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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 옛길
2019년11월6일 수요일에 동서울터미널에서 08시에 횡계행 버스를 탔다(요금 14600원)
내 마음속에는 걷고 싶은 길이 그득한데 대관령 옛길도 마찬가지다 고속도로 구간 구간에는
안개가 자욱하니 조망이 어려울 듯 싶었고 횡계에 도착하니 10시가 조금 넘었는데 횡계에는
용평스키장이 있고 명태 덕장이 있고 발왕산도 있어서 일찍이 정상도 밟아 봤고 횡계팔경이
있다
橫溪八景
1. 刀山狂風: 칼산에 휘몰아치는 매운 바람
2. 黃柄白雲: 黃柄山의 높이 뜬 구름
3. 嶺路行人: 大關嶺 아흔 아홉 구비 돌아 오가는 行人
4. 橫溪垂約; 橫溪里 三井坪의 고기 낚는 것
5. 高樓晴月: 高樓山에 맑게 갠 달
6. 曉星薺月: 曉星山의 밝은 달
7. 祥鳳落照: 祥鳳嶺의 해가 지는 光景
8. 能政出日: 能政山에 해가 돋아 오르는 光景
횡계팔경은 7개가 산의 풍경을 말하고 그 중 대관령을 넘는 사람의 모습도
있으니 오늘 내가 걷는 옛길은 영로행인의 모습일 터-
대관령 옛길 걷는 방법은
1. 횡계부터 대관령을 걸어서 오르는 방법
2. 횡계에서 택시를 타고 대관령 휴게소 까지 가서 걷는 방법
3. 횡계에서 택시를 타고 국사성황당 앞까지 간뒤에 걷는 방법
4. 횡계에서 택시를 타고 통신탑 앞 4거리로부터 걷는 방법
5. 반정을 들머리로 오르거나 내려가는 방법
자기 체력에 맞게 걸어 볼 수 있지만 보통은 대관령 옛 휴게소를 들머리로 하지만 옛날 사람
들은 걸어서 한양을 오며갔다 물론 관리들도 넘고 선비랑 민초들도 넘나들었지만 송강 정철
선생은 대관령을 넘으면서 관동팔경을 남겼고 단원 김홍도 선생은 대관령 풍경화를 그렸고 김
시습도 시를 썼고 율곡과 동행하면서 신사임당은 思親詩를 읊었다
동선
대관령휴게소→국사성황당→중계탑앞→반정→이병화유혜불망비→쉼터→주막
터→입구→원이울재→대관령박물관→강릉시외버스터미널
대관령휴게소에서 국사성황당 앞까지는 걸어서는 2.3km. 그리고 200m를 가파르게 넓적돌 박
힌 계단을 오르면 중계탑이 나오는데 소로(시멘트포장)의 4거리로서 차량으로도 올라 올수
있고 백두대간 선자령으로 갈 수 있고 이정목이 있다
• 이정목: 국사 성황당 0.2Km 반정 1.0KmKm 선자령 3.7Km 대관령 1.3Km
※ 국사성황당(大關嶺國師城隍堂 堂神話)
대관령 휴게소에서 북쪽으로 1㎞ 지점의 숲속에 위치하고 있다. 제당은 약 5평 규모의 목조와가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범일국사의 화상이 그려져 있다. 매년 음력 4월 12일 금줄을 치고 4월 15일 제사를 지낸 후 위패를 모시고 대관령 여국사 성황당에 합위(位牌)한다. 강릉 단오제가 시작되면 대관령 국사 성황신과 대관령 국사 여성황의 위패를 함께 단오장에 모시고 갔다가 단오제가 끝나면 다시 모시고 온다.
• Story Telling
옛날 한 처녀가 대관령 굴산사(掘山寺)앞에 있는 석천(石泉)이라는 샘에 가서 물을 긷는데 물 긷던 바가지에 물과 함께 해가 들어 있었다. 이에 놀란 처녀는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물을 떴는데 여전히 바가지에 해가 들어 있었다. 세 번째 다시 물을 떴을 때도 바가지에 해가 들어 있어 목마른 터라 하는 수 없이 그 물을 마셨다. 그 일이 있은 후 처녀의 배는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고, 달이 차서 아이를 낳아 보니 아들이었다. 아비 없는 자식을 낳아 주변의 핀잔은 물론 가족들까지 외면하자 처녀는 아이를 뒷산 학바위 밑에 버렸다. 그러나 처녀는 아이를 찾는 다
※ 범일국사
자라면서 말을 하지 못하다가 일곱 살이 되어 비로소 말을 하는데 첫 말이 “내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는 것이었다. 아이의 외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사실대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범상치 않은 아이임을 알게 된 외할아버지는 아이를 당시의 수도인 경주로 보내어 공부를 시켰다. 그 곳에서 아이는 열심히 공부하여 國師가 되었고 그 지혜와 총명함은 중국에까지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었다. 훗날 국사는 굴산산에서 지팡이를 던져 꽂힌 자리에 사찰을 지었으며 이름을 尋福寺라 하였다.
난리가 났다. 범일국사는 대관령에 올라가 도술로 山川草木을 모두 군사로 변하게 하여 적군이 감히 근접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급기야 적군은 많은 군사를 보고 도망을 갔다. 이렇듯 강릉을 지켜온 범일 국사는 죽어서 대관령의 서낭신이 되었다.(출처: 백과사전 줄임)
대관령 옛길은 내리막길이 시작되고 리본을 걸 수 있는 설치물이 있는데 산악회들이 등산하면서 달아 놓는 표식도 공해요 쓰레기라 하면서 리본을 달 수 있는 코너를 설치하였기에 내 것도 달았다
대관령 옛길은 강릉 바우길 2코스와 올림픽아리바우길과 겹치고 전 코스에 “구조 위치 번호”
“등산로 페쇄” 그리고 밧줄 설치, 올림픽트레킹 로드를 가다의 ”올림픽아리바우길”표식은 조
그마한 사각형으로 나무에 달아놨고 “산행 안내도 및 대관령 안내문과 곳곳에 휴식 의자와 전
망대가 있고 그리고 많은 詩板등을 볼 수 있지만 낡았다
※ 바우길
“바우”란 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리키며 강원도와 강원도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감자
바우” 라고 부르듯 관광객이 트레킹하기 친근한 코스로 “바우길” 이름이 붙여졌고 “세월이 쌓
여 만들어진 길”“녹음이 아름다운 길” “금강소나무 감상하는 길” “숲과 송이 향 가득한 길” 로
16구간에 350Km다 그러나 후에 울트라바우길과 계곡바우길이 추가로 조성되었다 그리고 해
파랑길과 겹치는 바우길도 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내리막길에 나무들은 裸木이 되어 바닥에 수북히 쌓인 낙엽을 밟는 소리는
천상의 음악처럼 들려졌고 아가씨들 대여섯명이 벌써 올라오면서 맨 뒤에 아가씨가 “안녕하
세요” 인사말을 건네니 다시 한번 쳐다 보니 더욱 이쁘게도 생겼다 김시습의 시판이 보였다
“대관령 구름이 처음 걷히니
꼭대기에 눈이 아직도 남아있네
양장처럼 산길은 험난한데
오도 같은 여정은 멀기도 하네
늙은 나무 신당을 에워싸고
맑은 안개 바다 산에 접했구나
높이 올라 글을 지으니
풍경이 사람의 흥을 돋우네”
산죽지대가 나왔고 좌측으로 강릉시의 아파트들이 시야에 잡혔고 시판이 보였지만 파손되었고 잠시 후 허난설헌의 “春雨” 시가 걸려 있다
春雨 - 許蘭雪軒
春雨暗西池: 봄비가 살며시 서쪽 못에 내리니,
輕寒襲羅幕: 가볍고 맑은 바람 비단 장막에 스며드네.
愁倚小屛風: 시름에 겨워 작은 병풍에 기대고 있노라니,
墻頭杏花落: 담장 머리로 살구꽃이 떨어지네.
• 許蘭雪軒(1563~1589) 이름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소설 홍길동을 지은 교산 허균
의 누이동생.
도로가 나왔다 반정으로 반정이란 목적지 까지 거리의 절반이란 뜻으로 국사성황당으로 올라
가는 입구로 산불예방장승과 숲가꾸기장승이 있고 이정목에 주막터는 3Km 성황당 1.83Km다
횡단보도를 건너면 버스정류장과 화장실 커피랑 라면을 파는 간이 음식점도 있고 바우길 명승
(강릉)안내도 그리고 전망대가 있다 가야할 대관령박물관은 6.04Km이고 통나무계단 따라서
내리막길이다
등로에 벗어난 곳에 기관 이병화유혜불망비(記官 李秉華遺惠不望碑)가 있다
Story
조선 후기 지방 향리였던 이병화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민초들이 세운 비석으로 비석은 마모가 심하고 등로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무심코 걷다가는 발견하지 못하는데 자그마한 무덤과 함께 위치한다. 이병화는 한겨울 대관령 험난한 고갯길에 변변한 쉼터가 없어 심지어는 목숨을 잃는 이들이 생기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사비를 내어 주막을 운영하도록 했던 이병화의 은혜를 기리는 비석이다.
비의 내용은 “이병화라는 사람이 벼 500석쯤 되는 돈을 내놓아 오두막을 짓게 하고 오두막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농사를 짓지 않고도 오두막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여 이곳을 지나는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라고 되어있다(또 돈 100량을 희사 했다는 다른 이야기도 있다)
김홍도의 대관령 그림은 색이 퇴색하여 알아 볼 수 없고 전방으로 제왕산(841m)과 산줄기가
파노라마처럼 보이고 걷는 길에는 참나무 종류가 많지만 제왕산 방향에는 푸른 소나무가 많고
나는 제왕산을 두 번 산행을 했는데 어느 해 겨울 수진(딸)이와 함께 산행을 하면서 수진이가
무척 어려워 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신사임당의 시판은 그림과 함께 큼직한데-
泣別慈母-어머님과 눈물로 이별하고-申師任堂(1504~1551
慈親鶴髮在臨瀛: 인자한 우리 엄마 흰 머리 되어 강릉(임영)에 계시고
身向長安獨去情: 이 몸 서울로 홀로 떠나는 심정이여
回首北村時一望: 어머니 계신 북촌으로 고개 돌려 바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 흰 구름은 날아 내리고 저문 산은 푸르기만 하네
반정 1Km 주막터 2.04Km의 쉼터가나왔는데 대관령 안내문이 있고 데크로 설치되어 있다
※ 대관령
대관령 정상에서 굽이굽이 돌아 흘러내린 시냇물은 산골짜기마다 고여 작은 폭포와 물웅
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시원한 소리로 계곡을 울리며 흐르는 시냇물은 바닥까지 투명하여, 지
나는 산객이 그 많은 물에 뛰어 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그 玉溪水가 흐르는 여름엔 서
늘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능선이 서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산과 기암괴석, 다양한 수종의 森林
이 잘 어우러져 대관령 숲 속에 들어가면 마치 대자연의 포로가 된 것처럼 쉽게 나올 수가 없
다. 초입의 울창한 삼림 속을 걸어 들어가면 야생 들국화 군락지를 지나게 된다. 늦은 가을 처
량히 핀 들국화도 산객의 마음을 한껏 낭만스럽게 한다. 그윽한 국화 향기는 산행의 걸음걸이
를 멈추게 한다. 야생화 군락지를 지나면 급경사의 오르막길이 이어져 산행을 하는 기분이 든
다. 작은 돌탑과 계곡을 돌아서면 들리는 상쾌한 물소리, 말없이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숙이
는 할미꽃, 이름없이 자태를 뽐내는 야생화들이 산객의 발길을 반긴다. 이것저것 산풍경들을
감상하며 오르면 어느새 반정까지 오른다(안내문)
주막터가 나왔다 주막은 산뜻하게 복원되었고 관리원도 있고 작은 방이 3개인데 물레방아도
돌고 연못도 있으며 정자와 휴식의자 옛길 안내문 이정목은 제왕산 1.2Km로 되어 있고 가야
할 대관령 박물관은 2.67Km로 되어 있다
작은 방 하나에는 밀랍으로 된 두 사나이가 막걸리를 마시고 그 옆에 주모가 다소곳이 앉아 있는 보습을 볼 수 있는데 문득 생각나기를...
죽으면서 가족들이 슬피 우는 모습을 보고 울지마라-라는 林悌의 물곡사가 떠오른 다
林悌(1549~1587)
조선 중기 제주를 유람한 문신으로 수성지· 화사 임백호집등을 저술했는데 당쟁 싸움을 개탄하고 명산을 찾아다닌 林悌가 28살 때 서울에서 놀고 수원을 지나면서 주모와 눈이 맞아 하룻밤을 즐겁게 보낸 뒤에 주인에게 발각되어 죽음에 이르러 시 한수를 읊으니 주인도 자기의 책임을 느끼고 호방하게 용서하고 한 잔술 걸치는 모습으로 물곡사와 시는 뒤로 옮겼다
배낭에 보약 한통을 풀가 말가 망설이다가 가야 할 길이 남았으니 참고 물소리를 들으면서 박
물관을 향하려니 계곡의 바위들은 흰색에 햇빛이 쏟아져 더욱 하얗게 보였다 주막터 부터는
제왕산 등산할 때 걸어 본 길이다 다리를 건너기도 하고 데크도 가끔 설치되어 있다 국민의
숲 안내도와 자연보호의 필요성 안내문도 있다
입구에 도착하니 우주선 화장실도 보이고 이차선 아스팔트포장도로에 옛길 가든도 있다 포장
도로 따라 걸으면 삼거리가 나오고 좌측 고개는 보광리로 넘어가고 대관령박물관은 우측으로
0.9Km라는 이정목이 있고 언덕으로 승용차 한 대 쯤 통과할 수 있는 길로 원이울제다
원이울제는 강릉으로 발령 받으면 이 고개를 넘으면서 서러워서 울고 영전 발령을 받으면 강릉에서 생활이 만족하였기에 떠나기 싫어서 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3시50분
대관령박물관 앞에 도착하고 박물관을 대충 훒어봤지만 야외 전시장을 먼 발치로만 훔쳐보고
버스정류장에서 14시30분 시내 버스를 탔고 도중에 다시 터미로로 가는 버스로 환승하고 강
릉시외버스 터미널에서 15시44분 동서울행버스를 탔다
대관령 옛길을 걸어보려던 꿈이 실현되었지만 겨울에 눈이 쌓이면 설경을 보면서 걷고 싶다
대관령 신봉승 시, 박경규 곡, 바리톤 김성길
저기 물안개 소낙비 아련한 산은
그려도 움직이는 한 폭의 비단
저기 빨간 단풍으로 색칠한 산은
의연히 손짓하며 우릴 부르네
대관령 아흔아홉 대관령 굽이굽이는
내 인생 초록물 드리면서 나그네가 되라네
저기 찬 바람 하얀 눈 소복한 산은
누구를 기다리다 봄은 머언데
저기 진달래 철쭉으로 불타는 산은
구름도 수줍어서 쉬어 넘는데
대관령 아흔아홉 대관령 굽이굽이는
내 인생 보슬비 맞으면서 나그네가 되라네
대관령 옛길
대관령휴게소에서
국사성황당 반정 주막터를 스치고
대관령박물관 앞 까지 7.87Km
숲길에는
선인들의 숨결이
계곡물 소라랑 흐른 다
국사 성황당에는
범일국사
탄생 설화는
처녀가 잉태하였고
굽이굽이
돌고도는 길을
신사임당은
오죽헌 몽룡실에서
구도장원공 율곡을 낳고
잉태한
봉평 판관대로 걸었다
주막터에는
제왕산을 넘어가는
햇살이 곱고
원이울재는
초임에는 서러워서 울고
영전할 때는
그리움이 쌓여
강릉부사는 울었단 다 2019년11월6일 수요일 맑음
주막 터
대관령 옛길엔
주막 터 있고
산뜻하게 단장되었고
연못에는 물고기 없지만
물레방아 돌고
제왕산을 넘어가는
가을 햇살 곱게 비추고
계곡의 맑은 물소리
길손을 멈추게 하느니
행여라도
막걸리 한 사발 찾지만
옛날 같은 이야기
주막이라
문득 생각나는 사람
당파 싸움 싫고
풍류객으로 살다간
임제(1549~1587)
선생의 詩가 떠오릅니다
昨夜長安醉酒來: 어제밤 장안에서 술에 취해 여기오니
桃花一枝爛漫開: 복승아꽃 한 가지가 아름답게 피었네
君何種樹繁華地: 그대 어찌 이꽃을 번화한 땅에 심었나.
種者非也折者非: 심은者가 그른가 꺾은 者가 그른가.
勿 哭(곡하지 말라)
사방의 오랑케와 팔방의 야만족이 모두 다 칭제하였거늘 조선만이 중국을 종주국으로 섬겨 칭
제하지 않았다 이런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 본들 무엇이고 죽은들 무엇이 애닯은가 내가 족어
도 서러울 게 없으니 곡하지 말라
勿哭辭 原文: 四夷八灣皆呼稱帝 唯獨朝鮮入主中國 我生何爲我死何爲
2019년11월6일 수요일 맑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