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12. 08(수)
■ 안동판관김공유허비(安東判官金公遺墟碑)
◇김성경(金成慶)
[연대] 1789년(정조 13)
[유형/재질] 비문 / 돌
[크기] 높이 155cm, 너비 45cm, 두께 20cm
[비의 소재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탁본문 소재지] 안동대학교 박물관(경상북도 안동시 송천동 388번지)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유도원(柳道源) / 이인형(李寅炯)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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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이 비는 1789년(정조 13) 경기도 광주에 건립된 안동판관김공유허비(安東判官金公遺墟碑)로 노애(蘆厓) 유도원(柳道源)이 비문을지었고, 생원(生員) 이인형(李寅炯)이 글씨를 썼다.
김성경(金成慶 : 생몰년 미상)의 본관은 삼척으로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1472년(성종 3년) 외직으로 나가 안동판관(安東判官)이 되었다.
그곳에서 효로서 백성들을 다스려 백성들이 후덕함을 가지게 되었다. 관작에서 물러나자 그대로 안동에 집을 짓고 살아서 여러 번 벼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효제(孝悌)로서 자제들을 가르쳤고, 종들에게는 농사하게 하여 세상사에 관심을 버리고 평생을 마쳤다.
현재 탁본은 안동대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탁본된 연대는 1980년대로 추정된다.
[비문내용]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안동판관(行 安東判官) 김공 휘 성경(金公諱成慶) 유허(遺墟)
안동(安東)의 낙동강 남쪽 대야동(大野洞)은 곧 옛 부(府)의 선생(先生)인 삼척 김공(三陟金公)께서 터를 잡고 지은 땅이다.
후손 김진추(金進秋) · 김해익(金海益) 등이 유허(遺墟)에 일이 있어서 김운찬(金雲燦)· 김성찬(金聲燦)이 유도원(柳道源)에게 와서 이르기를, ‘지금은 선생의 시대로부터 삼백 여년이나 떨어져서 세대가 아득하고 유적이 묻혀버려 불초한 우리들이 실로 한 지역의 옛 터전에서 모른 채 그럭저럭 칡넝쿨과 보리가 자라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이제 그 옛터에 빗돌을 세워 무궁하게 전하고자 하였으나, 병화(兵火)를 당한 나머지 집안 내력을 적은 글이 전해지지 않아 글을 짓는 이에게 갖추어 줄 수가 없으니 그대가 맡아서 집안내력을 정리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유도원은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이지 못해 이렇게 썼다.
공의 이력의 대략은 선생안(先生案)이나 지리서(여지(輿誌)) 등의 책에 실려 있으며, 세덕(世德)과 가풍은 공의 손자인 호군(護軍) 공의 정려비(旌閭碑) 및 현손 김익찬(金益燦)공의 효행록(孝行錄)을 통해 소급해서 구해본다면 징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개 공은 일찍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 대인 성화(成化) 임진년(성종 3, 1472년)에 외직으로 나가 안동판관(安東判官)이 되었다.
그곳에서 공은 효로서 백성들을 다스려 그들이 후덕한 데로 돌아가게 하였다.
일찍이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 경치를 공무를 보는 여가로 오가면서 그 사이에서 시를 읊조리기도 했다. 공은 관직에서 물러나자 그대로 이곳에 집을 짓고 살아서 여러 번 벼슬의 명이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오직 글쓰기와 역사서로 스스로 즐길 뿐이었다.
자제들을 가르침에는 효제(孝悌)의 도리로 가르치고 종들에게는 밭 갈고 씨 뿌리게 하며 세상사에는 관심을 버리고 그 평생을 마쳤으니,
공과 같은 분은 거의 이른바 성세(聖世)의 일민(逸民)이라 할 것이리라.
공의 휘는 성경(成慶)이요, 묘소는 풍남(豊南: 全州에 있는 지명) 인금곡(仁金谷) 간향(艮向 : 동북쪽) 둔덕에 있다.
공의 세계는 신라경순왕의 7번째 아들 일선군(一善君) 김추(金錘)의 아들 김위옹(金渭翁)이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실직군왕(悉直郡王)으로 봉해져 비로소 삼척(三陟)으로 본관을 삼았으니, 공에게는 12대조가 되신다.
고조는 김윤성(金允成)으로 도통사(都統使)며, 증조는 김인범(金仁釩)으로 전용랑(典容郎)이며, 할아버지는 김광보(金光輔)로 부사(府使)며, 아버지는 김신언(金臣彦)으로 봉직랑(奉直郎)이다. 공은 아들과 손자로 이어져 보공장군(保功將軍) 김한백(金漢佰)은 부호군(副護軍)인데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다.
그의 아들 김적필(金迪弼)은 훈도(訓導)요, 아들 김덕연(金德鸞)은 진사(進士)인데 유학자로서 명성이 있어 유일재(惟一齋 : 김언기(金彦璣)) 김선생과 율원(栗園) 이선생과 도의(道義)로서 사귀었다. 아들 김휘정(金輝貞)은 참봉(參奉)이며, 그 이하의 자손들은 많아서 모두가 기록하지는 못한다.
지금 힘을 합해서 그 일을 힘쓴 사람들은 10대손 김두옥(金斗玉). 김의옥(金儀玉)과 11대손 김진추(金進秋)와 김해평(金海平). 김해양(金海瀁). 김해익(金海益). 김봉기(金奉起). 김해징(金海澄). 김순기(金順起)와 12대손 김운찬(金雲燦). 김용찬(金用燦). 김영찬(金永燦). 김옥찬(金玉燦). 김화찬(金和燦). 김달찬(金達燦). 김응찬(金應燦). 김흥찬(金興燦)· 김재찬(金再燦) · 김맹찬(金孟燦). 김두삼(金斗三). 김중삼(金重三). 김견찬(金犬燦). 김송운(金松雲). 김여득(金輿得). 김용태(金用太)와 13대손 김인기(金麟基). 김중기(金重基). 김석기(金碩基). 김범기(金範基). 김선기(金善基)이다.
아! 유도원은 또한 일찍이 그 마을 입구를 지나면서 공께서 남긴 교화를 듣고서 오히려 수백년 뒤라도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거늘, 하물며 자손들이 오랫동안 사시던 땅에 있으면서 끼친 업적을 추모하여 흥기하는 자는 어떠하여야 하겠는가.
그것을 이어받아 더욱 행의(行誼)를 힘쓰고 문학에 더욱 노력하여 옛 가문의 전형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또한 유허비를 세우는 의미일 것이다. 이렇게 명하노라.
공께서는 세주(世胄)로서 성명(聖明)한 때 태어나셨네.
일찍 벼슬 길 사양하고서 재야에서 은거생활 하셨다네.
팽택(彭澤)과 같은 고을살이 그만두고 전원에 터 잡았지.
낙동강 강가이고 화산(花山) 곁일레라.
강산의 경치는 은자가 즐길만한 곳이었네.
그곳의 풍광은 청풍이 가득했다네.
그 뒤 수세대동안 효성이 있다 알려지니
뉘라서 단술과 지초가 근원도 뿌리도 없다 할 손가
아! 세대가 멀어지니 아름다운 님의 자취 잊혀만 가네.
이리하여 여러 자손들은 아주 없어질까 걱정했지.
힘을 모아 돌을 다듬고는 강가에 그것을 세웠다네.
아! 천만년 무궁토록 지나는 이들 경의를 표할지니.
지금 임금 13년 기유년(정조 13, 1789년) 11월 하한(下澣 : 하순)에 장사랑(將仕郎) 전 행 명릉참봉(前行明陵參奉) 완산(完山) 유도원(柳道源) 짓고, 생원(生員) 선성(宣城-안동 禮安의 옛 이름) 이인형(李寅炯) 글씨를 쓰다.
[참고문헌]
(단행본)안동시립민속박물관 편, 1995, 『안동의 비석』, 안동민속시립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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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承訓郞安東判官三陟金公遺墟碑銘 幷序。
安東府治之南大野洞。乃故府先生三陟金公卜築之地也。後孫進秋,海益等。方有事于遺墟。使雲燦,聲燦。來謂道源曰。今距先祖之世三百餘年。世代綿邈。遺蹟寢泯。不肖等實不知一區遺墟。居然爲兔葵燕麥之鄕。今將立碑舊址。以垂示無竆。但兵燹之餘。家乘無傳。無以備秉筆者採擇焉。道源旣辭謝。作而言曰。公之履歷大槩。載於先生案輿誌等書。其世德家風。見於公孫護軍旌閭碑及耳孫益燦孝行錄。泝而求之。亦可以徵焉耳。蓋公早登文科。仕成廟朝。成化壬辰。出爲安東判官。以孝理臨民。民歸于厚。嘗愛洛江山水之勝。簿領之暇。往來嘯咏於雲樹之外。及其解官。仍家於是。屢有除命。而不復應。惟以書史自娛。敎子弟以孝悌之義。課僮僕以耕種之業。遺落世事。以終其壽。若公者殆所謂聖世之逸民也歟。公諱成慶。字某。墓在豐南伊金谷艮向之原。系出新羅敬順王第七子一善君錘。子渭翁。三韓壁上功臣。封悉直郡王。始貫三陟。於公爲十二代。高祖諱允成。都統使。曾祖諱仁䡄。朝顯大夫典客郞。祖諱光輔。府使。考諱臣彥。奉直郞。公有子繼孫。保功將軍。子漢伯。護軍。以孝行旌閭。子廸弼。訓導。子德鸞。進士。有儒望。與惟一齋金先生,栗園李先生爲道義交。子輝貞。參奉。以下子孫。多不盡錄。今合謀而敦其事者。幾代孫某某。嗚呼。道源未嘗一過洞門。而聞公之風。猶可想見於數百載之下。而况子孫之世居其地。想慕遺烈而興起焉者。爲如何哉。繼今益敦行誼。力於文學。不失故家典刑。亦立碑之意也。銘曰。
公惟世胄。生逢聖明。早辭榮塗。晩隱林壑。彭澤之縣。仍卜田園。洛江之灣。花山之側。江山之勝。碩人之薖。一區烟雲。淸風灑灑。其後數世。孝誼著聞。誰云醴芝。無源無本。惟是世遠。往事烟沉。是以諸孫。大懼泯沒。合謀伐石。樹之江干。於千萬年。過者必式。
上之十三年己酉十一月。
下澣將仕郎前行明陵參奉完山柳道源 撰。
生員宣城李寅炯 書。
蘆厓集卷之八 / 遺墟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