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과 출세를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상은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형상화하기 이전부터 무수히 존재해왔다. 그럴 듯한 명분과 설득력을 가진 권력추구자를 역사는 긍정적인 인물로 평가하며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문학작품에서는 상반된 평가로 엇갈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 초기 로마사에서 가장 논란이 심한 인물이 바로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Lucius Sergius Catilina(BC 108~62)이다.
세계적인 대웅변가요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던 키케로와 정적 관계였던 카틸리나는 그 상대를 잘못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한 시대를 지배하는 것은 하나의 태양인데 또 다른 태양이 있는 시대에 태어난 지도급 인사는 결국 불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기원전 1세기 무렵 로마는 끊임없는 각종 반란에 직면해 있었다. 이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운 술라 장군은 강력한 독재체제를 굳혀 공포정치를 실시하다가 죽었다. 바로 이 술라 휘하에서 자기 세력을 길러온 카틸리나는 독재 지향성과 독재체제에 대한 반감이라는 두 가지 정치적인 파토스를 다 가졌을 것이다.
술라가 죽자 민주를 위한 움직임보다는 군부독재를 재구축하려는 음모가 복잡다양하게 전개되는 혼미가 계속됐다. 이런 와중에 검투사 출신의 노예 스파르타쿠스가 등장해 일대 반란을 일으켜 초기에는 성공해 로마를 위협할 지경이었다. 노예해방을 목표로 반항했으면서도 ‘황제’처럼 지배자가 돼버린 스파르타쿠스를 가리켜 카뮈는 부조리의 한 표본으로 거론하기도 했는데, 종국에는 실패하고 처절하게 전사해버린 이 노예반란 사건은 귀족들에게 공화제보다는 강력한 독재체제를 희구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역사는 언제나 이런 음모와 반란의 반복인지 모른다. 몰락해가는 귀족들은 극우 보수주의적 시각으로 당대의 사태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제2의 술라를 선택하게 되는데 그게 바로 카틸리나였다. 한 차례 집정관 선출에 나섰다가 낙방한 경험을 지닌 채 다시 집정관 후보로 나선 그는 대중의 인기를 위해 모든 부채를 탕감할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이것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그가 집정관으로 당선되었다면 술라처럼 했을지 아니면 술라의 비극을 교훈 삼아 민주주의자가 되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이 아슬아슬한 순간에 대웅변가 키케로가 이 야심가의 앞길을 가로막고 말았다.
키케로는 카틸리나가 공화제를 파괴하려는 음모가라고 폭로하면서 그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 사형을 요청했다. 보수파 원로원들이 그를 옹호했지만 이미 카틸리나는 키케로의 웅변술이란 마술에 걸려 정치적인 생명이 끝장나고 있었다. 카틸리나 일당은 반국가사범으로 체포돼 사형에 처해졌고 그는 간신히 도망쳐 자신의 지지기반인 은퇴한 노군부들이 모여 있던 곳에서 반란을 꾀했으나 권력쟁취를 위한 전투 중 최후를 맞았다. 그 뒤 로마에는 시저가 등장하게 되는데, 그는 조용히 카틸리나를 마음 속으로 지지하며 그 수법을 배워 실현시켰던 것이다.
영국의 극작가 벤 존슨은 <카틸리나의 음모>에서 그의 부채 탕감을 비롯한 서민을 향한 각종 선심정책에 초점을 맞춰 세습귀족 출신이면서도 평민해방을 위해 애쓴 진보주의자라고 추켜세운다. 헨리크 입센도 초기의 작품 <카틸리나>에서 타락한 로마의 윤리도덕에 저항해 진정한 로마정신을 구축하려는 개혁의지를 지닌 인간상으로 그를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볼테르는 <구원받은 로마 혹은 카틸리나>에서 그를 독재의 음모가로 보면서 그의 패배가 오히려 로마의 구원이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집권을 위해서는 어떤 술수도 마다지 않는 음모가에게 과연 공화제에 대한 기대를 걸 수 있을까란 것이 볼테르의 견해이다. 카틸리나는 이 땅에도 있다. 선거 철마다 무수하게 등장해 국민 앞에서 조화를 부려대는 이들을 유권자들의 안목이 잘 걸러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