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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장 17-21절. 우리의 참 소망
1.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과거에 잘한 것과 못 한 것을 다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전진해가야 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땅에 것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늘나라의 것에 소망을 두고 살라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2. “우리의 참 소망은 하늘나라”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늘나라를 소망 삼고 살아가는 바울 사도를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3: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Brethren, join in following my example, and observe those who walk according to the pattern you have in us.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Συνμιμηταί μου γίνεσθε, ἀδελφοί,
Imitators together of me be, brothers,
직역하면 ‘형제들아 함께 나의 모방자들이 되라’는 뜻입니다.
‘되라’(γίνεσθε)는 현재 명령형입니다(be).
그리고--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καὶ σκοπεῖτε τοὺς οὕτως περιπατοῦντας
and observe those thus walking
‘눈여겨 보라’(σκοπεῖτε)는 현재 명령형이고(observe), 원형(σκοπέω)은 ‘바라보다, 주의깊게 보다, 유의하다’(look at, regard attentively, take heed)는 뜻이 있습니다.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καθὼς ἔχετε τύπον ἡμᾶς.
as you have pattern us
직역하면 ‘너희가 우리를 모본으로 가지고 있는 것처럼’이란 뜻입니다.
‘가지고 있는’(ἔχετε)은 현재형입니다(you have).
1.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권했는데(빌립보서 2:5), 이제는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는 바울을 본받으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 내에서 바울과 바울의 추종자들을 본받는 자들을 유심히 살펴보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빌립보 교회 내에 이미 구원받은 자들로서 방탕주의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내에는 항상 율법주의와 방탕주의라는 2대 이단사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2.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은 완전을 향해 달려가는 바울의 모습을 본받으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는 정죄가 없다고 하면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이란 빌립보 교인들이 ‘우리’ 즉 바울과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2.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1)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자신을 본받으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율법주의자들이나 방탕주의자들을 따르지 말고, 자신을 본받으라고 권고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에는, 바울이 하늘나라를 소망 삼고, 이 세상에서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해서 눈물겨운 여러 가지 고난들을 당한 고난 목록들이 나옵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과 방탕주의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하늘나라보다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명예와 재물과 향락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당시 빌립보 교회에서 율법주의자들과 방탕주의자들과 신비주의자들은 빌립보 교회에서 자신의 육신적인 유익을 위해서 교인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자신을 본받으라고 한 것은 이런 잘못된 율법주의자들이나 방탕주의자들에게 미혹받지 않도록 하기 위한 가장 분명한 처방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험한 세상에서 신앙의 길을 바로 지도해줄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신앙생활에서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을 본받는 것처럼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어떤 무교회주의자들은 혼자서 신앙생활 하겠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혼자서 TV 설교 듣고, 인터넷에 들어가서 교제하고, 가끔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면서, 교회에 나오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신앙의 선배들을 통해서 신앙을 본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혼자서 독불장군처럼 신앙생활 하려는 자들을 따르지 말고, 건전한 교회에서 훌륭하신 장로님들 권사님들을 통해서 그 신앙적인 삶을 배워가시기 바랍니다!
(2) 우리가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부모의 삶을 통해서 신앙과 생활을 배워갑니다.
우리가 왜 부모님을 좋아합니까?
책에도 분명히 부모의 자녀 사랑과 자녀의 효도에 대해서 나와 있지만, 책을 백번 읽은 것 보다, 부모님께서 자녀들을 단 한 번 위로의 말 한마디와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주는 것이 더 낫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번 한 가정을 심방하는 중에 아름다운 사랑이 흐르는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이 가정은 몸이 불편하신 두 분 어르신과 젊은 내외와 손자 손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심방을 했을 때, 마침 젊은 내외가 안 계시고, 초등학교 다니는 손녀가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몸이 불편하신 것을 알고, 그 손녀가 음료수를 컵에 담아서 쟁반에 바쳐 가져오고, 할머니에게는 차지 않은 것으로 가져다 드리더라구요.
제가 감탄하며 기특해하고 있을 때, 할머니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자다가 이불을 차버리고 자면, 이 손녀딸이 와서 이불을 덮어주고 간답니다. 이 할미가 손녀를 사랑해주어야 하는데, 거꾸로 어린 손녀가 이 할미를 돌봐준답니다”.
그 집은 젊은 부부가 평상시 부모님께 효도를 잘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손녀도 어머니를 본받아서 할머니에게 그렇게 효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과 효도는 말로써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실제 본을 보여줌으로써 본받아 배우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우리는 바울을 본받고, 또 우리를 통해서 어린 학생들이 본받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이번 추석 때는 부모님을 만나 뵙거든 돈이나 물건만 드리고 오지 마시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한 번 안고 쓰다듬어 드리고 오시기 바랍니다!
이번 추석 때, 자녀들이 오거든 그냥 말로만 사랑하시지 말고, 나이든 자식들이라도 한 번 손이라도 잡아보시고, 얼굴이라도 쓰다듬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런 효도와 사랑의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주면, 어린 자식들이 커서 부모를 본받아 그처럼 다시 효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주님을 사랑하면서 충성하는 것을 실제로 본을 보인 것처럼, 우리도 가정이나 교회에서 실제로 사랑의 본을 보일 수 있기 바랍니다!
2.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1) 이 말씀은 바울 사도와 같은 정통신앙 지도자를 본받아 행하는 사람들을 주목하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따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은 바울 사도의 말씀이 바른 신앙의 표준인 줄 다 알지만, 당시에는 율법주의자들과 신령파 방탕주의자들이 바울을 거짓 사도로 매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처럼 바울의 가르침을 본받아 신앙생활을 하라고 간절하게 권면했습니다.
바울 사도를 반대하는 영지주의자들은 이 땅의 재물과 명예와 향락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하늘나라에 소망을 두고, 선교에 힘쓰느라고 명절 같은 것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늘날도 광주동명교회에서는, 바쁜 의사 선생님들이 명절 연휴 때면, 가난한 나라에 가서 의료선교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여기에도, 전에 명절 때 의료선교회에 참여했던 최*영 선생님이 예배에 오신 줄로 압니다. 지금 영남 초등학교에 재직중이신데, 오늘 예배에 참석하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은 땅의 것만 생각합니다.
3: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many walk, of whom I often told you, and now tell you even weeping, that they are enemies of the cross of Christ,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여러 사람들이--행하느니라.
πολλοὶ γὰρ περιπατοῦσιν οὓς πολλάκις ἔλεγον ὑμῖν,
many for are walking whom often I was talking you
직역하면 ‘왜냐하면 내가 여러 번 말했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말했던’(ἔλεγον)은 미완료과거로서(I was talking) 과거부터 계속 말해오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행하느니라’(περιπατοῦσιν)는 현재로서(are walking) 현재 행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νῦν δὲ καὶ κλαίων λέγω,
now indeed even weeping I say
‘눈물을 흘리면서’(κλαίων)는 현재분사로서(weeping) 현재 울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말하노니’(λέγω)는 현재형으로서(I say) 현재 말하고 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τοὺς ἐχθροὺς τοῦ σταυροῦ τοῦ Χριστοῦ,
these enemies of the cross of the Christ
1.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에서 바울은 잘못된 성도들을 권면할 때, 눈물로 호소하곤 했습니다.
이전에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말씀을 전할 때, 3년간 눈물로 훈계했습니다(사도행전 20:31),
또한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고린도후서를 기록할 때도 바울을 거역한 성도들이나 방탕한 자들 때문에 많은 눈물로 기록했습니다. (고린도후서 2:4).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란 교회 내에 금욕주의 신자와 방탕주의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당시 헬라철학의 두 사상(Stoicism, Epicurianism)의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 때문에, 일부는 금욕주의로 흘렀지만 일부는 방탕주의로 흘렀습니다.
즉 한 번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시는 정죄가 없다고 하면서 부도덕한 방탕주의로 흘렀던 것입니다.
반대로 일부는 헬라의 금욕주의로 흘렀고, 또 유대교의 영향으로 율법주의로도 흘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덕분이기 때문에 율법주의나 금욕주의가 합당치 않고, 또한 십자가 대속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은혜에 감사해서 영생 천국을 바라보고 경건하게 살기 때문에, 방탕주의는 십자가의 구원을 헛되게 만드는 마귀적인 태도입니다.
2. ‘왜냐하면’(γὰρ, for)이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를 말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십자가의 원수들이란 두 가지 이단 사상을 가리킵니다.
첫째는 율법주의 이단이고 둘 때는 방탕주의 이단이었습니다.
즉 율법주의 이단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할례를 받고 구약의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이단이었습니다.
그리고 방탕주의 이단은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은 정죄가 없기 때문에 방탕한 생활로 자유를 누려야 한다고 하면서, 부도덕으로써 기독교를 망치는 원수 이단이었습니다.
3. 내가 여러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바울 사도는 율법주의와 방탕주의와 신비주의에 대한 경계를 여러 번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의 그릇된 신앙 사조가 혼합된 것이 소위 ‘영지주의’였습니다.
제 1차 선교여행을 갈라디아 지방에서 하고, 교회들을 세운 후에도,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이 율법주의에 대한 경계를 했습니다.
갈라디아서가 그 내용입니다.
제 2차 전도여행을 하고서, 세운 고린도 교회에서도 영지주의 신령파 때문에, 고린도 교회가 여러 모양으로 문란한 생활을 한 방탕주의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경계를 했습니다.
제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세운, 에베소 교회에도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경계를 했습니다.
역시 로마 감옥에 있으면서, 골로새 교회에도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경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로마 감옥에서 3년간 있는 말기에 빌립보 교회에까지 이런 율법주의와 방탕주의가 뒤섞인 영지주의 이단에 대한 경계를 하는 것입니다.
2.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 사도는 에베소 교회 장로님들을 모셔놓고, 밤낮 3년이나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하면서,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영지주의 이단이 들어올 것이니, 장로님들은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잘 치리하라고 당부한 모습을 봅니다.
사도행전 20:28-32.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너희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니,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그런데, 이제 바울 사도는 로마 감옥에서,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다시금 눈물을 흘리면서, 이단을 경계하라고 경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이 성도들을 위해서 눈물로 곁길로 가지 않도록 호소했던 것처럼, 자녀들에게 예수 믿고 말씀대로 신앙생활 잘하도록 눈물로 호소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객지에 있던 자녀들이 찾아오거든, “내가 가장 원하는 효도는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다. 부디 불신앙 가운데서 죄짓고 살다가 가정을 파탄시키지 말고, 하나님 말씀 따라서 신앙생활 잘하거라”고 눈물지으면서, 신앙생활을 잘하도록 당부하시기 바랍니다!
3.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여기서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는 네 가지(율법주의, 금욕주의, 방탕주의, 신비주의)를 가리킵니다.
하나는,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고 율법의 규범을 따라 금욕주의 생활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율법주의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오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 맘대로 방탕한 생활을 하는 교인들을 가리킵니다.
이 십자가의 원수들은 한 편 그리스도의 완전한 속죄를 믿지 않고, 성도들에게 율법을 강요하면서, 금욕주의 고행주의를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율법적 속박에서 자유하려면, 신령한 지식을 소유하여, 율법과 육체의 억압에서 자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고 성령님 따라 말씀 순종하면서 생활하지 않고, 예수님 대신에 신비주의 사람을 따르고, 성령님 대신에 자기 감정에 도취되고, 성경 말씀 순종하기보다 신비주의자의 예언을 따라가는 신비주의 운동이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이 세 가지의 그릇된 신앙사도, 즉 금욕주의, 방탕주의, 신비주의의 혼합사상이 소위 ‘영지주의’ 이단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 밖에서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유대인의 율법주의나 금욕주의와 신령파의 방탕주의를 주장하는 이단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빌립보 교회 안에 있으면서, 바울을 통해서 전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고, 유대인의 율법주의를 따르고, 신령파 영지주의 이단을 따르는 교인들처럼 하지 맙시다!
우리는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님의 감동에 따라 살아가고, 이미 성경으로 기록해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가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ose end is destruction, whose god is their appetite, and whose glory is in their shame, who set their minds on earthly things.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ὧν τὸ τέλος ἀπώλεια,
whose the end destruction
저희의 신은 배요
ὧν ὁ θεὸς ἡ κοιλία
whose the God the belly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καὶ ἡ δόξα ἐν τῇ αἰσχύνῃ αὐτῶν,
and the glory in the the shame of them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οἱ τὰ ἐπίγεια φρονοῦντες.
those things earthly minding
‘생각하는’(φρονοῦντες)은 현재분사로서(minding) 현재 생각하고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1.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라는 것은 방탕주의자들의 궁극적인 운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신이 배’라는 것은 불신자들이 욕망 추구를 절대적인 존재로 여겨서 전심전력으로 욕망 추구를 위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골로새서 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숭배니라.
로마서 16:18.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저희 영광이 부끄러움에 있다’는 것은 방탕주의 불신자들이 여러 명의 첩을 두고 방탕한 생활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자기 영광으로 여기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땅의 일만 생각한다’는 것은 다음절(20절)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말씀과 대조가 됩니다.
2. ‘멸망’(ἀπώλεια)은 구원(σωτηρία)의 반대 개념입니다.
‘부끄러움’ (αἰσχύνῃ)은 영광(δόξα)의 반대 개념이고, 벌거벗은 수치와 수치스런 음부를 가리킵니다.
‘땅의 일’이란 육신적 향락과 이생의 자랑, 재물욕 등을 가리킵니다.
요한일서 2: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3. 저희의 신은 배요
본문은 방탕주의자들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물질주의와 명예와 향락을 따라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롬 16:18; 고전 6:13; 유 1:11).
베드로후서 2장과 유다서 1장에는,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의 대표적인 사례로서, 구약성경의 발람 선지자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유다서 1장 11절에는 이 사람들이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다”고 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15-16절에는,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자기의 불법을 인하여 책망을 받되 말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을 금지하였느니라”.
발람이란 선지자는 신비주의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았으면서도, 마귀의 영을 아울러 받은 사람입니다.
이 “선지자의 미친 것”이란 뜻은 발람이 신비주의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성령님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정신을 제대로 가지고, 모든 신앙 활동을 합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들은 자기의 정신을 벗어나서, 신비의 세계에 빠집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받아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성령님의 인도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삽니다.
그러나, 신비주의자는 자기의 정욕에 빠져서, 여자 신비주의자들은 여성도들에게 돈을 요구해서 사기해 먹든지, 남자 신비주의자들은 성범죄와 함께 재산을 바치라고 하고, 가정을 파괴합니다.
통일교나 신앙촌 이단이 다 그런 부류입니다.
발람에 관한 기록이 구약성경 민수기에 나옵니다.
발람은 원래 하나님의 영을 받은 선지자였으나, 말씀대로 살기 싫어하여, 유브라데스 강 쪽으로 가서 살면서, 물질과 명예를 탐하는 거짓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모세와 같은 참 선지자 앞에서 살면,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고, 하나님의 성령님을 속이다가 죽을 것 같으니까, 멀리 유브라데스 강 건너편에 가서 살면서, 사람들에게 예언 기도를 해주면서,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면서 크게 돈벌이를 하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 군대가 쳐들어옴을 보고, 영적 능력으로 저주하기 위해서, 유브라데스 강 건너편으로부터 영력이 있기로 이름난 발람 선지자를 모셔왔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좋으신 하나님께서 발람 선지자에게 모압 왕 발락에게로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발람 선지자는 모압 왕이 돈을 많이 준다는 말에 탐심이 생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멀리 유브라데스 강 건너에서 모압 땅에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하나님의 사자가 발람을 죽이려고 칼을 빼들고 좁은 길목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발람 선지자는 영안이 어두워서 그 칼을 들고 서 있는 하나님의 사자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이 타고 가던 나귀는 그 칼을 빼들고 선 하나님의 사자를 보았습니다.
나귀는 앞에는 칼든 천사가 서 있고, 발람은 막대기로 때리니, 억지로 천사를 비켜 갈려다가 발람의 발을 담벼락에 비비어 상하게 했습니다.
나귀는 칼든 천사를 보고,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발람이 나귀를 마구 때렸습니다.
그래서, 나귀가 발람에게 “나는 당신을 오늘날까지 충성되이 모시고 다닌 나귀였습니다”고 항의할 때에, 발람은 영안이 열려서 칼 든 천사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물질과 명예와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하기 위해서 모압왕 발락에게로 갑니다.
민수기 23-24장에서는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했으나, 결국 발람은 모압왕에게 이스라엘을 타락시킬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즉, 모압 여인들을 통해서 미인계를 써서, 이스라엘 군대의 두목들이 모압 여인과 음행을 하게 하고, 또 모압의 우상신인 바알브올을 섬기게 함으로써, 이스라엘이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듭니다.
이런 죄악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하루에 2만 4천 명이 염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비느하스로 인해 죄악과 염병이 그쳤고, 민수기 31장에서는 미디안 사람들과 함께 거짓 선지자 발람도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발람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선지자의 직을 버리고, 물질과 명예와 정욕을 따라서 타락한 거짓 선지자로 역사에 오명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4.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부끄러움'의 헬라어(αἰσχύνῃ)는 '벌거벗음'(nakedness), 또는 '사람의 은밀한 부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본문은 '저희'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부도덕한 일들을 서슴지 않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즐겼음을 뜻합니다( 엡 5:12).
<성도 여러분!>
이번 추석 때도 혹시 불신 친구들을 만나서 서로 옛정을 나누고, 어린 추억을 되살려 놀더라도, 하나님 말씀에 위배된 방탕한 생활을 하시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만 섬기다 보면, 인간적인 정이 그립기 때문에, 혹시 옛 친구들을 만나서 너무나 인간적인 정에 깊이 빠져서 말씀에 어긋난 죄악을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와 아울러 또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것은, 부모님과 조상들의 사랑과 옛정이 아무리 그립더라도, 하나님 말씀에 어긋난 방식으로 우상을 숭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생각만 해도 그립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오래 살아계신다면 내가 효도해드리고 얼마나 좋을까 너무도 그립고, 가슴이 저려오는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돌아가신 어머니 아버지를 생각할 때면,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애절한 마음과 아픈 가슴을 어찌 할 수 있습니까?
어떤 때는 아무도 모른 데서 혼자 눈물을 흘릴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아무리 돌아가신 어르신들의 생각이 간절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불신 친척들처럼 우상숭배하는 방식으로 효도할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돌아가신 어르신들에게 불효하는 것이고, 마귀를 기쁘게 하는 불효가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효도하는 길은 누가복음 16장에서 가르쳐주신 대로, 내가 지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 19-31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드리겠습니다.
예수 믿고 신앙생활 잘하는 것이 돌아가신 조상님들에게 대한 참된 효도가 됩니다.
귀신과 돌아가신 분의 영은 다릅니다.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고, 조상님이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5.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
그리스도인들이 '하늘 일'에 관심을 두는 반면(빌립보서 3:20, 요3:12), 이들은 '땅의 일' 즉 본능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생각하며 세상적 가치 기준을 따라 행동합니다.
통일교, 전도관, 정*석 등은 모두 순진한 성도들의 재산을 빼앗고, 가정을 파괴하는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6.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멸망'이란 특별히 사악한 자들에 대한 형벌로서 영원한 파멸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습니다(마 7:13; 벧후 3:7; 계 17:8).
'십자가의 원수'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을 믿지 않고, 또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없이 육신의 자유와 방탕에 빠져 삶으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발람이 타락하여 돈을 받고 예언해주는 거짓 선지자가 되었을 때, 결국 발람은 민수기 31장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와같이, 십자가의 구속을 저버리고, 세상 물질과 명예와 정욕을 따라가면, 멸망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잠시 이 땅의 돈과 명예와 향락을 따라가다 불신자와 함께 멸망을 당하지 마시고, 주님과 함께 고난의 길을 택하고,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의 삶은 나그네 인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참된 본향은 저 하늘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3-16절에는, “이 사람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래서, 아브라함도 이 땅에서는 나그네라고 증거했습니다.
또, 모세는 이 나그네 세상에서 하나님 없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보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시고 고난의 삶을 살기를 더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행복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에는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나그네 인생길에서 잠시 하나님을 버리고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을 모시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서, 영원한 천국의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으므로, 하늘나라를 소망 삼고 사시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New American Standard Bible: For our citizenship is in heaven, from which also we eagerly wait for a Savior, the Lord Jesus Christ;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ἡμῶν γὰρ τὸ πολίτευμα ἐν οὐρανοῖς ὑπάρχει,
our for the citizen in heaven exists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는 뜻입니다.
‘우리의’(ἡμῶν, for)가 초두에 나와 강조되어 있습니다.
‘있는지라’(ὑπάρχει)는 현재형입니다(exists).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ἐξ οὗ καὶ Σωτῆρα ἀπεκδεχόμεθα Κύριον Ἰησοῦν Χριστόν,
from whence also Savior we are awaiting Lord Jesus Christ
‘기다리노니’(ἀπεκδεχόμεθα)는 현재형으로서(we are awaiting) 현재 기다리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는 것은 하늘나라가 본국이고, 이 세상은 식민지(colony)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토(천국)에서 떠나 디아스포라(diaspora:διασπορά)로서 살아가고 있는 ‘흩어진 나그네’라고 했습니다(베드로전서 1:1).
유대인들은 본국을 떠나 70년간 포로 생활을 한 적이 있기 때문에, 이 ‘흩어진 나그네’(διασπορά)란 단어가 익숙했습니다.
당시에 이 편지의 수신자인 빌립보 교인들도 빌립보 도성이 로마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이 단어에 익숙했습니다.
그리고 ‘구원하는 자를 기다린다(ἀπεκδεχόμεθα)’는 것도 식민지 백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본국에서 오는 구원자를 간절히 기다리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완전 구원하러 재림하시는 것을 간절히 기다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구원하는 자’(Σωτῆρα: Savior)라는 표현도 본국에서 신민지 백성을 위험으로부터 건지기 위해서 파송한 구원자를 가리킵니다.
물론 여기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고생하고 있는 성도들을 완전히 구원하기 위해서 재림하시는 구원자가 되시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2. 본문 초두에 나오는 ‘왜냐하면’(γὰρ: for)이란 단어는 17절에 이어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즉 거짓 이단자들은 이 땅의 욕심에 젖어 있지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바울을 본받아서 하늘나라를 향해 달음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 시민권은 너무도 영광스럽고 완전한 행복이 주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와 일시적 체류자로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기다린다’(ἀπεκδεχόμεθα)는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탄식하며 기다리는 것을 뜻하는데,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영혼만이 아니라 몸까지 부활체로 구원받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로마서 8:21-23.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3.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십자가의 원수들(율법주의, 향락주의 이단자들)은 땅의 돈과 명예와 향락을 추구하지만, 우리 참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의 축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 교회의 참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참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히 11:13; 벧전 2:11)처럼 살아갔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장 11절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비록 지금은 지상에 살고 있지만,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므로, 하늘나라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지 말라고 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를 바라보면서 사는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서 육체의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추석 명절에도,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성도답게, 말씀을 순종하고, 마귀에게 제사하는 죄를 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4.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고향이 하늘나라이기 때문에, 참된 관심사가 하늘에 있으며, 목숨을 건져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신 좋으신 주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롬 8:21-23).
그래서, 로마서 8장 23절에는,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도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이유는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죄의 세력에서 완전히 해방받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늘의 참된 자유와 영광을 소망하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 말씀을 순종하면서, 인내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4-25절에는,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의 잠에 깊이 빠져서 살지 말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영혼이 깨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태복음 25장의 깨어있는 열 처녀처럼, 세상에 취해서 살지 말고, 저 하늘나라를 날마다 바라보면서, 주님을 사모하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New American Standard Bible: who will transform the body of our humble state into conformity with the body of His glory, by the exertion of the power that He has even to subject all things to Himself.
우리의 낮은 몸을--변하게 하시리라.
ὃς μετασχηματίσει τὸ σῶμα τῆς ταπεινώσεως ἡμῶν
who will transform the body of the humiliation of us
‘변하게 하시리라’(μετασχηματίσει)는 미래형이고(will transform), 원형(μετασχηματίζω)은 ‘후에’(μετά)란 전치사와 ‘모양’(σχῆμα)이란 명사를 합한 것으로서 ‘외모를 변화시키는 것’( change outward appearance after a change)을 뜻합니다.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σύμμορφον τῷ σώματι τῆς δόξης αὐτοῦ,
conformed to the body of the glory of Himself
‘같이’(σύμμορφον)는 ‘몸이 내적으로 동일한 본질을 갖는 형태로’( conformed, by sharing the same inner essence-identity, form) 변화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κατὰ τὴν ἐνέργειαν τοῦ δύνασθαι αὐτὸν καὶ ὑποτάξαι αὑτῷ τὰ πάντα.
according to the working of the enabling Him even to subdue to Himself the all things
‘복종하게’(ὑποτάξαι)는 부정과거 부정사형 동사로서(to subdue) 강력하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실 수’(δύνασθαι)는 현재 부정사형 동사입니다( to enable).
‘역사’(ἐνέργειαν)는 동사(ἐνεργέω, work)에서 나온 명사형으로서(working) 초인간적인 능력(superhuman activity)을 가리킵니다.
1.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만물을 정복하시고, 성도들의 몸을 부활하게 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낮은 몸’이란 지상에 있는 우리의 몸으로서, 죄성을 지니고 있고, 병약하고 죽게 되는 몸을 가리킵니다.
‘자기의 영광의 몸’이란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변화된 몸이나 부활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부활체를 가리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이 부활의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5:42-53, 데살로니가전서 4:16-17).
고린도전서 15:42-44.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이 부활의 몸을 갖게 되고 천국에서 영생하는 말씀은 복음이요, 우리가 평생 간직하며 살아갈 소망의 말씀입니다.
2.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의 '낮은 몸'을 예수님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
여기서 '낮은 몸'이란 이 세상에 살면서, 죄 짓기 쉬운 욕망, 죽음, 질병, 고난 등을 당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체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지금 우리의 썩을 몸, 죄 짓는 몸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의 몸'처럼, '썩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시키실 것입니다(고전 15:42-44).
그래서 고린도전서 15장 51-53절에는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 했습니다.
3.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이러한 변화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 곧 ‘'그리스도'의 역사’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역사'(ἐνέργειαν)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셨기 때문에, 영적인 원수들과 죽음을 이기시고, 마지막 날 성도님들을 완전히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이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더욱 주의 일에 힘쓰시는 여러분들 되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끝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