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모에 참여한 제가 김용만 선생님과 나눈 여러 야그들 중에 인상
깊게 다가왔던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구려'와 '발해'의
차이였습니다.
그렇다고 김용만 선생님과 제가 무슨 한규철 교수님의 주장 그 자체에
대해서 논한 것이 아니라(사실 '비교적' '지엽적인' 이야기에 속했음)
그저 제가 김용만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떠올린 생각이었지요.
김용만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적어도 취지는 맞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가 '무조건' '세계 제일'이어야만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최소한도 고구려가 그랬듯이 우리가 능동적으로
국제 정세를 주도하고 캐스팅 보트를 쥘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고구려와 발해가 다른 점은 고구려가 스스로 국제 정세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반면 발해는 그저 '동방의 강자'로만 그쳤다는데
있습니다.
거란에 대한 지배를 보면 실제로 그 사실여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발해사가 생각나더군요.
물론 발해도 고구려의 후예라는 타이틀에 못지 않게 나름대로 활발한
활동을 하기는 했지만 고구려와 달리 '주도적'이지 못했다는데 그
문제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선 살펴봐야 할 나라들이 바로 앞의 세 나라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중 안사(安史) 즉 안록산과 사사명의 대연국은 정식 국가가 아닌데
왜 집어 넣는가 하고 의아해 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하나 지구상에 존재했던 모든 국가는 하늘로부터 임명을 받은 것이
아니고 모두 그들 스스로가 세운 자칭왕국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구나 이들은 한때라고는 하지만 나름의 관료 체계를 만들었고 또
당의 수도였던 장안을 차지했다는 점에서 저는 정식 국가로 인정하는
전제하에 이 설명을 하려는 것입니다.
우선 돌궐 제2제국(682-744)을 살펴보면 이 나라는 비교적 반당적인
성향을 지닌 국가였습니다.
발해의 입장에서는 아직 당과 '정면 대결'하기 어려웠던 시절 일종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주었고 또 시종일관 발해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당전역에서 적지않이 도움을 줌으로써 발해의 기틀을 잡는데
이모저모로 도움이 되어주었던(물론 자기네 '국익에 충실해서'라는
표현이 더 맞기는 하지만)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에 비해 발해의 취약성은 다음에서 잘 나타납니다.
즉 초원의 패자가 반당적인 돌궐 제2제국에서 친당적인 위구르 오르콘
제국으로 바뀔 때 발해가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지켜보기만' 했다는
점입니다.
이때부터 대략 10여년 후 이른바 '안사의 난'이라는 것이 발생하지요.
물론 발해는 '용렬한 나라는 아니어서' 이른바 '담비의 길'을 통해
안록산 군대와 장사를 하여 이문을 남겼고 후에 당이 이를 추궁했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대외적으로 발해는 안록산의 연국(燕國)과 당의 사이에서 엄정 중립을
고수했지만 이것은 현대식으로 말하면 사실상 후방지원을 안록산에게
약속한 셈입니다.
하지만 발해의 역할은 이것이 '전부'입니다. 안록산의 대연국을
토벌하려는 위구르 오르콘 제국이 개입했을 때 발해는 동아시아 국제
질서 자체에 어떤 영향을 끼칠만한 행동을 하나도 취하지 못합니다.
또 세월이 지나서 761년, 이른바 안사의 난이 진압된 이후 당은
이른바 번진이라고 하여 각 지방의 책임자들인 절도사들이 각기 왕을
자처하는 등 나라가 대규모로 분열되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이때 봉기한 절도사들 중 하나였던 사람이 제(齊) 왕국(王國 이후
이 납 시절 일시 제국(帝國)으로 바뀜)을 세운 이 정기입니다.
이정기는 군사적으로 영역을 넓히는 한편 발해와 신라 왜 등과 무역을
하면서 그 힘을 증강하게 됩니다.
특히 발해와는 막대한 무역을 함으로써 상부상조의 이익을 서로 얻게
되지요.
이를 이른바 민족주의적 감정에서 보든 냉정하게 장사적 이익으로
보든 두 나라가 '서로 이익을 얻고 국세를 신장'시킨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발해의 한계성은 다시 한 번 드러납니다.
819년 제 왕국이 당의 공격을 받을 때 발해는 돌궐 제2제국을 방관
했던 것처럼, 연국을 방관했던 것처럼, 그렇게 제 왕국을 '방관'하고
맙니다.
더구나 치명적이라면 치명적인 것은 돌궐 제2제국의 멸망 이래로
'거란에 대한 지배권'을 위구르 오르콘 제국이 842년까지 '한 번도'
놓치지 않았고 이에 대해 발해가 어떤 '행동을 취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점 일 것입니다.
물론 나라를 보존하고 국세를 신장시켰다는 점에서 발해의 외교술이나
부국강병책은 후대의 우리 왕조들에 비하여 칭찬할 만 합니다.
하나 발해는 고구려와는 달리 어디까지나 '종속 변수'로 머물렀고
돌궐 제2제국이나 연국 그리고 제 왕국등에 후방지원을 하기는 했지만
그것에 그치고 마는 한계를 보여줍니다.
종래 돌궐 제2제국이나 안사의 연국 그리고 제나라는 어디까지나
중국사의 일부로만 설명이 되었고 또 그 존재의 의미도 축소된 형태로
기술되었지만 이들 나라들의 향방이 발해사에 한 몫을 단단히 차지한
점 역시 동 아시아사에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부득불
졸필을 남겨봅니다.
적어도 이들 나라의 활동은 우리 국사에서는 중요시하여 다루어야 할
부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본시 발해사로 적어야 할 노릇인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들 나라들을
엄연히 독립국가들로 보기 때문에 동 아시아 역사 토론장에 이 글을
남기는 것임을 밝히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