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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광주의 노인요양원 <작은 안나의 집>에서 상담사와 요양보호사로 일하면서 이전부터 꾸어오던 두 가지 꿈을 구체화시켰다. 하나는 인터넷교회를 세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독교역사소설 10권을 시리즈로 써내는 일이었다.
1. “교회를 세우겠다”
2008년 9월 29일, 나는 <예수동아리교회 창립선언문>을 인터넷에 올렸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며, 어떤 건물도 소유하지 않고, 재산을 축적하지 않으며, 공적인 전도활동을 하지 않는 것을 기본 원칙으로 한다.”는 내용이 서문에 들어가 있다.
선언문에는 교회조직과 운영에 대한 핵심내용을 모두 담았다. 한국 주류 개신교회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 해소를 위해 목회자는 재정과 행정에 일체 관여할 수 없도록 했고, 목사 월급을 포함한 인건비를 전체 재정수입의 10% 이내로 제한했다. 기타 중요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 2009년 1월 첫 모임을 시작으로 주 1회 정기모임을 갖고, 필요시 비정기모임을 가질 수 있다. 모임장소는 야외나 회원이 제공하는 공간으로 하되, 모임장소를 한 곳으로 고정하지 않는다. 장소를 제공하는 회원은 물 이외에 어떤 음식이나 향연도 제공할 수 없다.
- 예수동아리교회의 조직은 총회와 운영위원회로 구성된다. 총회는 정회원 전원으로 구성하며 일 년에 1회 정기총회를 갖는다. 정회원의 자격은 교회의 인터넷카페에 가입하고, 교회 설립과 운영의 뜻에 동의하며, 월 일천 원 이상의 회비를 납부하는 회원에게 주어진다.
- 운영위원회는 교회의 재정과 운영을 기획하고 실행한다. 운영위원장은 총회를 주관하고 교회를 대표한다. 운영위원장과 운영위원은 정기총회에서 선출한다. 장로, 집사 등 기존 교회의 직제는 인정하지 않는다.
- 담임목회자는 목회와 교육을 담당하며, 재정과 행정에는 일체 관여할 수 없다. 담임목회자의 임명은 운영위원회에서 재적인원의 2/3 이상, 총회에서 출석인원의 2/3 이상의 동의를 얻어 임명한다. 담임목회자의 임기는 2년으로 하되 연임할 수 있고 재신임은 임명과 같은 조건으로 한다. 담임목회자가 재신임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조건 없이 즉시 사임해야 한다.
- 교회의 수입은 정회원 스스로 정하여 납부하는 월 1회의 회비와 찬조금 및 기타 수입금으로 하며, 정회원이 납부하는 월 회비의 최소단위는 천원으로 한다. 십일조를 비롯하여 기존교회의 헌금제도는 모두 폐지하며 회원에게는 월회비 이상의 어떤 비용 지출도 강요할 수 없다.
- 예수동아리교회의 수입금은 부동산이나 동산에 투자할 수 없고 3개월 이내에 모두 지출되어야 한다. 재정의 50% 이상을 정회원 이외의 이웃을 위한 구제에 사용하고, 30%는 정회원과 그 직계가족의 복지를 위해 사용하며, 상기 구제와 복지를 위한 재정의 사용은 의료, 식량, 주거, 교육의 4가지로 제한한다. 인건비 총액은 재정의 10%를 넘을 수 없고 인건비를 제외한 운영비 총액도 재정의 10%를 넘을 수 없다.
교회를 설립하겠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된 건, 그해 봄 노인요양원 일을 하다 과로로 쓰러진 아내를 쉬게 하고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만큼의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기초가 됐다. 단지 생활비를 벌기 위해 교회조직으로 다시 들어가겠다는 생각까지 하다 포기하고 교회설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하지만 시민단체처럼 회원들의 회비만으로 운영하고, 전체 수입의 10% 이내로 인건비를 제한하면서도 생활이 가능하려면 교회의 한 달 수입이 3천만 원은 되어야 한다. 한 사람당 평균 만원의 회비를 낸다면 3천 명, 3만원의 회비를 낸다 하더라도 천 명의 회원이 필요하다. 그게 가능할까? 혹 가능하다 하더라도 먼 훗날이 될 것이다. 선언문을 발표할 때는 교회에서 생활비를 벌겠다는 생각은 내려놓아야 했다.
그런데 이 일로 나는 불순한 동기로 교회를 설립하려 한다는 비난을 두고두고 받게 된다. 돈을 벌기 위해 교회를 세웠다는 것이다. 변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돈 때문에 교회설립을 생각한 건 맞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누가 봐도 부끄럽지 않은 교회를 만들 것이고 투명한 운영을 할 것이며, 정당하게 전문직업인으로서 정해진 월급을 받겠다고 소신을 밝혔다.
2. 대하역사소설을 기획하다
<기독교 대하역사소설>을 시리즈로 쓰겠다는 생각은 <소설 콘스탄티누스>를 쓰면서 구체화되었다. 기독교가 예수님을 배반해온 역사를 체계적으로 고발하려면, 그리고 누구나 쉽게 읽고 이해하게 하려면, <소설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기독교 역사를 모두 소설로 담아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나에게 용기와 동기를 준 인물은 작가 조정래 선생이었다. 역사를 전공한 분이 아니었지만 선생은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시리즈를 잇달아 내어 굴곡진 한국현대사를 고발하고 바로 잡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소설이 가진 힘이었다. 나도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집필계획서를 세웠다. 전체 제목을 <제국의 종교>로 잡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의 교회 역사를 매년 1권씩 10년에 걸쳐 전 10권으로 써내기로 했다. 다만 2009년에는 <한반도 종교전쟁>을 쓰고, 2010년부터 <소설 콘스탄티누스>에 이은 다음 작품으로 넘어가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한국의 종교갈등을 다룬 작품을 꼭 써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5년이 지난 2013년도에나 <신의 눈물>이란 제목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계획을 세우면서 욕심은 더욱 커졌다. 기독교역사소설 10권을 성공적으로 써내고 그 이후에도 여건과 능력이 된다면, 다시 서기전 8세기부터 서기 3세기까지의 역사를 8년에 걸쳐 8권으로 써내고 싶었다. 예정대로 된다면 내 나이는 70세가 될 것이었다. 이만한 작업을 하려면 글쓰는 일에 몰입해야 한다. 다른 직업을 가지면서 이런 작업을 해낼 수는 없다.
나는 후원자를 찾아보기로 했다. 재벌가나 사업가가 가난한 작가나 예술가, 과학자들을 후원하는 일은 선진국에선 흔한 일이다. 영화 <주라기 공원>에도 주인공인 그랜트 박사 부부에게 주라기 공원의 설립자인 해먼드 박사가 거액의 후원금을 제안하며 공원답사와 평가를 부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그게 가능할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시도해 보기로 했다. 후원을 요청하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받고 싶은 금액도 제시했다. 대광고에서 받던 월급의 70% 정도였다. 그 정도면 다른 일을 하지 않고 글에 몰입할 수 있을 것이었다.
만일 후원자가 나타난다면 인세를 포함하여 내 글과 관련된 모든 권리의 50%를 그의 몫으로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후원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네티즌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세상 너무 쉽게 살려고 한다... 뻔뻔하다... 먹물 근성을 버리지 못했다... 땀 흘려 돈을 벌어라...” 이런 비난을 견뎌내기에는 내 그릇이 너무 작다. 후원자를 찾는 일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3. 예수동아리교회를 시작하다
2009년 1월 둘째 일요일, 예수동아리교회의 출범을 알리는 첫 모임을 우리 집에서 가졌다. 20여 명의 회원이 모였다. 참석한 분들 중에는 가톨릭 생활성가 가수 김정식 로제 선생도 있었다. 그는 기타를 메고 아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찾아왔다.
예배 도중 그에게 특송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다. 노래를 직업으로 갖고 있는 분에게 아무 예우 없이 부탁드려도 되는 것인지 망설여졌기 때문이다. 예배가 끝난 후에야 로제님이 교회 출범을 축하하는 노래를 몇 곡 불러주셨던 기억이 난다.
한 달이 지나고 교회에서 첫 월급을 받았다. 회원들이 낸 회비의 10%인 14만 여원이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스러웠지만 소식을 들은 아내는 표정이 없었다. 아니 표정이 사라졌다고 해야 옳을 것 같다.
며칠이 지나 운영위원들이 교우들과 그 직계가족을 위해 사용할 수 있게 되어있는 구제비를 내 아이들 대학등록금으로 책정하기로 했다고 알려왔다. 회칙의 취지를 다시 설명하고 편법으로 지출하게 되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사라진다고 설득했다.
교회 재정의 수입과 지출 내역이 홈페이지에 공개되자 네티즌들의 격려와 비난의 글이 함께 올라왔다. 내 생활을 걱정하는 회원들과 목사가 월급을 받는 걸 문제 삼는 비회원들이 공방을 벌였다.
집요하게 비난의 글을 올린 사람들은 안티기독교인이 아니라 교회갱신을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거의 “목사도 생활을 위한 직업을 따로 가져야 하며, 일반 교인들처럼 월급을 받지 말고 봉사직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요구했다. “교사나 의사가 일의 대가로 돈을 받는 건 괜찮고, 목사가 일의 대가로 돈을 받는 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합리적으로 설명해 달라. 납득이 가면 월급을 받지 않겠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의견을 내놓은 기독교인은 없었다. 목사라는 직임은 성경에 근거가 없다거나 목사가 돈을 받기에 교회가 혼탁해진다는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일부 안티기독교인들도 논쟁에 가담했다. “개인과 사회에 해를 끼치는 강도나 도둑을 직업으로 인정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목사도 사람을 무뇌아로 만들고 사회에 해를 끼치기에 정상적인 직업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극단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안티기독교인들의 주장이 더 논리적이고 그들 나름대로의 근거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소모적 논쟁에 지친 나는 월급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가 회원과 운영위원들의 반대로 번복하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교회가 출범하자 글을 쓸 마음의 여유를 갖기 어려웠다. 게다가 모자라는 생활비를 일부라도 벌충해야했기에 종자연(종교자유정책연구원)이라는 시민단체에 주중에 이틀 시간제 직원으로 일하기로 했다.
종자연은 강의석 사건이 계기가 되어 서강대 박광서 교수가 발의하고 나도 창립멤버로 참여해 만들어진 범종교시민단체다. 하지만 그곳에서 내가 꼭 해야 할 일은 별로 없었다. 필요해서 사람을 채용한 것이 아니라 내 처지를 배려한 결과였다. 월급을 받는 게 기쁘지 않았다.
4. 아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다
당시 내 수입은 종자연 시간제 임금 50만원과 예수동아리교회 담임목사 월급 10여만원에 원고료와 인세 등을 모두 합해도 100만원이 넘지 않았다. 아내는 눈에 띠게 말이 없어졌다. 우는 것과 웃는 것만 잘한다던 아내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아내를 붙들고 끝장토론을 하기로 했다. 그때 내가 했던 말을 정리하면 대충 이렇다. 여기서 중단하면 내가 살아가는 의미가 없으니 이해해 달라. 우린 아직 집이 있다. 이 집으로 십년은 버틸 수 있다. 그동안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달라...
아내가 작정하고 터놓은 말을 간단히 정리하면 이렇다. 당신은 너무 이기적이다. 늘 가족을 앞세우고 걱정하는 척하지만 결국 당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는 무책임한 사람이다... 아내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모든 게 내가 뿌린 씨앗이 자란 열매였다.
입을 다문 아내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평생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생각이 찾아들었다. 차라리 이혼을 하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 내가 이혼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생각을 중단하고 당분간 돈 버는 일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제대로 쓰지도 못했지만 기독교역사소설은 무기한 중단하기로 했다. 그때까지 1/3 정도 썼던 <한반도 종교전쟁>도 덮어두었다. (이 책은 2012년에 다시 쓰기 시작해서 이듬해 5월에야 <신의 눈물>이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나왔다.)
하지만 막 시작한 교회까지 그만둘 수는 없었다. 회원들에게도 무책임한 짓이거니와 그것까지 그만 두면 내 자신이 너무 비참해진다. 교회 일은 일요일에만 하고 주중에는 오로지 돈 버는 일에 집중하자! 하지만 월 200만원 이상의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화물차운전이 가장 가능성이 있는 것 같았다.
2009년 4월 어느 날, 화물운송자격시험 응시원서를 냈다. 시험을 보는 날은 6월이었고 합격자 발표는 7월이었다. 두세 달을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일주일마다 치르는 택시운전면허시험을 먼저 치러 합격했다. 면허시험장에는 택시회사 간부들이 나와 합격한 사람들을 그 자리에서 회사로 데려갔다.
나 역시 집에서 멀지 않은 택시회사로 안내되어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받았다. 면접담당자는 왜 교사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학교를 그만 두고 택시기사를 하려는 것인지 물었다. 이틀인가 지난 후 전화로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운동권 교사의 위장취업을 의심했던 것일까?
집에서 더 가까운 다른 택시회사에 이력서를 냈다. 이번엔 학력과 경력을 솔직하게 기재하지 못했다. 면접을 볼 때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줄곧 액세서리 가게를 운영하다 최근에 접었다고 말했다. 택시기사로 일을 시작한 날은 2009년 5월 21일이었다. 종자연 일은 그만두었다.
5. 화계사에서 백팔배를 드리다
그런 와중에도 예수동아리교회 일요모임은 점차 자리를 잡아갔다. 사복음서를 대조해가며 연구하는 성서공부에 흥미를 느낀 10~20명의 교우들이 꾸준히 참석했다. 참석하지 못한 교우들을 위해 공부과정을 녹화해 홈페이지에 올렸다. (당시 내용은 유투브와 DAUM CAFE <예수동아리> <류상태 글방>에 올려져있다.)
2009년 5월 3일 일요일에는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여 교우들과 함께 화계사에서 백팔배를 드렸다. 당시 인터넷에 발표한 이 행사의 주된 이유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1) 지구마을 백성으로서 인류의 큰스승으로 오신 부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며
2) 기독교인으로서 그 동안 기독교가 이웃종교인 불교에 저지른 무례에 대해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며
3) 이 행사를 계기로 종교간 대화와 화해 분위기를 조성하고
4) 기독교계에 의식개혁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동기를 제공하기 위해.
주일예배를 대신해 사찰에서 백팔배를 드리고 싶다고 하자 교우들은 당황해했다. 한국교회의 독선과 배타에 지쳐 스스로 교회를 뛰쳐나온 분들이었지만 주일예배만은 제대로 드리고 싶다는 분들이 많았다.
결국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싶은 교우들만 참여하기로 했다. 이웃교회 예배에 참석하든지 화계사 백팔배 행사에 참여하든지 그날 하루는 각자 마음가는대로 하기로 했다. 행사에 참여한 교우는 동행한 가족을 포함하여 열 명이 조금 넘었다.
한겨레신문과 한국일보, 그 외 몇 개의 종교계 신문사가 이 일을 보도해주었다. 백팔배를 할 당시 삼백 여명이었던 교회 홈페이지의 회원 수가 한 달 정도 지나자 팔백 여명으로 늘어났다.
* 이 글은 <공동선> 2016년 03+04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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