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별을 찾는 언제나 젊은 삶의 철학자
수필가 김형석 교수
글.사진 : 최원현
작가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독자일 것이다. 독자가 없는 작가, 그것은 어떤 이유로 합리화 한다해도 결코 이해될 수 없으리라. 물론 독자의 이해 수준이 작품의 진가(眞價)를 파악 못하는 좋은 작품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그것도 문학적 가치는 있다할지 모르지만 문학의 목적 및 생명이요, 사명이기도 할 독자를 감동시키는 몫에선 위배되는 일이 아닐까싶다.
나는 분재(盆栽)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제대로 놔두면 하늘을 찌를 듯 커갈 나무를 자랄 수 없도록 제한을 가하여 인위적으로 모양을 만들어 내는 것이 마땅치 않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작가에 대한 불안과 불만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 자유로울 수 있는 언어를 오히려 작가라는 한계적인 능력으로 억압하고 제한하여 분재를 만들고 있는 꼴이 아닐까 하는 노파심에서이다. 그러나 그런 염려는 작가 스스로가 늘 자신에의 성찰로 관리하고 자극하고 건사해야 할 몫이기도 할 것이다. 사람들은 철학이 있는 글을 어렵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철학이 있는 글이라는 것은 어쩌면 생각하게 하는 글, 같이 생각하는 글이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철학과 문학이 별개라고 고집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지금까지 꽤 여러 분의 원로 수필가 선생님들을 뵈면서 느꼈던 것은 그 분들의 작품이 깊이가 있는 글, 곧 작가의 인생관이 철학으로 뿌리내린 글들이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나의 발걸음은 여느 때보다도 기대가 크다. 철학과 수필, 이 둘 사이에서 나는 오랜만에 푹 젖어볼 수 있다는 즐거운 비명을 기대하는 것이다.
많은 에세이집을 출간했으면서도 철학자로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김형석 교수님, 그러나 그의 철학은 현실의 삶을 중시하는 생활철학으로 굳이 철학이란 이름으로 구분하지만 않는다면 철학 에세이보다 문예수필에 가까운 것이 교수님의 작품들이라고 생각해 왔다. 사색적 논리보다도 서정적 묘사가 문장의 특징을 이루며 지(知)보다는 정(情)에 비중을 더 크게 두고있는 전통 동양적 수필에 김형석만의 사색적. 지적. 논리적인 요소를 가미하여 내놓은 김형석 교수님의 수필은 철학과 문학이 서로 용해되어 이루어낸 어쩌면 새로운 수필의 한 경지가 아닐까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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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문학평론가 김우종 교수는 김형석 교수의 수필을 두고 ‘인생의 밑바닥에서 건져낸 보물이요, 어둠에서 찾아낸 진리에의 길이요, 고통을 안고 사는 인간들에게 마음의 안식과 평화와 보다 값진 행복을 느끼게 하는 보약’이라고 했나보다. 저명한 철학자요, 종교인이요, 대학교수이지만 평범한 일상생활 주변에서 서민적 감정으로 사물을 보고 생각하면서 그 속에서 수필이란 진주를 찾아내는 작가, 오늘은 연세대학교 명예 교수이신 김형석 교수님을 찾아 뵙게 되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교수님을 뵙는 것이었다. 햇볕마저도 너무 따사로와 창가 쪽에 앉아있는 것이 거북할 만큼 은총처럼 햇살이 스며드는 곳에서 교수님과 마주앉았다.
교수요, 독실한 크리스찬이요, 문학인으로써, 살아오신 모든 날의 삶들이 오늘에 이르도록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우리에게 기억되는 것은 그만큼 한결같이 사람을 중시하며 살아오신 삶의 태도 때문이 아닐까.
김형석 교수님의 첫 인상은 부지런한 농부의 손에 의해 잘 가꾸어진, 마치 잘 빗겨진 머릿결같이 정연한 보리밭 두렁을 보는 것 같다. 호화롭지도 부담스럽지도 않게, 보고만 있어도 마음까지 정돈되는 질서정연하게 잘 자란 보리밭, 그 부시도록 아름다운 초록의 질서와 바람결 따라 스며드는 풋풋한 향기로움처럼 노 교수님에게선 그런 보리밭 내음이 짙게 풍겨났다.
오늘도 와이셔츠와 넥타이와 양복 그리고 그 위에 입으신 코트까지 너무도 잘 어울리는 모습이시다. 찻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아 들려주시는 말씀은 또 얼마나 정겨운가. 도란도란 어린 날 할머니로부터 듣던 옛날 얘기처럼 구수하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두 시간이 넘도록 말씀을 하시는데도 이십 분도 채 안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만큼 교수님의 얘기 속에 내가 빠져있었음이요, 교수님의 말씀이 그만큼 친화력이 있음이리라.
뵙고 나니 우선 교수님께선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가 궁금했다. 정년을 맞으신 지 15년이 되시니 조금은 여유가 있으실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여전히 요즘도 바쁘다고 하신다. 물론 정년퇴임 전 만이야 못하겠지만 지금도 강의도 나가시고, 운동도 하시고, 글도 쓰시고,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학자로, 신앙인으로, 문필가로 하시는 일은 여전하시단다. 그런데 무슨 운동을 하시는가가 궁금해서 여쭤보니 매일 수영을 하신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교수님의 얼굴에선 소년 마냥 붉으레 혈색이 돌고 있었다. 잡아주시는 손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움도 교육자로써 한 평생 살아오신 것을 확인케 해 주었다.
나는 김형석 교수님이 김태길, 안병욱 교수님과 각별한 우정을 지니고 계신 것을 안다. 요즘도 여전히 그 오랜 정을 유지하고 계시다고 했다. 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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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두 철학자시면서 수필을 쓰시는 것도 그렇고, 또 세 분 모두 동갑내기이신 것도 그렇고, 여하튼 세 분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갖고 계시는 것 같은데 태어나신 날로는 교수님이 가장 먼저라시는데도 다른 두 분 보다 훨씬 젊어 보이시는 것은 아무래도 하루도 걸름없이 수영을 하신 덕택이 아닌가싶다.
김형석 교수님은 1920년에 태어나셨으니 우리 나이로 하면 여든이시다.
‘ 나는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어요. 그러나 3년 후 지금은 평양시에 편입되어 있는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송산리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성장했어요. 평양에서 숭실중학을 거쳐 제3공립중학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상지대학 철학과를 졸업했지요. 1954년부터 1985년까지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었고, 지금은 명예교수로 있어요. 그동안 미국무성 초청으로 시카고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연구교수 생활을 했었고, 오스틴 대학의 초청교수로도 있었어요.
결혼은 1944년에 해서 2남4녀를 두었는데 두 아들은 철학교수와 건축공학 교수로 있고, 딸들도 저마다의 일을 하는데 큰 딸 성혜가 글을 쓰는 편이지요. <이민가족>, 등이 큰딸의 글이예요.‘
문득 교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교수님이 어렸을 때 아버지의 지게를 타고 산으로 나무를 하러 가면서 옛 이야기를 들었다던 모습이 생각났다. 수필 <낙엽에 부치고 싶은 마음>에선 ‘그 뒤 나는 자라서 청년이 되고 장년이 된 셈이다. 그런데 나이 들수록 인생은 고독하고 많은 일에 부닥칠수록 인간은 더욱 피곤해 지는 모양이다. 오늘도 가능만 하다면 한 번 더 아버지의 지게를 타고 산으로 올라가 보고 싶다. 그러고는 그 뒤 누구에게서도 들을 수 없었던 값 귀한 옛날 이야기를 아버지에게서 한 번만 더 들을 수만 있다면...’ 하고 그 때를 그리워하고 있다.
지나버린 삶은 그것이 비록 고통과 아픔의 점철이었다 해도 그리웁기 마련이다. 하물며 이만큼 연세가 드셨어도 부모님에 대한 추억은 가장 짙은 그리움이 아닐 수 없다. 까마득하게 멀어져 간 날들을 회억하시며 지나온 삶의 개략을 말씀해 주시는데 왜 나는 교수님의 어릴적 그 옛날 한 편을 생각하는 걸까. 교수님의 고향이 저 북쪽이라는 것 때문일까. 교수님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그리고 지금의 그곳 사정은 얼마나 알고 계실까.
‘고향은 만경대 뒷동네인 송산리(松山里)예요. 지금은 고향사람 아닌 공산사회 지도층의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는데 나는 1947년 월남한 후로 한 번도 가본 일이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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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말씀을 하실 줄 알았는데 너무 짧게 말씀을 해 주셔서 한 편 당황하기도 했지만 분명 수없이 체념하고, 그래도 떠오르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다시 꾹꾹 다독이며 살아오셨을 그 많은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르실 것 같아 워낙 정이 깊은 분이시니 행여 눈물이라도 흘리시는 건 아닐까싶어 교수님을 쳐다봤더니 표정 없이 햇살이 비쳐드는 창 밖만 슬쩍 내다보시고는 이내 고개를 돌리신다. 그러나 그런 교수님을 뵈며 가슴으로 전해져 오는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많은 저서를 내신 교수님은 어떻게 처음 문학과의 만남을 가지셨을까, 그리고 글을 쓰시게 된 동기나 특별히 누구에게선가 어떤 영향을 받으신 것일까?
‘중학교 때의 많은 독서가 철학, 종교, 문학에 관심을 갖게 해 주었으며, 수필을 위한 수필보다는 ‘삶과 사상’을 청소년들에게 주기 위해 집필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수필문학으로서의 선배나 영향을 준 사람은 없어요. 나의 경우는 철학적 논문, 사상적 저술의 부산물로서 쓰게된 수상(隨想)들이 문예수필이 된 셈이지요.‘
교수님의 수필엔 물안개가 끼어 있는 것 같다. 햇살을 기다리는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한껏 신비로움을 드리운 물안개처럼 교수님의 수필 속에선 그런 기대감과 편안함이 상존하며 늘 새로운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물안개 속으로 작은 배를 타고 들어가는 것처럼 교수님의 수필 속에 들어가면 고요감 도는 평화를 만난다. 그는 자연 앞에 자연의 아들로 순응하는 산짐승들처럼 신 앞에 지극히 겸손한 인간의 모습으로 서있다. ‘인간의 자유 때문에 우시는 신의 마음을 알게 된다면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 되련마는..., 그러므로 우리들의 유일한 의무는 나의 모든 자유를 신의 사랑에 굴복시키는 일이다.’ 라고 교수님은 말씀하신다.
교수님 세대는 우리 민족의 온갖 간난(艱難)의 역사를 다 거치신 세대일 것이다. 그러니 개인적 삶에 여유를 갖거나 할 겨를도 없었겠지만 어쩌면 그렇기에 더 기억되는 일들도 많으실 것 같다. 교수님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으셨던 일들 중에서 특별히 기억되는 행복한 순간이나 추억되시는 일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14살 때 기독교 신앙에 들어올 때 가장 큰 정신적 변화를 느꼈고, 해방에서 환희(歡喜)를, 6.25에서 비참(悲慘)을 체험했어요. 고뇌스러웠던 일은 젊은 학생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바르게 이해하지 못해 빠져드는 일을 계속 보고 있을 때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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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교수님의 삶은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나라 우리 민족의 아픔을 가장 심도 있게 자각하시며 그 속에서 당신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시면서 달리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엔 그토록 큰 안타까움으로 함께 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철학을 전공하시고 30년 넘게 철학을 가르쳐 오신 철학교수 수필가로서 철학 속의 수필과 우리 수필과의 차이는 어떻게 보실까.
‘삶의 과제를 이론적으로 추리하는 것이 철학이라면 정서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문학일 것이며, 철학은 논리적 추리가, 문학은 상상적 구상이 그 방법일 것입니다. 순수문학이나 순수수필은 문학이나 수필 그 자체가 문학일 경우이며, 철학 속에 수필이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철학적 과제를 쉽게 쓴 것은 철학적 수상이나 수필이라고 부를 수 있으나 철학에 있어서는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아서 좋을 것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수필은 수필을 위해서 씌어진 것과 삶의 내용을 느끼는 대로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 수필의 또 하나의 흐름일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의 수필은 그가 전공해온 철학, 일생동안 담고 생활해 온 철학을 그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재정립해 보려 했으며, 그것은 곧 대중적 사상과 감정의 철학화로서 어쩌면 철학의 대중화를 조금의 부담도 느끼지 않게 표현하려 했던 것이 수필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교수님이기에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거나 아주 아끼시는 작품이 있으시냐고 했더니 “대표작은 생각지 않으며, 수필집 <고독이라는 병> 속의 글들이 처음 부분이며 수필에 가까운 편일 것 같습니다.”라고 하신다.
사실 교수님께서 이런 수필류의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40대에 들어서부터였다고 한다. ‘모든 생명에는 시간이 있고, 자각 있는 삶에는 역사가 따르는 법’이라며 삶을 에세이로서 더욱 심화 확대해 나가고자 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고독이라는 병>, <영원한 사랑의 대화> 등 책을 발간케 되었고, 그렇게 출간한 책들이 이내 열 권의 <김형석 에세이 전집>을 이루었던 것이다.
교수님께선 문학 속에서 수필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문학을 보통 소설, 시, 수필로 3등분하는 것 같은데 수필은 내용에서 시, 소설만은 못하나 독자의 광범위성 때문에 그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곧 무한한 독자층의 확보가 가능한 장르가 수필이고, 이 수필은 자기의 이야기 곧 사람의 이야기이기에 김형석 교수님의 ‘휴머니즘 정신’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휴머니즘은 이상과 회의와 허무를 그 품안에 간직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긍정하는 의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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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전진하려는 신념이며, 건설하려는 힘을 지니고 있다. 정신적인 면에
서는 휴머니즘 이하는 인간 이하와 통한다.’는 휴머니즘이야말로 김형석 수필의 원류였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수필이 좋은 수필인가에 대해서는 ‘독자들에게 무엇을 주는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내가 쓰는 수필이 대표적이며 좋다는 생각은 지혜롭지 못한 주장일 것입니다.’라고 일축해 버리신다.
많은 강연, T.V 출연, 학생들과의 대화 등 생활 속에서 인간을 만나고, 그 속에서 휴머니즘의 철학을 실천키 위해 쉬지 않았던 교수님의 삶은 바로 글의 소재였으며, 그렇게 작품들을 통해 진실을 나누고자 하셨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교수님의 문학세계를 스스로는 어떻게 평하실까?
‘그런 생각을 해본 일은 없어요, 글을 쓸 때 나도 모르게 평소에 갖고있던 생각인 ‘선하고 아름다운 삶’, ‘밝은 이상’ 같은 것을 찾아 나누고싶은 심정일 뿐입니다.‘
곧 교수님의 문학세계는 교수님의 철학세계로서 선하고 아름다운 삶과 밝은 이상이라는 말씀으로 풍부한 현실적 생활경험과 그 속에서 사색하고 깨달았던 신앙인과 지식인으로서의 생각은 특별히 문학세계란 범위로 한계 짓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자유스럽게 그렇기에 아주 폭넓게 포용하면서 독자의 가슴속으로 파고든 것이었다.
‘글이 곧 사람’이란 말은 김형석 교수님 같은 분을 두고 한 말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통해 읽었던 분위기며 감동이 말씀을 듣는 중에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만한 연세에도 워낙이 젊은이들과 많은 만남을 갖고, 또 늘 젊은 생각을 하고 사셔서인지 젊음 냄새가 물씬 풍겨나는 교수님과의 시간은 우리가 이 시대의 삶을 얼마나 소중하게 사명감 있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자각케 하는 귀중한 시간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한국 수필문학의 방향. 수필문학 발전을 위한 문제점 의 지적이나 또는 조언을 주십사 부탁드렸다.
‘그런 것은 그 분야의 전문가들의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문학 및 예술적 표현이 없는 것은 수필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수필계의 장래를 위해서, 예를 들면 유명한 사람의 글은 그 유명한 사람의 글이라는 그대로의 의미가 있지 꼭 수필의 영역에 넣어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교수님의 수필 ‘수학이 모르는 지혜’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과거에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빼앗아 가지려고 애써왔다. 이웃들로부터 가장 많은 것을 찾아 누리는 사람이 그만큼 잘 살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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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왔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어떻게 하면 많은 것을 이웃들과 더불어 소유하며 한가지로 즐길 수 있을까를 모색해 왔다. 오늘 우리는 그만큼 못살고 있으며 그들은 그만큼 잘 살고 있다. 우리는 수학으로는 풀리지 않는 이러한 진리를 실천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 수필가들도 이 원리를 깨달아야 할 것 같다. 수필이 제대로의 위상을 정립하고 타 장르에 뒤지지 않으려면 그만한 열정과 노력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노 교수님을 뵈오면서 느끼는 생각은 우리가 너무나 안일무사한 글쓰기를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한 편의 소설, 한 편의 시를 낳기 위하여 흘리는 땀과 고생만큼 우리의 수필도 그러했을까. 너무 쉽게 수필을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내가 한 편의 수필을 낳을 수 있는 인격 또는 품격을 갖고있는 것일까. 수필가로써 수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글을 써 오진 않았을까. 아무래도 깊은 자성이 필요할 것 같다.
유리창을 통해 그토록 강하게 쏟아지던 햇볕이 저만치 방향을 틀어 기울어지다 아직 불이 들어오지 않은 뜨락의 등 위에서 빛나고 있다. 밖으로 나와 인사를 드리고 헤어져 차로 향하면서 이 땅에 이같은 분을 허락해 주신 것에 감사를 드렸다. 밤사이에 아무도 모르게 내렸으나 아침이면 그것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아름다움과 기쁨을 주는 눈처럼 조용히 책상에 앉아 쓰신 글들이 희망과 용기를 얻게 하는 사랑스런 기적의 씨를 뿌리는 분, 부디 더욱 많은 날들 동안 하시던 일을 계속하시기를 간절히 바램해 본다. 돌아보니 다시 어디론가 떠나시는 교수님의 옆으로 뜨락의 등 위에 머물던 햇살이 유리로 된 건물 모서리에 부딪혀 빛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마치 세상에서 빛처럼 강한 것은 없다는 듯. 수필과 비평 ‘99.3.4월호/작가가 찾아본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