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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사론 제3권
11) 오견처(五見處)
오견(五見)이라 하는 것은,
신견(身見:몸에 대한 집착)ㆍ
변견(邊見:한쪽 가장자리에 치우친 견해)ㆍ
사견(邪見:삿된 견해)ㆍ
견도(見盜:편견을 취하여 正見이라 생각하는 집착)ㆍ
계도(戒盜:戒禁取見, 계율의 금지 규율에만 집착하는 견해) 등 다섯 가지를 말한다.
[문] 이 오견에는 어떤 성질이 있는가?
[답] 신견(身見)은 삼계에 각기 한 종류가 있으니 모두 세 종류의 신견이 있고, 변견(邊見)도 또한 그렇다.
사견(邪見)은 삼계에 각기 네 종류가 있으니 모두 열두 종류의 사견이 있으며,
견도(見盜)도 또한 그렇다.
계도(戒盜)는 삼계에 각기 두 종류가 있으니 모두 합하면 여섯 종류가 있다. 이렇게 서른여섯 종류의 견해가 오견(五見)의 성질이다.
이 견해의 성질은 이미 종류와 성질과 몸체에 있는 자연이며 성질을 설명하고 나면 마땅히 그 행해지는 모습도 설명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견(見)이라 이름지었기 때문이다.
[문] 견(見)에 어떤 내용이 있는가?
[답] 관(觀)하는 까닭에, 또 행해지는 까닭에, 굳게 받아들이는 까닭에, 연이 깊이 들어가는 까닭에, 관(觀)하는 사람은 능히 멀리 내다볼 수[視] 있는 것이다.
[문] 가령 사관(邪觀)이나 전도된 관[顚倒觀]의 경우, 이것이 어떻게 멀리 내다볼 수 있는가?
[답] 비록 삿된 관ㆍ전도된 관이라 하더라도 오직 그것은 지혜이기 때문에 멀리 내다본다고 표현한다.
이것은 지혜의 성질을 지닌 것이니,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사물을 또렷이 보지 못할 경우에도 역시 본다[見]라고 표현한다.
이와 같이 삿된 관이나 선도된 관이라 할지라도 다만 그것이 지혜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멀리 내다본다[視]라고 표현한다.
이는 지혜의 성질을 지닌 것이기에 관을 행하는 사람은 능히 행이 행해질 수 있는 것이다.
[문] 한 시각 사이에 어떻게 이것이 행해지는가?
[답] 민첩하고 예리한 까닭에 행해진다고 표현하며 그렇기 때문에 행(行)이라 하는 것이다.
굳게 받아들인다[堅受]라고 한 것은 잘못된 일을 굳게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 견해는 잘못된 일을 지극히 굳게 받아들이는 것이며 성도의 칼이 아니면 버리게 할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부처님 제자의 경우 도를 일으키게 죄면 성도(聖道)의 칼로 편견의 이빨을 떨어뜨린 다음에야 그 칼을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게송으로 말했다.
만약 악한 지혜 받아들이면
전어(鱣魚)나 실소마라(失搔摩羅)가
먹이를 물고 있는 것과 같아서
도끼가 아니면 떨어지지 아니한다.
큰 바다에 한 벌레가 있으니 그 이름을 실소마라(失搔摩羅)라 한다.
그 벌레는 풀이든 나무든 무엇인가를 입에 물었을 때는 지극히 세게 물어 칼이 아니면 떨어지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칼로 그 이빨을 떨어지게 한 다음에야 떨어질 수 있다.
이와 같이 이 편견으로 잘못된 일을 지극히 굳게 받아들이게 되면 성도(聖道)의 칼이 아니면 버리게 할 수 없다.
만약 부처님이나 부처님 제자가 일어서게 되면 성도(聖道)의 칼로 편견의 이빨을 떨어뜨린 다음에야 그 편견을 버리게 된다.
그런 까닭에 굳게 받아들인다[堅受]라고 말하는 것이다.
연이 깊이 들어간다[緣深入]라고 하는 것은,
이 편견은 연 속에 지극히 깊이 들어가는 것이 무쇠가 진흙탕 속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 편견은 관하고 행해지고 굳게 받아들이고 연에 깊이 들어가게 되는 까닭에 견(見)이라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밝히고 행해지는 두 가지 일 때문에 견(見)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밖에도 다시 두 가지 일이 있기 때문에 견(見)이라 부른다.
즉 그 모습이 성취되고 그 일이 마련되는 두 가지 일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세 가지 일 때문에 견이라 부른다.
그 모습이 성취되고 그 일이 마련되고 그 연에 깊이 들어가는 세 가지 일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시 세 가지 일이 있기 때문에 견이라 부르는 것이다.
즉 생각하고, 행하며, 집착하기 때문에 견이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다시 세 가지 일이 있기 때문에 견이라 부르는 것이다.
즉 생각이기 때물에, 방편이기 때문에, 지혜가 없기 때문에 견이라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이라 하는 것은 악한 생각을 말하고,
방편이라 하는 것은 악한 방편을 말하는 것이며,
지혜가 없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것을 말한다.
또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면,
생각이라 하는 것은 정수(正受)에든 사람을 말하고,
방편이라 하는 것은 행을 살피는 사람을 말하며,
지혜가 없다는 것은 상반되는 두 가지 말을 듣고 거기에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다섯 가지 견해에 공통적으로 행해지는 일의 설명을 마쳤으니, 지금부터 마땅히 개별적인 설명을 해야 한다.
[문] 무엇 때문에 신견(身見)이라 하는가?
[답] 이 견해는 자기 몸이 따라 반복되기[轉] 때문에 이를 신견이라 하는 것이다.
[문] 다른 견해도 역시 자기 몸이 따라 반복되는데 왜 하나만 신견이라 부르고 다른 것은 신견이라 하지 않는가?
[답] 이 신견은 오로지 한 방향으로 자기 몸이 반복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몸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고, 또 몸 아닌 것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다른 견해는 역시 자기 몸도 따라 반복되지만 다른 사람의 몸도 따라 반복되게 하고 또한 몸 아닌 다른 것도 반복되게 한다.
자기 몸이 반복되는 것은 자기 경계의 연이다.
다른 사람의 몸이 반복되는 것은 다른 경계의 연이다.
몸 아닌 것이 반복되는 것은 도가 다한 연이다.
이 신견(身見)이라 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몸만 반복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의 몸을 반복되게 하는 것도 아니며 몸 아닌 다른 것이 반복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만을 신견이라 하고 다른 것은 신견이라 하지 아니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 몸이 반복된다고 하는 것은 ,‘내가 이것이며 내가 따라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몸으로 행하는 것으로, 다른 견해는 비록 자기 몸이 반복된다 하더라도 이런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 몸이 반복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 행동에 집착하고 행을 아끼는 것을 말한다.
‘나는 내가 갈 길로 반복되어 간다.’라고 하는 견해, 이것이 신견이다.
나머지 다른 견해는 비록 자기 몸이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 몸이 반복되면서 모든 일은 아(我)라고 받아들이는데 이것은 다 자기 몸이 반복되면서 행하는 일이다.
나머지 다른 견해에는 비록 자기 몸이 반복되더라도 이런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자기 몸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신견(身見)이라 한다.
여기서 자기 몸이라 하는 것은 다섯 가지의 왕성한 음(陰)을 말하는데, 이 오음의 견해를 그가 받아들이는 까닭에 이를 신견이라 말한다.
다른 견해라 하는 것은 비록 자기 몸이 반복되면서 행하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런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변견(邊見)이라 하는가?
[답] 두 가장자리의 견해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변견이라 하는 것이다.
두 가장자리라 하는 것은 하나는 단견(斷見)이고 또 하나는 상견(常見)이다.
이 견해를 두 가장자리에 치우쳐 받아들이는 까닭에 이를 변견이라 한다.
저 계경(契經)에서는 말하기를,
“가전연(迦旃延)이여, 세간의 습(習:前生에서 얻은 번뇌의 찌꺼기)을 바로 관하면 사실과 같다.
세간의 존재는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음(陰)을 관하면서 그것이 들어오는 것을 지니고 점차 서로 생겨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문득 이런 생각을 하다가도 이 일어난 생각은 이미 소멸되니, 이는 영구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다.
가전연아, 멸한다는 것도 바로 관하면 사실과 같다.
세간에서 무(無)라고 하는 것은 유(有)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만약 몸을 관하면 자리를 바꾸어 위 세계에 태어난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 이는 끝내 또한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단멸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는 두 가지 행(行)에 연하여 반복되니, 즉 단행(斷行)과 상행(常行)이 그것이다. 그런 까닭에 이를 변견이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는 다른 길을 배워 가장자리를 받아들이고 어리석음을 받아들이고 바르지 아니함을 받아들여,
‘아(我)’라는 존재가 있다고 생각하여 그것이 혹 영구히 존속한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혹 단멸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계경에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부처님은 여러 비구들에게,
“나는 세간 사람들과 함께 말다툼을 하지 않는데 세간 사람들은 나와 함께 말다툼한다.”라고 하셨다.
[문] 부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세간 사람들과 함께 다투지 않는가?
[답] 부처님께서는 거룩하고[善] 평등[等]하셔서 능히 세간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시면서 추한 말을 하시지 않는다.
만약 단견(斷見)을 지닌 이학(異學)과 함께 있을 때는 그 이학과 함께 단견을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인(因)은 있으나 과(果)는 없어서 그 과란 단멸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대에게 인이 있다면 나에게도 인이 있나니, 그대가 과를 비방한다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또 만약 상견(常見)을 지닌 이학과 함께 있을 때는,
그의 상견을 함께 하고,
그들 이학들은 인은 없고 과만 있다고 생각하여,
그 인이 없는 것을 상(常)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대에게 과가 있다면 나도 과가 있다.
그대가 인을 비방한다면 그대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한쪽 가장자리에서는 인을 취하고, 또 한쪽 가장자리에서는 과를 취하시어, 이미 단상(斷常)을 떠난 중도(中道)에서 설법하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말씀하시기를,
“비구들이여, 나는 세간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다투지 아니하나, 세간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으면서 말다툼을 한다.”라고 하셨다.
존자 바수밀(婆須蜜)은 말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비구들이여 ! 나는 세간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다투지 아니하나, 세간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으면서 말다툼한다.’
‘무엇 때문에 부처님은 세간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다투지 아니하는데 세간 사람들은 부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말다툼하는가?’
그에 대한 해답은,
‘부처님은 법을 말씀하시지만 세간 사람들은 법이 아닌 것을 말하며 법을 설법할 수 없으므로 함께 법이 아닌 것으로 말다툼을 하게 된다.’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거듭 말하기를,
“부처님께서는 평등한 중도(中道)를 따르지만 세간 사람들은 부처님의 최고의 뜻에 더불어 따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간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다투지 않으나, 세간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으면서 말다툼을 한다.’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는 다시 말하기를,
“훌륭히 두 다툼의 뿌리[諍根]를 제거하기 때문이니, 두 갈등의 뿌리라고 하는 것은 모든 애(愛)와 견해다.
부처님에게는 두 가지가 이미 다 없어졌으나 세간 사람들은 이것이 다하지 않은 까닭에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간 사람과 함께 있어도 다투지 아니하나 세간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으면서 말다툼을 한다.’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존자 담마다라(曇摩多羅)는 말하기를,
“여러분은 마치 말[馬]이 나쁜 길에 의지하고 있는 것과 같아서 관(觀)을 하게 되면 바른 길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그들 이학(異學)도 바른 설법을 하지 못하며 관을 하게 되어도 그것은 바른 설법 일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뜻을 밝히시고 법을 밝히시고 거룩하고 오묘한 길을 밝히시는 까닭에 관(觀)을 하게 되면 이는 바른 설법이다.
그런 까닭에 비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세간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다투지 않으나, 세간 사람들은 나와 함께 있어도 말다툼을 한다.’라고 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사견(邪見)이라 하는 것인가?
[답] 삿된 행[邪行]인 까닭에 사견이라 말한다.
[문] 모든 견해의 경우도 결과적으로 삿된 행인데, 왜 사견 하나만 사견이라 하고 다른 견해는 사견이라 하지 않는가?
[답] 두 가지 때문에 사견이라 하며 또한 행동의 전환이 없는 것을 사견이라 한다.
나머지 다른 견해는 비록 그것이 삿된 행의 일을 하더라도 행동을 바꾸게 되면 이 두 가지 일이 없어진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삿된 행을 반복하면 중생의 은혜를 비방하게 되고 또한 법의 은혜를 비방하게 된다.
중생의 은혜를 비방하는 사람은 부모가 없다고 말하고,
법을 비방하는 사람은 세간에 아라한ㆍ선서(善逝:부처님의 異稱)ㆍ등정법(等正法)ㆍ등정취(等正趣)는 없으며 이 세상과 뒤 세상에서 스스로 깨달음을 증득하여 노닐게 된다.
나머지 다른 견해에서는 비록 행이 바뀌어져도 이런 일은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삿된 행을 반복하는 것과 행의 반복됨이 없는 것을 사견이라 한다.
그들은 베풀어지는 것도 없고 한계도 없으며, 설법도 없고 선행(善行)과 악행(惡行)의 과보도 없고 이 세상과 뒤 세상의 구별도 없다고 이와 같이 광범위하게 말하게 된다.
다른 견해는 비록 삿된 행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이런 일이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삿된 길을 굴러가 다하게 되면 인과(因果)를 비방하게 되며,
또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부처님의 집착 없는 등정각(等正覺)의 길을 비방하게 되고,
또한 삼보(三寶)와 사제(四諦)를 비방하게 된다.
다른 견해는 비록 삿된 행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삿된 행을 반복하며 현재 나타난 일,
예를 들면 사람들이 큰 불구덩이 속에 떨어진 것을 보고도,
다른 사람을 속이기 위하여 짐짓,
‘나는 지극히 즐겁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중생들이 받는 번뇌는 마치 뜨거운 무쇠 탄환을 삼키는 것과 같은 것인데도,
사견(邪見) 때문에,
‘고통이 없다.’고 말하게 된다.
나머지 다른 견해는 비록 삿된 행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없다.”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삿된 행을 반복한다고 하는 것은 나쁜 행을 말한 것이다.
경에서 설명한 것처럼,
어떤 거사가 사견을 지닌 사람이어서,
그의 신행(身行), 즉 입으로 하는 행[口行]ㆍ생각으로 하는 행[意行]ㆍ생각과 소원 및 이에 상응하는 행 일체가 그치 법에서는 사랑하지도 않고 염원하지도 않으며 기뻐하지도 않고 기뻐하지 않고자 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 바꾸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거사의 견해가 나쁜 사견을 지닌 거사라고 말한다.
가령 쓴 박씨[瓠子]나 근 가지씨[婆檀鞮伽子]ㆍ마라다씨[摩樓多子]ㆍ시바리씨[尸婆梨子] 등의 씨앗이 땅 속에 붙어 땅ㆍ물 ㆍ불ㆍ바람의 맛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 모든 씨앗은 쓴맛ㆍ무미(無味) 혹은 달지 않은 맛으로 바꾸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거사는 씨앗은 쓴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거사가 사견(邪見)을 지닌 사람일 경우,
모든 신행(身行), 즉 입으로 하는 행동ㆍ생각으로 하는 행동ㆍ생각과 소원 및 이에 상응하는 행동 일체가 그의 법에서는 사랑하지도 않고 염원하지도 않으며 기뻐하지도 않고 기뻐하지 않고자 하는 것도 아닌 것으로 바꾸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거사의 견해가 나쁜 것을 사견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다른 견해는 비록 삿된 행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없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견도(見盜)라 하는가?
[답] 견해에 집착하기 때문에 견도라 부른다.
[문] 이와 같은 도둑[盜]은 오음 모두가 도둑에 해당하는데, 왜 견해를 도둑질하는 것만을 견도라 하는가?
[답] 편견으로 인하여 도둑의 마음이 일어나 일체의 오음을 도둑질하기 때문에 견도라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설사 견해를 도둑질하고 모든 오음을 도둑질한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것이 제일 먼저 행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견도라 한다.”라고 하였다.
[문] 무엇 때문에 계도(戒盜)라 하는가?
[답] 집착하는 대상이 계율이기 때문에 계도라 한다.
[문] 이와 같은 도둑은 오음(五陰) 모두가 도둑에 해당하는데, 왜 계율을 도둑질 하는 것만을 계도라 하는가?
[답] 계율로 인하여 모든 오음을 도둑질하는 마음이 일어나기 때문에 계도라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계율을 도둑질하고, 모든 오음을 도둑질한다고 하더라도, 단지 그것이 청정한 행이기 때문에 계도라 한다.”라고 하였다.
[문] 왜 도둑이라 하는가?
[답] 다른 사람이 본 견해인데도 이를 도둑질하기 때문에 도둑이라 한다.
즉 그 신견(身見)을 나[我]로 받아들이고 변견(邊見)인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및 사견(邪見)을 받아들이면서 비방하여 말하기를,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견해를 도둑질하면서 제일 먼저 편견을 받아들이고, 계율을 도둑질하여 청정하다고 받아들인다.
이것은 다른 사람이 본 견해인데도 이를 도둑질하는 까닭에 도둑이라 말하는 것이다.
오견처(五見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이것으로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