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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부여의 왕
부여왕조의 변화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러나, 부여의 역사가 짧지 않으므로, 그 과정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부여가 기록에 따라, 북부여(北夫餘), 부여(夫餘), 동부여(東夫餘) 등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도 그 역사가 단순하게 전개된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대체로 부여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하였고, 그곳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朱蒙)집단이 나왔으며 이들이 압록강 일대에 졸본부여(卒本夫餘) 즉, 고구려를 세웠다고 전해진다. 또한, 먼저 압록강 유역에서 살고 있던 이들의 일부가 한강 유역으로 내려와 백제의 건국세력이 되었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부여족이었던 백제는 그 왕실의 성씨를 부여씨(夫餘氏)라고 했고, 부여의 건국 시조인 동명왕(東明王)을 제사지내는 사당인 동명묘(東明廟)를 설치하였다. 또한, 백제는 6세기 중반 자신들이 세운 국가에 남부여(南夫餘)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여에서는 일찍이 국왕이 존재하였고 왕위 계승도 적장자 세습의 원칙이 지켜졌다. 그러나, 부여의 왕은 귀족들의 합의기구에 의해 권한이 제한되었고, 가(加)들의 대표로서 선임되었다. 그래서, “날씨가 고르지 못하여 수해나 한해가 생기고 그 해의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그 허물을 곧 왕에게 돌려 죽이거나 교체하였다”는 기록에서 부여 왕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부여에서 왕은 권력자이면서 동시에 귀족의 대표자로서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존재였다.
부여의 명칭
'부여(夫餘)’라는 이름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사기(史記)』이지만, 그 이전 문헌인 『산해경(山海經)』의 ‘불여(不與)’나 『일주서(逸周書)』의 ‘부루(符婁)’ 등과 같이 옛 기록에서 부여를 뜻한다는 구절에 대해 많은 설이 있다.
부여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도 역시 여러 의견이 있는데, 대부분 평원, 강 이름, 산 이름 등에서 유래했다는 지리적 면이 강조되고 있다. 우선, 부여의 원뜻이 ‘밝(神明)’에서 비롯되어 ‘벌’로 변화하였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여기서 ‘벌’ 역시 여러 뜻으로 변화하다가 평야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은, 부여의 중심지역이 송화강 연안의 동북평원 일대이고, ‘벌’이나 ‘부리’가 삼국시대 지명에서 자주 나타난다는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부여가 사슴이라는 뜻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부여의 원 거주지로 나오는 ‘녹산(?山)’이 사슴을 뜻하는 만주어와 몽고어에서 유래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으로, 북방 선비(鮮卑), 오환(烏丸) 등의 북방 유목민의 종족명이 그들이 원래 거주한 산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이다.
또한, 발해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부여의 사슴이었다는 점 등도 부여가 처음 거주한 곳이 녹산이었다는 사실과 연결된다. 따라서, 부여의 명칭이 퉁구스어에서 사슴을 일컫는 buyu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부여의 성립
우리나라에서 고조선에 이어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던 부여는 예맥족의 일파인 부여족에 의해 성립되었다. 부여족은 일찍이 송화강 유역을 중심으로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를 일구었고 송눈평야와 송요평야를 개척하였다. 그러나, 부여의 건국세력은 북쪽에서 송화강 유역으로 남하한 무리일 가능성이 많다.
건국설화에서는 시조를 동명(東明)으로 삼고 있는데, 그 내용에 북아시아의 풍토적 현상을 배경으로 담고 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부여의 건국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즉, 고리국(?離國) 출신인 동명 집단이 그곳에서 세력갈등을 겪다가 송화강 쪽으로 남하하여 정착하면서 그곳에 있던 예족(濊族)들을 중심으로 부여를 건국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해 볼 때, 부여는 기원전 3세기 후반경에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08년에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한사군을 설치하였고, 이후에 옛 연의 땅인 동북지구 남부가 비로소 “북으로 *오환(烏丸)ㆍ부여와, 동으로 예맥ㆍ조선ㆍ진번의 이로움을 이었다”는 기록이『사기(史記)』에 실려있다.
이로써, 늦어도 서한(西漢) 초부터 부여가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같은 역사서에서 진나라 시황제 때 오씨현의 라(?)라는 사람이 주변 나라들과 장사를 하여 큰 이득을 본 이야기를 전하는 중에 부여라는 명칭이 나온다. 그러므로, 이미 진시황 때(기원전 246-210)에 고조선과 함께 부여가 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5세기 고구려인의 기록인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에서 처음 나타나는 부여국은 북부여국(北夫餘國)이다. 즉, “옛적 시조 *추모왕(鄒牟王)이 나라를 세웠는데 (왕은) 북부여에서 태어났으며, 천제(天帝)의 아들이었고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말하는 북부여가 고구려 수도에서 볼 때 북쪽에 있는 부여를 뜻하므로 북부여와 부여는 같은 나라로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 생각이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북부여와 부여를 서로 다른 나라처럼 구별해 사용한 내용이 있다. 이에 따르면 북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한 집단이 강을 건너 세운 나라가 부여로 되어 있다. 따라서, 북부여를 고리국(또는 탁리국)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으며 부여의 기원이라 말할 수 있다.
한편, 이와 달리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부여의 기원이 동부여(東夫餘)에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동부여가 실재했던 국가라는 것을 뒷받침 할 만한 구체적인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동부여는 길림 일대를 중심으로 서단산 문화를 이끌었던 예족 세력이, 송눈평원 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던 원부여(북부여)의 세력이 이주해 와 성장하자 이를 동부여(부여)라 부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오환(烏丸) - 동호(東胡)족의 한 지파로 한나라 초에 이름을 얻었다.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 - 길림시 일대를 중심으로 나타난 청동기 문화로 대략 기원전 7세기에 시작해 기원전 3세기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고 있다. 서단산문화의 중심 분포지역은 송화강 중류로 이곳은 오곡 농사에 적합하였다. 이 문화에서는 대개 반지하 또는 석축으로 주거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길림시 동단산 일대에서 한(漢)과 한(漢) 이전의 유적 중에서 거의 원형을 이룬 토성이 발견되고 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서단산 석관묘군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의 씨족공동묘지로 농업생산 도구(마제 돌도끼, 반월형 석도, 끌, 갈판 등)와 여러 토기(삼족기, 시루, 물동이, 굽접시 등), 그리고 돼지뼈와 어망추가 많이 발견된다. 따라서, 이 사회가 경제적으로 농업과 함께 가축 사육 및 어업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보다 북쪽으로 눈강(嫩江) 지역인 송눈평원(松嫩平原) 일대에도 일찍이 농경이 발달하고 문화가 발전하였다. 대표적으로, 춘추시대 이전에 속하는 백금보-한서 하층문화와 전국에서 서한시대에 속하는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가 있다. 이 중,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가 당시 송눈 평원 일대에서 활약하던 부여족에 의해 이룩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단지, 그것을 부여의 조기문화로 볼 것인가, 아니면 부여 건국설화에 나오는 ‘고리국’의 문화로 보는가에 대해서는 의견의 차이가 있다.
그런데, 서단산 문화와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의 문화성격을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서로 남과 북쪽 지역에 위치한 두 문화가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지고 발전해 나가다가 기원전 4-3세기 즈음에 이르러 큰 차이를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설명이 가능해 진다. 즉, 한서 상층-망해둔 문화가 고리국(또는 탁리국)의 문화이고 그 중 일부 주민들이 남하하여, 먼저 내려와 서단산문화를 누리고 있던 앞선 부여족 주민들과 융합하여 부여국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발전과 전개
부여는 건국 이후로 빠르게 성장하여 나갔는데 그 과정은 건국 설화에인 동명신화에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부여국은 건국 후에 빠르게 발전하여 곧 분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기원전 1세기 경에는 많은 부여인들이 제 2송화강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동남쪽을 향해 옮겨 가기도 하였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동부여(부여)의 왕위가 금와왕(金蛙王)에게 계승되고 이어서 대소(帶素)에게 전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금와의 아들 대소가 22년 고구려에 의해 살해되고, 그 아우들과 추종자가 함께 압록곡(鴨?谷)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었다고 한다. 한편, 대소가 죽음을 당한 이후 부여 읍락의 대부분은 고구려에 투항하여 연나부에 안치되어 락씨(絡氏)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그 이후 매우 오래도록 연나부의 동부여인들은 상대적으로 독립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압록강과 가까운 지역에서 동부여로 표기되는 집단이 분화 발전된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는 1세기 초부터 이미 중국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하였고 늦어도 후한 초에는 중국식의 왕호를 사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 부여조에는 “매우 부유하고 선조 이래 남의 나라에 패해 본 일이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는 당시 부여가 경제력과 함께 강한 군사력과 통치력을 갖춘 사회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부여의 사회ㆍ경제
(1) 사회
부여는 왕과 대가(大加)들의 연맹체로서 중앙의 왕은 귀족과 관리를 거느리고, 대가들은 자신들의 종족을 기반으로 중앙 이외의 지역을 통치 하였다.
이들 통치계급 이외에 평민층으로는 호민(豪民)과 하호가 있었는데, 이 중 호민은 부유한 상층의 평민으로서 이들이 하호를 지배하였다. 그리고 이들 호민이 성장하여 중앙 귀족으로 된 신분이 가(加)인데, 이들은 자신의 세력 기반이 있는 읍락의 호민을 매개로 하호를 지배하였다. 급인 노비가 있어서 신분이 분화된 사회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같은 신분분화를 보여주는 이 시기의 무덤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그 대표적인 예가 *유수 노하심(老河深) 분묘군이다.
또한, 부여사회는 매우 엄격한 법률을 가지고 있었으며 엄격한 가부장권이 확립된 일부다처제 사회였다. 그리고 죄인들을 가두기 위한 감옥이 수도 뿐 아니라 전국 도처에 있었으며 중대 범죄는 *영고(迎鼓) 행사 때 제가들의 합의에 따라 처형하기도 하였다.
한편, 부여에서는 점복(占卜)의 습속이 유행하였는데, 이는 중국 은(殷)나라의 갑골점법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같은 관습은 흉노사회를 비롯해 고구려와 삼한 등 북방 및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보편적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2) 경제
부여에서는 기후와 토질에 맞는 농업을 주로 하면서도 목축을 겸하였고, 말?옥(玉)?*담비(貂)?구슬(美珠) 등의 특산물을 한(漢)민족에게 수출하고 금수(錦繡) 등을 수입하였다. 부여의 농업은 대체로 호민들이 토지를 사유하고 하호를 부려 농경에 종사하게 하는 형태였다. 그러나, 가뭄이 들어 농사가 흉년이 들면 그에 책임을 물어 왕을 죽이거나 바꾸기도 하였다. 토질이 비옥하고 평탄한 지역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이를 알 수 있는 유물과 유적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부여에서는 농업 뿐 아니라 목축업이 발달하여 말ㆍ소ㆍ돼지ㆍ개 등의 가축을 길렀으며 히, 부여의 대평원에서 생산된 말은 유명하여 일찍이 외국에까지 알려졌다고 한다. 또한, 여섯가지 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이름을 정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가축의 무리를 종류에 따라 전문적으로 길렀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는 농경민이면서도 훌륭한 말을 키워낸 것으로 보아 기마풍습이 일반화되어 있고, 보병과 함께 상당수의 기병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짐작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부여의 전성기 영역 내에서 유목민족들이 주로 사용한 철제 무기와 마구들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부여에서는 목축 외에도 상업과 교통이 발달하여 이를 바탕으로 주변의 나라들과 대외무역이 이루어졌다.
부여의 대외관계
지형상 대평원에 자리잡은 부여는 외부로부터의 침입을 막는 데에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부여지역은 유목민과 농경민이 서로 교차하는 중간지대에 놓여 있기 때문에 주변세력의 변화에 따라 민감하게 영향 받았다. 그리하여, 역사의 전 기간 동안 부여는 중국의 왕조들과 비교적 잦은 교류를 하며 가깝게 지냈으나, 북방 유목민족과 고구려와는 대립해 왔다.
(1) 고구려와의 관계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는 고구려의 성장에 따라 변화하였다. 고구려가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던 기원전 1세기에는 부여가 여전히 강력했던 데다가 두 나라가 같은 계통이라는 점 때문에 관계가 우호적이었다.
사실, 이 관계는 힘에서 열세였던 고구려가 어느 정도 부여에 예속되는 관계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점차 고구려가 빠른 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두 나라의 관계가 변화하기 시작한다. 성장하는 고구려 왕실에 볼모교환을 요구하는 등의 외교적 방법을 동원해 고구려를 여전히 자신의 세력 안에 묶어 두려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군사를 동원한 무력적 방법으로 고구려 왕실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 역시 고구려가 부여와 직접 맞설 수 있을 만큼의 힘을 키울 때까지만 유지될 수 있었다.
고구려가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긴 후 부여의 지배기반을 잠식해 오자, 이를 저지하던 부여왕 대소는 13년에 고구려를 공격하나 학반령(鶴盤嶺) 전투에서 크게 패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이후로 부여와 고구려 관계는 달라지게 된다.
오래지 않아 고구려는 부여에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여 지금의 휘발하 유역으로 생각되는 지역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 부여는 가까스로 이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국왕이 전사하였고 이를 계기로 지배층 내에서도 적지 않은 동요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지배층의 핵심 구성원들이 잇달아 조직적으로 고구려에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부여의 국력은 급속히 약화될 수 밖에 없었고,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해 중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외교적 대응을 모색하였다.
또한, 부여는 한랭한 북방의 송화강 유역에서부터 온난한 평야지대인 요하유역로 나아가고자 하였고, 고구려 역시 압록강 중류의 산간지대에서 농경지로 적합한 요동지역에 진출하려 하였으므로, 두 나라는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부여는 후한과 밀접한 군사외교를 펼쳐 나갔다.
(2) 중국과의 관계
중국와 부여와의 관계는 대부분이 우호적인 것이었다. 흉노(匈奴)의 세력이 강했던 서한(西漢) 초에는 그 관계가 비교적 적었으나,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한 이후 관계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두 나라의 관계가 급진전하게 된 것은 후한 초부터이다. 이 당시 부여는 남쪽의 고구려와 서쪽 유목민들로부터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또한, 한 왕조도 선비족과 고구려가 가까워지는 것을 막고 이들을 억누르기 위해 부여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여와 후한은 오래도록 매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 나가게 된다. 이같은 관계를 말해주는 여러 일화들이 전해지고 있는데, 그 중 다음과 같은 것도 있다. 부여왕이 죽으면 옥(玉)으로 만든 관을 사용하였는데, 한 왕조가 “미리 옥갑을 현도군에 가져다 놓고 왕이 죽으면 현도군에서 가져다 쓰게 하였다.”고 『후한서(後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부여와 고구려가 서로 요동평야에 진출하기 위해 경쟁하던 2세기에는 현도군과 낙랑군은 남아 있지만 실제로 요동군에 흡수되어 있는 상태와 같았다. 이 때, 후한은 그다지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펼치지 않았으므로 요동 평원을 두고 부여, 고구려와 요동태수 중심의 군현 세력이 치열하게 대결하였다.
한편, 예외적으로 부여와 후한이 서로 대립하였던 사건이 있었다. 111년에 부여왕이 “보병(步兵)과 기병(騎兵) 7?8천 인을 거느리고 낙랑을 노략질하고, 관리와 백성을 살상한 후에 다시 귀부하였다.” 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한, 167년에 부여왕 부태(夫台)가 2만명을 거느리고 현도군을 약탈하니 현도태수 공손역(公孫域)이 그것을 격파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사건으로 부여와 한의 국교가 일시적으로 단절되기는 하였으나, 오래가지 않아 다시 관계가 회복되어 우호적이고 밀접한 관계가 계속되었다.
부여의 문화
부여에서는 “은정월(殷正月)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국중대회는 연일 계속되며, 음식을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를 영고(迎鼓)라고 했다. 군대를 동원할 일이 있으면 또한 하늘에 제사했다.”고 전해진다. 즉, 일년에 한 번씩 12월에 영고라는 국중대회를 열었는데, 이는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마한의 10월제와 같은 성격의 제례로 씨족 사회의 관습에서 이어져 온 수확감사제였다.
그런데, 부여의 영고가 본격적인 사냥철이 시작되는 시기인 은정월(12월)에 치뤄진 것은 공동수렵을 하던 전통을 계승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축제 때에는 노예외 외래민을 제외한 전 부여의 읍락민이 참여해 밤낮으로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추며 보냈다. 또한 노인과 어린아이 모두 종일토록 노래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부여인들이 가무와 음악을 매우 좋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국중 대회 때에는 죄수를 판결하고 석방하기도 하였고, 한 해 농사의 풍흉이 결정되는 이 때에 왕을 교체하거나 살해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도 이 때에 이뤄진 회의에서 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밖에도 부여에서는 생활용기를 만드는 공예가 발달하였으며 기와와 벽돌을 이용하여 지은 궁성도 존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들은 백색을 숭상하여 흰옷을 즐겨 입었으며, 가죽신을 신었고, 상의와 겉옷(두루마기), 바지를 입었다. 국외로 나갈 때에는 수를 놓은 찬란한 비단옷을 입었다고 한다.
부여의 멸망
중국과 가까이 지내며 성장하던 부여는 서쪽에서 성장하는 *선비(鮮卑)족과 남쪽 고구려의 압력을 받게 된다. 특히, 285년에 선비족 모용외가 침입해 수도가 함락되고 1만 여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또한, 이 때에 국왕 의려가 자살하고 부여 왕실이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게 되는 등 국가적 위기를 맞이 하게 되었다. 왕위를 계승한 의라가 진(晉)의 도움을 받아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으나, 이후로 그 이전의 국력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게다가 4세기에 이르러 진(晉)나라가 북방민족에게 ?i겨 남쪽으로 옮겨 가고, 고구려의 공격까지 받게 되자 더 이상 원래의 중심지를 유지하기 어려워진 부여는 서쪽으로 근거지를 옮기게 된다.
그 이후 부여는 346년 전연(前燕)왕 모용황의 침입으로 큰 타격을 입고 급격히 국력이 기울어졌다. 그러나, 이 때에 부여가 멸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침입했던 연나라 군대가 귀환하자 부여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하였다. 당시는, 북중국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연이 부여에 대한 압력을 늦추었고, 고구려도 연의 침입과 남쪽의 백제에 대응하기 위한 방안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부여는 5세기 광개토왕의 대규모 정벌로 고구려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여왕은 고구려가 부여지역을 다스리기 위한 방편으로서 유지될 뿐이었다. 그리고 5세기 말에 이르러 국왕과 그 일족이 고구려에 망명,항복해온 것으로 부여는 완전히 멸망하게 된다.
[펌]☞http://k.daum.net/qna/view.html?boardid=QMA001&qid=2cT09&q=%BC%AD%B4%DC%BB%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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