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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情(Ⅱ)
김운회 1.계획 구곡폭폭에서 만난 철암회의 송영주, 안국모 청맥회의 김재식, 그리고 나 4명은 토왕성 빙폭합동등반을 계획하여 구정 다음날인 87년 1월 30일부터 2월 8일까지 9박 10일의 등반퀮르 계획했고 우리회의 명식형, 금석형이 동참하기로 했다. 등반일정은 격일로 상하단 완등을 하여 전 대원이 등반을 하는 3회이상의 등반을 계획, 현지에서의 날씨, 체력등 여러 가지 상황을 보아 최대한 시도하기로 했다. 식량은 바쁜 일정에 전량을 2회(5인분씩)에 나누어 속초에 구입하기로 했다. 장비는 텐트 3동(숙영, 식량, 장비) 과 각자의 개인장비와 80미터자일 3동, 40미터 1동등을 준비하였다. 2.등반 1월 30일 상봉터미널에서 재식이, 영주, 명식형, 금석형을 만났고 석준이와 현옥이가 마중을 나와 주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록 국모의 모습이 보이질 않는다. 명식형에게 먼저 들어가 텐트자리를 확보해 줄 것을 부탁하고 국모를 기다려 9시 20분차로 영주는 "부디 행복해야돼"라는 농담을 하고 악우이 손 흔듬속에 설악을 향한다. 차안에서는 등반일정과 식량구입문제를 이야기하며 진부령넘어 속초에 생각보다 빠른시간에 명식형과 같이 도착하였다. 명식형에게 2개의 박스를 비룡교 매점에 맡겨줄 것을 부탁하고 속초시장에 들려 5일분의 식량구입과 중식, 패킹을 하는데 3시간을 소요하고 비룡교 매점에서 박스를 찾아 비룡폭포 트래버스길에 올랐을 때는 이미 날이 어두어졌고 엄청난 하중에 견디지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가는 우리들 자신은 너무도 미련함의 극치를 이룬 것같았다. 엎어지고 미끌어지고 나는 안겨이 부러져 국모의 손을 잡고 가는 우여곡절 끝에 캠프지에 도착하니 명식형이 확보해 놓은 자리는 텐트 1동을 간신히 설치할수 있었다. 간신히 라면으로 석식을 마치고 텐트는 내일 자리르 물색하여 다시 설치하기로 했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 텐트에 모여앉아 각자 싸갖고온 구정차례음식을 맞보며 진한 커피한잔과 주고받는 산의 이야기들로 지금 토왕골에 있는 우리는 더없는 행복감을 느끼며 국모에게 하루세번 포옹을 해야 정서에 좋다는 농담으로 포옹하고는 잠자리에 든다.
1월 31일 명식형, 금석형은 하단의 빙폭으로 영주, 국모는 중단 MC산악회형들의 지원을 재식이와 나는 텐트를 옮기고 오후에는 전원 하단 등반을 하기로 했다. 짐을 옮겨 놓고 텐트를 3동 설치하여 장비와 식량텐트를 따로 정해 놓으니 캠프의 분위기가 쾌적하고 여러모로 좋은 듯 했다. 캠프정리를 마칠 무렵 영주가 내려와 80미터 자일 1동을 가져오라는 명식형의 말을 전하고 영주눈 설악도응로 외출을 했다. 하단에 도착, 명식형은 동대 테라스위치에 등반중이고 많은 사람이 등반을 하고 있다. 금석형이 끓여준 라면으로 중식을 하고 명식형이 올라간 자일로 국모의 등반이 끝날 무렵 나의 선등으로 재식이와 하단을 오른다. 얼음상태가 작년과 달리 속이 많이 비어있고 면이 고르지 못하고 요철이 심해 픽켈과 함마를 걸어가며 등반을 한다. 동대 테라스 윗쪽으로는 완경사를 흐른 얼음이라 면이 고른 반면 갈라지고 떠버리는 얼음이 많다. 하단을 끌낼 무렵 명식형과 국모는 얼음에 80미터자일을 고종시켜 빙폭으로 바로 하강퀮르 하고 재식이의 빌레이를 보며 상단을 보니 몰고이 앙상한게 폭이 상당히 좁아졌고 반면에 높이는 상당히 높아보였다. 재식이가 올라와 바로 중단으로 나는 명식형이 하강한 자일을 회수하여 배려보내고 중단으로 오른다. 우측 릿지를 내려 오며 보는 토왕성의 상하단 빙폭과 좌우벽의 커다란 스케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단 빙폭밑에서 명식형과 금석형, 국모가 손을 흔든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귀가하는 일꾼들마냥 쩔렁거리는 연장부딪히는 소리와 상단의 모습을 뒤로 캠프를 향한다. 상단에는 3명의 MC산악회 형님들의 등반이 끝나지 않았다. 저녁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설악동에 나간 영주가 소주 4홉 3병과 관리소에서 등반허가서를 만들어 왔다. 국모의 잡탕찌게는 곁들이는 반주와 저녁식사에 더욱 좋았고 정취있는 캠프분위기가 있다. 모닥불을 피워 장비를 말리고 내일은 상하단 등반을 재식이와 내가 하기로 했다. 저녁 늦은 시간 MC형들의 등반이 걱정되어 명식형이 캠프로 가보니 아직 도착을 안했다 한다. 좌측의 계곡을 내려오는데 예년같이 눈이 많지않아 시간이 걸릴 듯하다. 명식형은 마중, 심각하게는 구조라는 생각까지 하고 준비를 하여 올라가 보자고 한다. 배낭에 침낭, 코펠, 버너, 비상식을 챙겨메고 재식, 국모와 함께 출발했다. 영주는 몸살기운으로 창백한 얼굴로 침낭속에 있고 좀처럼 말없는 금석형과 같이 앉아있으니 캠프의 분위기가 갑자기 너무 조용해져 버렸다. 토왕성폭폭의 상단에는 무수한 별들이 쏟아져 내리는 한층의 폭포가 더한 듯 하고 선녀봉에는 예쁜 선녀가 내려올 듯한 환상적인 풍경이다. 모닥불이 꺼질 무렵 텐트안에 들어가 있다가 12시까지 내려오지 않으면 올라가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잠이 들어 1시가 넘어 내려오는 기척에 잠을 깬다. 전원이 무사히 캠프에 도착을 했고 따뜻한 찌개를 끓이고 간식과 소주로 MC형님들을 대접하는 자리를 만들어 등반 이야기와 함께 소주잔이 돌아가며 밤이 가는 줄 모른다.
2월 1일 새벽 많은 시간의 소비와 여러 가지를 감안하여 상하단등반을 하루 미루었고 늦은 시간까지 취침을 하였다. MC형님들은 캠프를 철수하여 나갔고 금석형도 하산하였다. 오늘도 전원이 하단등반을 한다. 재식이, 국모가 톱, 자일을 매고 등반을 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한다. 국모의 자일로 명식형이, 재식이쪽으로 나와 영주가 올랐고 영주의 빌레이를 할 때 기침소리와 함께 올라오는 영주의 모습이 컨디션이 영 안좋은 것 같다. 내일은 어떻게든지 하루 미루어진 상하단 등반을 하여야 한다. 1차적으로 내일 재식이와 내가, 모래는 내가 상하단 등반을 하기로 했다. 저녁후에는 전부가 염소들이라 한 개피씩 피워물면 텐트안은 너구리잡는 굴이 되고 술은 주력이 체력이라며 5일치를 다 마셔버렸기 때문에 허전한가보다. 2월 2일 일어나 텐트문을 열어보니 하늘빛이 어둡고 눈발이 날린다. 아침을 뭉기적거리며 많은 식사시간을 보내고 명식형, 영주, 국모가 중단을 우측 릿지로 오르고 재식이와 나는 하단의 빙폭에 도착, 장비를 점검하고 재식이가 출발할 때 10시 07분이었다. 오늘은 등반하는 팀도 없이 재식이의 함마찍는 소리, 아이젠소리, 거친 숨소리만 하단의 빙폭에서 울려나간다. 재식이의 등반모습을 보며 더 이상일 수 없는 파트너의 믿음직스러움을 느껴본다. 등대테라스 높이에 스나그 한 개를 설치하고 80미터 자일이 거의 끝날 무렵 움직임이 멈추었고 잠시후 세 번의 긴 호각소리가 내려온다. 내가 한단을 시작할 때 우측 릿지에서 영주의 하이팅이라는 메아리와 우리텐트옆의 솔로로 온 사람의 수고하시란 말이 고맙다. 재식이가 올라간 곳을 따라 가장 왼쪽을 오르니 시작부터 온 몸이 다 젖어버렸다. 먼저 오른 재식이도 물론 다 젖었겠구나! 위에서 재식이의 운회형! 하는 소리가 내려온다.(그래 빨리 올라갈게) 우중충한 날씨에도 나의 빌레이를 보며 환한 재식이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는 바로 중단을 향했고 재식이는 빌레이 지점의 스나그를 회수하여 중단으로 올랐다. 명식형, 영주, 국모가, 마련한 따뜻한 차 한잔과 간식을 하고 명식형의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상단을 향한다. 눈이 점점 쌓여가고 이정도로 눈이 빨리 쌓일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않했었기에 마음에 불안이 더해간다. 중단에 도착하니 명식형, 영주, 국모는 커다란 설동을 만들어 놓았다. 따끈하게 끓여놓은 스프를 먹고 눈발이 점점 심해져 서둘러 내려갔고 캠프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눈이 쌓여있다. 2월 3일 -눈사태- 저녁을 마친 시간에는 눈이 폭설로 변하고 우측의 사면에서 눈이 밀려 내려와 텐트의 한쪽이 짓눌려 장비와 식량텐트에 모든 장비, 식량을 넣어 닫고 숙영텐트만을 계곡의 한쪽으로 옮겼다. 눈발은 점점 거세지고 바람또한 세차게 구색을 맞춘다. 지금의 상황으로는 캠프를 철수한다는 것이 상당히 어려운 일같아 비상시의 식량과 의류, 신발등을 텐트속에 집어넣고 연유에 진하게 커피를 타서 마시고 밤을 새기로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계속 바깥을 살펴보지만 눈은 그칠 것 같지가 않고 상당히 많이 쌓인눈이 텐트의 입구를 절반이나 막아버렸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것같고 우리캠프옆에 홀로 온 사람이 안내려 갈꺼냐는 물음에 "글세! 지금 내려간다는 것도 우리에게는 커다란 어려움을 자초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하루 밤만을 지세우기로 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다 영주는 몸살기운으로 침낭속에 들어가 누워있고 국모, 재식이는 계곡 윗쪽으로 침낭에 기대어 졸고 있었고 명식형과 나는 쪼그려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찢어지는 듯 "쌕!" 하는 소리와 동시에 "퍽!" 하는 소리가 있었고 재식이, 국모의 상반신이 눈에 밀려 벌떡 일어나며 재식이의 얼굴이 나의 콧전으로 닥아온다. 세찬 눈보라가 계속되고 계곡의 가운데로는 키이상의 눈이 쌓여 전진이 불가능하다. 사면으로 붙어 하산을 하다 계곡을 건너야 되는 한 지점에서는 강희윤씨, 나, 국모 차례로 빠져들어 그 눈덩이를 빠져나오는데는 상당한 체력과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교대로 럿셀을 하며 전진을 하지만 럿셀이 아닌 눈의 헤엄치기이다. 한 사람이 20내지 30미터를 전진하고는 교대를 해야 했고 눈이 너무 깊고 계곡을 건널때는 눈 위에 전신을 엎드려 뱀처럼 기어간다. 눈사태가 떨어졌던 지역은 눈이 굳은 상태인지 발이 깊게 빠지질 않고 신속히 통과할 수 있었다. 커다란 고목이 넘어진 곳위에 올라 떡 반조각의 간식과 한 개피의 담배를 나누어 피우는 우리들의 모습에는 밤의 시달림도 아랑곳하지 않은 미소가 있다. 비룡교 도착(13시 40분), 육담폭포의 철계단은 모두 묻혀버리고 매점에서 간식을 얻으려 했으나 사람이 없었고 혜경이네집 휴게소에는 16시가 다되어 도착하였다. 이곳에도 사람이 없어 휴게실 의자에 앉아 나폴레옹 한병으로 삶? 승리? 성공? 뭔지 모를 축배를 들었다. 비룡교까지의 럿셀때는 10미터도 못가서 퍼져버리곤 하여 17시 30분 비룡교 매점에 도착을 하니 매점의 할머니가 놀란 듯 나오시며 옷에 묻은 눈을 쓸어주고 라면을 끓이고 나물반찬으로 대접을 받고 오랜만에 먹어보는 따뜻한 음식을 할머니의 정인 듯 하다. 매표소까지 럿셀을 해갔고 매표소밖에 나왔을때야 길이 트였다.우선은 B지구로 내려가 민박을 정한 뒤에 모든 대책을 세우기로 하고 도중 상점앞에 눈을 치운곳을 걸을 때는 평지를 걷는다는 것의 편안함을 새삼 느껴본다. 우체국에 들러 서울에 전화를 하는데 동전이 모자라 상황이 급박하다는 말밖에 못했으나 어떻게 전달되었을지 모르겠다. 많은 관광객들의 원색의 옷차림과 카메라를 들고 눈위를 굴러 다니며 많은 눈의 즐거움을 만끽한다.(저리도 좋을까?) 민박집을 정하고 서울에 연락을 다시 했는데 아까의 전화내용만으로 서울회원들간에는 전화내용대로 급박한 상황이었나보다.(서울의 회원들 상상에는 내가 눈속에 묻혀 있었대나?) 간만에 따뜻한 방바닥에 이불을 덮고 누우니 어제와는 다른 분위기에 잠을 못이루고 그 엄청났던 눈 사태의 이야기를 하며 시간가는 줄 모른다. 2월 4일 -장비지원 및 발굴대책-
각 개인이 필요한 장비(트라우져, 장갑, 스팻츠 등등)를 서울에 연락해 지원을 받기로 했고 발굴에 필요한 장비(삽..)는 민박집에서 구해 주겠다 했다. 장비 발굴은 약 이�{가량이면 눈이 굳어지고 눈사태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6일부터 작업에 들어가기로 했다. 하루 종일 휴식을 하고 오후에는 설악동나들이와 당구한게임, 노루목 묘지를 찾으려 했으나 럿셀이 않되어 도중에 돌아왔다. 서울서 아침 저녁으로 전화가 빗발치니 너무도 고맙다. 2월 5일 아침 늦게까지 잠을 자고 일어나 조식과 중식을 같이 했다. 영주와 나는 속초터미널로 서울에서 보내온 장비를 찾으러, 명식형과 재식이는 장비를 구하러가고 강희윤씨는 아는 사람을 만난다 하고 국모는 집을 지켰다. 장비는 예정보다 2시간 늦게 도착하였고 형님들의 편지와 장비가 그득한 배낭엔 형님들의 마음이 다 담아있는 듯 하였고 터미널 의자에 앉아 편지를 읽을 때 용문형의 보고싶은 운회에게.. 라는 서두에 코끝이 시리다. (몇년을 못본 것도 아닌데..) 저녁에는 장비목록을 작성하였다.
2월 6일 아침 배낭과 장비를 챙기로 픽켈대신 삽을 등반아닌 중노동을 하러 토왕골을 올라간다. 토왕골에는 벌써 럿셀자국이 있고 텐트가 들어와 있었다. 우리의 캠프지에 도착, 발굴작업은 우리텐트가 있던 자리부터 약 40미터 아래까지의 범위를 정해 우선은 윗부분터 파보고 장비가 전부 나오지 않았을 때는 아랫부분부터 전면적으로 다 파헤쳐보기로 했다. 장비가 한, 두 개씩 발견되는 것이 눈에 밀리면서 텐트문이 열렸는지 이곳저곳 산재해있다. 영주는 현장취재에 열중이고 우리는 장비가 한가지씩 나올때마다 환호성을 올렸다. 오후 4시쯤 작업을 끝낼 쯤에는 우리 장비의 3분지 2정도가 발굴되었는데 등반 장비텐트는 발견되지 않았다. 배낭 하나씩을 메고 민박집으로 돌아와 내일은 비룡폭위에 비박굴에서 비박을 하고 장비를 전부 찾자는 이야기를 했고 장비를 찾은 뒤에 다시 등반을 하자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등반보다는 더 커다란 산에서 삶의 경험이 있었다는 위안으로 장비를 찾는대로 철수하기로 했다. 2월 7일 토왕골 50미터 정도의 계곡의 눈을 전부 뒤집어 엎어 장비는 거의 찾았으나 아직도 몇가지의 장비를 찾지 못하여 비룡폭포위 비박굴에서의 비박을 한다. 저녁 시간은 눈 사태때 못다부른 노래와 토왕골에서 소주 한잔과 국모의 잡탕찌게를 다시 맛볼수 있게 된..., 뜻모를 기쁨이 있었다.
2월 8일 모든 장비를 찾고 남은 것은 국모의 핼멧뿐이다. "어이해 눈보라속에 사라졌나 국모핼멧!" 눈보라속에 사라진 국모의 핼멧 찾기를 포기하고 토왕골을 내려간다. 국모에게는 잃어버린 핼멧보다 더한 등반의 아쉬움을 남긴채 내려오며 뒤돌아 보니 장비파낸 자국이 마치 채석장을 방불케 하는 장면이다. 혜경이네 집의 휴게소에 들러 막걸리로 오늘 하루 중노동의 피곤함을 풀며 부산 클라이머팀과 합석을 하였고 인사를 나눈 뒤 비룡교를 거쳐 설악동을 나올때는 걸음걸이들이 제멋대로고 목이 터져라 노래를 불러 재끼며 민박집으로 향한다. 2월 9일 -결론- 서울행 고속버스편에 올라 가까이 있는 바다보다는 멀리 있는 하얀산을 보며 구곡폭포에서 처음 만나 토왕성 등반까지의 연장과 재식이와 상단에서 굳은 악수와 포옹, 중단에서 명식형, 영주, 국모의 따뜻했던 지원, 그 세찬 눈 사태와 눈보라가 있었던 죽음의 지대에서 삶의 환희를 느꼈을때와 강희윤씨의 만남, 형님들과의 대화. 이모든 것이 토왕골에서만 있을 수 있었던 산정(山情)임을 생각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