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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지도/한암당/이유립) 북부여 분국도
위로변강침략도(衛虜邊彊侵略圖)
<규원사화> 단군기
先是, 夫婁旣平水土, 而夏禹適治唐堯九(年)
[秊]之水. 宇內諸國, 悉會於塗山.明.鳳陽府. 夫婁亦奉命往會, 又使神誌(氏)
齋寶玉?弓矢以從焉. 自蚩尤.軒轅大戰以後, 兩國始以玉?帛相見, 可稱東方會盟之始矣.
이 보다 앞서 부루가 물과 땅을 모두 안정시키고 나니, 하우씨(夏禹氏)가 마침 당요(唐堯) 9년의 홍수를 다스리기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모두 도산(塗山)(명明의 봉양부鳳陽府)에 모였다. 부루 역시 명을 받들고 가서 함께 모이며 신지씨로 하여금 보옥 및 활과 화살을 지니고 따르게 하니, 치우와 헌원이 크게 싸운 이후 두 나라가 처음으로 옥과 비단을 가지고 서로 만난 것으로서, 가히 동방회맹(東方會盟)의 시초라고 할 만하다.
<조선상고사> 2편 수두시대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 왕검이 아들 부루를 보내어 하우(夏禹)를 도산(塗山)에서 만났다.”고 하였고, 또 오월춘추(吳越春秋)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어, “당요(唐堯) 때에 9년간 홍수가 져서 당요가 하우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라 하였다.
우(禹)가 8년 동안이나 공을 세우지 못하고 매우 걱정하여, 남악(南岳) 형산(衡山)에 이르러 흰말을 잡아 하늘에 제사 드려 성공을 빌었는데, 꿈에 어떤 남자가 스스로 현이(玄夷)의 창수사자(蒼水使者)라 일컫고 우에게 말하기를 구산(九山) 동남쪽의 도산(塗山)에 신서(神書)가 있으니, 석달 동안 재계(齋戒)하고 그것을 꺼내 보라 하므로 우가 그 말에 의하여 금간옥첩(金簡玉牒)의 신서를 얻어 오행통수(五行通水)의 이치를 알아 홍수를 다스려 성공하고, 이에 주신(州愼)의 덕을 잊지 못하여 정전을 제정하고 율도량형(律度量衡)의 제도를 세웠다”고 하였다.
현이(玄夷)는 당시 조선의 동?남?서?북?중 오부(五部)를 남(藍)?적(赤)?백(白)?현(玄)?황(黃)으로 별칭했는데 북부가 곧 현부(玄部)이니 지나인이 현부를 가리켜 현이(玄夷)라고 한 것이요, 창수(蒼水)는 곧 창수(滄水)이고, 주신(州愼)?숙신(肅愼)?직신(稷愼) 혹은 식신(息愼)으로 번역되었으니 주신은 곧 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옛 기록의 부루는 오월춘추(吳越春秋)의 창수사자(蒼水使者)이니, 이때 지나에 큰 홍수가 있었음은 여러 가지 옛 역사가 다 같이 증명하는 바인데, 단군 왕검이 그 수재를 구제해주려고 아들 부루를 창해사자에 임명하여 도산에 가서 하우(夏禹)를 보고, 삼신오제교(三神五帝敎)의 일부분인 오행설(五行說)을 전하고 치수의 법을 가르쳐주었으므로 우(禹)는 왕이 되자 부루의 덕을 생각하여 삼신오제의 교의를 믿고 이를 지나에 전포(傳布)하였으며, 정전과 율도량형도 또한 지나의 창작이 아니라 조선의 것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꿈에 창수사자를 만났다.’고 하였는가? 신성(神聖)을 장식하여 사실을 신화화함이니, 이는 상고에 흔히 있는 일이다.
<한단고기> 단군세기
47대 단군 고열가 재위 58년(BC296 - 239)
丙寅元年(紀元2039年) 己卯十四年(2052)立檀君王儉廟于白岳山令有司四時祭之帝歲一親祭己酉四十四年(2082)燕遣使賀正癸丑四十八年(2086)十月朔日蝕是歲冬北漠酋長阿里當夫請出師伐燕帝不從自是怨不朝貢壬戌五十七年(2095)四月八日解慕漱降于熊心山起兵其先 離國人也
癸亥五十八年(2096)帝仁柔不斷令多不行諸將恃勇禍亂頻起國用不敷民氣益哀三月祭天之夕乃與五加議曰昔我列聖肇極垂統種德宏遠永世爲法今王道哀微諸汗爭强惟朕 德懦不能理無策招撫百姓離散惟爾五加擇賢以薦大開獄門放還死囚以下諸 虜翌日遂棄位入山修道登仙於是五加共治國事六年先是宗室大解慕漱密與須臾約襲據故都白岳山稱爲天王郞四境之內皆爲聽命於是封諸將陞須臾侯箕丕爲番朝鮮王往守上下雲障蓋北夫餘之興始此而高句麗乃解慕漱之生鄕也故亦稱高句麗也
북부여기 상편
시조 단군 해모수 재위 45년(BC239 - 195)
<始祖檀君 解慕漱 在位四十五年壬戌元年帝天姿英勇神光射人望之苦天王郞年二十三從天而降是檀君高列加五十七年壬戌四月八日也依熊心山而起策室蘭濱戴烏羽冠佩龍光劍乘五龍車與從者五百人朝則廳事暮登天至是郞位癸亥二年是歲三月十六日祭天設烟戶法分置五加之兵屯田自給以備不虞己巳八年帝率衆往諭故都五加遂撤共和之政於是國人推檀君是爲北夫餘始組也.>
<燕遣將秦介侵我西鄙至滿番汗爲界>
<丙午四十五年燕盧 叛漢入凶奴其黨衛滿求亡於我帝不許然帝以病不能自斷番朝鮮王箕準多失機遂拜衛滿爲博士劃上下雲障而封之是歲冬帝崩葬于熊心山東麓太子慕漱離立.>
2세 단군 모수리 재위 25년(BC194 - 170)
<戊申二年帝遣上將延 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滿赤厭苦不復侵擾己酉三年以海城屬平壤道使皇弟高辰守之中夫餘一城悉從糧餉冬十月立京鄕分守之法京則天王親總衛戌鄕則四出分鎭恰如柶 觀戰龍圖知變也辛未二十五年帝崩太子高奚斯立.>
3세 단군 고해사 재위 49년(BC169 - 121)
<三世檀君 高奚斯 在位四十九年壬申元年正月樂浪王崔崇納穀三百石于海城先是崔崇自樂浪山載積珍寶而渡海至馬韓都王儉城是檀君解慕漱丙午冬也癸丑四十二年帝躬率步騎一萬破衛賊於南閭城置吏庚申四十九年一群國遣使獻方物是歲九月帝崩太子高于婁立.>
4세 단군 고우루(혹은 해우루) 재위 34년(BC120 - 87)
<擢高辰守西鴨綠增强兵力多設城柵能備右渠有功陞爲高句麗侯癸亥三年右渠賊大擧入寇我軍大敗海城以北五十里之地盡爲虜有甲子四年帝遣將攻海城三月而不克丙寅六年帝親率精銳五千襲破海城追至薩水九黎河印悉降丁卯七年設木柵於坐原置軍於閭以備不虞癸酉十三年漢劉徹寇平那滅右渠仍欲置四郡盛以兵四侵於是高豆莫汗倡義起兵所至連破漢寇遺民四應以助戰軍報大振甲午三十四年十月東明王高豆莫汗使人來告曰我是天帝子裝欲都之王其避之帝難之是月帝憂患成疾而崩皇弟解夫婁立之東明王以兵 之不己君臣頗難之國相阿蘭弗奏曰通河之濱迦葉之原有地上壤膏 宜五穀可都遂勸王移都是謂迦葉原夫餘或云東夫餘.>
북부여기 하편
5세 단군 고두막(혹은 두막루)재위 22년(BC108 - 87), 재위 26년(BC86 - 60)
<嘗見北夫餘衰漢寇熾盛慨然有濟世之志至是卽位於卒本自號東明或云高列加之後也乙亥三年帝自將傳 所至無敵不旬月衆至五千每與戰漢寇望風而潰遂引兵渡九黎河追至遼東西安平乃古 離國之地甲午二十二年是爲檀君高于婁三十四年帝遣將破裵川之漢寇與遺民幷力所向連破漢寇擒其守將拒以有備乙未二十三年北夫餘奉城邑降屢哀欲保帝廳之降封解夫婁爲候遷之 陵帝前導鼓吹率衆數萬而入都城仍稱北夫餘秋八月與漢寇屢戰于西鴨綠可之上大捷壬寅三十年五月五日高朱蒙誕降于 陵辛酉四十九年帝崩以遺命葬于卒本川太子高無胥立.>
6세 단군 고무서 재위 2년(BC59 - 58)
<六世檀君 高無胥 在位二年壬戌元年帝卽位于卒本川與父老會于白岳山立約祭天頒行事例內外大悅帝生而有神德能以呪術呼風喚雨善賑大得民心有小解慕漱之稱時漢寇騷亂遍于遼左屢戰得捷癸亥二年帝巡到寧古塔得白獐冬十月帝崩高朱蒙以遺命入承大統先是帝無子見高朱蒙爲非常人以女妻之至是卽位時年二十三時下夫餘人將欲殺之奉母命與烏伊摩離陜父等三人爲德友行至 陵水欲渡無梁恐爲追兵所迫告水曰我是天帝子河伯外孫今日逃走追者垂及奈何於是魚鼈浮出成橋始得渡魚鼈乃解.>
가섭원부여기
시조 해부루 재위 39년(BC86 - 48)
始祖 解夫婁 在位三十九年乙未元年王爲北夫餘所制徙居迦葉原赤稱 陵宜五穀尤多麥又多虎豹熊狼便於獵丁酉三年命國相阿蘭弗設賑招撫遠近流民使及時飽暖又給田耕作不數年國富民殷時有時雨滋 陵民歌王正春之謠壬寅八年先是河伯女柳花出遊爲夫餘皇孫高慕漱之所誘强至鴨綠邊室中而私之仍升天不是父母責其無媒而從之遂謫居邊室高慕漱本名弗離支或曰高辰之孫王異柳花同乘還宮而幽之是歲五月五日柳花夫人生一卵有一男子破殼而出是謂高朱蒙骨表英偉年甫七歲自作弓矢百發百中夫餘語善射爲朱蒙故以名云甲辰十年王老無子一日祭山川求嗣所乘馬至鯤淵見大石相對俠淚王怪之使人轉其石有小兒金色蛙形王喜曰此乃天 我令胤乎乃收而養之名曰金蛙及其長立爲太子壬戌二十八年國人以高朱蒙爲不利於國欲殺之高朱蒙奉母柳花夫人朦南走渡淹離大水到卒本川明年開新國是爲高句麗始組也癸酉三十九年王薨太子金蛙立
2세 금와 재위 41년(BC47 - 7)
二世 金蛙 在位四十一年甲戌元年王遣使高句麗獻方物丁酉二十四年柳花夫人薨高句麗以衛兵數萬返葬于卒本命以皇太后禮遷就山陵建廟祠于其側甲寅四十一年王薨太子帶素立
3세 대소 재위 28년(BC6 - AD22)
三世 帶素 在位二十八年乙酉元年春正月王遣使高句麗請交質子高句麗烈帝以太子都切爲質都切不行王 之冬十月以兵五萬往侵卒本城大雪多凍死乃退癸酉十九年王侵攻高句麗至鶴盤嶺下遇伏兵大敗壬午二十八年二月高句麗擧國來侵王自率衆出戰遇泥 王御馬陷不得出高句麗上將怪由直前殺之我軍猶不屈圍數重適大霧七日高句麗烈帝潛師夜脫從間道而遁去夏四月王弟與從者數百人奔至鴨綠谷見海頭王出獵遂殺之而取其民走夷曷思水賓立國稱王是爲曷思至太祖武烈帝隆武十六年八月都頭王見高句麗日强遂擧國自降凡三世歷四十七年而國絶募頭爲于台賜第宅以琿春爲食邑仍封爲東夫餘候秋七月王從弟謂國人曰先王身弑國亡人民無所依曷思偏安不能自國吾赤才智魯下無望與復寧降以圖存以故都人民萬餘口投高句麗高句麗封爲王安置椽那部以其背有絡文賜姓絡氏後稍自立自開原西北徙到白狼谷又近燕之地至文咨烈帝明治甲戌以其國折入于高句麗椽那部絡氏遂不祀
고구려국 본기 제6
고리군의 왕 고진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고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한 공을 세워 봉함을 받은 바라. 불리지는 일찍이 서쪽 압록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만나 그녀를 맞아 들여 고주몽을 낳게 하였다. 때는 곧 임인(BC 79) 5월 5일이라. 곧 한나라왕 불능의 원봉2년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에 뽑혀 말지기로 임명되었다. 얼마 안되어 관가의 미움을 사서 오이와 마리와 협보와 함께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때마침 부여왕은 후사가 없었다. 주몽이 마침내 사위가 되어서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연타발은 졸본 사람이다. 남북의 갈사를 오가면서 재물을 모아 부를 이루어 거만금에 이르렀다. 은밀하게 주몽을 도와 창업입도의 공을 세웠다. 뒤에 무리를 이끌고 구려하로 옮겨 고기잡이와 소금장사를 하게 되더니 고주몽 성제가 북옥저를 칠 때에 양곡 5,000석을 바쳤다. 서울을 눌현으로 옮길 때는 앞질러 자납을 원하여 유망민을 초무하고 왕사를 권하여 공을 세웠으니 좌원에 봉작을 받았다. 나이 80에 죽으니 바로 다물 34년 병인 3월이다.
고주몽은 재위할 때 일찍이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거든 마땅히 봉하여 태자로 삼을 것이다.'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였는데 기묘년(BC42)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서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 번의 사이에 이르렀다. 바다에 가까운 외진 곳으로 여기에 살기 10년 만에 밭을 사고 장원을 두고 부를 쌓아 몇 만금이러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협력하는 자가 많았다.
북쪽은 대수에 이르고 서쪽은 큰 바다에 임했다. 반천리의 땅이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사람을 보내 편지를 주몽제에게 올리며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니 주몽제는 몹시 기뻐하시며 이를 장려하여 소서노를 어하라라고 책봉(BC31)했다. 13년(BC19) 임인에 주몽제가 돌아가셨다. 태자 비류가 즉위(BC19)하였는데 모두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마려 등은 온조에게 말하기를 '신등이 듣기는 마한의 쇠퇴는 이미 들어난 일이요 가서 도읍을 세워야 할 때입니다'라고 했다. 온조가 '좋다'고 승락하니 곧 배를 짜서 바다를 건너 처음 마한의 미추골에 이르렀다.
앞으로 나아가 사방을 살펴보았지만 텅 비어서 사람 사는 곳이 없었다. 한참 만에 한산에 이르러서 부아악에 올라 살만한 땅을 살펴보고는 마려 오간 등 열명의 신하들이 말했다. '생각컨대 이 하남의 땅은 북쪽이 한수를 끼고 동쪽은 크고 높은 산이요 남쪽은 기름진 평야가 열려 있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으니 이곳은 천험의 지리를 갖추고 있어 얻기 어려운 지세이옵니다. 마땅히 도읍을 정할 만한 곳입니다.
여기보다 나은 곳을 찾지 마시옵소서.' 온조는 열 신하들의 의견을 따라 하남의 위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라고 칭하니 백제라는 이름은 백사람이 건너 왔다는 뜻의 이름이다. 뒤에 비류가 죽으니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그의 땅을 가지고 귀순해 왔다.
1) 사기 오제본기(五帝本紀)에 ??북산융발식신(北山戎發息愼)??이라는 기록과 관자(管子) 규도편(揆度篇)에 ??발조선지문파(發朝鮮之文皮)‘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의 식신(息愼)은 곧 숙신(肅愼)으로 숙신은 직신(稷愼)으로도 표기가 되었다.
어쨌든 위의 기록에서 숙신과 조선에 똑같이 발(發)이라는 글자가 붙어있는 것이 보인다.
원래 발숙신에서 발과 숙신은 연칭이 아닌 따로 떼어내어 해석한다고 하였으나 관자 규도편에 보이는 위의 문구와 같은 관자의 기록에서 발조선(發朝鮮)과 제나라가 교역을 했던 사실은 발조선(發朝鮮)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이를 감안해 본다면 발숙신(發肅愼)이라는 단어 역시 같은 용법으로 연칭을 해야 옳다.
이외에도 발숙신(發肅愼)이라는 단어는 사기 오제본기 외에 춘추시대 때 작성된 여러 사서에 한 두 글귀씩 발견이 된다. 이 경우 거꾸로 식신발(息愼發)이라고 쓰일 법도 한데도 발식신이라는 표현은 그대로이다.
또한 같은 시기 주나라에 호시(弧矢)와 석노(石?)를 바쳤다는 기사를 같은 시기 발숙신과 발조선에서 바쳤다고 서로 다른 기록에 보이는 바 조선(朝鮮)과 숙신(肅愼)은 그 의미가 동격임을 알 수 있다. 어찌 되었든 조선과 숙신이 같은 말이 틀림없다면 그 의미는 무엇인가?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 숙신(肅愼)의 옛 이름은 주신(珠申)이며 그 의미는 소속 관경(觀境)이라 하였다.
소속 관경은 영토를 말하는 것이요, 곧 나라 자체를 의미하는 말인 것이니 우리 민족의 기개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민세(民世) 안재홍(安在鴻)은 심지어 주신(珠申)은 한님이 우리에게 살라고 ’주신‘ 땅을 뜻하는 주신이라고 해석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기존의 조선의 어원 해석은 조선의 수도였던 아사달(阿斯達)과 그 의미가 동격이라고 보고 있다. 이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침땅’이라는 의미의 어떤 고어를 훈차(訓借)로써 조선(朝鮮)이라 하고 음차(音借)로써 아사달(阿斯達)이라고 표기했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과거 처음에 조선이 도시국가 단계에서 출발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기 때문에 수도명인 아사달을 국호로 정하였는데 이것의 훈차가 바로 조선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한참 잘못된 것이다.
이미 조선이라는 말 자체가 훈차가 아닌 음차 표현인 것을 숙신과 조선의 관계가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일본어에서 아침 조(朝)를 발음할 때에는 ‘아사’라고 주로 발음하는데 조선을 발음해 보라고 하면 ‘아사센’이라고 하지 않고 ‘조센’이라고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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