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산행 - '황학산' / 이대영

[상상의 힘]

山明水靑의 月鶴山

                                                                     이 대 영

直指寺韻

정 완 영

매양 오던 그 산이요

매양 보던 그 절인데도

철따라 따로 보임은 한갖 마음의 탓이랄까?

오늘은 외줄기 길을 낙엽마져 묻었고나.

뻐꾸기 너무 울어싸 절터가 무겁더니

꽃이며 잎이며 다지고 산 날이 적막해 좋아라

허전한 먹물 장삼을 입고 숲을 거닐자

오가는 윤회의 길에 僧俗이 무에 다르랴만

沙門은 대답이 없고 행자도 말 잃었는데

높은 산 외론마루에 기거하는 흰구름

인경은 울지 않아도 산악만한 둘레이고

은혜는 뵙지 않아도 달만큼을 둥그느니

문득 온 산새 한 마리

깃 떨구고 가노메라.

1. ‘대전문총’ 문학기행에 대한 상념

 아침부터 아내가 도시락을 준비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이미 아파트 아래의 배드민턴 코트에서는 장년의 사람들이 거친 호흡을 즐기고 있다. 늘 그러했지만, 산행이 있는 날이면 그에 대한 준비와 기대로 마음이 분주하다. 멀리 보이는 보문산과 식장산을 주마간산 격으로 둘러보는 나의 모습에 이미 아내는 익숙한 듯 혀를 끌끌 찬다. 그러나 조금 있으면, 거실에서 서성이던 커다란 산 하나를 또 다른 산 속으로 올려 보낸 후련함을 느낄 아내라는 것을 내 모르는 바 아니다.

어김없이 오늘도 ‘상상의 힘’의 조주행 동인이 뒤늦게 도착하여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느라 정신이 없다.  오늘은 지팡이까지 가지고 온 것으로 보아 한껏 매무새를 산행 길에 뿌리고 올 듯하다. 12분밖에 늦지 않았다는 그의 너스레에 승용차의 타이어가 탄력을 받기 시작한다.

경부 고속도로로 올라서자 며칠 전 문학기행을 다녀 온 기억이 떠올랐다. ‘대전문학총연합회’ 문인들과 함께 경남의 함양, 산청의 목화시배지, 성철 스님 생가, 남명 조식 선생 서원, 지리산의 대원사를 다녀왔다. 사실 이 문학기행에 참가하기 전까지 많이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었다. ‘대전문학총연합회’의 단체 성격이나 구성원들에 대한 정보가 없는 상태여서 자칫 이방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공교롭게도 이 날 행사에는 ‘상상의 힘’ 동인들 중 참석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지난 번 ‘백지’ 동인 모임에서 처음 뵈었던 박상일 시인과 변재열 시인의 간곡한 참석 요청에 나는 참석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동향과 고등학교 선후배라는 인연의 끈도 작용했지만 문학단체행사를 주선하는 대선배들의 열정과 노력에 나는 서서히 동화되고 있었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상상의 힘’을 널리 알리고 협조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시 교육청 앞에서 어설픈 인사를 건네고 버스에 자리를 잡았을 때, 약간은 난감함을 느꼈다. 대학의 은사님, 그리고 은사님 같은 대선배 문인들…. 사십 중반 길에 들어선 나는 이미 가장 어린 청년이 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대전지역의 원로문인들과 처음으로 동행한 여행이었다. 그럼에도 그 분들이 나에게 베풀어 주신 애정과 환대, 대원사에서의 산채나물과 막걸리, 지리산 토종 꺼먹돼지와 잎새주는 잊지 못할 정과 맛으로 남게 될 것이다.

 차는 어느덧 김천 나들목을 빠져나와 직지사 초입으로 들어서고 있다. 나는 계룡산 입구보다 많은 음식점에 또 한 번 놀랐다. 관광 김천으로서 거듭나려는 지역민들의 삶에 대한 뜨거운 열기가 전해져오는 듯했다.

잘 정돈된 진입로, 그리고 수려함과 청정함을 보여주던 길가에 식재된 소나무 이 모든 것들은 나에게 김천의 이미지를 새롭게 해 주었다. 김천은 나에게 있어서, 옛날 고향 시골 장터에서 타의에 의해 연이 맺어졌던 ‘김천댁’ 이미지로 점철된 지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접한 김천의 첫 인상은 ‘산뜻함’ 그 자체로 다가서고 있었다.

2. 황학산의 깊이와 멋

 황학산(黃鶴山)은 경북 김천시 대항면과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상촌면 사이에 있는 높이 1,111m의 산이다. 학이 많이 찾아와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 하니 가히 백두대간의 중추를 이룰 만하다. 직지사 현판과 󰡔택리지󰡕에 황악산(黃嶽山)이라 기록되어 있어 그렇게 부르기도 한다. 대한불교 조계종 제8교구 본사로, 동쪽 산록에 위치하고 있는 직지사에는 석조약사여래좌상과 대웅전 앞 3층 석탑, 비로전 등 문화재 5점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신라 눌지왕(訥祗王) 2년(418) 아도화상(阿道和尙)에 의해 개창되어 국운과 함께 성쇠를 같이 했던 직지사의 위용과 규모에 우선 기대감을 가졌다. 사찰 감상에 대한 기대는 이미 진입로에서부터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김천의 중앙중학교 학생들이 현장체험학습을 위해 길게 줄을 지어 서서 소음을 만들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찰 진입로에 걸린 ‘東國第一伽藍黃嶽山門’이란 현판이 백두대간에 어울리게 시원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었다.

 직지사는 하산 후에 보기로 하고 백련암, 운수암, 참나무 숲 능선, 산정에 이르는 등산로를 타기로 했다. 시멘트로 포장된 다소 지루한 길을 중학생들과 어우러져 걷다보니 이마에 땀이 나기 시작한다. 가끔씩 학생들을 인솔하고 동행하고 있는 여교사와 대화를 나누고 인물을 훑어보는 재미도 솔솔 하다. 다행히 학생들은 운수암으로 가는 초입에서 등산로가 시작되고 있었다. 학생들이 운수암으로 간 관계로 이제야말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는 셈이다.

오름이 시작되면서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기름먹인 침목을 딛고 올라설 때면 ‘다리에 근육이 다져지겠구나’라는 생각에 힘들지만은 또 다른 쾌감이 땀으로 흘러 내렸다.

조주행 동인이 자취를 감춘 지 이미 오래이다. 다행히 백두대간을 종주 중인 동료와 붙여 놓아 안심이 되었다.

 참나무숲 능선에 이르자 정상까지 3,600미터라는 이정표와 함께 몇 개의 쉼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곳은 다른 일행이 자리 잡고 있어 우리는 내친 김에 정상을 향해 발을 옮겼다. 이미 자랄 대로 자라 버린 갈참나무의 신록으로 주변 경관이 확 트여있지 않은 이유도 컸다. 정상으로 이르는 길은 비교적 순탄했다. 가히 육산(肉山)이라 불릴 만큼 지반이 부르러웠으며 굵은 산 줄기가 대간의 명성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또한 도심 주변의 산에서는 이미 낙화한 철쭉꽃이 서늘한 그늘을 우산 삼아 보여주고 있는 아름다운 자태는 중년 사내들의 마음을 홀리기에 충분한 청순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비로봉 정상에 이르는 오름은 약간의 경사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우선 정상에 이르고 싶은 마음에 행보를 빨리했다. 해발 1,111미터, 황학산이라 분명히 씌어 있었다. 다소 기대 이하의 정상 표지석과 돌무덤이었지만 1,111미터의 정상에 서 있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희미하게 보이는 김천과 문경읍의 전경을 조망하며 가녀린 군상들이 저 곳에서 잘 살아보자고 아둥 바둥 싸우는 나날들이 얼마나 허망한 가를 다시금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그 허망한 뒤끝을 직지사가 길게 길을 틔워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우리는 다소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점심을 먹기 위해 다시 정상 밑에 위치한 헬기장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았다. 조주행 동인은 여전히 밑에서 헤매고 있었다. 배낭을 어깨에서 내리던 나는 비로봉 정상 전의 억새밭이 진풍경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러나 억새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뜻밖에 나는 고사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봄볕이 좋아 고향에 내려가면 만사를 젖혀두고 찾아 나서는 것이 고사리였다. 고사리가 자라는 장소를 알 뿐 아니라 즐겁게 산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자주 시골에 내려가곤 한다. 정상 아래의 평지에는 고사리가 거의 없었다. 오히려 헬기장을 중심으로 주변 지대에서 고사리를 채취할 수 있었다. 고사리뿐만 아니라 취나물도 많이 자라고 있었다. 그러나 고향의 취나물과는 다르게 잎에 윤기가 없었으며 다소 건조한 모습을 띄고 있어 많이 채취하지는 않았다.

조주행 동인이 합류하여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산에서 먹는 식사를 관념적 언어로 어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또한 소주의 달콤한 뒷맛을 청명한 바람에 띄워 보내는 즐거움이란…

3. 하산, 그리고 직지사

 하산 길의 즐거움은 바로 ‘여유’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상행 길에서 느끼는 맛스럼이란 거친 호흡을 통해 느끼는 살아있음, 그리고 타인 보다 좀 더 세상을 아우를 수 있는 산정의 점유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세사를 발아래에 두고 세상을 굽어보는 자아도취감에 있을 것이다.

형제봉에서 일행은 삶의 한 순간을 사진에 담고 내원계곡을 향하여 발걸음을 서둘렀다. 덕유산이나 민주지산, 식장산을 내가 즐겨 찾는 이유는 바로 물소리와 함께 산행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肉山인 백두대간의 계곡에서 물소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이미 非人이 되어 있었다. 다른 동행자들과 함께 옷을 벗고 자연과 한 몸이 되어가고 있었다. 계곡이 깊지 않고 낙엽이 쌓여 덕유산이나 민주지산 골짜기의 물만은 못했지만 그 시원함이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나는 문득 안정효의 󰡔하얀 전쟁󰡕에서 윤명철 병장을 베트공으로 오인하여 살해하고 정글 속으로 숨어들었던 채무겸 상병을 떠올렸다. “각종 질병과 생명을 위협하는 정글 속에서 땀과 때로 얼룩진 온 몸을 닦지 못했던 그가 이 곳에 와서 몸을 씻어 낸다면 얼마나 시원할까?”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글 쓰는 일에 평소 중압감을 받은 듯하다. 문학기행을 통해 문우들과의 교류가 확대되다 보니 요즘 들어 부쩍 청탁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한 긴장감을 풀어내려 깊은 산 속으로 숨어 들었겄만 정글 속에 숨어 있던 채무겸 상병이 이렇게 출몰할 줄이야 …

직지사 경내는 내가 지금까지 본 사찰 가운데 가장 웅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국제불교회관으로 사용되는 ‘만덕전’ 잔디밭, 3층으로 이루어진 ‘설법전’ 그리고 이 건물들을 에워싸고 있는 돌담길은 가히 일품이었다. 설법전 담 밑에 정겹게 놓여진 수십 개의 항아리를 보는 재미도 있었으나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나를 어느 승려가 힐끔힐끔 주시하는 통에 정감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산중다실로 접어들기 전 선원으로 통하는 입구에 ‘외인출입금지’라는 문구를 보고 그 승려가 행했던 태도를 알 수 있었다. 낯모르는 타인이 어찌 보면 당신의 공부방을 훔쳐본다는 생각도 가지겠지만 도 닦는 사람이 무에 그리 신경을 쓰는가도 싶었다. 산중다실에서 황학산의 차 맛을 느끼고도 싶었지만 일행들이 벌써 사찰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는 터라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없었다.

 비로전 앞의 삼층석탑은 국보로 지정될 만큼 멋을 보여주고 있었다. 예전 불국사에서 석가탑과 다보탑을 처음 보았을 때의 감회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비로전 앞에서 나는 부처님께 가벼운 목례로 예를 표하였다. 대전에서 온 한낱 범부가 문 밖에서 목례로 예를 표한다는 것이 다소 죄를 짓는 느낌이었지만 법당 안으로 가서 큰 절을 올릴 만큼 불심이 자란 것도 아니었거니와 그럴 만한 나이도 안 된 듯했다. 천 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는 비로전에서 흰색의 불상은 쉽게 눈에 띄었다. 천불상은 본래 모두 흰색이었으나 1992년에 한 구를 제외하고 모두 금색을 칠했다고 한다. 흰색의 불상을 보면 아들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있다던데, 혹여 또 한 명의 아들을 본다면 밖에서 보아야 하는 데 금년에 또 다른 인연을 만날 지도 모르겠다.

비로전 앞을 지나 급히 대웅전으로 향했다. 그러나 석가탄신일 행사를 마치고 연등과 전선을 수거하는 작업이 한 창이라 그냥 스치고 말았다. 그리고는 만세루를 거쳐 천왕문, 금강문, 대양문, 일주문을 거쳐 진입로를 급히 빠져 나오고 말았다.

뒤늦게 나는 직지사 경내를 거꾸로 둘러보았다는 것, 내가 스쳐 지나 온 대웅전 내에 그 유명한 ‘삼존후불탱화’가 있고 대웅전 앞의 쌍탑이 국보라는 것, 일주문의 기둥이 천 년 된 싸리나무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 그리고 …

 결국 나는 사전 지식 없이 찾아간 직지사에서 헛품만 팔고 온 셈이다. 그러나 결코 헛품만은 아니었던 것이 직지사 입구, 즉 매표소 맞은편에서 시조시인 정완영의 시비를 발견한 것이었다. 시비에는 ｢직지사운｣이라는 시가 돌에 새겨져 있었다. 시비를 사진에 담고 시를 종이에 옮기는 순간 빨리 오라는 일행으로부터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대부분의 작품들, 특히 지명도 있는 정완영 시인의 작품은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급히 발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후일담이지만 그 시를 인터넷에서 찾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황학산의 가을 단풍이 곱다는데 이번 가을에는 꼭 다시 들러 직지사의 오랜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