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州의 土姓 公州 公山李氏
◆. 公州 公山李氏 由來
공주 공산이씨(公州 公山李氏)는 신라 때 이천일(李天一)을 시조(始祖)로 받든다.
시조 이천일(李天一)은 18세 때 문명(文名)이 뛰어나 나라에서 초선(招選)되어 기원전 53년(신라 박혁거세 5년)에 아우 홍일(弘一)과 같이 한(漢 )나라에 들어가 중사마시(中司馬試)와 대과(大科)에 장원급제하여 상공주(尙公主)를 배수(拜受)하고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어 흉노적(匈奴賊)을 정벌한 공을 세워 요동백(遙東伯)에 봉 해졌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아니하고 환국하니 즉시 공산군(公山君 공산은 공주의 옛 지명)에 봉 해지고 시호는 문무공(文武公)이시다.
그 아우 홍일(弘一)도 대과에 급제하여 중서렬(中書令)을 역임하고 귀국하여 전의군(全義君)에 봉 해지고 시호는 문목공(文穆公)이시다.
시조께서 공산군(公山君)이므로 자손들이 본관을 공산(公山)으로 쓰며 공산지방에 세거하였다.
고려 초기에 지명이 공주(公州)로 바뀌면서 관향을 공주(公州) 또는 공산(公山)으로 쓰고 있으나 다 같은 일가이다.
공주 공산이씨 세계도(世系圖)에는 시조로부터 소목(召穆)이 뚜렷하고 신라 고려 조선조에 이르는 동안 군 후 상 시(君 侯 相 諡)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정승(政丞)이 13분이고 군(君)을 봉 함이 21분이며 문자(文字)시호가 8분이요 충자(忠字)시호가 7분이며 후(侯)작위를 받음이 6분이니 대대로 높은 벼슬을 한 삼한갑족(三韓甲族)의 대성이다.
특히 31세 송령(松齡)은 이부상서 정양공(睛襄公)이고 그 아우 백령(柏齡)이 양산군(陽山君) 충민공(忠敏公)으로 양산이씨(陽山李氏)의 관조(貫祖)가 되었으며 또 34세 교송(喬松)은 문하평장사 공산부원군(公山府院君)이오 그 아우 자송(子松)이 첨의정승 수성부원군(隋城府院君)으로 수원이씨(水原李氏)의 관조(貫祖)로 분관(分貫)되었다.
고려 말엽에 36세 우(?)는 전공시랑 금자광록대부 태자 태부 양호공(楊胡公)이오, 그 아들 37세 저(苧)는 보문각 대제학 화성부원군(花城府院君)이며, 38세 사손(思孫)은 은자광록대부 첨의정승(僉議政丞)이오, 39세 엽(曄)은 강릉도관찰사 겸 강릉대도호부사, 광록대부 전공판서 정충공(貞忠公)이며 그 아우 서(曙)는 판서 증 찬화공신으로 참지의정부사이다. 40세에서 자손이 크게 번창하여 7파로 분파되었다.
39세 엽(曄)의 여섯 아들 명선(明善)은 경력공파(經歷公派)요 명성(明誠)은 문성공파(文成公派)요 명덕(明德)이 공숙공파(恭肅公派)요 명보(明保)는 지평공파(持平公派)요 명윤(明尹)이 참의공파(參議公派)요 명의(明義)는 현감공파(縣監公派)요 서(曙)의 아들 부(敷)는 강양공파(剛襄公派)로 7종형제가 분파되었다.
◆. 가문(家門)을 빛낸 주요인물(主要人物) (역사적인 분만 소개)
◆. 두문동72현(杜門洞72賢) 송은(松隱) 이명성(李明誠)
두문동72현(杜門洞72賢) 중 한분이신 송은(松隱) 이명성(李明誠)은 동생 이명덕(李明德)과 더불어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인으로 고려 말에 벼슬하여 적성감무(積城監務)를 역임하고 감찰전중시어사(監察殿中侍御史)에 올라 지제고(知制誥)를 겸하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도의의 친교를 맺고 문관들의 문학을 장려하고 시험하였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자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나라가 망함에 있어 이를 구하지 못하면 충(忠)이 아니요, 어버이가 늙었는데 이를 끝내 부양하지 못하면 효(孝)가 아니다. 그러나 고국(고려)의 의리는 중하고 노모의 은혜는 가볍다” 하고 드디어 정포은(鄭圃隱)과 만월대(滿月臺) 아래에서 서로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이천(伊川) 산속으로 은거하였다. 마침내 충신 정포은(鄭圃隱)이 살해되고 드디어 조선이 개국되자 제윤명자개이초두(諸胤名字皆以草頭) 모든 아들의 이름자에 초두를 붙여 근(筋) 분(?) 말(茉)자 등으로 지어 부르게 하니 이는 조선조에 벼슬하지 말고 초목과 벗 삼아 고려를 향한 굳은 마음으로 살라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태종(太宗)이 여러 차례 벼슬을 주어 불렀으나 절이익수지언자서(截耳溺水之言自誓) 그때마다 말하기를 “차라리 옛날 초(楚)나라 굴원(屈原)과 같이 귀를 짜르고 물에 빠져 죽을망정 절대로 나가지 않겠다” 하고 끝내 이를 거절하였다. 송은(松隱) 이명성(李明誠)의 고려에 대한 절의(節義)는 두문동칠십이현록(杜門洞七十二賢錄)과 송오비(松塢碑)에 올라 세인의 추앙을 받고 있다. 그는 일찍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아침에 부조현에서 이별한 제현들 어디로 갔나. 붉은 충성심은 별처럼 뚜렷하고 마음속에 맺힌 슬픈 원한 실처럼 맺혔다. 밤빛은 돌아가는 구름처럼 축축하고 깜박이는 등불 밑에 나그네 꿈만 어수선하네. 충신 열사를 말하지 말라 대의는 죽고 삶을 기하여 나오느니』라고 하였다. 이명성(李明誠)의 충절에 대하여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 선생은 <그윽한 난초향기를 깊이 간직한 것 같아 모진 바람 혹독한 서리 진이기는 데에도 남은 향 내 음은 스며오는 듯하다.> 하고 또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후회하지 아니하고 우리들의 인륜을 바로 세웠다. 대의(大義)를 지킨 것은 어떻하였나 포은(圃隱)과 목은(牧隱)과 같으리라.> 라고 하였으며, 판서 이광직(判書 李光直)선생은 <공이 세상에 남긴 그윽한 향기는 부인이나 어린이들까지도 그분의 소문을 듣고 충의를 지킨 그 뜻을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벼슬을 버리고 과감히 물러나왔으니 그것은 본래 먹었던 뜻을 편 것뿐이요 대의를 지키는데 열렬하였던 것은 뒤 사람들을 충동시키기에 충분했다.> 라고 하였다.
◆. 우의정(右議政) 사봉(沙峰) 이명덕(李明德)
우의정(右議政) 사봉(沙峰) 이명덕(李明德)은 조선조 태조(太祖) 5년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 좌승지. 형조 호조참의. 도승지와 세자사부(후에 세종). 이조 병조 예조참판을 거쳐 공조 병조판서 등 4조(四曺)의 참판(參判))과 판서(判書)를 역임하시고 강원 황해 경기 전라 경상 등 5도(5道)의 관찰사(觀察使)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 세 번에 걸친 중국 정조사(正朝使).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판중추부사(判中樞院事)를 역임하시고 말년에 집에 돌아와 계실 때 세종대왕으로부터 궤장(?杖 안석과 지팡이)을 하사받으시고 세종26년에 천명을 다하시니 향년 76세이었다. 세종대왕(世宗大王)은 조회를 철폐하고 사제문을 내려 부의를 하였으며 시호(諡號)를 공숙(恭肅)이라하였으니 이는 “공경하고 화순하게 위를 섬기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굳게 가져 결단성이 있는 것을 숙(肅)이라 한다” 라고 하였고 대광숭록대부(大匡崇錄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 右議政)으로 증직(贈職)되었는바 공(公)께서는 조선조 개국초 명신(名臣)으로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세종(世宗) 등 4왕(王)을 52년 동안 모신 원로대신(元老大臣) 입조충신(立朝忠臣)이오 재가효자(在家孝子)이시었다. 태종(太宗)이 세종(世宗)에게 전위(傳位)하였으나 병권(兵權)은 상왕(上王)이 전권(全權)을 행사하는데 병조참판으로 상왕을 직접 보필하였으며, 특히 세종대왕의 대업을 이루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태종이 세자에게 전위코자 하시거늘 불가함을 누차 간하였으나 태종이 끝내 명령으로 지신사(知申事)인 공으로 하여금 대보(大寶 옥쇄)를 세자에게 바치도록 하여 드디어 경복궁에서 세종이 즉위하였다.
◆. 조선조(朝鮮朝) 개국공신 흥원군(興原君) 이 부(李 敷)
고려말(高麗末) 보문각대제학(普門閣大提學)에 등용되었으나 사임 은거하면서 태조 이성계와는 금란고의(金蘭古宜)하여 개국공신 흥원군(興原君)에 봉해지고 그 후 판본상시사(判本常時事)이 등용되시고 상장군으로 정종을 시위하였으며 태종 때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어전회의를 주재하시다. 추충익대개국공신(推忠翊戴開國功臣) 2등(二等)으로 증 공조판서 시 강양공(剛襄公)이시고 불천지위사당(不遷之位祠堂)인 연천 흥원사(興原祠)을 사액하시다.
◆. 임진왜란(壬辰倭亂) 공신(功臣)
이정견(李庭堅) 이정헌(李庭憲) 형제 공숙공파(47세) 이정견(李庭堅)은 의병장으로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 원종2등공신. 이정헌(李庭憲)은 부사맹 부산진중 순절 증 좌승지. 동래 낙안서원 충열사 배향
이기수(李麒壽) 이붕수(李鵬壽) 형제 경력공파(48세). 이기수(李麒壽)는 의병창의 주도 증 부제학 경성 창열사 배향 이붕수(李鵬壽)는 정문부를 대장으로 추대하고 별장으로 백탑전투에서 전사. 증 지평 부제학.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 경성 창열사 배향
이몽구(李夢龜) 공숙공파(46세) 충무공 별장 노량해전 전사. 선무원종공신 증 가선대부 삼도수군절도사
이천장(李天章) 공숙공파(48세) 계공랑. 공주 공산성 전투 전사 공산성 망일사사은비(望日寺思恩碑)
이지현(李之賢) 참의공파(40세) 부장 관군 선봉 노량전사. 정려
◆. 절의(節義)
이 진(李 畛) 공숙공파(43세) 임피현령. 단종폐위 항거 벼슬을 버리고 영주낙향 단종에 대한 절의
이 겸(李 謙) 경력공파(44세) 선전관. 연산조 때 경성유배. 중종반정으로 풀려났으나 자손이 그 인연으로 세거. 증 공조판서.
◆. 청백리(淸白吏)
이지온(李之?) 경력공파(52세) 호 빈교(貧郊). 삼척부사. 형조참판. 한성좌윤. 효자 학포 백산서원 배향
◆. 도덕 문장가(道德 文章家)
이 건(李 鍵) 문성공파(45세) 호 풍계공. 문장가 금부도사 보사원종공신 이공권(李公權) 문성공파(48세) 호 봉화공. 문장가 이조참의 보사원종공신 이 위(李 ?) 공숙공파(48세) 호 혁회제. 도학 문장가. 병자호란 의병. 증 동지중추부사 화순 충현사 배향 이언세(李彦世) 문성공파(50세) 호 주선제. 문장가. 사간원 정언 이응거(李膺擧) 참의공파(51세) 호 덕암 돈희공. 문장가 효자. 한성판윤. 영변 돈희사 배향 이원배(李元培) 경력공파(56세) 호 구암 문의공. 도학 문장가 도북8현. 경성 도북사 배향
◆.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이필주(李弼柱) 공숙공파(58세) 민족대표 33인 중 한분. 목사. 2년형 옥고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독립유공자 2등급) 이승수(李承洙) 字 承吉. 안명길 안악사건 주동. 15년형 옥고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독립유공자 3등급) 이화일(李化日) 경력공파(61세) 홍범도 장군 청산리봉오동전투 독립군분대장 전사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독립유공자 3등급) 이희발(李熙發) 공숙공파(57세) 독립운동가 보국훈장 광복장 이호용(李浩溶) 문성공파(58세) 독립운동가 최면암 의사와 순창의거 주동 이병한(李柄漢) 공숙공파(58세) 만주에서 독립운동 건국공로훈장
◆. 현대 중요 인물(現代主要人物)
이영준(李榮俊) 경력공파(60세) 의학박사. 연세대 의과전문학교장. 부속병원장. 국회부의장 이종우(李鍾雨) 경력공파(61세) 철학 문학 법학박사. 고려대학교총장. 문교부장관. 국회의원 이형근(李亨根) 문성공파(59세) 육군대장 육군참모총장. 합동참모회의 의장 이주일(李周一) 경력공파(60세) 육군대장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 대한체육회장. 감사원장 이인관(李仁寬) 경력공파(61세) 경기공전 교장. 충암학원 설립자 이제구(李濟九) 경력공파(61세) 의학박사 서울대 의과대학장. 서울대병원장 이 용(李 龍) 경력공파(61세) 육군소장. 강원도지사. 교통부차관. 철도청장. 이소연 우주인 이강인 축구선수
◆. 훌륭한 조상(祖上)이 배향(配享)되어 있는 서원(書院) 사당(祠堂) ◎. 시조 모선단(始祖 慕先壇) 위치 충난 공주시 월송동 사송정 배향위 始祖 公山君 文武公 휘 李天一 이하 39世祖 列位
◎. 명탄서원 충절사(鳴灘書院 忠節祠) 위치 충남 공주시 월송동 사송정 배향위(영정) 松隱 李明誠 文成公 고려조 말 항절충신 두문동72현 沙峰 李明德 恭肅公 조선조 초 충신 증 의정부 우의정
◎. 좌포 충절사(左浦 忠節祠) 위치 전북 진안군 성수면 좌포리 배향위(영정) 松隱 李明誠 文成公 - 고려조 말 항절충신 두문동72현 沙峰 李明德 恭肅公 - 조선조 초 충신 증 의정부 우의정
◎. 칠송서원 충현사(七松書院 忠賢祠) 위치 전남 화순군 능주 배향위(영정) 沙峰 李明德 恭肅公 - 조선조 초 충신 증 의정부 우의정 ?悔齊 李 ? - 병자호란 창의 도학 문장가
◎. 연천 불천지위사당 흥원사(漣川 不遷之位祠堂 興原祠) 위치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무등리 백촌동 배향위(위패) 靜?軒 李 敷 剛襄公 - 고려조 말 보문각대제학 조선조 초 개국공신2등 흥원군 공조판서(불취)
◎. 공주 숭모제(公州 崇慕齊) 위치 충남 공주시 신풍면 만천리 배향위 鶴渚 李明保 持平公 - 사헌부 지평
◎. 경성 창렬사(鏡城 彰烈祠) 위치 함경북도 경성 배향위(위패) 李麒壽 임진왜란공신 - 증 부제학 李鵬壽 임진왜란공신 - 북관대첩 창의주동. 증 부제학. 북관대첩비
◎. 경성 도북사(鏡城 道北祠) 위치 함경북도 경성 배향위(위패) 龜岩 李元培 文懿公 - 도덕 도북8현. 증 이조참판(불취)
◎. 학포 백산서원(鶴浦 栢山書院) 위치 함경남도 안변 학포 배향위(위패) 貧郊 李之? 淸白吏 - 형조참판. 한성좌윤
◎. 안주 충민사(安州 忠愍祠) 위치 평안북도 안주 배향위(위패) 李雲斗 - 정묘지란 순절. 절도사
◎. 영변 돈희사(寧邊 敦僖祠) 위치 평안북도 영변 배향위(위패) 德巖 李膺擧 敦僖公 - 청백리. 한성판윤
◎. 개성 두문동서원(開城 杜門洞書院 위치 개성 두문동 배향위(위패) 松隱 李明誠 文成公 - 고려조 말 항절충신 두문동72현
◎. 장성 경현사(長城 景賢祠) 위치 전남 장성군 남면 삼태리 만수산 배향위(위패) 松隱 李明誠 文成公 - 고려조 말 항절충신 두문동72현 ◎. 파주 고려통일대전(坡州 高麗統一大殿) 위치 경기도 파주시 배향위(위패) 松隱 李明誠 文成公 - 고려조 말 항절충신 두문동72현
◎. 동래 낙안서원(東來 樂安書院) 위치 부산시 동래구 배향위(위패) 李庭憲 임진왜란공신 - 부사맹. 부산진 전투 순절 증 좌승지
◎. 천안 독립기념관(天安 獨立記念館) 위치 충남 천안시 배향위(영정) 李弼柱 독립운동가 - 목사. 민족대표 33인
◆. 공주 공산이씨 인구(人口) 및 세거지(世居地)
2000년도 통계청의 본관별(本貫別) 인구통계자료(人口統計資料)에 의하면 공주본관(公州本貫)이 10.764가구(家口)에 35.148명이고, 공산본관(公山本貫)이 998가구(家口)에 3.241명으로 우리나라 공주(공산)이씨는 총 11.761가구(家口)에 38.389명으로서 우리나라 인구(人口) 1.000명 가운데 한명이 공주이씨(公州李氏) 인 셈이다.
지역별 인구분포 통계에 의하면 각파(各派)의 자손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으나 서울, 인천, 경기등 수도권(首都圈)에 절반이 넘는 6.843가구 21.154(55%)명이 살고 있고, 충청도에 2.126가구 6.843명(18%), 경상도에 1.876가구 6.119명(16%), 전라도에 1.033가구 3.318명(9%)이 살고 있으며, 강원도에 295가구 886명과 제주도에도 19가구 69명이 살고 있다. 시조(始祖) 이래 세거(世居)의 터로 삼았던 곳을 짐작하기는 어려우나 고려조(高麗朝) 중엽, 후대인 29세 검교(檢校) 정승령(政丞令) 삼사사(三司使) 이승경(李承景) 이후로 몇 대의 묘영(墓塋)이 전북 남원 대곡동과 충남 공주 청양 그리고 경기도 양주 이천등지에 있으므로 그 일대(一帶)에 자손들이 살았다고 믿어진다.
조선조(朝鮮朝)초에 7파로 분파(分派)하였는데,
경력공파(經歷公派)의 자손인 45세 겸(謙)이 연산군(燕山君)때 함북 경성으로 유배(流配)되어 그 후손이 정착하여 집대성(集大成)을 이루었으나 지금은 남북 분단(南北分斷)으로 극소수만이 남한에 거주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문성공파(文成公派)는 강원도 이천(伊川)에 자리 잡고 살았는데 근(筋)의 후계 45세 현산(賢山)의 자손은 충절사(忠節祠)가 있는 전북 진안(鎭安) 좌포(佐浦)에 자리 잡고 그 후손이 전주 정읍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고, 분(?)의 후손은 경기도 파주 양주 전북 남원(南原)등지에 옮겨가 살았고 45세 진(進)의 자손은 충남 공주(公州) * 천안(天安)등지에 옮겨가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한편 공숙공파(恭肅公派)는 원근(元根), 형근(亨根)의 후손은 영남(嶺南)에 낙향하여 경북 영주 예천 안동과 충남 대천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고, 정근(貞根)의 후손은 충남으로 낙향하여 명탄서원(鳴灘書院)이 있는 공주 월송동을 세향(世鄕)으로 삼아 충남 전역에 산거하며, 영근(寧根)의 후손은 적은 수가 대전 공주등지에 살고 있으며, 효근(孝根)의 자손은 광주 또는 충현사(忠賢祠)가 있는 전남 화순에서 집성촌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으며, 그 일부가 경남 하동 진주등지에 산거하고 있다.
또한 지평공파(持平公派)는 43세조 방필(邦弼)이 공주의 신풍에 낙향하여 집성촌을 이루고 충남 일원에 산거하고 있다.
그리고 참의공파(參議公派)의 후손은 평안도 안주 영변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으나 경력공파 자손과 같이 남북분단(南北分斷)으로 그 후손 중 일부가 대전 부산등지에 피난 와서 살고 있으며,
현감공파(縣監公派)의 후손들은 충남 서산등지에 산거하나 그 수가 많지 않다.
강양공파(剛襄公派)의 후손은 흥원사가 있는 경기도 연천 왕징을 세거지로 고양 포천 철원등지에 자리 잡고 집성촌을 이루고 있으며, 파주 청양 부여 당진등지에도 많이 살고 있다.
(이병운 전 대종회장님이 수집 간추린 자료임을 알려드립니다.)
(공주이씨 공숙공파 하동종친회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