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 창설기의 특별훈련(기합,氣合)
이 내용은 오늘의 해병들에게 해병대의 창설기에 해병들, 신병들에게 해병대 정신을 주입시키고 또 강인한 해병으로 육성하기 위하여 창설요원(간부)들이 실시한 훈련 중 훈련의 성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의 일환으로 실시한 특별훈련(기합, 氣合)에 대해서 설명하므로서 그 당시의 특별훈련(기합,氣合)이 어떠하였음을 이해하게 하고 또한 오늘날의 해병들의 특별훈련과 비교하게 하는데 이 내용의 목적이 있음.
여기서 설명되는 기합은 적과 전투 시의 살기(殺氣) 등등한 그런 기세라든가, 또는 전투 시 "돌격 앞으로!" 할 때의 함성 같은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훈계를 목적으로 개인이나 또는 단위부대에 가하는 그런 제재를 의미한다.
흔히들 말하기를 해병대는 기합이 쎈 군대라고들 말하는데, 해병대의 기합창설기나 다름 없었던 그 창설기의 기합은 과연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크게 나눠서 두가지로 살펴 보고자 한다.
1. 빳다
창설기의 기합은 주로 구령대 운반과 빳다를 비롯한 구보와 연병장에서의 포복, 또는 기합으로서의 총검술 훈련 등이었다. 구령대 운반은 주로 기마전에서 패했을 때 가해졌던 기합으로서 목재 구령대 위에 텀부링을 하듯 잔뜩 사람들을 올려 태운 다음 그 구령대를 어깨에 메고 연병장을 구보로 돌게 하는 것이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차례로 그 구령대를 메고 돌아다니긴 했지만 사람들을 잔뜩 올려 태운 그 구령대의 무게가 대단했으므로 어깻 죽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끼게 했다. 그러나 무어니 무어니 해도 역시 그 대종(大宗)을 이룬 것은 빳다였다.
해병대는 기합이 쎈 군대라고 하는 말들을 뒷받침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특히 신병훈련소시절에 얻어 맞았던 빳다에 대한 이야기들을 자랑삼듯 꺼내기를 좋아하는 현역 또는 제대한 해병들 중에는 어쩌면 불패 상승의 전통으로 상징되기도 하는 해병정신이라는 것이 바로 그 빳다에 의해서 근원적으로 창조되기라도 한것 같이 착각하는 사람들마저 없지 않을 정도로 해병대와 빳다는 상호 불가분의 깊은 인연을 맺어 온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창설기의 빳다 기합은 과연 어느 정도의 것이었는지 그에 대한 증언을 들어보자.
"그때는 하루의 규정량이 열 다섯대 정도였었는데 만약 특별히 잘 한 일이 있을 때엔 그 대수가 감해질 수도 있었지만 그 반대로 잘 못한 일이 있을 때엔 기본숫자에다 그 수를 배가하는 빳다의 수로 인하여 하루에 최하 설흔대는 얻어 맞지 않은 날은 없었던 것입니다...."
"빳다는 우리들에게 말할 수 없이 쓰라린 고통을 강요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것을 참고 견뎌내는 가운데 우리들의 정신과 육신을 무쇠같이 튼튼하게 만들 수가 있었던 것이고, 또 우리들이 그 모진 빳다를 참고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빳다를 치는 상관들에게 감정적인 증오심같은 것을 털끝 만치도 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증언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우선 그 빳다의 규정량, 다시 말해서 잘못이 없어도 최소한 그 열 다섯대의 규정량은 얻어 맞게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잘못이 없어도]라는 말은 피교육자들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일방적인 표현에 불과한 것이겠지만 아뭏든 하루에 최소한 열 다섯대 이상의 빳다를 맞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빳다를 맞을 때 "충무공 하나!" "충무공 둘!" "충무공 셋!"하며 스스로 힘껏 구령을 붙여야만 했고, 그 구령소리는 빳다의 댓수가 늘어감에 따라 차츰 애처롭게 시들어 가기 마련이겠으나 그럴 경우엔 그것을 핑게로 더 쎄게 맞든지 아니면 댓수가 증가되었으므로 시종일관 안간힘을 다해 큰 소리로 그 댓수를 헤아려야만 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런 특별훈련이 아주 잊혀?거나, 또는 근절되다싶이 된 이 빳다치기 기합은 최초 어느 시대에, 어느 국가의 군대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해병 1기생들을 훈련 시켰던 그 당시의 조교나 분대장, 또는 소대장들이 대부분 일본 해군이나 육전대 출신들이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그들이 일본군에서 겪었던 그 체험을 그대로 해병들의 훈련에 적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국전쟁 중 UN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던 영국 해군에서도 그때까지도 빳다를 친다고 그 당시 서해일대의 봉쇄작전에 참가하고 있던 영국 함정을 우리가 방문했을 때 영국 해군의 안내장교는 영국 해군에서 처음 빳다를 치기 시작했다고 우리에게 설명했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했던 사실은 그들 모두가 장차 국방의 최강부대가 될 무적 해병을 교육, 훈련하여 양성한다는 그 막중한 사명감과 뜨거운 애국심의 소유자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짐짓 그랬었기에 그들은 수없이 빳다를 첬지만 그것은 죄수들에게 형벌을 가하는 형리들의 태형 같은 것일 수 없었으며 언제나 공감이 가는 의지와 지성과 그리고 공정성이 결여되지 않았기에 스팔타식 훈련의 연장과도 같은 그 빳다에 대해서 어느 누구 한 사람 사감을 갖거나 또는 저주스로운 원한과 불평, 불만을 터뜨리지 않았었다.
빳다를 맞는 데에도 요령이 있기 마련이라고들 하지만 그것도 한 두대의 경우이지 한꺼번에 이 삼십대씩이나 맞게 될 경우엔 다들 그까짓 요령 따위에 집착하려 하지 않고 어쩔 수 없이 일종의 일과처럼 되고 만, 그 친근? 하면서도 구차스런 규정량이나 벌(罰)의 량을 초과하는 빳다를 어떻게 하면 아픔을 덜 느끼는 가운데 시원스럽게 후딱 맞아 넘겨 버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한 나머지, 결국 "충무공 하나 둘 셋..."을 크게 외치는 그 힘찬 목소리로 빳다의 댓수를 헤어 넘기는 새로운 전법?에 의존하게 된 것이었다.
한편 빳다에 의한 상처는 엉덩이에 시퍼런 멍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고 하루에 이 삼십대씩 얼흘, 스므날 또는 계속하여 두달, 석달 간을 맞은 해병들의 엉덩이와 뒷 허벅지가 어떤 모양으로 변해 있을까 하는 것은 누구나 상상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신병들은 입대식 바로 그 첫날부터 잠들 때가 되면 으례이 무언의 작업처럼 서로 옆신병의 엉덩이와 허벅지를 살며시 어루만져 주고 또 주물러 주는 습성을 지녀왔고, 또한 일주일에 한번씩 진해 시내에 있는 민간 목욕탕에 들었을 땐 서로 그 끔찍한 상처들을 대하면서 탕 내에서 안마도 해주고 또 심한 상처의 경우는 바늘 끝으로 따서 그 속에 응어리 져 있는 시커먼 피를 뽑아내 주기도 했다. 그들은 이열치열(以熱治熱)이라는 낱말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물론 어폐가 있는 말이긴 하겠지만 빳다로 인한 상처는 빳다로 다스려야 한다는 그런 소신으로 그 무서운 빳다공세를 감당해 내었던 그들의 심신은 공히 그러는 가운데 마치 대장깐에서 치여서 나오는 강한 무쇠처럼 그들자신도 모르게 강인하게 단련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기에 그들의 신념은 [필승] 바로 그것 일 수밖에 없었고, 또 철석같이 굳은 그 신념은 여하한 어려움도 능히 극복해 낼 수 있다는 불굴의 의지에 의해 반석같이 굳어져만 갔던 것이다.
해병 1기생들을 사나운 표범이나 무서운 사자같은 강병으로 양성하는데 유공했던 그 빳다의 공과(功過)에 대해서는 여기선 굳이 거론하고 싶지 않으나 다만 한가지, 그것이 효시가 되고 근원이 되었던 그 빳다는, 비록 격류와 난류의 흐름처럼 강약의 차도는 있었을 망정 상당 기간 지속되었었으나 휴전 후부터 세차게 일기 시작한 군의 민주화 여론에 의해 차츰 그 기세가 꺾인 끝에 결국 음성적인 경향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중 근래에 와서는 아쉽게도 그런 특별훈련은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빳다는 맞는 기술도 중요하지 만 보다 중요한 것은 빳다를 치는 기술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빳다를 잘 못치면 훈련병의 엉덩이 대신에 척추끝을 건디릴 수 있기 때문인데, 만일 그렇게 되면 훈련병에게 치명상을 입히게 되기 때문에 숙련되지 않으면 사전에 빳다 치는 연습을 상당한 시간 했어야 했다.
2. 구보(驅步)
海兵隊 發祥塔
사진 설명: 사진의 아랫쪽에 '진해 비행장' 활주로가 동서로 길게 보이며 활주로의 왼쪽끝 위에 검게 보이는 동산이 海兵隊發祥塔이 건립된 40m 고지이며 사진의 윗쪽에 보이는 산 능선의 중간에 모든 해병들의 훈련 목표였고 또한 훈련장이었던 天子峰(상투바위)이 위치하고 있음.
海兵隊의 發祥地인 경남 진해시 德山洞에 위치하고 있는 德山비행장(사진 중앙에 비행장 활주로가 남북으로 보이고 있으며 활주로 주변은 Golf장(9 Holes)으로 되어 있음). 사진의 북쪽이 진해시이며 오른쪽 방향에 天子峰이 위치하고 있으며 왼쪽에 행암만이 검게 보이고 있음. [海兵隊 發祥塔]은 사진의 중앙 윗쪽에 보이는 동산에 위치하고 있음.
다음은 빳다에 이은 특별 훈련과정의 범주에 속해 있던 기합, 구보에 관한 내용인데 이 특별훈련은 예나 지금이나 또 어느 나라, 어느 군대에서나 흔히 찾아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특별훈련과정일 뿐더러 별달리 특기할 만한 내용은 없지만, 다만 한가지 덕산비행장(德山飛行場 진해 경화동) 내에는 해? 약 40m 정도의 작은 고지가 하나 위치하고 있는데, 그 고지 위를 하루에도 수십번씩 오르 내려서, 연인원으로 계산하면 하루에 2-3만 개의 군화를 신은 발이 사정없이 짓뭉개고 밟고 다?는지라 그 고지 위엔 풀이 씨마르고 지표는 빤짓돌 처럼 빤질빤질하게 변한 끝에 나중에는 차돌 같이 변해 단단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빳다와 구보 외에 한여름에 내려 쪼이는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뜨거운 시멘트 바닥(활주로) 위에서의 포복 및 총검술 그리고 북풍이 세차게 불어오는 엄동설한 속에서 꽁꽁 얼어붙은 비행장 활주로 위에서의 포복, 총검술 등은 여기에 당연히 추가하여야 특별훈련과정이 아닐 수 없다.
해병들이 소총을 양손으로 받쳐 든 자세로 땅위에서 포복을 한다는 것도 심한 고통이 따르기 마련인데, 하물며 시멘트 바닥으로 된 활주로를 포복으로 전진하여야 했으니 그 고통을 어찌 필설로 전부 표현할 수 있을까!. 훈련복의 팔꿈치와 정갱이쪽은 여지없이 시멘트와의 마찰로 닳아서 헤어졌을 것은 두말할 여지조차 없고 또한 거치른 시멘트 바닥과의 양 팔꿈치와 양 무릎의 정면 대결의 결과가 어떠하였다는 것은 너무나 빤한 일이었다. 양 팔꿈치와 양 무릎에서는 시뻘건 선혈이 흘러 내렸고, 때로는 흰 뼈까지 보였으니 그 쓰라린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이런 고통은 당사자 만이 알 수 있는 그런 고통이었다.
기합을 정상적인 훈련으로 생각하고 또한 그런 훈련을 전투로 생각 했던 그 당시의 훈련 답당자로서는 물론 강병육성이란 지상의 Motto에 충실했던 나머지 훈련 중 피를 보지 않거나 또는 끝을 보지 않고서는, 소기의 목적를 달성하지 않고서는 적성이 풀리지 않았을 정도로 잔인한 면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당시의 훈련병으로서는 실로 초인간적인 인내가 강요되는 그러한 기합, 특별훈련이었다. 또한 엄동설한 속에서 진해만의 차디찬 바닷 속으로 뛰어드는 것도 전투수영이 아닌 특별훈련과정의 일부이기도 했다.
1951년12월4일 24:00시 해간 3기생들은 특별훈련의 일환으로 엄동설한 속에서 진해만의 차가운 바닷 속으로 뛰어들어 약 5분 간 그 속에서 견뎠으나 오히려 바닷 속이 밖앝보다 더 따뜻하게 느껴졌었다. 그리고 활주로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구보를 했으나 한 명의 감기환자도 발생하지 않았었다.
끝을 보지 않고서란 표현은 기합으로서 실시되는 총검술이 바로 그 실례였다. 이때 기합을 주는 상사로부터, 또는 훈련교관의 입에서 "총검술훈련 시작!"이라는 구령이 한번 내려지면 전원이 기진맥진한 끝에 앞으로 쿡 꼬꾸라져 버리기 전에는 절대로 중지하라는 구령을 내리지 않고 인간의 체력의 한계까지를 강요했던 것이었으니 누군들 이런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렀던 당시의 훈련과정, 기합을 쉽게 잊을 수 있을까!
그런 그들이 이제 80을 바라보는 老海兵이 되어 "한번 해병은 영원히 해병"이라는 정신으로 오늘의 해병들을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오늘의 해병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참고문헌: '덕산에서 월남까지'(저자 정채호 81세 예 해병 중령 정훈장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