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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사역 이야기1.
빈민가 사역
2005년 10월에 캄보디아에 온 후에 개인적으로는 NGO에 가입이 되지 않아 사역을 하지 못하고 나우 병원의
비자를 기다리는 중에(결국은 비자를 받지 못하고 비지니스로 일 년 연장했다.) 밥퍼에서 섬기는 이 00 선교사가 많은 빈민가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치료를 하였다. 이때는 시내에서 얼마 되지 않는 ‘뚠레 바삭’이라는 곳에 몰려 살고 있었다. 이곳은 도심지에 가깝고 1992년부터 빈민굴이 형성되어 계속 지방민들이 유입이 되었다.
정부의 이주 계획을 1차 추방 시에는 아이 5명이 개에 물려 죽었다 한다.
2차 추방 시에는 2001년 11월 방화하여 강제 이주하였으나 70% 이상의 주민이 되돌아왔다.(2차 추방 시에는 불을 질러서 화상을 입히게 하였다. 후에 화상을 입은 환자가 저의 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상당 기간 환자를 접하다가 보니 이곳의 사정을 알게 되었고 또 무료 진료를 하여 많은 사람이 고마워하고 있었다. 특히 다리가 썩어가서 도저히 회복 불가능 할 것이라 생각되어지는 노인이 낫고, 에이즈(당시에는 초창기라 몰랐다.-지금도 밥퍼에서 그 부인의 남편이 일을 한다.-당시에는 마약을 취급하는 두목 급이었고 선교사를 위협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의 사랑으로 변화가 되어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하는 사람으로 변하고 빈민가 주민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존재가 되었다. 또한 캄보디아 의사의 오진으로 맹장염을 모르고 복막염 직전에 우리의 도움으로 수술을 하여 생명을 구했다.)에 걸린 아기 엄마의 치료와 많은 도움을 줌으로써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또한 어린아이가 예뻐서 선교사가 항상 안고 다니곤 했다. 후에 알고는 가족 전체를 에이즈 검사하고 선교사 자신도 검사하여 결과에 안심하였다. 이곳은 전체 인구의 약 20%(사창가의 창녀와 같은 수준)가 에이즈 환자이다.
치과치료 중 피가 튀거나, 상처가 난 곳을 치료하다보면 손에 피가 묻는다. 치과의사의 말이 나에게 도전을 준다.
만약에 이러다가 에이즈에 걸리면 에이즈 환자를 위하여 일을 하라고 믿고 사역을 하겠다는 것이다.
전에 하와이에 문둥병자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스스로 문둥병자가 된 신부가 기억이 난다.
실제로 큰 봉제 공장의 사장의 도움으로 병원이 세워지면 에이즈 환자를 위하여(에이즈 환자는 일반 병원에 치료하지 못하고 겨우 약국에서 약을 사 먹을 뿐이다.)따로 방을 만들어 치료 할 예정이었으나 아직 때가 되지 않았는지 무산되고 말았다.
이때의 이 빈민가의 사정은 밥퍼가 있는 곳은 마약거리이고 안으로 임 OO 선교사가 있는 곳은 한국 선교사로서는 유일하게 학교를 운영하는 곳이 있었고, 더 안쪽으로는 자체 내의 창녀촌이 있고, 거의 매일 초등학교 가량의 나이 인 여자 아이들을 엄마가 외국인에게 하루 20~30$(이들의 한 달 집세이다)에 몸을 팔아서 생계를 하는 곳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은 쓰레기를 뒤져 고물상에 팔아 돈을 얻어 본드를 하고 마약을 한다. 지금도 거리에는 비틀거리며 고물을 줍는 아이들이 많다. 이 나라는 쓰레기는 거의 사용할 정도로 이용한다. 거리를 지나다보면 이들이 아는 체를 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사탕수수를 잘라 시내에서 팔고 또는 모토독이 되어 시내 교통의 수단이 된다. 고로 많은 오토바이 운전자들은 거의 도둑들이 많다.
빈민가 많은 주민들이 마약을 하고 어린아이의 70~80%(학교 아이들도 같은 정도)가 본드릃 하는데 처음에는 왜 하는가를 몰랐으나 후에 하도 배가 고파서 500리알(=125원)의 본드를 마시면 2일간 배가 고프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이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거의가 일을 하지 않고 자식들이 가져다주는(학교는 일찍부터 가지 않는다.) 벌이로 마약을 하고 노름을 한다.
이러한 곳에서 점점 의료사역(당시에는 치과의사와 같이 함)을 함으로써 이들과 친숙해지기 시작했으며 시내에서 종종 치료받은 모토 독들이 알아보곤 한다. 이곳에 살던 부인(나이는 젊으나 남편이 있고 여자는 밤에 몸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약물을 흡입 한다.)을 우연히 식당에서 알게 되었는데 나에게 와서는 자기 엄마가 치료를 받고 좋아졌다고 고마워하여 집안 사정을 물어보니 아버지와 언니, 그리고 남동생은 헤로인 중독으로 죽고 자기는 마약을 하지 않으나 몸을 팔아 자식과 남편을 먹여 살리고 자주 외국인과 자면서 도둑질도 한다고 한다. 도둑질을 할 때에는 항상 2명이 한 남자와 자면서 한다고 한다. 자기는 밤에 자지 않고 일을 하려면 야마와 아이스(중독성 약물-야마: DEXTROAMPHETAMINE 와 아이스: CAFFEEIN이 함유된 복합물질)를 하여 몸이 점점 말라간다고 한다.
충북 노회 목사님 3분이 방문하여 다리가 썩어가는 것을 치료받은 노인을 보고, 상기 기술한 곳을 구경하였는데 위험성이 있었으나 치료 해준 덕에 무사히 방문하게 되었다.
후에 웃질 못할 헤프닝이 있었는데 학비를 보조해주는 ‘쓰라이 몸’이라는 아이(부친이 전에 학교 교장 선생님이었다는데......왜 빈민가에서 사는지 모르겠음. 밥퍼 선교사의 추천으로 처음 장학금을 주게 됨.)를 찾다가 ‘쓰라이 언’이라는 부인을 방문하다 한 번은 개에 물리고, 또 한 번은 오염된 물에 풍덩 빠지는 일이 생겨 후에 그녀를 만나면 박장대소하며 웃곤 한다. 결국은 이 가족은 구제 대상에서 제외 되었다.
그러던 중 정부의 방침으로 프놈펜 트마이라는 곳에 강제 이주가 되었고(1차 추방은 2007년 5월 3일에 시행되었는데 주택 권리가 있는 1,216세대가 대상이었고 이들은 땅을 분배 받았다. 그러나 정작 400세대만이 살고 있고 시내와 멀어서 땅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1차 이주지는 임 OO 선교사가 학교와 교회 사역을 하고 있고, 2차 이주는 2007년 6월 6일 700명의 경찰을 동원하여 강제 이주를 하였는데 세를 살던 400세대가 대상이었다. 현재 약 1,820세대 7,000명 정도가 살고 있지만 오직 306세대만이 토지를 분배받았는데 1차 이주지보다 매우 작다. 이 지역(더 열악함)은 밥퍼가 시앤립으로 옮겨서 프놈펜은 억지 춘향으로 치과의사가 맡아서 밥을 나누어 주게 되었고, 같이 매주 2회 정도 진료를 하게 되고, 다른 선교사의 초청으로 외부로 갈 때는 같이 동반하여 진료를 하여 매우 효과적인 진료가 되었다.
처음 이주 시에는 땅(이것도 아직 정부에서 나누어주는데 부정이 많다) 외에는 거의 전무하여 밥퍼에서 주는 한 끼 식사가 이들의 전부이고 물은 UNICEF에서, 화장실은 다른 NGO에서 공급하고 거의 막대기에 천막을 걸쳐 살고 있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좋아졌지만 땅 투기가 이곳에서도 이루어져서 많이 팔고 다른 곳으로 가는 이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정부에서 땅을 준다하여 몰려들기 시작하고 많은 구제품과 쌀을 몇 십 킬로그램씩 나누어주어 구제되었다. 많은 한국 단기 선교 팀들과 교회들이 도움을 주었으나 후에는 노름으로 딱지(구호품) 를 잃어서 한 명이 여러 쌀부대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직접 방문하여 선정하여 나누어 주었다. 후에 이 나라 왕이 하사한 쌀을 나누어 주었고 이후로는 쌀을 나누어 주지 않고 다른 것으로 대치하여 준다.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아프면 현지 사역자가 아무 때나 전화를 하여 밤중에 깨는 경우가 많았고 치과의사는 저에게 상담을 하여 시내 병원으로 후송하여 치료 해 주었다. 물론 돈 한 푼 내지 않고 대신 치료비를 지불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지금도 가끔 현재 선교사(2007년 3월 말로 밥퍼에서 치과의사의 후원이 끊겨 사역을 그만두고 베트남에서 사역하던 선교사가 맡아서 함)가 상담을 하여 자문을 구한 후 조처한다.
지금은 일주일에 1회 화요일에 진료를 하는데 점점 환자 수가 줄고 있고 영양 상태도 좋아지고 있다.
이곳은 한 달에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고, 거의 모든 주민이 영양실조이고 아이들과 산모 또는 노인들 그리고 일을 한 청년들을 상대로 밥을 주고 있다. 하루에 한 끼를 제공하는데 11시 30분에 제공한다. 이들의 식사 시간이지나면 이후에는 낮잠을 잔다. 현지 사역자가 지금은 크메어와 영어도 가르치고 있다.
순식간에 물건이 없어지므로 조심을 해야 한다. 본인도 그동안 모아두었던 의료 기구를 몽땅 도적맞아서 지금은 겨우 드레싱 할 수 있는 도구만 남아있다.
이들의 질서의식은 전혀 없어서 사소한 구경거리(주로 싸움질과 교통사고) 가 있으면 떼거리로 몰려든다. 지금은 줄을 서서 기다리지만 처음에는 막대기로 때려서 줄을 서게 했다. 이렇게 질서를 잡기에는 3개월이 소요되었고 지금도 차례를 기다리지 않고 새치기를 하면 진료를 멈추고 줄을 세운다. 전에는 새치기하는 청년과 싸우기도 하여 지금은 진료 시에는 거의 차례를 지킨다.
이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러나 희망을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다시 찾아 회복되리라 믿는다.
밥을 받을 때마다 ‘어꾼 뿌레야 예수’(예수님 감사합니다.)하며 받는다. 진료 후에도 같은 소리를 해야 하는데 밥보다는 약이 못하는가보다. 이들에게는 약은 곧 돈이 된다. 아프지 않아도 이 나라에 흔한 증상 두통약을 받아 팔아먹는다. 연고를 통째주면 아예 자기는 치료하지 않고 진료 장소에서 먼 거리가 아닌데도 개의치 않고 팔아먹는다.
전에 아가 방 옷을 주었더니 다음날에 모두 시장에서 볼 수가 있었다. 지금은 옷을 나누어줄 때는 아예 흙탕에 묻혀서 주기도하고 신발은 끈을 끊어서 주기도 한다. 그래도 많은 아이가 아직도 신발이 없고 옷이 없다. 주어도 끝이 없는 이들이다.
도저히 사랑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나 자신은 그들을 상식선에서는 사랑 할 수가 없으나 내 가슴에 항상 용서의 용납을 원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용서한다.
그들을 위해 울 수 있다는 것-이것만이 주님이 나에게 주신 죄 사함의 끝없는 용서의 답이다. 주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신 용서를 주셨는데....... 어찌 내가 주님이 주신 용서로 그들을 용납하지 않을 수 있으랴. 주님 먼저 저를 용서하옵소서. 아직까지도 교만과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육체의 한계를 용서하시고 주님의 충실한 사역자가 되게 하시고 죄 사함의 감사를 알게 하소서. 아멘
캄보디아 사역 이야기2.
봉제 공장 이야기
2주에 한번 월요일에는 한인 교인 사장이 운영하는 “가원 어패럴 봉제 공장”에서 진료를 한다.
전에는 “비시 캄보디아” 사장이 순복음 교회 집사이고 교회도 크게 짓고 다른 건물에는 병원과 간호대를 설치 할 예정이었고 2,000명의 직공이 있었으나 부도가 나서 다른 믿지 않는 자가 인수하려다가 시아누크빌에 휴양을 가다 교통사고로 죽는 바람에 현재 사장이 인수하였다. 850명의 직공이 있으나 계속 모집하는 중이고 매일 시골에서 올라오는 아이들을 접견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약 100명~200명사이의 환자를 진료하는데 9시부터 11시30분까지 2시간 반 만에 마쳐야한다. 11시 30분 이후에는 점심시간이기 때문이다. 또한 진료 받으러 교대로 오기 때문에 매우 속도가 느려지는데 진료 대상자가 많다보니 정신없이 진료를 한다.
전에 비시캄보디아의 직공들은 많은 영양실조(점심으로 2,000리알(=500원)을 주는데 아끼느라 500리알(=125원) 의 빵 반 조각을 먹고 일을 한다.)가 있다. 그래서 많은 아이들이 쓰러져서 오는 경우가 많다. 처음에는 구제 대상을 삼고 진료와 구제를 하였는데 한이 없다.
지금의 아이들은 그래도 사장이 큰 관심을 두고 건강을 챙기고 식사도 제대로 하기 때문에 문제가 덜하다. 사장이 믿음이 있어서 아침 조회 때마다 예배를 드리고, 밥퍼에 정기적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봉사를 시킨다. 이들에게는 이 봉사가 아주 중요한 교육이다. 간부진으로부터 모든 직공들에게 더욱 가난한 이들을 보게 하여 일을 열심히 하여 돈을 모으도록 격려시킨다.
이 나라의 물은 양은 많으나 쓸 만한 물이 없다. 물풍년에 물 기근이다. 오염된 물로 목욕을 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여자들이 냉, 대하가 많고 또한 공장에서 반복적인 작업을 하기 때문에 근육통을 호소한다.
질정을 나누어주는데 약품 값이 만만치 않다. 항상 이곳에 오면 약품을 걱정한다. 반절의 양을 주어도 낫기는 잘한다. 그러나 환경으로 인하여 항상 재발을 한다. 근육통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거의 약품은 같은 것을 사용하기 때문에 단일 약품의 소요량이 많다.
과거 한국의 구로공단의 직공을 생각나게 한다. 월급은 70$~120$선인데 많은 돈을 집으로 부치고 정작 본인은 하루 1$ 미만으로 산다. 숙소는 작은 방에 5명이 살아서 1인 한 달 5불 정도이고 이 방은 최소 2부제 혹은 3부제로 10명 혹은 15명이 한 방을 이용하여 잠만 잔다.
이러한 공장 아이들을 위하여 사역하는 싱글 선교사들이 많다. 이들을 위하여 가끔씩 선교사가 진료를 요청한다. 그러나 거의 같은 질병이다. 그래서 질정과 진통, 소염제 및 근 이완제, 그리고 파스 류가 불티나게 나간다. 아마도 한국 같으면 노다지 황금시장이다. 산부인과와 정형외과가 단순 질환으로 많은 환자를 볼 수가 있다. 두통, 복통(오염 된 물로 인함), 관절통, 그리고 냉, 대하증이다.
이들은 그래도 나름대로 삶을 영유하며 즐기기도 하고 남자 친구를 사귀어서 더욱 돈을 모으는 애들도 있다. 그러나 결국에는 많은 것을 잃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고 그 후유증은 거의 여자 몫이다.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사자나 호랑이처럼 자식들을 남기고 다른 여자에게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곳은 모계사회이고 여자가 직장을 잡기 쉽기(?) 때문에 여자가 고스란히 감당을 하고 있다.
이들도 노조를 형성(없으면 종합으로 대항)하여 가끔 데모를 하고 일을 하지 않는 경우를 본다. 우리들의 옛날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들은 근무 교대시간이 되면 거의 거리가 통행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쏟아져 나온다. .(미완) -계속-
어느 공장에는 인력이 10,000명이 넘는 직공들이 일을 하는데 점심시간이면 무수히 거리로 나와서 식사를 하는데 차량이 통과하기가 만만치 않다. 이들의 점심은 한 끼 겨우 250원~1,000원짜리로 해결한다.
이 나라 여자들이라면 거의 이일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이 업종에 종사한다. 이들에게는 시간 외 일을 원하는데 그리 많은 것 같지 않다. 요즈음은 물가가 올라서 임금도 자연히 올랐지만 여전히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중국인이 운용하는 회사는 기숙사와 식당을 운영하여 그나마 월급에서 착취한다.
이곳에는 의무적으로 캄보디아 의사가 있기로 하였으나 거의 진료는 간호사가 하고 오전 근무만 마치면 바로 집으로 가서 개원하여 환자를 치료한다. 즉 이중 직장을 갖고 있다. 심하게 아파서 병원에 가라고해도 돈이 없어서 가지 못하고 병을 키우는 사람이 많다. 단지 약국에서 약만 사서 먹는다. 고로 진료 시 흔히 듣는 이야기는 질병에 관계없이 약을 많이 달라는 것이다. 후에 병이 나면 복용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