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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마복음 [2]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았던 것(1)
예수는 매우 모순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의미가 깊다.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째는 이것이다.
모든 사람이
거의 죽어 있는 것과 같을 때,
그때 평화가 가능하다.
그때 그곳에
어떤 전쟁도 갈등도 없다.
동시에 삶 또한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덤가의 침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 정적에는 아무 가치가 없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전쟁이 나을 것이다.
전쟁이 일어나면
최소한 활력이 넘치고
생기로 가득 차기 때문이다.
또 다른 형태의 평화가 있다.
완전히 다른 차원의 평화가.
그 평화는
그대가 활력이 넘치고
생기로 가득 차 있지만,
자기 존재에
중심을 두고 있을 때
찾아오는 평화이다.
그대가
자기 자신을 알았을 때,
깨달음에 이르렀을 때,
불꽃이 타올라 그대가
더 이상 암흑 속에 있지 않을 때
찾아오는 평화이다.
그때 그곳에
더욱 넘치는 생명력과
더 깊은 침묵이 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죽음에 속한 것이 아니라
삶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결코
무덤가의 침묵이 아니다.
그대가
이해해야만 하는 모순이
그것이다.
전쟁은 나쁘고
증오도 나쁘다.
그것들은
이 행성의 악이며,
사라져야만 한다.
병은 나쁘고, 건강은 좋다.
병은 사라져야만 한다.
그러나 죽은 자는 결코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죽은 자는 비록 부패할지언정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대의 모든 노력은 다만
죽은 세계를 만드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질병도 없고 전쟁도 없을 테지만
더불어 삶도 사라질 것이다.
예수는
그런 평화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형태의 평화는 무의미하다.
그때는 오히려 이 세상,
전쟁으로 나날을 보내는
이 세계가 더 나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펑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매우 소극적이다.
그들은 '전쟁만 없어지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이다.' 라고 여긴다.
그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만의 관념이 아니다.
버트런드 러셀 같은
위대한 철학자까지도 전쟁이 중지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소극적인 자세이다.
문제는 전쟁이 아니라
그것을 일으키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있다.》
만일 자신의 내면에서 싸우지 않으면
그대는 외부세계에서 싸울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싸워 승리한다면 그때
외부세계에서의 전쟁은 끝이 날것이다.
이것이 유일한 길이다.
인도에서는 마하비라(자이나교 창시자)를
정복자, 위대한 승리자, 즉 '지나' 라고 불렀다.
'지나'란 말은 정복자를 의미한다.
하지만 그는 누구와도
싸움을 한 적이 없는데
누구를 정복했다는 것인가?
그는 결코 폭력을 믿지 않았다.
전쟁을 결코 믿지 않았다.
싸움을 믿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이 사람, 마하비라를
'위대한 정복자'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그의 본명이 아니다.
그의 본래 이름은 바르다만이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어떤 현상이 일어난 것인가?
이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정복한 것이다.
일단 자기 자신을 정복하면
그 즉시
다른 사람과의 싸움은 중단된다.
《다른 사람과의 싸움은, 자기 내면의 싸움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속임수이기 때문이다.》
그대 자신이
평화로운 상태가 아닐 때
길은 두 가지밖에 없다.
혼자서 그 불편함으로 고통 받든지,
아니면
그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투영하는 것이다.
내면에 긴장이 고조되어 있을 때
그대는 곧바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
계기는
언제 어느 것이라도 좋다.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그대는
고용인이든 아내든 자식이든,
그 누구에게든 덤벼들 것이다.
그대는 어떻게
자기 내면의 갈등과
불편함을 해결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길 것이다.
그때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대는 지금 당장이라도
화를 낼 수 있고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대에게
해방감과 휴식을 가져다 준다.
물론 일시적인 것이다.
내면은 전혀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다시 축적될 것이고,
여전히 뿌리 깊은 것으로 남아 있다.
내일이면 또다시
분노와 미움이 쌓일 것이고,
그대는
그것들을 누군가에게
투영시켜야만 할 것이다.
그대는 내면에 끊임없이
쓰레기를 쌓아올리고 있고,
또 그것들을 밖으로
내던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이다.
자신을 정복한 사람,
자아 정복자에게는
내면의 갈등이란 없다.
싸움이 멈춘 것이다.
그는 내면에서 하나이며,
그곳에
분리된 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결코 자신의 것을
남에게 투영하지 않는다.
그러한 사람은 결코
다른 누군가와 싸우지 않는다.
따라서
내면의 갈등을 피하려고 하는 것은
마음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
내면의 갈등은 외부의 갈등보다
더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유는 여러가지다.
기본적인 이유는
인간 개개인이 자기 자신에 대해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는 데 있다.
그리고 삶이 그렇기 때문에
그대가 그러한 이미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정신분석가들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환상이 필요하다.》
만일 그대가
자신이 매우 나쁘고
악마와 같다고 생각해
그 이미지가
그대 내면 깊은 곳까지 침투한다면
그대는 전혀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자신감을 잃고
자기 비난에 빠질 것이며,
그것으로 인해
사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정말로
움직일 수도 없을 것이고
다른 인간 존재를
바라볼 수조차 없을 것이다.
심한 열등감,
극도의 악인 의식에
사로잡혀 죽고 말 것이다.
이 느낌은
자살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그것은 진실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진실을 변화시킬
길은 한 가지밖에 없다.
신의 인간이 되는 것이다.
악마의 인간이 아니라
신성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렵고
힘들고 기나긴 길이다.
수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악마는 신성이 된다.
《악마는 신이 될 수 있다.》
사실 '악마devil'라는 단어는
'신성divine'이라는 말과 어원이 같다.
악마도 신성도 모두
같은 산스크리트어
'데바deva'에서 유래했다.
악마는 신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신이
악마가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곳에 가능성이 있다.
그것들은
같은 힘의 극과 극이다.
시고 쓴 에너지가
달콤하게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내면의 연금술이 필요하다.
그것은 길고 힘든 길이다.
그리고 마음은 언제나
장애물이 가장 적은 지름길을 택한다.
따라서 마음은 말한다.
《"무엇 때문에 선한 인간이 되기 위해 괴로움을 겪는가? 자신이 선한 인간이라고 믿어 버리면 간단한 일 아닌가?"》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쉬운 일이다.
그저 자신이 선하다고
생각하기만 하면 된다.
자신이 아름다우며 성스럽고
자신과 비교할 사람은 아무 데도 없다는
이미지를 만들기만 하면 된다.
그리고 그러한 환상만 가지고도
그대는 살아갈 충분한 에너지를 얻는다.
《만일 환상이 그만한 에너지를 그대에게 줄 수 있다면, 진리를 깨달았을 때는 얼마나 거대한 에너지가 솟아나올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선하다는 환상만으로도
움직일 힘과, 일어설 다리와 자신감을
얻을 수 있다.
그대는 그 환상에
존재의 중심을 두게 된다.
《환상 속의 그 중심이 바로 에고이다.》
그대가 진정으로
중심에 뿌리내릴 때,
그것이
곧 진정한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체를 깨달았을 때만
얻을 수 있다.
내면의 에너지가 탈바꿈되어
낮은 것이 가장 높은 것으로,
땅의 것이 하늘의 것으로
탈바꿈되었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
악마가
신성으로 변화되었을 때,
자신의 빛으로 광채가 날 때,
씨앗이 싹텄을 때,
한 알의 겨자씨가
한 그루의 나무가 되었을때....
그러나
그것은 길고 긴 과정이다.
기다림의 용기가 필요하다.
지름길에
유혹되지 않을 용기가 필요하다.
삶에
지름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힘겨운 여행이다.
힘든 싸움을 통해서만
성장이 찾아오기 때문에 그것은
결코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것을 값싸게
손에 넣을 수는 없다.
값싼 것은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고난만이 도움을 준다.
그 노력, 그 고행, 그 긴 여행만이
그대에게 예민함,
성장, 경험, 성숙을 가져다준다.
지름길을 통해
어떻게 성숙해질 수 있는가?
자연은 서두르지 않는다.
마음은 언제나 서두르지만
자연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자연은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그 기다림은 끝이 없다.
사실 서두를 필요는 조금도 없다.
삶은 언제나 진행되고 있고,
계속해서 진행되어 나간다.
그것은 영원히 계속된다.
그러나
마음에게는 시간이 짧다.
그래서 마음은
시간은 금이라고 말한다.
삶은 결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삶은 "경험하라!"고 말한다.
시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삶은
기다리고 또 기다릴 수 있다.
마음은
기다리지 못한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삶에는 죽음이 없지만, 마음에는 죽음이 존재한다.》
마음은 언제나
지름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지름길을 찾는 데
가장 간단한 방법은
환상을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꿈꾸던
이상형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정신병자가 된 것이다.
정신병원에 수감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나폴레옹이고 알렉산더 대왕이고
그 비슷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것을 믿고
또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
마음은
지름길을 찾고 있으며,
환영이 그 지름길이다.
마야(환영)는 가장 간단하고
값싸게 획득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현실은 어렵고 힘들다.
고통을 당하면서
불길 속을 뚫고 지나가야만 한다.
불길 속을
뚫고 지나가면 갈수록
그대는 그만큼 익는다.
더 많이 익을수록
그것은 그만큼 더 가치가 있다.
그대의 신성은
시장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씨구려가 아니다.
그대는
그것의 값을 깍을 수도 없다.
그대의 삶
전체를 지불해야만 한다.
전 생애를 걸었을 때,
오직 그때만 그것이 가능하다.
그대가
다른 사람들과 싸우는 것은
그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대는 자신은 선한데
상대방이 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싸움은 늘 외부로 향한다.
자신을 바라본다면 그때
싸움은 안으로 향할 것이다.
그대는
자신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
그대보다
악한 사람은 찾기 힘들 것이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그대는 자신이 철저하게
나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무엇인가
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내면의 싸움,
내면의 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기억하라.
내면의 싸움을 통과하는 것,
그것이 하나의 비법임을.
그것은 수세기에 걸쳐
행해져 온 최고의 비법이다.
내면의 싸움이 있을 때,
그대는 합일된 인간이 된다.
내면의 싸움이 있을 때,
싸움을 하고 있는 각 부분을 넘어선
새로운 관찰자가 나타난다.
내면의 싸움이 있을 때,
에너지들이 서로 뒤섞이고
그대의 전 존재가 동요한다.
혼돈이 발생하고
그 혼돈으로부터
새로운 실존이 탄생한다.
새로운 탄생에는
혼돈이 필요하다.
이 우주 전체도
태초에는 혼돈 속에서 탄생했다.
그대가 진정으로
새롭게 태어날 때도
이 혼돈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예수가 말하는 전쟁이다.
그는 말한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착각하지 말라."》
그가
평화를 주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그는 그대가 원하는
그런 값싼 평화는
주러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ㅡ 도마복음
오쇼 강의/류시화 옮김. 청아출판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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