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산동성 등주를 공격하는데 한반도 북부에서 충분히 도달할 수 있기 때문에 요동에서만 등주로 간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의견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항해기술의 미비로 연안항해가 일반적이지, 황해를 사단으로 하는 항해는 드뭅니다. 또 황해를 사단하려면 압록강하구나 청천강, 대동강 하구에서 황해도 장산곶 까지 내려와 황해를 가로질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해도 일대는 신라 영토라 이것도 힘듭니다. 결국 장문휴 장군이 이끄는 발해 해군은 요동반도 남단의 해안을 따라 장산열도를 지나 요동반도 끝에 이르러 묘도열도를 따라 발해만을 건너 등주로 공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이것은 발해의 요동반도 장악에 있어 방증자료일 뿐이지요.
중요한 것은 자치통감 당현종 21년(732년) 기록에 발해의 대무예가 당을 공격해오자, 당나라는 당나라로 망명온 대문예를 시켜 유주의 병사들을 동원해서 막게 합니다. 유주는 지금의 북경과 난하일대지요. 왜 유주의 병사를 동원했는가 하면, 당시 발해가 마도산(馬都山)까지 공격해왔기 때문입니다. 자치통감의 주에 보면 마도산은 거란의 영역내에 있던 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확한 곳은 알 수 없으나, 지금의 요서지역에 있던 산임에는 분명합니다.
발해가 장문휴의 해군 공격외에도 육군으로 요서지역을 공격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이에 있는 요동반도를 그냥 놔두었을 까닭이 없겠지요.
자, 그럼 왜 발해의 영토가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않았다고 믿었던 것일까요. 그것은 가탐의 도리기의 한 문장의 해석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가탐이란 자는 당나라를 떠나 바다를 통해 발해를 방문했는데, 압록강 하구 방면으로 해서 발해에 들어옵니다. 여기서 가탐은 압록강 하구에서 130리쯤 올라가서 육지에 내리는데 여기부터 발해의 영토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자, 이 문장은 발해의 영토에 들어왔다는 말이지, 압록강 하구 130리 까지가 당의 영토가 그 넘어가 발해영토라는 말은 아닙니다. 물론 문장의 구조상 이런 해석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발해가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내건 이 문장은 해석상 발해의 영토를 압록강 130리 지점에서 부터라고 볼 완벽한 근거는 되지 못합니다.
자, 그렇다면 왜 당나라가 요동반도를 가졌다고 볼까요. 그것은 고구려 멸망시점과 관련이 있습니다. 고구려가 멸망한 직후 발해는 물론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못했습니다. {구당서}에는 699년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를 안동도독으로 제수하여 변방을 통솔하게 했다. 이때부터 안동도호부에 있던 고구려의 옛 주민이 점차 줄어들어 돌궐, 말갈 등으로 흩어지자 고씨의 군장은 마침내 끊기고 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당이 안동도호부를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말갈 땅으로 간 고구려인들은 바로 발해를 말하며 적어도 이때부터 요동반도가 발해 당이 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714년 당은 요서지방 평주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요동에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발해가 요동반도를 차지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732-733년에 요서와 등주를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함니다.
무엇보다 요동반도 지역은 8세기 기울어가는 당나라의 입장에서는 다스릴 수 없는 먼 변방의 땅입니다. 요서에 있던 후희일-이정기가 등주로 옮겨간 사건에서 보듯 당은 요서지역의 변방민을 막지도 못하였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더 먼 요동반도를 다스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해로를 통해 요동반도와 왔다갔다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하지만, 이미 산동일대에 치청왕국까지 세워진 마당에 그것은 더 더욱 불가능합니다.
발해사 연구자 임상선 박사는 도교를 숭상하는 이광현이란 사람의 기록을 찾아내어 발해인이 서해안일대에서 활발하게 해상활동을 했음을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발해인이 요동반도와 평안도 서부지역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한 활동입니다. 이런 증거외에도 여러가지가 있지만, 이제 그만 생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