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장엄경론 제3권
10. 보리품[2]
[무루 법계가 매우 깊음]
이미 공용이 없는 마음에는 부처님의 일을 버리지 않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무루 법계가 매우 깊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앞과 같아서 뒤도 또한 그러하고
일체의 장애를 벗어난다.
청정함도 아니고 청정하지 아니함도 아니기에
부처님께서 여(如)라고 이르신다.
[釋] 이 게송은 법계의 청정한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앞과 같아서 뒤도 또한 그러하다’고 함은 이른바 청정하지 않다고 함이니, 자기 성품은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체의 장애를 벗어난다’고 함은 이른바 청정하지 않음도 아니니, 후시(後時)에 객진(客塵)을 벗어났기 때문이다.
‘청정함도 아니고 청정하지 아니함도 아니기에 부처님께서 여(如)라고 이르신다’고 함은 그러기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여는 청정함도 아니고 청정하지 아니함도 아니니, 이를 법계의 청정한 모습이라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청정하여 공하고 무아(無我)인 것을
부처님께서 제일의 아(我)라고 말씀하였다.
모든 부처님의 아는 청정하다.
그러기에 부처님을 큰 아[大我]라고 이르셨다.
[釋] 이 게송은 법계의 큰 아[大我]의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청정하여 공하고 무아(無我)’라 함은 무루계가 제일의 무아를 자기의 성품으로 삼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제일의 아’라 함은 제일 무아는 말하자면 청정과 같으니, 그 청정과 같은 것은 곧 모든 부처님의 아의 자기 성품이다.
‘모든 부처님의 아가 청정하기 때문에 그러기에 부처님을 큰 아라고 일렀다’고 함은 부처님은 이 아로부터 가장 청정함을 얻으셨음을 말한다. 그러기에 부처님을 일러 큰 아라고 하는 것이다.
이 뜻으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께서 무루계에서 제일의 아를 건립하였으니,
이를 법계의 큰 아의 모습이라고 이른다.
게송으로 말한다.
체(體)도 아니요, 체 아님도 아닌 것,
이와 같은 것을 부처님의 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이 논을 지으니
정녕 무기(無記)의 법이다.
[釋] 이 게송은 법계의 무기(無記)의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체가 아니다’라고 함은 인(人)과 법 두 가지 모양을 가히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체 아님도 아니다’라고 함은 같은 모양이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의 체를 말한다’고 함은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서 부처님의 체는 체가 아니요, 체가 아님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 때문에 이 논(論)을 지으니,
정녕 무기의 법이라 함에서 무기는 이른바 죽은 뒤에 여래가 있다고 말하든지 죽은 뒤에는 여래가 없다고 말하든지, 죽은 뒤에 또한 여래가 있고 또한 여래가 없다든지, 죽은 뒤에는 여래가 있는 것도 아니요 여래가 없는 것도 아니라는, 이와 같은 네 구(句)를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법계는 무기(無記)의 모양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쇠의 열(熱)이 식음[息]과 같고
비유하면 눈의 눈병이 제거됨과 같아서
마음과 지혜가 쉬는 것[息]도 또한 그러하여서
유와 무의 체를 말할 수 없다.
[釋] 이 게송은 법계의 해탈된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유하면 쇠의 열이 식음과 같고 비유하면 눈의 눈병이 제거됨과 같다’는 것은 이와 같은 두 물건에 열이 식고 눈병이 제거되면 이를 체도 아니고 체 아님도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체가 아니라 함은 열과 눈병에는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체 아님도 아니라고 함은 식는 모양에는 체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과 지혜가 쉬는 것 또한 그러하여서 체가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없다’고 함은, 모든 부처님의 마음과 지혜는 탐심[貪]으로 열을 삼고 무명(無明)으로 눈병을 삼으니, 그 둘이 만일 쉬게 되면 또한 체도 아니고 체 아님도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체가 아니라고 함은 탐심과 무명이 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체가 아님도 아니라고 함은 마음과 지혜의 해탈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를 법계의 해탈된 모습이라고 이른다.
[법계의 처소가 매우 깊음]
이미 법계의 모양이 매우 깊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법계의 처소가 매우 깊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모든 부처님의 무루계는
하나도 아니고 또한 많음도 아니니
앞의 몸을 수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이 아닌 것은 공과 같다.
[釋] 이 게송은 법계의 처소가 매우 깊음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모든 부처님의 무루 법계는 하나도 아니고 또한 많음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가 아니라 함은 전세(前世)의 몸을 수순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이요, 많음도 아니라고 함은 몸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몸이 아니라고 합니까?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법계의 처소가 매우 깊다고 이른다.
[업이 매우 깊음]
이미 법계의 처소가 매우 깊음을 말하였으니,
다음에는 업이 매우 깊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큰 보배 창고는
여러 보배들의 의지함과 같아서
청정한 경계도 또한 이와 같고
부처님의 법이 의지한다.
[釋] 이 게송은 법계의 의지하는 업(業)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청정한 법계가 10력과 4무외(無畏) 등 여러 보리분(菩提分)의 보배가 의지하는 것이 됨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짙게 낀 구름이 덮여서
비를 뿌려 온갖 곡식을 이루는 것과 같이
청정한 법계도 또한 이와 같아서
선근이 두루 퍼져 중생들을 성숙하게 한다.
[釋] 이 게송은 법계가 중생들의 업을 성숙하게 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청정한 법계를 좇아 온갖 선근을 흐르게 하여 중생을 성숙하게 하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해와 달이 차면
밝은 빛에 정화된 바퀴가 원만함과 같다.
청정한 법계도 또한 이와 같아서
착하고 청정한 무더기가 원만하다.
[釋] 이 게송은 법계가 구경에 이르는 업의 무더기를 말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복과 지혜가 청정한 법계로 말미암아 생겨남도 이와 같아서 두 무더기가 원만함을 얻기 때문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해가 떠올라
광명을 흘려 일체를 비추듯이
청정한 법계도 또한 이러하여서
말씀을 두루 퍼뜨려 뭇 중생을 교화한다.
[釋] 이 게송은 법계에서 바른 법의 업을 말함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햇빛이 합하여
한가지로 세간을 비추듯이
청정한 법계도 또한 이와 같아서
부처님께서 합동(合同)하여 업을 교화하신다.
[釋] 이 게송은 법계에서 교화로 짓는 업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유하면 많은 해와 많은 광명이 일시에 화합하여 한가지로 한 일을 지음과 같으니, 말하자면 말리거나 성숙시키는 것 등이다.
이와 같아서 많은 부처님과 많은 지혜가 일시에 화합하여 한가지로 한 업을 지으니, 말하자면 변화 등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햇빛이 비치는데
한량없고 또한 동시이듯이
청정한 법계에 부처님의 광명이 비치는
두 가지의 일이 또한 이와 같다.
[釋] 이 게송은 법계의 분별이 없는 업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유하면 햇빛이 널리 비침에 일정한 한도가 있지 않고 또한 동시이듯이
부처님의 광명이 널리 비침도 한량이 없고 동시인 것이 또한 이와 같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모든 햇빛이
구름 등의 가림이 있는 것과 같아
청정한 법계의 여러 부처님의 지혜에도
중생들의 장애가 있다고 말한다.
[釋] 이 게송은 법계가 짓지 않는 업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유하면 햇빛에 구름 등이 가려지면 이 때문에 비치지 않듯이 부처님의 광명도 중생들의 허물과 실수가 장애가 되어 다섯 가지 탁함[五濁]이 많기 때문에 짓는 것이 있지 않다.
게송으로 말한다.
비유하면 재[灰]가 번지는 힘으로
옷을 물들일 때 가지가지의 색이 나오듯이
청정한 법계의 행원(行願)의 힘은
해탈한 가지가지의 지혜이다.
[釋] 이 게송은 법계의 해탈하는 지업(智業)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비유하면 각각의 옷감이 재가 번지는 힘으로 말미암아 어느 것은 가지가지의 색을 얻고, 어느 것은 가지가지의 색을 얻지 못하는 것과 같이 3승(乘)의 청정한 법계도 또한 그러하여서 행원의 힘으로 말미암아 여러 부처님의 해탈은 가지가지의 지혜를 얻고, 2승(乘)들의 해탈은 가지가지의 지혜를 얻지 못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무루계는 매우 깊어서
상(相)과 처(處)와 업(業)의 세 가지가 있다.
여러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비유하면 허공에 물들여 그리는 것과 같다고.
[釋] 이 게송은 앞의 매우 깊은 뜻을 거듭 나타낸 것이다.
‘무루계는 매우 깊어서 상(相)과 처(處)와 업(業)의 세 가지가 있다’고 함은,
이 무루계에 대하여 세존께서 간추려 세 가지의 매우 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첫째는 상(相)이 매우 깊음이요,
둘째는 처(處)가 매우 깊음이요,
셋째는 업(業)이 매우 깊음이다.
상이 매우 깊음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청정한 상이요,
둘째는 큰 아[大我]의 상이요,
셋째는 무기(無記)의 상이요,
넷째는 해탈의 상이다.
이것은 차례대로 앞의 네 게송에서 나타내 보였다.
처가 매우 깊음에는 한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하나나 많음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섯 번째 게송에서 나타내 보였다.
업이 매우 깊음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보배가 의지하는 업이요,
둘째는 중생을 성숙하게 하는 업이요,
셋째는 구경에 이르는 업이요,
넷째는 바른 법을 설하는 업이요,
다섯째는 소작(所作)으로 화하는 업이요,
여섯째는 분별이 없는 업이요,
일곱째는 지혜가 짓지 않는 업이요,
여덟째는 해탈지의 업이다.
이것은 그 순서대로 뒤의 여덟 게송에서 나타내 보였다.
여러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비유하면 허공에 물들여 그리는 것과 같다’고 함은
무루계에는 희론(戱論)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다. 그러기에 매우 깊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매우 깊은 차별을 말하는 자는, 비유하면 허공에 물들이고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으니, 이 뜻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게송으로 말한다.
일체가 차별이 없다.
그러기에 여(如)를 얻으면 청정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모든 중생을
여래장이라고 이름한다.
[釋] 이 게송은 법계가 여래장임을 나타내 보인 것이다.
‘일체가 차별이 없다’고 함은 일체의 중생과 모든 부처님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기 때문에 여라고 이른다.
‘여를 얻으면 청정하다’고 함은 청정한 여를 얻어서 자기의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여래라고 이른다.
이러한 뜻에서 일체의 중생을 여래장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