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 얼마나
시 32:5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 이다 (셀라)
세상에는 두 분류의 사람이 있다. 한 분류는 알지 못하지만 표현하며
사는 사람, 한 분류는 알고 있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과 또, 가짜를 진짜처럼 말하는 사람과 진짜를 가지고도 확실히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농담 같은 얘기지만 세상은 가짜를 가지고 진짜처럼 속이고 목사는 진짜를 가지고 가짜처럼 대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현 시대 기독교를 손가락질
하는 질타이다.
성경은 진리로 가득 차 있지만 매일 성경을 대하는 우리는 진리로 충만해 있지 못한듯하다
우린 왜 진리로 가득 채워져 있지 못하는 것일까? 그건 진리를 어렵게
여기며 진리로 자신을 표현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진리가 우리에게 말하고 표현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고 복잡하지 않다
하나님께선 복음을 모든 가난한 자나 눈 먼 자나 눌린 자나 포로 된 자나 무식한 자나 유식한 자나 죄인 할 것
없이 모두가 믿으면 깨달아 알 수 있도록 우리 가까이 우리 곁에 진리를 두셨다. 그리고 진리를 내 삶의
사실로 주인으로 받아드리게 되면 진리가 우리 삶을 사로잡아 이끌게 될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14:6)
성경에 죄인이라 기록 할 만큼 큰 죄를 지은 한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진리를 만나자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표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수치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자신의 머리카락에 향유를 부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으며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그녀의 그러한 행동을
예수님께선“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마26:13)”하셨다
M. 몽테뉴(프랑스의 사상가)의 말처럼 용기 있는 고백은 힐책의 칼날을 무디게 하고, 모욕의 총구를
무력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랑하는 선에 대해서는 엄격하시지만, 자백하는 죄에 대해서는 언제나 따뜻하시다. 사랑의 주체이신 주님께서는 우리가 진리를 만난 후부터는 고백하며, 표현하고, 알고, 닮아가기를
원한다. 인간 냄새, 죄의 부끄러움, 수치, 모든 것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만나면 다 가려지고 해결 받고
새롭게 된다 간음한 여인도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고 자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의롭다
여긴 사람들은 심판자[주님]도 정죄하지 않는 그 은혜의 자리를
떠나고 말았다
간음한 여인의 부끄러움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의 잠시뿐
이였다 그 여인이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접하면서 그 부끄러움이 오히려 은혜로 바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진짜
우리의 부끄러움은 죄를 짓고도 주님 앞에 다가가지도 못하고 복음을 외면한 그 부끄러움이 진짜 영원한 부끄러움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진리를 안다 하면서 표현하지 못하는 부끄러움 속에서 나와 진리로 다스림 받는 영광의 삶으로
나와야만 한다. 이러한 삶은 우리를 어둠에서 빠져 나와 밝은 빛으로 깊이 들어가는 방법이다
어느 목사님이 새벽 기도회를 위해 이른 아침에 강변 도로를 운전해 가고 있었는데 바로 앞에서 쓰레기를 산더미처럼
실은 대형 트럭이 무섭게 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목사님이 무심코 그 뒤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아마
길에 울퉁불퉁한 곳이 있었는지 그 트럭이 덜컹 하더니 그 쌓였던 각종 쓰레기가 길바닥에 많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었다. 문자 그대로 쓰레기 비가 내리는 것이었다.
그 순간 목사님의 얼핏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내 마음도 실상은
수많은 오물로 가득하여 썩고 냄새 나고 있는데 뚜껑으로 덮고 눌러서 아직 밖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가? 남이
모르는 교만과 위선,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려는 악한 마음, 음란한
생각들이 속에 들어 있지만, 신분과 직분, 남들의 눈길, 그 동안 받은 종교적인 훈련이나 교육으로 뚜껑을 단단히 덮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러던 어느 날 삶의 장애물을 만나서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도 모르게 뚜껑이 열리고 누추한 것들이 쏟아져 내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었다 한다.
정말 우리 육신 속에는 선한 것이 없다. 바울도 고백하기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롬7:18). 아예 미리 열어서 자신의 누추함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청결함을 받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는가? 비록 그 과정은 잠시 부끄럽겠지만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다 드러낼 때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받게 될 것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여 구원 받은 사람들과 표현하지 못해 멸망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아간(수 7:20,21) 간음, 살인죄를 범한 다윗(삼하 12:13)
하나님을 의심하였던 욥(욥 42:3-6) 그리스도를 세 번 부인하였던 베드로(요 21:15-23)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은 응답 없는 메아리요! 껍질뿐인 쭉정이의 빈약함이요! 열매 없이 찍히는 무화과요!생명 없는 죽은 나무요!죽음을 이기지 못하는 가짜 사랑이다. 표현하는 사랑은 응답 받는 기도요! 열매 가득한 알곡의 풍성함이요! 시절을 쫓아 맺는 과실이요!
영생하는 생명 나무요! 죽음을 이긴 진짜 사랑이다.
그 사랑을 표현하고 고백하며 알아가는 자 그 사랑의 진리가 얼마나 큰지 아는 사람은 구원의 감격의 아름다운 옷을
날마다 새로 갈아 입으며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자족하며 감사하며 새 얼굴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의 세상 기쁨이 아닌 천국의 기쁨의 풍성함과 부유함을 삶으로 채우며 자신을 이기며 세상을
변화시키며 주님 닮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다 표현 못해도 최대한 크고 감격스럽게 표현 하십시오
다 고백 못해도 내 속의 전부를 쏟아 내 십 시요
다 알 수 없어도 믿고 크게 사모 하십시오
다 닮지 못해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노력하십시오
매일 그렇게 살아 가신다면....
주님의 그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천국의 기쁨이 여러분들의 것이 될 것이다
기독교는 변화의 종교이다.
변화를 원치 않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종교적 사치이다. 변화 없이
기도하고 예배 드리는 것은 주일 오락에 불과하다. 변화는 필연적이다. 결국 우리가 주님 앞에 설 때에는 영육간에 모든 것이 변화된
상태로 서기 때문에 변화 없이 선다면 심판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타락한 죄인이므로 심판은 결국 변화가 없는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의 화두는 "변화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도 사람에게 영적 변화가 잘 일어나질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의 일생에 가장 큰 기적은, 부자 되고 출세하고 죽어가던 암환자가
병을 고치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타락한 영혼이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관심을 "나는 변하고 있는가?"에 맞추어져야 한다. 변화의 필요성은 나를 상식적인 죄인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자아가 철저하게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내 중심적으로 행하고 있음을 발견하므로 요청된다.
변화는 진절머리가 나도록 싫은 자신을 부인하고 새롭게 되어야겠다는 필요로
시작된다. 변화는 복음으로 거듭날 때부터만 일어난다. 우리의
신앙의 본질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본질적인 것은 가장 중요하므로 이 '진리'는 '질리'게 느껴진다. 그러나
쾌락은 재미있고 자극적이다.
교회도 재미중심, 감성중심, 자극중심
되면 세상적으로 흐를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은 생명이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따라서
변화는 율법으로나 내 의지나 종교성으로 일어날 수 없다. 변화는 살아계신 예수께서 내 속에 나와 연합하여 사시므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예수를 믿는 것이다. 이렇게 믿을 때에 구원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어마어마한 사실이며 사건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엄청난 일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즉, 내가 죄인으로서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감격하게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전혀 복음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지도 않고 검증의 기회를 갖지도 못하고 교회당의
종교 용어에 길들여져만 있다면 그는 종교인이다.변화는 기적중의 기적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체험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랑으로 진실로 거듭나기를 소원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찬양해보자
JOHN K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