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어머니는 남정네가 아니었다. 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안일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내 기억에 형은 아예 집안일에는 별로 관심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늘 철도에서 퇴근을 하면 형수와 아이들과 지내기에 바빴고, 야근을 하는 날이면 어머니는 형이 잠을 자야하니 떠들지 말라고 쉬쉬 하셨다.
내가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서 생각해본 일지만 그때 어머니는 놉을 살만한 돈도 없고 소도 없었으니 그저 남의 집 일을 열심히 해주고 품앗이로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농사를 지으셨던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남자들이 하는 큰일을 이웃들에게 부탁한다고 한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농사일을 어머니는 어떻게 혼자 하셨을까.
내 어린 기억으로도 어머니는 농기구가 없으면 이웃으로 가서 빌려왔고, 어쩌다 소를 빌려 밭이나 논을 가는 날이면 막걸리를 사다가 그 놉에게 대접하고 새참을 머리에 이고 나르셨다. 아, 그 논둑길을 허둥대며 늘 분주하시던 어머니여.
내 기억으로 우리가 가진 논밭이라고 해봐야 집 바로 앞에 긴 밭이 하나 있었는데 그 밭에 어머니는 보리, 고구마를 심으셨고, 이랑이나 둑에도 콩, 열무, 옥수수, 수수, 밀(조선밀) 등을 심으셨던 것 같다. 그러면 아침부터 오후 늦게까지 어머니는 혼자 밭에서 사셨다.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날이면 누가 있어 밭에 있는 어머니에게 물 한 주전자라도 갖다 드렸으랴.
그때 동생은 아주 어렸다. 늦게 얻은 막내라서 일까, 동생은 아주 늦게까지 어머니의 젖을 먹었고, 언제나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떠나지 않으려고 하였다. 어느 정도 커서 학교에 다니게 되었지만 녀석은 학교가 끝나기도 전에 혼자서 학교를 나와 어머니가 계신 밭으로 달려갔다. 그럴 때 어머니는 어린 막내를 끌어안고 얼마나 마음 아파하셨을 고...
결국 동생은 내 기억으로 국민학교 2학년정도 밖에 학교를 다니지 못하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정에 굶주린 그는 도무지 어머니에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고 형이 아무리 야단을 치고 내가 손을 잡고 학교에 데려다주어도 동생은 금방 집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결국 동생은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았고, 국민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아이가 되고 말았다.
논농사는 어머니에게 더욱 힘든 농사였을 것이다. 내 기억으로는 우리 집에서 한 5분정도 떨어진 마을 한 귀퉁이에 조그만 논이 있었다. 위아래 논의 높이가 차이가 나서 남북으로 두 개의 논이 중간에서 논둑으로 나뉘어져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우리 집 논 위에는 다른 사람 소유의 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위에 있는 논에서 물이 내려오지 않으면 우리 논에는 물이 도달하지 못하고 논바닥은 말라버릴 것이다.
따라서 논에 물을 대고, 소를 빌려 논을 갈고, 볍씨를 뿌려 모종을 만들고, 모내기를 하는 모든 과정이 남의 손을 빌어서 해야 했을 테니 어머니에게는 벅찼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 논에 벼를 심어 키우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그래서 어머니는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위아래 남북으로 갈라진 삼팔선 같은 논둑이 무너져 내릴까봐 노심초사하셨다. 비가 오지 않으면 논바닥이 갈라질 것이요,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논둑이 무너져 애써 심어놓은 벼가 묻힐까봐 걱정을 하셨던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때의 기억을 할 때마다 평생 가슴을 쥐어짜는 슬픔으로 오열하곤 했다. 어머니는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걱정근심을 하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나를 깨우셨다. 형은 대개 집에 없었다. 형이 있었더라도 어머니는 형을 어려워하고 어떻게 보면 무서워하였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너희 형은 성질이 불꽃같고 급하니 너희들이 참아라 참아라 늘 그러셨다. 그러면서도 너희 형은 아버지나 다름없다고 생각해라 하셨다. 그래서 나는 나이가 나보다 열한 살이나 많은 형에게 감히 대들거나 할 생각은 하지 못하였다.
큰누나와 둘째 누나는 서울에 있는 과자공장에 다녔고, 셋째 누나는 공부만 잘했지 그때까지 젓가락을 사용하는 방법조차 서툴렀다. 동생은 물론 너무 어렸다. 결국 그래도 어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나는 그래서 아주 어려서부터 닭장이 부서지면 고치기도 하였고, 못을 박거나 톱질을 하거나 무엇인가 ‘남자의 손길’이 필요하면 어머니는 나를 부르셨다. 아무개야 여기 못 하나 박아봐라. 이것 좀 고칠 수 없겠니 하면서 나에게 일을 시키시고, 내가 서툴게나마 그것을 해놓으면 어머니는 “너는 참 손재주가 좋구나. 참 달걀같이 잘 해놓았다”고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셨다.
그 때문일까, 나는 살면서 어머니가 쓰시던 이 “달걀같이 잘 해놓았다”는 말을 평생 써먹었다. 다른 일꾼을 부릴 때에도 늘 이렇게 어머니가 내게 하시던 것처럼 “참 달걀같이 잘해 놓으셨네요”하고 칭찬을 해주곤 하였다.
어머니는 또한 집안에 징그러운 벌레가 나타나거나 쥐를 잡거나 쫓는 일, 심지어 닭을 잡는 일도 나를 시키셨다. 나는 벌레는 보이는 즉시 손바닥으로 때려잡을 정도로 잘 잡는다. 하지만 쥐나 뱀을 몹시 싫어하였다. 또한 살아있는 닭을 잡는 일이 아주 고역이었다. 하지만 내가 아니고는 닭을 잡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남자 어른들은 대개 닭의 모가지를 한 손으로 잡고 홱 비틀어서 닭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닭의 목을 잡는 순간 그 따뜻한 체온이 느껴져서 도저히 비틀 수가 없었다.
할 수없이 내가 쓴 방법은 텃밭에 나가 흙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닭의 대가리를 집어넣은 다음 흙을 덮고 닭이 조용해질 때까지 먼 산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닭을 안 잡을 수는 없고 모가지를 비틀 수는 없어서 내가 한 고육지책이었지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닭에게 미안하고 슬프다.
아무튼 이러한 집안 사정이라서 어머니는 비가 오는 한 밤중에 나를 깨우시고는 가마니를 어깨에 둘러메고 후레쉬 한 개와 삽을 들고 논으로 나가셨다. 나는 어리둥절하여 어머니를 따라 나섰는데 밖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고 장대같은 비는 금방 온몸을 적셨다. 우리 집 논에 가면 윗논에서 빗물이 흘러넘쳐 벌써 어린 벼들은 많이 잠겼고, 내가 기억하던 윗논과 아랫논에 가로놓인 삼팔선 둑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둑이 무너져 내리지 말라고 아래쪽에 박아놓은 나무말뚝은 부러질 듯 위태로웠고 높이가 낮은 구석진 둑 사이로 물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실 지금 생각하면 어른들 말로 정말 손바닥만 한 작은 논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그 논이 우리 가족의 식량줄이었으리라. 아직 올망졸망 어린 자식들을 거두어 먹여야 할 소중한 논이었기에 어떻게든 무너지는 둑을 막고 벼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비가 내리던 저녁, 캄캄한 밤하늘, 잘 보이지도 않고 미끄럽기만 하던 논둑길에서 어머니는 발을 동동 구르며 아이구 어떡하나 아이구 어떡하나 하실 뿐이었다. 얘야, 아무개야 어떡하면 좋으냐 하실 뿐이었다.
첫댓글 글이 재미있어서 계속 읽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