었다. 그래서 양국 경제 전문가들이 착안해 낸 것이 광부와 간호부의 인력 파견으로 발생하는 인건비 3년치를 모두 서독은행에 예금한다는 조건으로 1억5천만 마르크를 차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하여 광부 5천명, 간호부 2천명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얼마나 못 살고 있다는 것을 반증 하듯 광부 5천명 모집에 약4만 명이 응시하여 경쟁률 8대1을 넘었으며, 그나마 대졸자들이 학력을 속이고 대거 파견되었으며, 간호사도 2천명 모집에 근 2만 명이 몰려들었던 것이다. 서독 루르 지방의 탄광 막장에는 우리나라 학사출신이 많았다. 그들이 받는 한달 보수는 4백마르크(1백달러)에서 7백마르크 정도였다. 많은 사람들이 시간외 근무를 자청하였고, 틈틈이 독일어를 배우고, 첨단기계 기술을 익히는데 노력하였다. 서독에서의 광부 간호사 직업은 3D업종으로 취급되어 독일인 인력 확보가 어려웠기 때문에 저개발국가의 값싼 인력을 불러다 쓰는 것이었다. 한국의 간호사는 환자들에게 헌신적인 봉사를 하여 독일 국민의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심어 나갔다. 이들 광부, 간호사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하여 그 후에도 2억 마르크에 달하는 제2차 경협을 얻어 낸 것이다.
상업차관이 결정되자 서독 기업들은 자사제품을 수출하기 위하여 경쟁적으로 나섰다. 너도 나도 한국시장 진출을 위한 각축전을 벌인 것이다. 이름 있는 서독기업들은 한국을 방문하여 새로운 기업 파트너를 찾게 되는데, 최초 사업은 독일 지멘스와 금성사가 합작한 전화 사업이다. 다음으로 한국을 찾아온 기업이 루루기(Lurugi)회사였다. 이 회사는 나주에 건설 중인 호남비료공장을 건설하는 자재공급 회사로 참여 했다. 아이젠버그사라는 유태계의 서독 중간상인(오퍼상)의 잘못된 상술에 의해 많은 문제점이 있었으나, 농촌 소득 향상에 요소비료 공장으로서 크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 후 많은 서독 기업들이 한국에 들어와 한독 경제협력의 발판을 만들어 나갔다. 1964년 한국인의 근면 성실성에 감동 받은 독일 정부는 동방의 작은 나라 박정희 대통령을 초청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서독의 선진지 현장연수와 파독 광부, 간호부 위로 격려차 서독을 방문하여 뤼브케 대통령, 에르하르트 수상을 면담하였다. 에르하르트는 경제성장관이었는데, 그 후 수상으로 당선되어 일하고 있었다. 에르하르트 수상은 한국 같은 후진국이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첫째, 고속도로 건설하라, 둘째, 철강산업 육성하라, 셋째, 석유산업 육성하라, 라인강의 기적을 한강에서 이룩하라고 조언하였다. 그 결과 차관 자금으로 경부고속도로 착공, 포항제철 착공, 여천 석유화학공단을 착공하였으니 초창기에는 이러한 사업들의 무용론으로 반대 시위도 많았으나 오늘의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SOC가 된 것은 사실이다. 독일인처럼 근검, 절약하는 정신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하자는 결심이 새마을 운동을 태동시킨 것이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반만년 긴 세월동안 가난이라는 꼬리표를 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인당 소득 100$달성에 무려 4600여년이 걸린 것이다. 1960년대 1인당 소득이 76$선이니 그 당시 필리핀은 170$, 태국은 220$과 대비하여 못 사는 정도가 상상할 만하다. 우리나라 해방 후의 경제 변화의 모습을 보면 - 해방 후 : 76$소득/1인 - 1959년 : 87$소득/1인, 외환보유고 2,300만$ - 1964년 100$/1인 소득 → 단군 이래 4600년 걸려 100$달성 - 1965년 : 국가적으로 1억$ 수출 달성 - 1971년 : 10억$ 수출 - 1977년 : 100억$ 수출, 1000$/1인 달성 - 1980년대 기적의 경제성장으로 이어져 - 1990년대 1인당 소득 1만$시대 진입하였으니,
과거 6.25 참전 해외 용사들의 말을 빌리면 한국의 경제성장은 기적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전후 50여 년 만에 세계무역 12권 국가로 당당히 설 수 있었던 그 원동력 내지는 씨앗이 무엇인가 돌이켜 보면, 서독으로 파견된 광부, 간호사의 피눈물 나는 봉급이 담보되어 얻어 온 최초의 독일 차관이라고 본다.
3. 호남비료공장 건설 기술자로 온 독일인 호만(Hohmann) 이야기
우리나라와 독일이 국교를 여는 것은 1883년 11월26일부터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1백년 한독교류사 가운데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사람은 호남비료공장 건설 기술자로 온 프리츠 호만(Fritz Hohmann, 1909-1982)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서독 카셀시에서 태어나 슈투트 가르트 공대를 졸업하고 여러 공장에서 기사로서 일 했으며, 독일정부의 기술감독, 기술고문을 역임했다. 그가 몇 사람의 독일인 기술자들과 함께 나주비료공장 건설의 기술자로 1959년에 한국으로 온 것이다. 부인과 자녀를 독일에 두고 왔기 때문에 루루기(Lurugi) 회사 직원으로서 비료공장을 건설 해주고 받은 봉급을 가족에게 보내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독일 기술자중에서 가장 마음이 깊었던 것인지 처음 한국 땅에 들어와 한국의 기술수준을 간파하고, 단순히 사회간접자본시설인 비료공장 건설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한국발전이 뒤진 것은 기술자 부족이라고 갈파하여 스스로 기술자를 양성해 내는 “인간 개발”사업을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호만의 의무나 책무도 아니다. 호만의 인생관이나 생활철학이 그를 한국의 청소년 지원 사업 하도록 하였을 것이다. 그가 한국에서 받는 봉급은 1백만원 정도였는데, 모든 수익을 불우한 한국 소년, 소녀를 위해 썼다. 오히려 독일에 있는 의사, 교사를 하던 자녀(2남3녀)들이 돈을 보내왔다. 필자가 올해 60살이다. 필자의 연령대층에서는 잘 알려진 호만과 김현도(당시 나주중2년) 학생과의 만남이다. 등산을 좋아했던 호만이 금성산 등산길에 나무를 하면서 영어를 공부하고 있던 가난한 김현도를 만난 것이다. 호만이 “Can you speak English?"라고 영어로 묻자 김현도가 ”Yes, I can speak English."라고 답하여 이것이 인연이 되어 호만의 도움으로 후일에 독일로 유학을 가서 뉘른베르크, 에르랑겐 대학에서 수학박사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호만은 직접 자기 집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청소년을 가르쳤다. 그리고 가르친 제자가 독일의 기술학교로 유학을 떠나자 이때부터 나주 유지들 내지는 교육계에서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1964년 9월 나주사람들이 호만을 돕자고 나섰다. 나주향교 일부를 무상으로 2년간 교육의 장소로 빌려 주었고 호만은 사재를 털어 강의실과 기숙사를 만들어 20여명의 학생을 수용하였다. 이 기술학원이 호만애암(好萬愛菴)이다. 이 뜻은 사랑의 암자인 것이다. 호만은 목사의 아들로서 기독교를 믿었으나 나주에 오면서 그 당시 나주 다보사 주지 우화(雨華, 일명 천진도인)스님과 절친한 우정이 싹터 불교를 좋아하게 되었고 불교와의 인연 때문에 애암이라 한 것 같다. 교육비는 일체 무료이며 기숙사비만 형편에 따라 5백원에서 2천원까지 내었으나 부족액은 호만이 충당하였다. 향교건물이나 호남비료 공작실을 이용하여 기술자 양성의 소식을 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1월에 호만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하면서 무엇을 더 도와 줄 것인가 물었다고 한다. 대답은 향교 건물을 좀더 오래 빌려 쓰도록 도와달라는 소박한 것이었다. 그 후 더욱 많은 청소년들이 호만애암 학교에 입학하여 향교시설로는 수용 할 수 없자, 호만은 서독정부에 원조신청을 하여 경제협력성으로부터 재정과 공작 실습 자재 지원을 받게 된다. 우리나라 측에서도 1965년에 정규고등기술학교로 문교부 인가를 받아 나주 산정동(현 나주공고 위치) 금성산 산록에 한독고등기술학교를 열게 된다. 그리고 나주를 중심으로 하여 여수, 마산, 광주, 해남, 안동 등 5개 지역에 호만애암 분교를 설립하였다. 호만은 혼자 호만애암을 모두 가르치고 인도 할 수가 없어 1966년도에 사위 삿세(Sasse)를 한국으로 불러들인다. 그리하여 장인과 사위가 힘 을 합하여 호만애암 기술교육에 열을 쏟아내는 것이다. 1965년 3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나주의 한독고등기술학교를 방문 하기도 하였다. 1967년 루루기 본사로부터 귀국명령을 받았으나 학교를 인수받아 운영할 한국인 후계자를 찾지 못해 회사 사표를 내고 한국에 귀화한 것이다. 1967년 11월 한국 국적을 얻을 때 신원 보증인으로 서명한 사람이 박정희 대통령이었고 신분에 대하여 공란으로 둔 것을 당시 법무부장관이 직접 “교육자”라고 써 넣었다고 한다. 호만의 한국 이름은 호만영부(好萬寧富)가 되었다.
그리고 나주의 학교가 자리를 잡아가고 학교 인수의 뜻을 밝힌 김혜자 여사에게 1968년도에 경영권을 넘겨주었다. 필자는 이때 이 학교 재단이 병설로 세운 버드실중학교 수학교사로 ‘72년도부터 2년간 재직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후 여수 등 타 지역 호만애암을 돌보며 1973년까지 국립경기공전, 영남대 공대 교수로 일하면서 한국의 젊은이를 독일로 보냈다.
1982년 그의 나이 73세의 노쇠한 몸을 가누기 힘들어 호만애암 제1회 졸업생 김규철에게 호만애암 학교를 맡기고 독일로 갔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 하여서인지 죽기 전에 부인의 묘소라도 가보고 싶어서인지 귀국을 서둘렀던 것이다. 그리고 독일에 간지 얼마 안 되어 1982년 3월17일 향년 73세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죽기 전에 나주의 땅에 묻어 달라고 사위 삿세에게 유언 하였다고 한다. 1982년 9월에 호만의 사위 삿세에 의해서 화장된 호만의 혼이 다시 한국에 온 것이다. 호만의 제자 500여 명 중에 200명은 외국에 체류하고 있으며 300명은 국내에서 활동 중 이라며, 그 중 많은 사람이 박사학위를 받았을 것이라고 호만의 제자였던 성남길(나주초등48회, 현 서울 한독교역상사 대표)이 증언하고 있다. 호만의 업적을 널리 기리고자 제자들이 모금하여 추모 기념비를 만들어 당초는 한독고등기술학교였던 그 위치에 건립 하려고 하였으나, 김혜자 여사가 인수했던 학교가 나주공업고등학교로 개칭되고 재단 이사장이 바뀌면서 학교 내 기념비 건립은 학교 측의 반대로 난항 겪게 된다. 그래서 호만과 다보사와의 옛정을 기반으로 다보사 내에 세우게 된 것이다. 필자가 이 글을 쓸 수 있도록 많은 자료와 증언을 해준 호만의 제자였던 남기봉(베르린대학 공학박사, 동신대 교수)씨의 말에 의하면 호만의 업적이 모두 그늘에 가려 빛을 못 보고 있다고 한다. 지역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국가 차원에서도 이 나라를 위해 일생을 마감하신 분들을 예우하는 것이 또 다른 훌륭한 봉사자를 낳을 수 있는 풍토가 된 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또한 독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제자가 15명이라고 말하였다. 1970년 귀국한 사위 삿세는 한국학 전공의 대학을 다녔다. 1975년 그가 대학에서 한국학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의 제목은 “계림유사에 나타난 고려방언”이니 이 정도면 한국사람 보다 더한 한국 사람이 된 것이다. 그는 2006년 9월 말까지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며 유럽 한국학협회장을 역임하다가 함부르크 대학에서 정년퇴임식을 마치자마자 한국으로 돌아 왔으니 제2의 호만애암 일을 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
이제 한국 사람보다 더 한국을 사랑했던 호만의 이야기를 끝내려 한다. 사람이 살다보면 모두 좋은 일만 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살다보면 실수도 하고 잘못도 하는 것이다. 호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왜 문화가 다른 한국생활에서 오점이 없었을 것 인가. 그러나 후진국 우리나라 사람에게 기술이 무엇인지를 몸소 가르쳐 준 분이다. 가난했던 한국 청소년들에게 사재를 털어 교육시키고 독일 유학을 보내어 “하면 된다”(can do sprit)는 꿈을 심어 주었다. 60년대 후진국의 늪에서 빠져 나오도록 불을 밝혀주신 그분의 업적을 햇빛 아래로 옮겨 놓은 것이 후세를 위한 교육이 아닌가. 아무도 오지 않은 금성산 기슭 음지에 서 있는 그분의 추모기념비를 나주시민 모두가 칭송 할 수 있는 공원이나 가로변으로 이설하여야 한다. 예수님도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 했을 때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 했듯이 남의 크고 작은 오점은 덮어주고 좋은 점을 돋보이게 하여야 좋은 세상 아닌가.
4. 호남비료공장 숨은 이야기
1955년 12월 호남비료주식회사(호비)를 창립하여 연산 8만5천톤 규모로 1958년 1월 서독 루루기 회사를 비롯한 5개회사의 콘소시엄(공동체)으로 건설계약을 체결하였다. 이 당시 이승만 정권은 호비 건설 전에 충주비료공장을 지을 때 미국회사에게 골탕을 먹었기 때문에 호비는 서독기술을 도입키로 하였고 민간업체로 하여금 건설토록 하였다. 경험이 없었던 민간업체 사장 이문환은 1960년 민간 주주(株主)간 의견대립, 민간주주의 자금 조달 등 주식공모에 차질이 생겨 공사가 중단되어 버렸던 것이다. 5.16후에 혁명정부는 “호남비료주식회사 정부인수에 관한 입법”조치를 완료하고 정부에서 직접 건설토록 하였다. 이 법이 혁명정부의 산업에 관한 입법 제1호가 되었다. 그리고 김재규 육군준장이 사장으로 내려왔다. 문제는 우리 측에 비료공장 건설의 전문 지식을 가진 자가 없어 건설자재 중간상인(오퍼상)인 아이젠버그사의 농간을 발견하지 못 한 것이다. 요소비료가 나오는 높은 조립탑을 콘크리트로 짓는 것도 문제였지만, 콘크리트 강도가 부족하여 부수고 다시 쌓는 등 건설 중에도 문제가 많았는데, 진짜 문제는 공장을 다지어 가동해 보니 비료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가 그 때 듣기로는 유태인이 헌 기계 가져다 팔아먹었다는 말이 돌았었다. 제일 문제는 원료탄인데, 화순탄광에서 나오는 무연탄은 탄의 강도도 나쁘고 원료가 되는 일산화탄소(CO)가 규격대로 안 나오는 것이다. 루루기사 쪽에서는 시험했을 때 탄과 다르다고 주장하였는바, 알고 보니 이문환 사장이 서독에 시험용으로 보낸 것은 화순탄이 아니고 삼척탄이었던 것이다. 루루기사와 호비 측과 싸움이 붙었다. 그러나 호비 측이 강력하게 화순탄만을 고집하자 우리 측 의견대로 진행되었고 1962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호비가 한국 측에 인도 된 것이다. 그러나 화순 무연탄으로는 제 용량을 생산하지 못해 충주비료공장과 같은 기름을 쓰는 장치로 다시 건설했지만, 투자와 산출이 항상 마이너스가 되어 1970년대 말 문을 닫는 운명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LG측에서 호비 공장 부지를 인수한 것이다.
4. 나주발전에 헌신한 인물 기념비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국가적 차원에서는 국난극복사 과정에서 수 많은 충신,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던져 나라를 구했거나, 지역적 차원에서는 사재를 털어 지역발전에 앞장서거나, 평생을 헌신 한 분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죽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리면 후손, 후배들은 아무도 그 역사를 들 추어보려 하지 않고, 모르고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고려시대 왜구 소탕의 공이 큰 정지장군이나,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이 연전연승 할 수 있도록 한 호남출신 제장졸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것이다. 거북선을 만드신 나대용 장군이나, 1593년 진주성 제2차 혈전 때에 3난(三難)의 공을 세우신 김천일 선생과 제장졸들을 어느 누가 자세히 알고 있는가. 먼 역사로 거슬러 가지 않더라도, 1960년대 한국사람 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독일인 호만을 기억하는 자는 없다. 나주가 고향이라는 인연 때문에 나주지역발전과 교육발전에 엄청난 재정적 지원을 해 주신 금하 서상록 선생을 기억하는 자 과연 몇 사람인가. 1896년 나주관찰사를 광주로 빼앗긴지 거의 백년 만인 1981년 나주군에서 금성시로 개청할 때 금하회관을 시청사로 기증하여 주었다. 그리고 송월동 현 위치로 이설하기 전까지 남산공원에서 시청업무를 하였던 것이다. 어디 이것뿐이랴. 각급학교, 기관 등에 금하선생의 애향심으로 지원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이와 같은 나주지역 발전을 위해 목숨을 던져 역사의 수범을 보이신 그분들과 평생을 지역사회발전에 몸을 불태우신 그분들을 현창하는 기념비 거리를 시 차원에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뜻있는 많은 사람들이 가칭 “나주를 빛낸 역사인물 100인 기념비”를 세워야 한다고 말을 했었다. 나주를 빛낸 인물의 기념비 거리든, 공원이든 전국최초로 조성해 간다면 새로운 볼거리, 명물로 탄생할 것 같다. 그것이 바로 후세를 위한 충효의 현장학습 장이 될 것 같다.
<참고자료> 〇 문헌 책자 1. 백영훈, 「한강에 흐르는 라인강의 기적」, KID출판사업국, 2001. 2. 백영훈, 「대한민국에 고함」, 씨앗 뿌리는 사람, 2005. 3. 오원철, 「한국형 경제건설」, 동아경제연구소, 4. 선데이서울, “한국인보다 한국을 사랑한 독일인”, P22-25, 1983. 5월
〇 옛자료 수집 5. 호만애암 잡지, 베르너 삿세 주필, 분도출판사 인쇄 외 다수, 1966. |
첫댓글 백실이 최고야, 우리문중에도 호만씨 학교를 다닌 사람이 있지, 그리고 내친구'이근배'는 호만씨 와의 인연으로 서독에 가서 살면서 무역업을 하면서 살아......
고래 나주 사람들이 그분의 업적을 지금이라도 높이 평가 해 드려야한다는데 동감이야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형부가 (호비) 에 근무 하셔서,도시락 들고 구경 간적이 있는데,굴뚝에서 뿜었던 연기가, 모두 서독정부의 차관으로 .....
죽동에서도 4년정도 선배가 그때 서독으로 간호사로 갔다가 그 곳에서 정착하고 삽니다 그시절! 우리 한국은 얼마나 어려웠던 시기입니까!
그런데, 그 언니 말이 "그나라는 고구마를 사람이 안먹고, 돼지들이 먹더라.그래서 밤에만 몰래 캐서 먹었다"는 생각이 납니다
나주 아니, 대한민국 정부가 나서야 될 일 아닌가요? 인적도 드문 뒤안길에 묻혀 있다니....
호만이 다시 살아서 이 글과 사진을 본다면 무어라 일성을 할까.
당시 독일어 교사 박봉환 선생도 보인다. 나주의 대선배인데, 나와 함께 호만의 후계학교에서 교사직을 했었다.
이미 고인이 된 두분에게 삼가 추억을 되새긴다.....
호만!! 당신이 뿌린 업적은 대한민국의 국기는 알고 있습니다
황금색깔은 나주평야의 황금들녁이며,나주 배의 상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