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이후부터 조선중앙연감에서는 김봉한의 이름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렇게 요란하게 선전을 해대던 보도기관들과 잡지들에서도 김봉한과 관련된 내용이 일제히 사라졌습니다.
공화국이 “노벨상을 받을 만한 업적”이라고까지 칭송을 했던
김봉한의 이름이 갑자기 사라지게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지금부터 그 내막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봉한의 몰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금철의 몰락에 대해서 먼저 살펴봐야 합니다.
박금철은 일제 때 보천보 습격사건에 가담한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였다가 광복과 동시에 풀려난 사람입니다.
박금철은 박달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해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했기 때문에
그 투쟁경력을 인정받아 당의 요직을 두루 거친 박금철은
1956년 당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면서 권력서열 4위로 부상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살펴봤지만 1956년은 김봉한이 경락연구를 시작할 때입니다.
이후 김봉한이 1961년 첫 번째 논문을 발표해 큰 반향을 일으키는 데는 5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동의학 과학화’라는 당의 방침이 있긴 했지만
‘동의학연구소’라는 상급기관을 제치고 한 대학의 연구실에 5년 동안 지원이 계속된 것은
막강한 뒷 배경이 없이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당시 조선노동당은 1956년에 있었던 8월 종파사건으로 소련파와 연안파가 제거된 이후
국내 공산주의자 계열인 갑산파와 빨치산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박금철이 이끄는 갑산파에는 대남사업부장 이효순, 선전담당부위원장 겸 선전선동부장 김도만이 있었습니다.
군대 쪽에는 빨치산 계열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당의 요직에는 갑산파들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갑산파가 몰락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김일성의 노선에 대항했기 때문입니다.
1966년 10월 김일성이 당 대표자 회의에서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키는 노선을 공식발표하자
갑산파는 ‘군사 우선의 중공업 정책보다 인민경제를 우선시할 것을 요구’하며 반대 입장을 밝혔습니다.
김일성은 갑산파를 견제하기 위해 그해 10월 열린 당 중앙위원회 4기 14차 전원회의에서
당 중앙지도기관의 직제를 개편하고 간부를 새롭게 배치했습니다.
이 간부 임명에서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가 정치국 후보위원과 당 조직비서 겸 조직지도부장에 임명되였습니다.
김영주가 사실상 2인자로 부상하자 갑산파 구성원들은 불만을 강하게 터뜨렸습니다.
"우리가 눈보라 속에서 언 감자를 먹고 있을 때 김영주는 어디서 무엇을 했습니까?"
갑산파는 김영주를 견제하는 한편 박금철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해 본격적인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선전담당비서 김도만은 <일편단심>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박금철의 존재를 널리 알렸습니다.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세력에 대한 잔인한 숙청을 벌려왔던 김일성이 자신 이외의 개인숭배를 그대로 두고 볼 리 없었습니다.
김일성은 빨치산파를 동원하여 갑산파를 숙청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967년 3월 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가 시작되였습니다.
사회자인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최용건의 우렁우렁하면서도 쉰 듯한 목소리가 울렸습니다.
최용건 :
당 중앙위원회 비서 박금철 동무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토론할 동지 있습니까?
남1 :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박금철 동무에 대해 비판하겠습니다.
박금철 동무는 당조직비서로 있으면서 중앙당에서 비준하는 간부들을 배치하고, 해임, 철직시키는 사업을 해왔습니다.
그는 이 지위를 이용하여, 도당과 군당의 책임비서 자리를 자기의 측근자로 채워놨을 뿐 아니라
이들에게 봉건유교사상까지 주입시켜 자신의 추종자로 만들어 나가는 심중한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남2 :
박금철 동무는 자신의 고향 갑산에 양옥집을 크게 지어 놓는가 하면,
자신의 아내를 무슨 큰 혁명가인 것처럼 포장하여 비석을 세우는 등 요란하게 선전했습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업적을 우상화하려는 속셈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박금철 동무는 24살밖에 안된 자신의 맏딸을
김봉한이 있는 경락연구소에 배치하여 연구원들에게 논문을 쓰게 해서 학위를 받게 하는 등 권력을 남용해 왔습니다.
남3 :
사실 박금철은 일제시절 보천보습격 사건 때 일본경찰에 체포되였다가 변절해서 동료들을 고발한 변절자입니다.
그런 변절자를 수상님과 당에서 너그럽게 품어 주었는데 종파를 만들어 당의 단결을 해쳐왔습니다.
박금철의 반당적인 행동은 도저히 용서할 없습니다.
청중들 : '박금철이 당장 끌어 내리라‘ ’반당종파분자 박금철을 처단하라‘
15차 전원회의 이후 갑산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시작됐습니다.
김일성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내세우며,
강력한 1인 독재체제를 구축하려고 했기 때문에 숙청은 길고도 잔인했습니다.
여기에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김정일이,
숙청으로 인한 혼란을 틈타 자신의 정치적 립지를 강화하려고 했기 때문에
숙청의 범위는 더욱 넓어졌습니다.
김일성이 뿌리 뽑고자 하는 갑산파에 대한 공격이 잔인하면 잔인할수록
자신의 충성심을 더욱 드러낼 수 있었고
숙청을 틈타 정적이 될만한 사람들을 없앨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에
김정일은 피바람을 계속 일으켰습니다.
이 같은 숙청의 물결 속에서
박금철의 비판 목록에 올라왔던 김봉한이 무사하기를 바란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또한 김봉한의 이론이 각종 논란에 휩싸이면서 부담을 느껴온 북한은
기회를 만났다는 듯 일순간에 김봉한의 존재를 없애버렸습니다.
첫댓글 정말 정치란 무엇인지..... 역사의 안타까운 일부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