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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좀 초전법륜경이 중요하다 얘기하는데, 이런 거하고 똑같아요.
위빠사나가 계속 하근기가 하는 거라고 터부시되는 거하고 똑같이
이것도 전혀 경전 축에도 안 드는 것처럼.
위빠사나가 올라가면서 초전법륜경도 다시 올라가는 거고, 그렇게 되는 거 같아요.
석가모니가 왕자였잖아요.
그래서 풍요롭게 자라다가 대신에 석가모니가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돌아가셨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유모 손에서 크고 이모 손에서 크고 이런 건 있었지.
그래도 풍요롭게 살다가 어느 날 ‘누구나 다 생로병사를 겪는구나.’
이런 의문점을 갖고 그걸 깨치기 위해서 나왔다고 얘기하죠.
그러고 나서 석가모니가 거기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수행을 한 거예요.
요가부터 깊숙이 들어가는 사마타수행부터 해서 다 한 거예요.
그러고 나서 거기에서 수행하는 곳에서 끝까지 자기가 수행의 도를 깨치고 나와서
또 다른 곳에 가서 하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 한 게 고행수행을 한 거예요.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아니다 는 것을 알고
사마타 깊이 들어가든, 어떤 체험을 하든, 환상을 보든,
이런 것들하고는 전혀 깨침, 생로병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그러고 나서 그 모든 것들을 버리는 수행을 하는 거였겠죠? 고행이라는 게.
그래서 식음을 전폐하고 피골이 상접할 때까지 육체를 버리는 수행을 하는 거죠.
왜냐하면 체험이라는 것은 육체에서 오잖아.
그러면 육체에서 단련된 체험은 육체가 있는 동안 계속 일어나요.
조건화 되어있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게 이 사람한테는 괴로울 수 있었던 거지.
무지 크리슈나무르티 라고 있거든요. 이 사람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의 깨달음은 뭐냐면 바로 육체의 체험적인 깨달음인데,
거의 엑소시스트 영화를 보면 몸이 막 뛰고 움직이고 이런 거 있잖아.
그런 체험을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거기서 못 벗어났어요.
그래서 ‘깨달음은 없다’라고 얘기하지만 이 사람은 그 몸의 체험에서 못 벗어났어요.
거기에서 몸의 체험과 함께 정신적으로도 달라져 있겠지.
그러한 것들이 같이 오지만 몸의 조건화된 체험들 있잖아.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정신적인 경험 이런 것들에서 이 사람은 못 벗어났어요.
그래서 그것을 그냥 견디면서 사는 거였어요.
그래서 내가 생각하기에는 석가모니도 그 정도의 육체적인 경험은 했었을 거 같아.
그러니까 그 당시 요가를 하는 요기들은 그런 체험을 하는 거거든요.
그러면서 그 체험을 통해서 자기는 자기가 원했던
생로병사의 괴로움에 대한 해답을 못 찾았기 때문에
육체에서 일어나는 어떤 체험을 아마 없애고 싶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고행을 시작하지 않았나, 요기들도 고행을 하잖아.
그래서 거의 육체가 죽기 전까지 하잖아요.
거기에서 그 모든 과정에서 결국은 죽을 먹으면서 몸을 회복하면서,
그렇지만 몸이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었을 때, 연기를 깨쳤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 모든 과정들을 지혜로써 그것을 깨닫게 됐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죠.
그게 석가모니의 깨달음이에요.
그렇잖아. 우리가 이 공부를 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어떤 체험도 있고,
어떤 앎도 있고 뭔가 계속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조건화되어 있잖아.
우리가 바랐고 그것을 듣고 우리가 그런 체험들을 하는 현상들이 일어나게 됐잖아.
그런데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사실은 힘든 거잖아요.
그런데 이 사람도 거기에서 최고의 수행을 경험하고 최고의 수행을 체험을 했으면
아마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힘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고행을 하면서 몸 육체에서 오는 어떤 경험들은 극복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래서 그 모든 과정을 겪고 ‘나는 깨달았다’ 그러고,
그 모든 자기가 가졌던 의문점이 해결된 거지.
그러니까 ‘뭘 알았다’라기 보다는 해결된 거야.
생로병사의 궁금점을 가지고 시작했던 공부이기 때문에 그게 해결된 거야.
궁금증이라든가 앎이라든가 이런 게 다 없어졌어.
그걸 우리가 뭐라고 표현할 때 깨달았다 해탈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그런 어떤 구속, 관념 이런 것에서 벗어나게 된 거죠.
질문자1: 그게 ‘이해가 됐다’ 이게 아니라, ‘궁금증이 사라졌다’ 이건 거예요?
이해될 게 없잖아. 뭐가 이해됐어?
질문자1: 왜냐하면 저도 예전 상태에서 이해됐다기보다
그냥 굳이 궁금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지. 내가 지금 이렇게 표현하는 거는 그게 들리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는 거고,
그때 같았으면 이해라고 표현했겠지.
지금 이해라고 표현하면 이거는 말이 안 되는 거거든.
이해라고 표현하면, 이 이치에서는 말이 안 되는 거잖아.
그냥 아무 궁금증도 문제도 없이 ‘그냥 일어나는 그대로구나’ 라고
그런 지혜가 일어난 거지. 그거예요.
이해라는 거는 뭐냐면 ‘이건 이렇게 해서 이렇게 됐구나’ 하고 이해를 하는 거잖아.
그걸 통해서 그냥 그러한 것도 아무 문제가 없음이 된 거지.
궁금증이 일어나든 이해가 됐든, 이런 거하고 상관없이 그냥 일어나는 그대로가.
그러니까 ‘뭘 깨달았어요?’ 하면 말 할 게 없는 거지.
뭘 이해했어요?
질문자2 : 말로 하라면 저는 ‘그냥 매순간 살아. 그거지 뭐.’ 이 말은 할 것 같아요.
말로 굳이 하라고 그러면.
그렇지. 그런 표현이 되는 거지,
뭔가를 이해했고 뭔가를 알았고, 그런 게 없어진 거지.
그러니까 아무 잡음이 없으니까. 상이 없으니까.
질문자3 : 아는 순간도 없어지겠네요.
표현하자면, 표현이 그렇다는 거지.
그러니까 이런 앎이 일어나면 또 지혜가 일어나면,
석가모니가 그런 지혜가 일어나서 첫 성이 그거였다고 하잖아요.
‘이걸 누구한테 얘기해서 누가 알 수 있을까?’ 그랬다고 하잖아.
그럴 수밖에 없지. ‘이걸 어떻게 얘기하고 어떻게 그들이 알 수 있지?’
이렇게 해서 그래도 같이 공부했던 사람들을 찾아간 거라고 그랬잖아요.
마지막에 공부했던 그 사람들을, 그러니까 공부가 좀 된 사람들한테 찾아간 거야.
“내 말 좀 들어봐. 나 이런 상태야.” 이런 식으로 얘기했겠지.
그랬을 때 그 단체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죠.
그런데 다 ‘저 사람은 이상하다. 이상한 짓 하다 왔다.’ 이런 식으로 다 내쳤는데,
그 중에 다섯 명이 ‘아, 이 사람은 정말 깨달았다.’하고 따라 나온 거예요.
그래서 그 다섯 명한테 지금 법륜을 처음 굴린 거예요.
다른 사람한테 다 얘기를 해도
다 ‘저 사람 미쳤다. 이상한 소리 한다. 배신자다.’ 이렇게 됐겠지.
그 중에 다섯 명이 따라 나와서 이 초전법륜경을 펼쳤다.
이렇게 얘기가 나옵니다.
질문자3 : 그러면 나중에 그 다섯 명이 들은 걸 이렇게 적은 거예요?
그렇죠. ‘이렇게 나는 들었다’
내가 그 때 금강경 할 때 그랬죠. 이게 다 영어로 번역할 때는 수동태라고.
주체가 아니고, ‘들리었다’라고 표현돼요. 이것도 마찬가지죠. 이렇게 들리었다.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2절에 있죠.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따라서는 안 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자기 경험에서 얘기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두 가지 극단으로 살아왔잖아.
정말로 쾌락과 세속적인 왕자의 삶을 살고,
그 다음에 나와 가지고는 또 그쪽의 최고급 수행도 했었잖아.
그러다가 고행도 하고 극단적으로 이렇게 해왔잖아요.
그러니까 본인의 경험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거는 깨달음과는 거리가 있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 같아요.
그 두 가지 극단이라는 것은
저열하고 통속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이며,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출가자가 두 가지 극단이라고 그랬는데,
하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의 탐닉’이라고 그랬고,
하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
둘 다 성스럽지도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지만,
두 가지 극단이 이렇게 된다는 거예요.
출가자한테 쾌락은 뭘까요?
그러니까 석가모니가 출가를 하고 난 다음에 출가자한테 얘기를 하는 거니까.
이 공부를 할 때 우리가 만족을 찾아서 공부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결국은 욕망을 따라 가는 거죠.
처음에는 나의 만족, 어떤 체험들 그랬을 때 체험을 통해서 행복감을 느끼고.
그러니까 지금 석가모니가 사마타 수행을 했을 때에
사마타에 집중을 하고 얻어지는 그런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희열 이런 것들은 결국은 감각적 욕망의 쾌락하고 다르지 않다는 거야.
물론 세속에서 하는 방법하고는 다르지만, 그렇지만 결국은 그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공부를 한다고 그러지만
그런 거를 원하잖아.
질문자2 : 집착이 있죠.
집착이 있잖아. 결국은 나의 욕망에 대한 집착이고,
그것이 좋게 나타나니까 하는 거야. 쾌락으로 나타나니까.
희열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고 그렇게 하잖아.
질문자2 : 그런 게 여기서 나타날 때는 뭔가 수승해진 거 같잖아요.
그러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인정도 받고. 그러면 점점 더 내가 강해지잖아요.
그렇지. 그러면서 자비한 모습으로 바뀔 수도 있잖아.
뭔가 모두가 하나라는 걸 경험을 하잖아요?
그러면 막 모든 게 자비롭고 이렇게 경험을 하면
그것 또한 나에 대한 욕망의 체험밖에 안 되는 거지.
그러면 그들은 또 그들의 욕망에 맞게 나를 우러러 봐주고.
그게 결국은 출가자들한테 감각적인 욕망, 쾌락이라는 거야.
종교도 마찬가지잖아요. 종교를 믿으면서 우리는 천국에 가기를 원하고,
그리고 거기에서 기도를 해서 답을 받았다 그러면
막 해피하고 얼굴 색깔이 변하고 흥분되고 이렇잖아요.
그리고 만약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잖아.
그러면 부흥사들이 막 그러면 그 흥분된 에너지에 전부 둥둥거리면서 스스로 흥분되고
거기서 어떤 체험을 하고 행복감을 느끼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뇌에서 도파민이 나오고, 그런 걸 경험을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거기에서 그런 희열을 경험하고, 도파민의 호르몬의 경험을 하면,
집에 가면 다시 쳐지거든. 그러면 그걸 경험하기 위해서 또 다시 오는 거예요.
그러면 단체에서는 그거를 막 채워주는 거야.
그러면 또 거기에서 환희를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고,
몇 시간 동안 있다가 또 돌아가는 거지.
그러면 그게 사그라지면 또 다시 가서, 그게 세속에서 하지 않는 방법일 뿐이지.
세속에서는 부어라 마셔라 이렇게 해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여기는 그게 아닌 고고한 척 하면서.
그러니까 옛날에 히피 그런 사람들도 고고한 척 하잖아.
나는 너희랑 달라, 그 사람이 한 건 결국 마약이야. 그건 100% 마약이에요.
비틀즈, 존 레논 이런 사람들이 빠졌던 그런 히피문화 이런 것들.
그들이 경험하는 거는 대마초 이런 종류로서, 그런 종류로서 쾌락을 추구하는 거지.
그러니까 사마타로 경험하는 것들의 희열은 마약할 때 느꼈던 희열과 똑같은 기준이에요.
뇌의 도파민을 형성시키는 거야. 그렇게 되면 거기서 못 벗어나. 그게 중독이에요.
깨쳤다고 표현하면 깨친 사람의 특징은 뭐냐면 중독이 없어요.
어디에 빠짐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무엇을 끊으려고 해도 그럴 필요가 없어.
그냥 하면 하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예요. 어디 끌림이 없기 때문에.
그게 표시면 표시일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 거기에 끌려가요. 호르몬에 끌려가요.
거기를 추구하지 말라는 거지.
우리가 세상적으로 뭔가를 추구하고 이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고,
출가자와 다섯 비구한테 하는 얘기이기 때문에.
그런 쪽으로 빠지지 마라. 그런데 대부분의 수행은 그거잖아요.
우리가 사실은 경전을 읽을 때 성경을 읽을 때, 어떤 체험을 하는 것도
사실은 그런 희열이거든.
‘알았다’ 라는 희열, 그랬을 때 이걸 누구한테 얘기하고 싶은 욕망,
그리고 얘기를 했을 때 누가 알아줬으면 좋겠다라는
그런 것들이 막 드글드글 하는 거지. 그게 바로 감각적 욕망의 쾌락과 똑같다는 거지.
그러니까 석가모니가 알았다는 거잖아요.
출가해서 나와서 자기가 요가를 하고, 요가를 한다는 거는 에너지를 돌리는 거거든.
그러니까 요가를 하면 계속적인 체험이 일어나는 거예요.
자기가 생로병사를 해결하는 깨달음의 공부라고 생각하고 계속 요가를 했는데,
인도는 요가수행이 기본이니까.
그런데 결국은 알고 보니까 그 행복감, 희열 이런 것들이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을 추구하는 거밖에 안되더라는 거야.
거기서 벗어나면 뭐예요? 말짱 도루묵이잖아.
그래서 그런 건 아니다, 그건 이 도의 길이 아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건 아니구나’ 했을 때, 그런 육체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강했겠지?
그것을 통해서 어떤 체험들을 만났으니까. 그래서 결국은 막 학대를 하는 거지.
질문자1 : 그런데 사마타가 육체적 쾌락이라면 그것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은
극히 드물잖아요. 그런데 부처님은 사띠를 통해서 그걸 보고 있었다는 거네요?
그렇지.
질문자1 : 순수했네요.
왜냐하면 종교를 하는 사람도 기도에 대한 화답 이런 것도 있지만,
스스로 자기를 치는 공부도 하잖아.
하나님과 만나고자 육체를 학대하고 금식하고 그런 사람도 있잖아요.
그것도 옳은 게 아니다.
불교에 귀의한 사람도 스님이나 수도자나 이런 사람도 사실은 두 극단을 가는 거야.
왜냐하면 욕망에 따라가게 되니까 그 욕망을 저지하기 위해서
육체를 학대하는 거예요.
성경에도 보면 육체보다 영을 더 중요시 하죠. 그러니까 뭔가를 계속 추구하는 거지.
그게 바른 지혜가 없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석가모니가 다 그걸 경험하고 나니까 그렇더라고 얘기해주는 거기 때문에.
자기학대에 몰두를 하는 게 둘 다 따라서는 안 되는 극단이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출가자는 대충 하지 않고, 극단까지 가니까 문제라는 거야.
이렇게 해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 많이 없으니까
이게 위험한 극단이라고 표현을 한 거 같아요.
그렇게 빠져버리면 중독이 된다고 그랬잖아요.
사마타 수행을 했을 때 그 경험에 쉽게 못 빠져나오잖아요.
여기서는 그런 게 바로 극단이라고 표현을 한 거 같아요.
다른 데는 어떻게 표현됐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면 육체를 학대를 하고 그러잖아요. 육체를 학대하는 게 뭐예요?
영양분이 보급이 안 되는 거잖아.
그러면 몸만 그렇게 되는 게 아니고, 뇌의 작용도 이상하게 돼요.
왜냐하면 뇌는 이게 다 탄수화물이 있어야지 당이 있어야지 움직이는,
100% 이거는 당이 없으면 이상해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헛것을 보는 거야.
그래서 내가 옛날에 처음에 이 공부를 할 때 외국 여자 스님 책이 있었는데,
그 스님이 자기가 경험한 거를 얘기하는데,
극단으로 자기를 내몰면서 공부를 하게 선택을 한 사람들이 있어요.
혼자 굴에 들어간다든가, 그런 사람들은 정말 안 먹고 환경도 그런 데에 있잖아.
그러면 헛것을 봐요. 환상에 빠져. 그러면 그게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왜냐하면 누가 알려주지도 않으니까. 그러니까 잘못된 경험을 하게 되는 거예요.
육체를 통해서 어떤 사마타 경험도 아니고, 이거는 뇌의 잘못된 작용 있잖아요.
건강하지 못한 그런 작용들을 하게 되는 거예요.
질문자4 : 석가모니도 보리수 아래에서 그런 거 했잖아요.
그렇지. 예수도 그런 표현 있잖아.
40일 광야에서 식음전폐 하면서 할 때 계속 뛰어내려보라 그러고,
여자가 유혹하는 게 나오잖아요. 그게 자기 뇌에서 일어나는 환상이거든요.
내가 그랬잖아요.
뇌는 자기가 믿고 자기가 원하는 게 나타난다고, 그렇게 만들어준다고.
성경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믿음으로 보여주는 거는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내가 바라는 것들이 보여지는 거야. 뇌의 작용이야. 뇌의 착각이에요.
그런데 그게 실재라고 믿으면 거기에 끌려가는 거야. 그게 뇌한테 속는 거예요.
뇌가 허상을 보여줬는데 실재가 아닌 거를 보여줬는데
그게 진짜라고 생각하고 잡아버리게 되면 뇌한테 속는 거야.
그러면 계속 그 메커니즘으로 뇌한테 그걸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거 밖에 안 돼.
질문자4 : 그럼 지금 이것도 똑같네요. 지금 이 현실도 똑같네요.
선생님이 가짜라고 하는 현실을 딱 잡아버리면,
뇌의 작용인데 우리가 진짜라고 잡아버리면 이게 진짜인 걸로 계속 가는 거.
그렇지. 모든 게 그래요. 그래서 생각 속에 있다고 그러잖아.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中道, 正道)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렇게 얘기했어요.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정도라고도 되어 있고, 중도라고도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기를 깨달은 거잖아. 그러니까 모든 것들은 조건 지어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서 극단을 따르지 않으면, 그거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 거잖아요.
뭐든지 그냥 일어나는 대로, 그게 바로 중도라는 거야. 그게 바로 도(道)라는 거예요.
지금 일어나는 이거, 지금 일어나는 이거대로 그냥.
그러니까 지금 이대로 여기에 있는 이 자체,
이 자체가 그냥 그대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야.
여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것도 그냥 조건 되어서 일어나는
연기 작용일 뿐이기 때문에. 그게 바로 중도라는 거예요.
거기에서 ○○○가 처음에 얘기했던 상대성이라는 얘기를 했던 거 같아요.
모든 것들은 상대적으로 존재한다. 그런 것도 개념이야.
그럴 수가 없어.
일어나는 게 다인데 어떻게 두 가지 상대가 있을 수가 있어.
질문자2 : 그건 어떻게 얘기하면 연기를 아주 작은 관점에서 봤을 때
그렇게 얘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러한 행동이 있으니까 이러한 행동이 나올 수 있다라는.
그런 뜻이 아니었잖아.
질문자4 : 저는 내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 그게 안 되고, 꼭 반대로 일어나니까
‘아, 이건 진짜 상대적인 게 있는 거구나.’라고 생각을 했죠.
그러니까 그게 이해의 단계에서는 그렇게 표현하고 이해될 수 있는 거 같아요.
그런데 상대라는 건 있을 수가 없어요. 일어나는 게 다야.
지금 일어나는 게 다고, 그것에 대한 다른 어떤 버전,
다른 어떤 상대적인 개념은 그냥 생각 속에만 있는 거죠. 그냥 일어나는 게 다야.
그러니까 그것이 모든 현상은 상대적이라는 것도 굉장히 잘못된 표현이라는 거지.
우리 지금 여기가 지금 좁아요, 넓어요?
질문자4 : 그 때 사무실보다는 좁죠.
그거예요. 기준이 있으면 항상 상대성이 생겨. 기준이 없으면 상대성이 안 생겨요.
그러니까 ‘나’라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느냐하면 기준으로 나타나.
무엇을 볼 때 판단을 하게 되는 거는, 나한테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렇거든.
그렇기 때문에 그냥 일어나면, 그냥 마시면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나의 기준이 ‘내가 생각했을 때 커피 컵은 이런 게 아니었는데.’라는
기준이 만약에 있다면 여기서 벌써 판단이 일어나는 거지.
그러니까 상대성이라는 거는 기준이 있을 때 상대성이 있는 거야.
상대성으로 만들어 놓은 것도 그가 개념으로 가졌던 기준에 아마 있었을 거야.
모든 현상은 상대성이다, 이거는 정말로 개념적인 얘기에요.
모임에 가려고 했었는데 어떤 일이 생겼다, 그냥 그 뿐이야.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기 때문에
되는 일이 안 되면 안 되는 일이 생기는구나.
이런 상대성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오려고 막 옷을 입고 나오려는데, 또 다른 일이 생겼어.
그러면 그냥 그런 일이 생길 뿐이야. 그래서 여기에 늦었어.
매순간 그 조건에 맞춰서 일어나는 게 그게 다예요.
물론 그것이 또 다른 데에 연하여서 다른 게 일어나고 하겠지만
그렇지만 그것도 100% 그것 때문에 이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거든.
매순간 그냥 일어났다, 또 일어났다, 또 일어났다. 조건 지어가지고.
그러니까 그 극단을 따르지 않고 보니까
‘그냥 지금 일어나는 게 이게 그냥 그대로 도(道)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아무 문제가 없지. 일어나는 원리를 아는 거지. 연하여 일어난다는 것.
석가모니가 딱 그 한 문장 하셨잖아요. “모든 것들은 조건 지어져 있다.”
조건 지어진 대로 일어나는 거예요. 그 때 그 때 따라서 조건대로.
그뿐이야. ‘무엇 때문에’가 아니고.
그러니까 나오려고 하는데 애가 막 울었어. ‘너 때문이야.’ 이게 아니라는 거야.
그냥 그런 조건에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그랬을 때 어떤 그 다음 행동이 일어나고,
또 그러한 것들이 계속 일어나는 거죠. 그 순간순간이 다 도라는 거예요.
도라는 게 뭐냐면 다른 길이 없는, 그냥 그거라는 거야.
매순간 일어나는 것이 그러함을 알면, 그게 바로 밝은 눈을 가진 게 되고,
그게 바로 지혜이고, 그게 바로 바른 깨달음이고, 그게 구속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거야.
질문자1 : 그 상황에서 엄마가 나오려고 했는데 아기가 울었어요.
그런데 A라는 사람은 아기가 우니까 집에 있고,
B라는 사람은 애기가 울어도 오고 싶으면 오는 거고.
그런데 거기에는 답이 없는 거잖아요.
그렇지. 그게 ‘뭐가 정답이다’라는 거는 없는 거야.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서. 그러니까 그게 다른 사람 입 댈게 아무것도 없는 거지.
질문자1 : 그 사람이 가진 조건에 맞춰서 올 수 있으면 오는 거고, 아니면 안 오는 거고.
그렇지. 그 사람이 항상 그렇게 행동하는 거는 또 아닌 거지.
갑자기 애가 더 중요할 때가 있는 거고 이런 상황이. 그러니까 그 때 그 때 다른 거야.
그러니까 날씨가 계속 달라지는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우리는 하나의 감정을 갖고, 이 감정을 좋은 마음을 유지하기를 원하잖아.
그런데 그런 거는 있을 수가 없다는 거야.
매순간 다른 거예요. 매순간 다르기 때문에 그게 어떻게 펼쳐질지는 아무도 몰라.
그게 ‘내 의지가 강해서 내가 그렇게 해냈다’라는 것도
사실은 그러한 작용이 일어난 거야.
그러니까 작용들이 계속 되는 거지,
그게 누구의 하나의 주권에 의해서, 누구에 의해서 이렇게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무의식적으로 어떻게 해서 어떻게 해야지’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도 그냥 작용인 거야.
그런데 그 작용대로 뭔가가 변화가 일어나는 거겠지.
거기에서 ‘내가 했다, 네가 했다’ 이거는 있을 수가 없는 거라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그러한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내 무의식이 그렇게 변화시키게 했다, 이건 아니라는 거야.
질문자4 : 그런 생각이 갑자기 드는 게, 서로 연결되기 위한
하나의 현상일 수는 있다는 거죠.
그렇지. 지금도 앉아있는데 다 다른 어떤 작용들이 일어날 거란 말이야.
내가 여기서 이런 말을 해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듣고,
어떤 사람은 다르게 듣는 거지. 그런 것들의 작용들이지,
그게 ‘이 말이 맞아’ 하고 내가 그거를 이러고 있는 그런 상황은 아니라는 거지.
이렇게 얘기해서 알아들었어도,
내가 이렇게 얘기해서 알아듣는 게 아니라는 거지.
그들 나름대로 다 작용이 일어나고 있는 거예요.
알 수 없는 그런 작용들 속에서 그냥 계속 달라지는 거지.
계속 작용들이 일어나는데, 그 작용이 무엇이다 라고, 그 작용이 중요하다고,
누가 주관한다고 생각하면서 그걸 잡고 있는 거죠. 그러면 그건 스토리가 되지.
그러니까 여기 와서 내가 이런 얘기를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와요.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라는 것도 개의치 않아요.
그냥 일어나는 대로 얘기해요. 그리고 받아들이는 거는 각자 몫이에요.
뭔가를 준다라는, 뭔가를 받는다라는 그런 개념이 전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보여지는 것에 집착하면 그것이 있는 것이 돼버리지만,
연기라는 것은 조건 지어서 일어난다는 것은 거기에 대해서 항상 하지 않는 거잖아.
그러니까 이게 ‘이 모양 그대로가 실체가 아니다’ 이거잖아.
그러한 지혜의 눈을 뜨면 집착이 사라지는 거죠.
내가 그랬잖아. 원하는 대로 보인다고.
그러니까 그게 감각적 욕망의 쾌락하고 똑같다는 거예요. 원하는 걸 이루어주는 거니까.
이게 ‘공’이라고 표현을 했을 때, 그 공을 보고자 하면
그 공이라는 어떤 것들이 막 이렇게 보이는 거지.
그거를 경험하려고 하기 때문에,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게 바로 욕심이잖아.
그냥 들리면 들리는 대로 냅두면 나중에 ‘아, 그렇구나.’라는 지혜가 일어나는데,
들리는 것을 경험하고자 하는 욕망이.
그러니까 본인이 경험을 하면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그러면 그거라고 잡는 거지.
그런데 이해가 되든 안 되든 그냥 들리는 대로 냅둬야 되는 거지.
그러고 나면 어느 순간 ‘아, 그거네.’ 하는 지혜가 일어나는 거야.
그게 밝은 눈이 생긴다고 그러고, 지혜가 생긴다고 그러고,
그게 바른 깨달음이라고 얘기하는 이런 거지.
그런 육체적인 경험 이런 게 있지 않다는 거지.
그런 상황에서도 무던히 생활에서 녹여지면서 조금씩 지혜가 일어나는 거지.
들은 대로 경험되면 거기에 들떠 있을 수밖에 없어요.
질문자1 : 경험되면 오히려 이해력이 깊어져서 조용해지지 않나요?
그거는 바른 경험이었을 때는 그렇지.
그러니까 그거는 바른 이해로써 일어나는 어떤 자각. 자각이라는 표현이 좋네.
자각은 그거는 지혜로 이어져요. ‘아, 내가 착각하고 있었구나.’라는 자각,
중도를 듣는 어느 순간, 뭔가 자각이 툭 일어났어.
그랬을 때 어떤 변화됨, 이런 것들은 지혜로 나타나는데,
이거는 자각하고 다른 어떤 또 다른, 아까 얘기했던 사마타의 경험으로 들어간 거지.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 경험을 잡은 거지.
그러면 ‘그게 맞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잘못된 경험 속에 빠지는 거지.
그래서 내가 아니라고 얘기를 해도, 그 소리를 듣기 싫어서 피해버리는 거야.
자기가 경험을 했고, 자기가 안다고 생각했는데,
선생이 ‘그거 아니야’라고 얘기하면 그걸 받아들이기 싫은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중간에 못 하는 거지.
질문자1 : 어쩌면 그럴 수가 있죠? 내가 신뢰하고 내가 믿는 분이 아니라고 하면
당연히 그걸.
아니, 내가 얘기하는 거를 그들은 경험을 했기 때문에.
내가 생각하는 경험이 아니지만 경험을 했고,
내가 했던 말을 이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죠.
그래서 그 사람은 이제 나가서 깨달음에 대해서 얘기를 할 수는 있겠지.
자기가 경험한 것에 대해서.
그래서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의 탐닉, 그게 바로 사마타 경험이라는 거야.
그럴 때는 너무 행복하잖아.
질문자3 : 좋죠. 딱 있으면 온 몸에 기가 돌고, 태양을 보면 태양의 에너지가 들어오거든.
어떤 경험이든 똑같지 않아. 여기는 조건이 다르기 때문에 다 달라.
그것을 본인이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도 다 다르게 경험을 한다니까.
그러니까 같은 말을 하더라도 다 다르게 경험을 하는데,
그 경험은 바른 지혜가 아니라는 거죠. 자각!
질문자3 : 나중에는 그게 아니라는 거를 자기 스스로 알아야 돼요.
남이 쳐줘서는 몰라요. 자기 스스로 깨치고 알아야 돼요.
이게 너무 좋다. 그래서 바른 깨달음은 고요함이 온다잖아.
이게 들뜸이 아니라는 거야.
질문자1 : 네, 맞아요. 조용해지고 차분해지고 이해력이 깊어지고.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이거는 우리 보통 경험하면 들떠가지고 얘기해주고 싶고,
이런 것들은 오히려 욕망의 끌림이라는 거예요.
질문자2 : 그런데 이거는 뭐 들뜰래야 들뜰 수가 없잖아요.
들뜨게 만들어야 들뜨지. 이게 너무나 있는 그대로인데.
들뜨고 어떻게 해가지고 ‘나 잘났어’ 할 수가 없으니까. 보여줄 게 없으니까.
질문자1 : 맞어, 맞어. 들떠도 다 내려놓게 되고.
보여줄 게 없어.
질문자1 : 선생님, 여기 열반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요?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할 때 열반요.
그냥 열반이 곧 깨달음이잖아. 그러니까 열반이 힌두어로 니르바나 거든요.
그게 뭐냐면 열반은 불구덩이에서 벗어난다 이런 뜻이에요. 편안한 길로 가는 거지.
질문자4 : 우리가 아는 열반은 사마타적인 느낌이랄까?
그러니까. 평안하고 행복하고 이런 거잖아요.
그게 아니고 그냥 불구덩이에서 벗어나는 거.
이게 똑같은 거예요. 두 극단이 탐하고 진이야.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사마타수행이 탐이라면, 이것에 반하는 고행은 진이에요.
치고, 버리고, 때리고 이런 고행이 바로 진이야. 탐진은 같이 있어요.
탐이 안 되면 진이 일어나고, 그게 바로 치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것들이 어리석음이 지혜로 변화되고, 그러면 탐진은 사라지는 거지.
그러니까 이게 열반이 일어나는 거예요.
이게 고요함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지. 지혜도 똑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