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 선교사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죤(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언더우드의 생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으나 온유하고 인자한 성격을 가진 이로 여러 남매를 기르면서도 짜증을 내거니 큰소리를 지른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전한다.
1865년 언더우드가 5세 때 생모의 작고로 아버지 죤은 얼마 뒤 재혼을 하였다. 그러므로 언더우드를 포함한 형제들은 계모 밑에서 성장해야 했다.
언더우드는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들을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집안이나 몹시 가난하여 돈이 귀할 때 언더우드는 어느날 5달러 짜리 지폐를 갖고 식료품 상점에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상점에 다다랐을 때 돈이 없음을 보고 놀랐다. 5달러가 온데간데없고 자기 손에 못쓰게 된 돈의 한 귀퉁이만 남아 있었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그 돈을 잘강잘강 찢어 못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하나의 예이지만 그만큼 그는 일에 정신을 쏟아 만사를 잊어버리는 성격이었다.
그 후 언더우드는 17세 때인 1877년 뉴욕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지 2년 뒤인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된다.
1881년 언더우드는 뉴욕 대학을 졸업하며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New Brunswick)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의 키는 별로 크지 않았다. 약173cm 정도였다. 어깨는 딱벌어지고, 짙은 밤색 곱슬머리로 뒤덮인 머리는 유난히 컸다. 얼굴은 잘 다듬어져 있으면서 강한 인상을 풍겼다
뉴 브런즈윅에서 3년간 체류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학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으로 전도 사업에도 열을 올렸다. 신학교 교수들은 이에 대해 공부에 방해된다고 마땅치 않게 여겼으나, 언더우드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처음에는 인도 선교사가 되길 원했다. 인도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듣고 어린 마음에도 큰 감동을 받아 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동시에 신학교를 졸업하자 의학도 공부하였다.
외국의 오지에 있는 선교부에서 일을 하려면 주민들에게 의료의 혜택을 베풀어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883년,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 즉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그는 교회에서 항상 행복한 편이었다. 가족처럼 대하였던 것이므로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 그를 친구처럼 대했다. 월급을 배로 올려 줄 터이니 계속 목회를 맡아 달라고 요청이 있었으나 그는 거절하고 선교사로 외국에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언더우드가 한국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이었다. 이날은 부활주일이었다. 같은 배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목사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임신으로 한국의 정세가 불안하므로 일본으로 되돌아가라는 충고를 받고 그들 부부는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불안을 무릅쓰고 상륙하여 4월 7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독신이어서 행동하기가 편하였다.
조선 정부가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고 민중들 역시 선교사들을 서양 귀신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감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 있을 때 언더우드 선교사는 오직 복음을 전하겠다는 일념 하나만으로 조선행을 결정했습니다.
[인터뷰] 김수진 목사 / 한국교회역사연구원장
"그때 당시 한국에 선교사로 온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에요. 미진하지, 후진국이지 그런 나라에 이분들이 하나님께 자기 목숨을 맡기고 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의 업적
우리나라의 장로교 최초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설립
기독청년회인 YMCA를 조직
한국 최초로 찬송가를 간행
연세대학교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설립
존 리빙스턴 네비우스의 3자 정책을 받으들임(자립, 자치, 자전)
우리나라교회는 부흥사경회를 중시했고, 사경회를 통해 교회의 부흥과 사역자들이 나왔다.
서울 경신중학교와 고아원같은 역할을 했던 예수교학당 등을 만들어 한국 근대화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