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전함과 6사공양 / 복전함은 무슨 의미를 내포하나요?
① 복전함의 의미
사찰의 불전에는 복전함福田函이 놓여있다. 때로 복전함은 불전함佛錢函으로도 되어 있는데, 붓다에게 올리는 금전이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은 복전함에 비하면 대단히 비속하다.
복전이란, ‘복의 밭’을 의미한다. 밭이라는 전田자는 고대에는 사냥터라는 의미였다. 전자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밭농사가 아직 일반화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밭농사가 일반화되자 의미가 변화하여 밭을 가리키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전자가 생계를 지칭하는 글자라는 점을 명백히 해준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밭농사에서 논농사로 또다시 이행하게 되는데, 중국의 관중지역은 강우량이 적기 때문에 논농사로의 전환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전자가 더 이상 논의 의미로는 전환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논을 수전水田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여 ‘논 답沓’자를 만들어 사용하게 된다.
전에는 생계와 소출의 의미가 내포된다. 그러므로 복전이란 복을 심어 소출을 거둘 수 있다는 의미이다. 여기에서의 복이란 공덕功德과 복덕福德의 양자를 모두 의미한다.
공덕이란 깨달음에 다가가는 것과 같은 정신적인 측면이며, 복덕이란 물질적인 풍요를 확보할 수 있는 유형적인 조건이다. 인간이란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인 환경의 두 가지를 모두 만족해야 행복할 수 있다. 복전함의 복에는 바로 이러한 두 가지의 의미가 고르게 내포되는 것이다.
공덕과 복덕을 심는 밭, 그래서 많은 소출을 낼 수 있는 곳이 복전함이다. 왜냐하면, 복전함을 통해서 우리는 붓다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세상에 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제법 여럿 있지만, 태어나면서부터 호화로움을 입으며 당대에서부터 확고한 대우를 받으면서 오늘에 이르는 인물은 석가모니 이외에는 없다. 흔히 붓다와 더불어 4대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공자나 소크라테스, 그리고 예수 등은 모두다 고난의 일생을 산 분들이다. 또 그 가르침이 전해지는 것 역시 순탄치 못했으며, 그로 인하여 많은 부침이 있었다. 이는 분명 붓다와 불교만의 특수한 우월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붓다가 다른 성인들에 비해서 태생적으로나 출가해서 좋은 환경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전생의 수행자 시절에 쌓았던 복덕의 과보이다. 이러한 복덕은 오늘날까지도 다 소진되지 않았기 때문에 붓다에게는 오늘도 수많은 사원에서 공양이 올라간다. 붓다를 제외한 그 어떠한 성인이나 현인도 붓다와 같은 복덕을 갖추어 많은 공양을 확보한 존재는 유사이래로 없다. 이는 붓다가 아주 많은 복덕을 성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다.
또한 붓다와 같은 경우는 최상의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다. 그러므로 공덕 역시 매우 수승하다. 그렇기 때문에 붓다에게 올리는 것은 그것이 비록 작은 것이라도 뛰어난 과보를 산출해 내게 되는 것이다. 마치 기름진 밭이 적은 종자에도 많은 수확을 주는 것처럼 말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좋은 밭을 통해 67배의 소출을 올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구축한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이러한 소출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만배의 결과를 맺어준다. 그래서 불국사와 관련된 연기설화에서 점개는 하나를 보시하면 만배를 얻는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만배의 의미가 바로 복전함에 깃들어 있다. 다시 생각해 본다면, 만이 다시금 또 다른 결실로 맺어진다면 어지 만에서 그치겠는가! 그것은 결국 무상도라는 깨달음으로 완결되고 말 것이다.
② 복전과 승려
과거에는 복전이라는 명칭이 승려를 지칭하는 표현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청정한 승려에게 올리는 공양도 많은 소출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승려라는 명칭은 상가를 음사한 승가에서 유래한다. 승가는 가나나 길드와 같은 단체, 즉 집단을 의미한다. 이것을 중국인들이 승이라고 축약했다. 불·법·승의 승과 같은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음사를 축약하다보니 그 본뜻이 확실하지 않고 모호해지게 된다. 그래서 여럿이 함께 한다는 의미의 려侶라는 말을 붙여 승려라는 표현을 만들어 낸 것이다. 즉, 승려에 있어서 승은 음사고, 려는 번역어라고 하겠다.
또 번역으로는 무리라는 의미를 써서 중衆이라고 하였는데, 이 표현은 우리나라에 와서 속화되어 사용되게 된다. 그에 비해서 승이라는 표현은 존칭어 님이 붙으면서 승님이 된다. 승님이 전화된 말이 바로 스승님이다.
승님이 스승님이 될 수 있는 것은, 과거 당나라 유학과 같은 유학승들에 의해서 승려집단이 선진지식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학은 형편이 좋은 귀족들도 갈 수 있었지만, 중국까지 가는 길이 과거에는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귀족이 목숨을 걸고 유학을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승려들은 불교의 가르침을 보다 정확하고 폭넓게 알기위해 종교심으로 유학을 감행하게 된다. 그 결과 승려들의 유학이 더 많게 되는 것이다.
또 과거에는 사찰에 학교와 같은 교육시설이 겸비되어 있었다. 오늘날은 종교시설이 종교와 관련된 역할만 하지만, 예전에는 학교나 시장과 같은 기능도 겸하고 있었다. 오늘날 종종 목격되는 바자회는 이슬람 사원의 앞에 열리는 시장인 바쟈르에서 연유한 것이다. 즉, 과거에는 모든 종교가 다기능적인 역할들을 하고 있었고, 그러한 기능 중의 하나가 바로 학교이다. 그래서 승려가 스승님의 어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③ 6사공양
불전에 올리는 공양물은 예불과 관련된 ①물(차)과 ②향, 그리고 ③촛불(등불)과 사시에 올리는 ④마지 외에도 ⑤꽃과 ⑥과일이 더 있다. 이를 6사공양六事供養, 혹은 6법공양六法供養이라고 한다. 이러한 여섯 가지는 불전에 올리는 중요한 공양물로 오늘날까지 불교의례에 있어서 중요행사 등에 등장하곤 한다.
6사공양과 관련해서는 순서와 의미해석에 있어서 두 가지가 전해진다. 첫째는 향·등·꽃·과일·차·쌀(혹 떡)의 차례로 하여, 이를 각각 해탈향解脫香·반야등般若燈·만행화萬行花·보리과菩提果·감로다甘露茶·선열미禪悅米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는 오늘날 시행되고 있는 6사공양의 보편적인 측면이라고 하겠다.
둘째는 차·향·꽃·쌀·과일·등의 순서로, 이를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의 6바라밀에 맞추는 것이다. 6바라밀은 대승불교의 실천수행덕목이다. 이를 6법공양에 맞추어 물의 두루한 성질은 보시이고, 향의 청정한 정화력은 지계로, 겨울을 견디고 피어나는 꽃은 인욕으로, 계속해서 먹어야 하는 밥은 정진으로, 결실을 나타내는 과일은 선정으로, 주변을 두루 밝혀주는 등은 지혜로 해석한다. 둘째의 해석방식은 첫째에 비해서 일반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대승불교의 의미론에서 본다면, 더 타당한 가치를 내포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복전과 공양은 서로 유리되는 가치가 아니다. 우리는 공양하려는 그 마음에서 곧 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복의 실천자이자 완성자는 곧 붓다라고 하겠다. 붓다는 눈이 먼 제자 아나율이 가사를 깁지 못해서, “누가 나를 위해서 가사를 기워 복을 쌓겠는가”라고 했을 때 서슴없이 나섰던 분이다. 이는 복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복을 짓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족은 욕심에서 오고 남음은 양보 속에 깃드는 것이다. 그러나 복과 관련해서는 욕심은 깨달음을 불러오고, 양보는 슬픔을 잉태하는 가치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