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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하게 보는방 스크랩 {한국교회반성}교회 세습 양진우 목사대안을 제시하다(5)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았다
구리좋아요 추천 0 조회 15 13.06.30 02: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았다  
한국 교회에 다시 붙이는 95개조 반박문  

양진우 목사 / 대신총회 신학대학원 교수, 초이화평교회 당회장


자기가 태어난 날짜를 모르거나 누가 낳았으며 어떻게 자랐는지를 모르면 사생아다. 마찬가지로 현재 자기의 교회의 탄생과 자라온 과정을 모르면 신앙사생아다. 그러나 역사의식과 자기 정체성이 분명하게 무장된 신앙인(딤후 3:15~17)은 올바른 길을 갈 수 있다. 역사가 증명하듯 사악한 통치자는 백성이 우매하기를 바란다. 이것이 종교개혁 이전 교회 권력자들의 바람이었다. 역사는 좌우로 치우치던 편중을 바로 잡아 가려는 노력의 과정이라고 나름대로 정의해 보고 싶다. 종교개혁의 횃불은 1517년 10월 31일에 당겼다. 이것은 본래의 교회 회복 운동이었다. 이 종교개혁으로 우리 개신교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면 종교개혁 이전의 시대를 보도록 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보다 전통이 권위를 장악했었다. 믿음보다는 선행을 강조했다. 또한 교황 왕국을 건설했다. 중세교회의 교권 타락과 신앙의 변질은 극에 달했다. 그 모습은 ①교황청의 사치 ②도덕적 타락 ③교회 감독·사제들의 방종 ④신앙의 무속화(성자 숭배,성지 순례,세례명,성물 숭배) 등으로 나타났다. 신학교육을 받지 못한 사제들은 성경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추기경들도 교회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도적놈처럼 돈에만 정신을 팔고 있다. 로마로 흘러가는 돈은 마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다. 교황청의 부패상은 글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하니 곧 성직매매, 술주정, 사기, 도적질, 강도질, 사치, 매춘, 협잡질 등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로 가득 차 있다. 적그리스도가 다스렸다 해도 이보다 더 부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루터가 1520년에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쓴 서한」에서 당시 중세교회의 타락상을 지적한 글이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사회적 배경에는 민족주의의 형성, 사회의 불안정, 기술 문명의 발달로 인한 사람들의 이성적인 깨우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종교개혁 이후의 모습을 보자. 중세교회는 교회만이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한 반면, 개혁자들(특히 칼빈이 강조)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온 세계가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개혁자들의 기초는 ①오직 성경 ②오직 그리스도 ③오직 은혜 ④오직 믿음 ⑤오직 성령이었다. 그리고 개혁교회의 원리는 ①말씀 선포 ②성례 ③권징이었다. 즉 교회당을 더 화려하게 지어 중세 로마교를 본 받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의 내용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그들의 신념은 확고했다. 사형 언도를 받을지도 모르는 법정에 선 루터의 말을 들어 보자.

“존엄하신 폐하와 높으신 분들께서 단순명료한 답변을 요구하시므로 저는 아무런 주석도 단서도 붙이는 일 없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제가 성경의 증거나 명백한 이성(왜냐하면 저는 교황이나 종교회의의 결정만을 신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서로 모순되고 실수를 저지른 예가 많았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에 의하여 다른 확신을 갖지 않는 이상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들에 사로잡혀 있으며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안전한 것도 옳은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떻게 다른 방도를 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내가 여기 섰습니다. 나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러면 이들이 집중적으로 저항했던 것은 무엇인가? 그 내용을 보려면 95개조 반박문을 보면 된다. 그들이 집중했던 것은 성당을 크게 짓기 위해 돈을 밝히면서 팔았던 ‘면죄부’와 교권을 휘둘렀던 ‘교황권’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면죄부를 왜 팔았는가? 성 베드로 성당을 비롯하여 성당을 크게 짓기 위해서였다. 왜 교황권을 강화했는가? 교회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였다.

본 필자가 개혁 대상인 몇몇 교회들을 빗대어 말하겠다. 건축헌금 면죄부와 소교황권 비슷한 세습 권력과 전횡의 모습이 오늘날 교회들에 보인다. 95개조 반박문의 몇 내용을 보자.

7항.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행자인 사제의 권력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면서도 그밖에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결코 사하지 않으신다.
21항.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증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27항.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나온다고 말하는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28항. 돈이 연보궤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동시에 성직자의 대도(代禱)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43항.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증을 사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5항.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체만체 지나쳐 버리고(요 3:17참조)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점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항. 풍부한 재산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자라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으며(딤전 5:8) 결코 면죄증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항. 면죄증을 사는 것은 (사고 안 사는 것은)자유로운 일이요 결코 그렇게 하라고 강요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8항. 교황은 면죄증을 주는 일에 있어서 가져오는 돈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위해 경건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필요로 하고 바란다는 것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항. 만일 교황이 면죄증 설교자들의 행상 행위를 안다면,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서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1항.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주려고(당연하기는 하나) 한다는 것을 크리스천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4항. 설교하는 데 있어서 면죄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시간 또는 보다 더 긴 시간을 쓰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하여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57항. 그것이 현세적인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설교자(면죄증 판매인)들이 이와 같은 보화를 쉽사리 분여(分與)하지 않고 도리어 쌓아 두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58항. 또 그 ‘보화’는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교황의 도움과 전혀 독립적으로 항상 속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62항. 교회의 참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6항. 면죄증의 ‘보화’는 오늘날에도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재산을 낚는 그물이다.
72항. 그러나 다른 한편 면죄증 설교자들의 해롭고 뻔뻔스런 말에 대항하는 자는 복이 있을지어다.
79항. 교황의 문장(紋章)으로 장식된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다.
82항. 예로써 만일 교황이 베드로 성당에 소비될 썩어질 금전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이것도 구실에 불과하지만) 어찌하여 가장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 즉 거룩한 사랑과 영혼들의 최고의 필요를 위하여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
84항. 또는 돈 때문에 불경건한 자와 하나님의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 경건한 영혼 자신의 필요 때문에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구해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교황의 어떤 새로운 신성함인가?

86항. 또한 오늘날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 베드로 성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은가?
90항. 일반 세인이 열거한 반론에 대하여 떳떳한 이유를 들어 해결하지 않고 다만 권력으로만 억압하는 것은 교회와 교황을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게 만드는 일이요 또 크리스천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92항.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가라(겔 13:10, 16; 렘 6:14; 8:11; 살전 5:3).
93항.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갚하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사실)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95항. 이같이 하여 크리스천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 14:22).

이 95개 반박문을 붙인 루터는 화형을 당할지 모를 법정에 서게 되었다. 루터는 브롬스 의회당 지붕위에 촘촘히 깔려있는 기왓장을 쳐다보며 굳은 결심을 했다.

“원수가 저 기와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옳은 일을 위해 싸우겠다.”

많은 지지자들은 루터의 설교에 감동했다. 그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교황의 폭정과 타락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다른 속셈으로 귀족이나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이 기회에 회복시켜 보려고 루터를 통해 교황에게 대리항거를 시도하려는 속셈까지 가지고 있었다.

1521년 4월 16일 루터는 재판장인 브롬스의회에 입장했다. 거대한 내부는 웅장하다 못해 위압감을 주었다. 루터는 약간 두려움을 느꼈다. 자신을 지켜보는 수많은 눈빛들을 의식하며 루터는 의회 한가운데 섰다.

“이 책들의 내용을 취소하겠는가 아니면 여전히 지지하겠는가?”
엑은 호통을 치듯 루터에게 질문을 한데 비해 루터는 위압감에 눌려 겨우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대답했다.

“그 책들은 전부 나의 것들이며, 두번째 질문엔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겠습니다.”

황제는 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에게 하루간의 여유를 주었다. 루터는 숙소에 돌아와 눈을 감고 자신에게 용기를 가져다주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제까지 하나님은 나를 지켜 주셨다. 그분은 나를 당신의 정의를 실천하기 위한 도구로 삼으셨다.”

루터는 그날 하나님을 체험했다. 그것은 온몸의 떨림으로 전해지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다음날 루터는 기쁨과 용기를 가지고 의회에 출두했다. 그리고 당당히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이 책들은 모두 같은 내용을 담고 있진 않다. 나는 주님의 말씀으로 대답하겠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줄로 알지 말라. 도리어 싸움을 주러왔고 교황의 타락을 경계하려 한다.”

이 말을 트집잡아 엑은 루터를 자기기만에 빠졌다고 공격을 했다. 루터는 짧은 기도로 이 모든 말을 다 받아냈다.

“내 주장이 성서와 이성에 의해 잘못이라고 느껴지지 않는 한 나는 교황과 교회의회를 지지하지 않는다. 내 주장을 절대 취소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을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루터는 당당히 말하고 속으로 기도를 드렸다. “내가 여기 섰습니다. 나는 달리 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

당시 성서는 어려운 고대 라틴어와 헬라어로 쓰여 일반인들이 읽을 수 없었다. 루터는 알기 쉬운 상용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해 누구나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읽게 하려고 시도했다. 또한 음악에도 큰 관심을 보여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작곡하기도 했다.

한편 비텐베르크 지역을 비롯해 독일 각 지역의 루터 지지자들은 교황과 황제의 파문조치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개혁사상을 전하고 다녔다. 수녀로 있다가 파계한 캐서린이란 젊은 여자와 결혼을 하였다. 루터는 자기보다 16살 아래인 캐서린과 1525년 6월 13일 결혼을 하고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복”이라며 기뻐했다.

캐서린은 남편의 일을 적극 지지했을 뿐만 아니라 용기를 심어주었다. 한번은 루터가 농민반란의 선동자로 몰려 낙심한 모습을 보고 캐티(캐서린의 약칭)는 상복을 꺼냈다. 루터는 캐티의 뜻밖의 행동에 의아해 했다. “누가 죽었소. 웬일로 상복을 입었소?” 캐티는 루터를 바라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하나님이 세상을 떠난 것 같아요!”
“뭐라고 그런 말이 어디 있소. 하나님이 죽다니?”

루터가 깜짝 놀라 소리치자 캐티는 의아한 표정으로 오히려 반문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럼 하나님이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당신은 그렇게 낙심한 표정을 지었단 말인가요?”
루터는 아내의 이같은 말에 큰 감화를 받고 용기를 되찾았다.

1546년 2월 18일 루터는 그의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여 과로로 인한 심장병으로 일생을 마감했다. 그는 지지자들의 흐느낌을 들으며 “평생 모든 사람 앞에서 그렇게도 용감하게 고백한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떠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62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의 육신은 <95개조의 논제>를 처음 붙였던 비텐베르크 교회에 “내가 죽지 아니하고 살아서 주의 일을 선포하리라”는 말을 적은 묘비와 함께 안치되었다.

이 시대에 누가 루터가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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