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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생(賈生) (서기전 201 ~ 168)
전한(前漢) 문제(文帝)때의 유명한 학자 가의(賈誼)의 별칭.
여려서부터 수재였고 스무 살에 박사(博士)가 되어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렸으며 후에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양회왕의 대부가 돠었다. 그의 저서 『치안책(治安策)』,『신서(新書)』『과진론(過秦論)』은 정치론의 걸작이다. 33세에 요절하였다.
강이식(姜以式) (? ~ ?)
고구려 평양왕 때 병마원수(兵馬元帥)로서 수나라 30만 대군을 격파한 고구려의 명장.
평양왕 때 수나라 문제가 모욕적인 편지를 보내 왔다. 평양왕(平陽王)이 글을 받고 대로하여 신하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이 때 강이식 장군이 "무례한 글을 붓으로 회답할 글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글이라." 하고 개전(開戰) 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이에 왕이 강이식의 주장을 승낙하여 그를 병마원수로 삼아 정병 5만을 임투관으로 향하게 하였다. 강이식은 먼저 정예병 1만으로 요서를 침공하여 수나라 군사를 유인하고 거란병(渠丹兵) 수천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산동을 치게 하니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대전쟁이 시작되었다. 단재 신채호는 그의 『조선상고사』에서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이라는 이름 석자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삼국사기』가『수서(隋書)』만을 옮겨 기록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대동운해(大東韻海)』에는 강이식을 살수전쟁(薩水戰爭)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이식이 임투관 전쟁의 병마원수라 한다.
강이식이 요서에 침입하여 수의 요서총관 위충(韋沖)과 접전하다가 거짓 패한 척하며 임투관에 나왔다. 이에 수(隋) 문제(文帝)가 30만 대병을 동원하여 쳐들어 왔다. 수 문제는 양량(楊諒)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임투관으로 나오고, 주나후를 수군총관을 삼아 식량보급 함선을 이끌고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량의 대병에게 군량을 대려고 하였다. 이에 강이식이 수군으로 하여금 공격하게하여 수나라 양선(糧船)을 격파하고, 육지에서는 벽루(壁壘)를 굳게 지키어 장기전으로 돌입하였다.
드디어 수나라 군사들이 장마철을 만나 기아와 전염병으로 많은 군사가 상하여 후퇴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섬멸하였다.
그의 묘터는 현재의 중국 길립성 원수림(元帥林)역 부근에 있으며, 그곳을 지금도 '원수림(元帥林)이라 부른다.
강태공(姜太公) (? ~ ?)
서기전 12세기경 중국 주나라 초기의 정치가. 본명 강상(姜尙)이며 그의 선조가 여나라에 봉하여졌으므로 여상이라고도 불렸다. 속칭 태공 또는 태공망이라고 불리운다.
위수에서 낚시를 하다가 문왕을 만나 넓은 식견과 지혜로 문왕의 스승이 되어 문왕이 죽은 뒤에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일으켰다. 건국의 공적에 의하여 제(齊 : 지금의 산동지방)나라를 봉읍 받았다. 문왕이 위수에서 강태공을 만났을 때 "선군(先君) 태공(太公)께서 선생을 기다리신지 오래되었습니다."라고 말하여 후에 '태공이 기다렸다'는 뜻에서 태공망이라 불리어졌다. 강태공의 유명한 병서인 육도(六韜)는 고대 중국 병학의 으뜸인 무경칠서 중 가장 오래된 병법책으로 문도(文韜)·무도(武韜)·호도(虎韜)·용도(龍韜)·표도(豹韜)·견도(犬韜)등의 육도로 이루어져 있다. 유도의 '도(도)'는 화살을 넣는 주머니, 혹은 수습해서 갈무리한다는 뜻이다.
걸왕(桀王) (? ~ ?)
중국 고대 하왕조(夏王朝)의 마지막 왕. 성은 사( ), 이름은 이계(履癸). 은왕주(殷王朝)의 마지막 왕인 주(紂)와 함께 포악한 임금의 상징으로 걸주(桀紂)라 하며 흔히 이상적인 군주로 추앙받고 있는 요순(堯舜)과 대비된다.
그는 웅장한 궁전을 건축하여 천하의 희귀한 보화와 미녀를 모았으며, 궁전 뒤뜰에 주지(酒池)를 만들어 배를 띄우고 장야궁(長夜宮)을 지어 남녀합환의 유홍에 빠졌다고 한다. 걸이 스스로를 태양에 비유한 까닭에 백성들이 걸의 학정을 원망하여 "이 해는 어느때 없어질 것인가 너 죽고 나죽자."라고 까지 극언 하였다. -사기-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걸왕때 하의 국세는 쇠양하여 많은 제후가 떨어져 나갔다. 걸왕은 부도덕하였고 현신(賢臣) 관용봉(關龍逢)과 이윤(伊尹)의 간언을 듣지않았으며, 백성을 억압 하였을뿐만 아니라 당시의 도덕군자로 알려졌던 은의 탕왕을 하대(夏臺)에서 체포하는 등 폭정을 자행했으나 드디어 탕왕에게 토벌되어 도망가다가 죽어 하왕조는 멸망했다.
고수(高 ) (? ~ ?)
고수는 일반적으로 무지몽매하였고 아내가 죽자 다시 장가들어서 상고 계라는 남매를 두고 이들을 편애하여 순을 쫓아내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순이 지극한 효성으로 부친을 감화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순임금을 대효라고 전해지나, 부친 고수는 사리분별도 못한다는 뜻으로 '장님 고( )'자에 '장님 수( )'자를 써서 '고수'라고 불리워 왔다.
그러나 실제의 사실은 이와 다르다. 본래 순임금의 아버지 고수는 고조선의 초대 단군성조 때 조정의 중신(重臣)인 고시(高矢)씨의 친형으로서 아들 순이 단군왕검조(단군왕검조)에 벼슬하지 않고 당요조(당요조)에 벼슬하므로 부자간에 의견이 맞지 않아 마침내 불화하게 된 것이다. 이에 고수는 둘째아들 상을 사랑하고 순을 죽이고자 하거늘 순이 부친의 뜻을 알고 지극한 효성으로 섬겼다.(단기고사) 그래서 상제님
께서는, 우순 자신은 요순시대라는 평화시대의 대명사로 불리어 오며 성군으로 받들어지고, 부친의 이름은 수천 년 간 역사가 왜곡되고 와전되어 조소를 받아 오게 되었으므로 차라리 대효하는 찬사보다는 만고의 불효로서 자식 순의 가슴속에는 한(恨)만을 품게 되었다
고종(高宗) (1852 ~ 1919)
조선 제 26대왕 (재위 1863 1907년). 이름은 희(熙).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 12세로 즉위했으나 생부 대원군의 섭정으로 10년 간 실권 없는 왕으로 있었다. 1873년 최익현이 대원군의 실정을 탄핵함으로써 마침내 친정을 선포했으나 이 때부터 민씨 일족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1880년의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재등장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난이 수습되고 대원군은 청나라에 납치되었다. 1884년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1894년 동학혁명이 발발하여 청일전쟁이 터졌다. 1897년 덕수궁에 환궁, 연호를 광무(光武),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 왕을 황제라 칭하고 완전독립을 선포했다. 1904년 8월 일본의 강압으로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 외교권을 빼앗기고 내정간섭을 받았다. 이에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 회의에 이준 열사 들을 파견하여 일본의 침략과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좌절되었다. 이어 군대가 해산되고, 밀사파견 사건을 트집잡는 일본에 의해 양위를 강요당하자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황제(太皇帝)가 되었다. 열강의 침략세력, 민비·대원군의 정권 쟁탈, 개화·수구파의 싸움속에 뜻대로 정치를 시행해 보지 못했다. 일본의 음모로 독살당했다고 전한다.
■관련 성구 (9편57장)
공자(孔子) (서기전 552 ~ 497)
춘추전국새대의 대학자, 정치가, 대사상가, 성인(聖人), 유교의 개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 노(魯)의 창평향 추읍(昌平鄕 鄒邑 : 현재 山東省 曲阜縣)에서 숙량홀과 어머니 안징재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학문에 정진하였으며, 더 잘 아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배움을 청했다. 젊어서 이미 박학다식하였으며 회계 출납직인 위리(委吏), 목장 경영직인 사직(司職) 등으로 관리생활을 시작했다. 주(周)의 낙읍(洛邑)을 방문하여 문물을견학하고 귀국, 망명이 높아지면서 많은 제자가 모였다.
36세 때 노나라에 삼환(三桓)의 난이 일어나 제(齊)에 도피, 거기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景公)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적 정치 이상을 설파했다. 경공은 공자를 고문으로 임용하여 이를 실시하려 했으나
예절의 번잡과 비현실성을 지적하여 반대하는 대부(大夫) 안영(晏纓)의 진언으로 좌절, 실망해서 2년 만에 귀국했다. 귀국 후 시서예악(時書禮樂)을 연구하여 제자를 교육하다가 배신(陪臣) 양호(陽虎)가 세력을 잃고 물러난 뒤, 중도재(中都宰)를 거쳐 대사구(大司寇 : 司法大臣)에 임명된 지 칠일 만에 대부 소정묘(小正卯)룰 죽였으며, 또 제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반환받는 수완을 보이기도 하였다. 삼환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또 정공이 주위 제국의 계략에 속아 음락(淫樂)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 그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 사임한 뒤 14년 동안 제자들과 함께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위, 송, 조, 정, 진, 채 등 열국을 주유하며 인의(仁義) 정도(正道)에 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실현하여 난세(亂世)를 구제하려는 철환천하를 하였으나, 제후들이 공벌(攻伐)에만 급급, 이해하지 못하므로 다시 귀국(서기전 484)했다. 귀국 후에는 오직 후진 교육과 저술에 전념, 시(時), 서(書), 예(禮) 등을 제정하고 노사(魯史)에 으해 춘추(春秋, 주역(周易)을 여하여 십익(十翼)을 지었다. 고아자의 역사적 객관적인 생애가 이러함에 비해 그의 내면적인 인격의 완성은 그 자신이 단 한줄로 표현한 자서전적인 말에 함축성 있게 나타나 있다. 그는 이미 30대에 일가견을 갖고 40대에는 흔들림이 없었으며, 70대에 와서는 마음에 품은 바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그러집이 없었다 한다. 제자는 3천명으로 육예를 통한 사람이 72명이었다.
그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曾子), 자사(子思 : 공자의 손자, 중용의 저자로 알려짐)를 거쳐 맹자에 이르러 활기를 띄었고, 한의 무제(武帝) 이후 중국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한국, 일본 등 주변 국가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
관운장(關雲長) (? ~ 219)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장군. 지금의 산서성 원청현 하동운 해현 사람. 이름은 우(羽), 운장(雲長)은 자, 시호는 충의후. 유비, 장비와 도원의 결의를하여 평생 의
(義)를 지친 것으로 유명하다. 송대 이후 군신(軍臣), 복록장수신(福祿長壽神)으로 신앙되고 관제묘가 각처에 건립되었으며, 조선에도 임진왜란 이후 관제묘가 건립되었다.관운장의 모습을 전해 내려오는 책을 토대로 살펴보면, 키가 구척장신에 수염의 길이가 두 자로서 삼각수(三角鬚)이며, 입술은 연지를 칠한 듯 하며, 눈은 봉의 눈이며 누에 눈섭같이 짙고, 위풍이 늠름하였다는 기옥이 있다. 또한 수염이 길고 아름다워 미염공이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조조에 대항하여 유비·관운장·장비가 대항하여 외로운 투쟁을 할 때, 관운장은 하비성을 책임지며 형님의 가족인 두 부인과 어린 아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시세(時勢)의 불운(不運)으로 형제가 위태로워 하비성이 조조의 침입으로 함락되고 유비 가족이 생사를 모르게 되자 책임을 통감하고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 때 조조의 막하 장군으로 평소 관운장을 사모하던 장료의 '자결 삼불가설(三不可說)'을
듣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생각이 모자람을 인정하여 결코 굴욕적이 아닌 항복을 하게 되었다. 장료가 말한 삼불가설은 첫째, 한날 한시에 태어나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는 한날 한시에 죽자는 도원결의(桃園結義)에 위배되는 것이며, 둘째, 주군(主君)인 유비 형님의 처자는 누가 돌볼 것이며, 셋째, 한실(漢室)을 받들고 억조창생의 고초를 들어 준다는 대망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에 관운장은 항복의 조건으로 세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내용은 첫째, 한실에는 항복하나 조조에게 항복하는 것은 아니다. 둘째, 두 부인인 감부인과 미부인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의 생명과 생활을 보장할 것, 셋째, 주군의 생사를 알 때는 천리 만리라 해도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관운장의 마음을 돌려 자기 휘하에 두려는 조조가 하루는 관운장이 입고 있는 옷이 너무 남루하여 새 금포를 내주며 이를 입으라 하였다. 며칠이 지난 후 조조가 관운장을 보니 아직도 녹포를 입고 있어 의아히 여기니, "이것은 일찍이 유황숙께서 주신 은의이십니다. 아무리 누더기가 되더라도 조석으로 이것을 입고 벗을 때마다 황숙과 친히 만나는 것 같아 즐거운 기쁨을 느낌니다. 공께서 주신 비단옷은 이 옷 속에 입었습니다."고 하였다. 조조가 이 말을 듣고 "아, 의로운 사람이다. 이토록 충절한 장보도 있단 말인가."하고 탄복하였다. 관운자은 조조의 포로로 있는 동안 원소의 부하 안량과 문추를 베어 은혜에 보답한 다음 두 형수를 데리고 단신의 몸으로 그 유명한 '오관참장'을 하면서 다시 유비에게로 돌아갔다. 그 후 적벽대전 때에는 수군을 인솔하여 큰 공을 세우며 화용도에서 조조를 생포할 수 있었음에도 조조에게 입은 후의를 생각하여 그를 놓아 줌으로써 은혜를 갚는다. 후에 형주에서 촉나라 세력의 확립을 위해 진력하다가 조조와 손
권의 합공을 받아 마침내 사로 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조선에서의 관왕묘의 유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조선을 도우러 온 명나라 장병들이 말하기를 평양싸움, 홍산싸움 때에 관우의 영혼이 나타나서 왜병들과 싸우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명나라의 장군인 진유격은 한양에 있는 북악산 꼭대기에 관왕묘를 세우고, 석상을 만들어 앉히고, 석상 옆에 관운장이 자기들과 조선을 도운 사실을 기록한 비를 처음으로 세웠다. 이것을 선조 39년에 서악 동에 옮겨 다시 만들었다. 또 명나라 장군 진인이 숭례산 기슭에 두 번째로 관왕묘를 건립하였다.
광무제(光武帝)와 28장 (서기전5 ~ 서기 57)
한고조(漢高朝) 유방(劉邦)이 세운 한제국(漢帝國)은 말기에 이르러 외척의 손에 정권을 빼앗겨 혼란스러운 지경에 빠지게 된다. 한제국의 왕족이었던 유수(劉秀)는 형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차례로 숙적을 무찌르고 후한(後韓)을 건국하게 되니 이가 곧 후한의 창시자 세조
(世祖) 광무제이다. 유수는 성품이 어질고 겸손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으며, 왕이 된후에도 사치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심혈을 기울인 명군(明君)으로 위명(偉名)이 후세에 길이 전해내려온다.
광무제가 성군이니 그의 휘하에는 자연히 수많은 명신과 명장이 모여들어 광무제를 잘 보좌하니 오랫동안의 전란의 아픈 상처는 서서히 아물어 가고 후한의 위대한 새역사가 힘차게 태동하기에는 조금의 부족함도 없었다. 광무제는 서기 57년에 63세를 마지막으로 후한제국을 건설한 후 조용히 운명하였다.
그 후에 후비인 음여화에게서 태어난 왕자 유장(劉莊)이 즉위하니 이가 후한의 2번째 왕인 효명왕(孝明王)이고 연호는 영평이었다. 효명왕 영평 3년에 건국에 공이 컸던 공신 28명의 공적을 길이 기념하기 위해서 이들의 초상화를 제작하여 남궁(南宮)의 운대(雲臺)에 걸어 놓
았다.
그 순서를 보면 첫째가 역시 가장 많이 광무제를 섬기고 보필한 등우(鄧禹)이고, 두 번째는 마성(馬性)이었고, 세 번째는 공손술의 격파에 큰 공을 세운 장군 오한(吳漢) 등의 순서였다.
* 28장(二十八將)
등우, 마성, 오한, 왕량, 가복, 진준, 경감, 두무, 구순, 부
준, 잠팽, 견심, 풍이, 왕패, 주우, 임광, 채준, 이충, 경
단, 만수, 개연, 비융, 조기, 유식, 경순, 장궁, 마무, 유융
광서제(光緖帝) (1871 ~ 1908)
중국 청나라 제11대 황제(재위 1874 ~ 1908). 묘호(廟號)는 덕종(德宗), 시호(諡號)는 경황제(景皇帝). 청나라 말기의 격동기에 비극적인 운명을 겪었던 황제로 사실
상의 정권은 서태후(西太后)가 장악하여 명목상의 황제에 지나지 않았으며, 평생 동안 서태후의 전회에 시달렸다. 그의 치세에는 이리사건(伊犁事件) 및 청불전쟁, 청일전쟁 등이 잇달아 일어나 서구 열강과의 관계로 가장 다사다난했던 시기였다. 깊어만 가는 청나라의 고민과 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하여 강유위(康有爲), 양계초(梁啓超)등이 주장대로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본받은 변법자강챙(變法自疆策)을 받아들여, 1898년에 무술(戊戌)
변법을 시작하였다. 그 개혁은 당시의 상황에 적합한 것이었으나, 서태후를 정점으로 하는 수구파(守舊派)의 쿠데타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변법파의 강유위등은 해외로 망명하고 황제는 궁중에 유폐되었다. 1900년 의황단(義和團)의 난이 일어나 열강(列强)의 군대가 북경에 입성하자, 황제는 서태후와 함께 서안(西安)으로 난을 피하였는데, 이러한 탈출의 혼란한 틈타 서태후는 황제가 사랑하던 진비(珍妃)를 죽였다. 1901년에 화약(和約)이 성립되어 북경으로 귀환하였으나, 그 후에도 유폐생활이 계속되다가 1908년에 사인 불명으로 죽었으며, 그 다음날 서태후도 죽었다.
괴철 ( ? ~ ? )
한신의 막료로서 초나라 출신의 모사. 한신이 제나라에 주둔할 때에 한신에게 천하삼분지계를 제안하였다. 하신이 한고조와의 의리를 들어 괴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자. 한신을 떠나 저자거리에서 미친 척하며 지냈다. 여태후가 한신을 죽인 후 한고조가 괴철을 잡아들여 죽이려 하자, 한고조에게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이 한신에게 모반할 것을 권했다고 말하여 한고조를 감탄시켜 한고조가 풀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권극중(權克中) (1585 ~ ?)
조선 현종 때의 성리학자. 자 정지(正之), 호 청하자(靑霞子). 본관 안동. 어려서 최명룡(崔命龍)을 사사(師事)하고 1606년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 들어갔으나 신병(身病)으로 2개월 만에 귀향하였다. 1612년 사마시에 등광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계축옥사(癸丑獄事), 영창대군의 죽음, 인묵대배의 삭탈 등 정국의 혼란에 자극되어 관직을 포기하고 은거하였다. 그는 유교·불교·도교의 사상을 일관하는 사상을 갖고자 하였다.
공(空)과 유(有)를 삼가(三家)의 개념을 종합하고, '공이유 유이공(空而有 有而空)'으로써 그 관계성을 규정하였다. 성리학설에 있어서 태극은 이(理)와 기(氣)의 합(合)이라하고 현상화되기 이전의 본체로서의 모습은 이기(理氣)·성정(性情)의 혼융무간(混融無間)으로 둘로 분석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태극은 미발(未發)한 상태로 체(體)이며 선천일기(先天一氣)는 이(理)가 기(氣)에 승(乘)한 상태인 이발(已發)의 상태로 용(用)이라고 하면서, 이 둘은 이기합일(理氣合一)의 상태로서 모두 현상에 대한 본체라고 하였다. 선천일기는 현상 존재를 존재하게 하는 작용자이며, 이것은 공(空)·일(一)·적(寂)·한 이(理)와, 형(形)·수(數)·정(情)한 기(氣)를 연결하는 중간자(中間者)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이(理)의 존재 의미를 구조적으로 밝혀 '이'와 '기'의 불리성(不離性)을 강조하였다. 이를 공·일·적, '기'를 유(有)·이(二)·감(感)이라고 규정하고 그 관계를 '공이유 유이공
(空而有 有而空)', '일이이 이이일(一而二 二而一)','적이감 감이적(寂而感 感而寂)'으로 표현하였다. 따라서 기의 현상적인 변화는 이의 존재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이는 기가 존재하기 위한 필연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갖는다고 하였다. 이밖에 이기론에 의한 천·지·인 삼재론(三才論)을 통하여 인간을 천지의 묘용(妙用)으로 보고, 이기가 본래 불리(不離)하지만 구분해서 말하는 이유는 선악을 구분하려는 데에 있다고 하였다. 저서에 『청하집(靑霞集)』『참동계주해(參同契註解)』등이 있다.
김개남(金開南) (1853 ~ 1894)
이름 영주(永疇), 자 기선(箕先). 본관 도강(道康). 1853년 (철종4) 9월 15일 정읍군 신외면 동곡리 지금실(知琴谷)에서 김대현(金大鉉)의 셋째 아들로 출생했다. 개남이란 이름은 도강 김씨 족보에 기록돼 있지않은 것으로 미루어 동학입교 후에 불리운 호칭이다. 태인은 이웃 금구의 원평과 아울로 호암에서 동학이 가장 교세를 떨친 곳이며 그 가운데 산외면 동곡리는 전봉준, 김개남의 출생지이다. 최경선(崔景善)은 태인 주산리 출생, 김덕명(金德明)이 또한 이웃고을 금구 원평 출신이었으며, 산외면 오공리 김개남의 종형인 김삼
묵(金三默), 김문환(金文桓) 부자가 동학의 중진 인물이었다.
전봉준, 손화중과 아울러 동학의 삼걸인 김개남은 그 가운데서도 강경파였다. 그는 남원에서 우도(右道)의 금산, 무주, 진안 용담, 장수를 비롯하여 좌도(左道)를 호령하였고 9월 봉기의 북상에도 공주로 진격하는 전봉준과는 달리 청주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북상도중 전주에서남원부사 이용헌(理龍憲)과 고부 군사 양필환(梁弼煥)을 체포하였는데 굴복하지 않고 반항하자 일거에 이들을 참수 하였다.
그는 11월 10일 청주를 공격했으나 일본군에 패하여 진잠을 거쳐 태인으로 돌아와 태인 종송리 매부인 서영기 집에 잠거해 있다가 임모의 고발로 12월 1일 강화 병방 황헌주(黃憲周)에 체포되어 전주로 이송되었다. 전라관찰사 이도재(李道宰)는 김개남의 명성에 겁을 먹고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하는데 위험을 느껴 12월 13일 임의로 처형하여 최후를 마치니 향년 42세였다.
그 수급은 서울로 이송되어 12월 25일 서소문밖에 3일간 효시했다가 다시 전주로 내려보내 효시케했다.
김덕명 (1845∼1895)
이름은 준상. 본관 언양. 1845년 10월 27일 금구군 수류면 삼봉리 가야에서 아버지 한기, 어머니 윤씨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성장 과정에 대해서는 그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풍채가 수려하고 담론이 유창했다고 한다.
전라도 동학의 거두이며 1892년 11월 1일에 있었던 교조신원 운동의 삼례대회에는 금구 지방의 일만 여 명의 교도들을 소집하여 대회를 벌인 적도 있었다. 고종 30년 3월 20일 전라감사로 제수된 김문헌이 입시하였을 때 전라도의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 갔는데 이때 왕은 "호남에서 금구에 동학의 무리가 가장 많다
고 하는데 완영으로부터 거리가 얼마나 되는가? 먼저 그 소굴을 소탕하여 없애라!" 이에 김문헌이 말하기를 "30리 가량 떨어져 있는 금구 원평에는 과연 동학당들이 많이 잇다고 합니다. 삼가 성교대로 거행하겠습니다." 금구 원평의 동학은 물론 김덕명포의 동학을 지칭
하는 것이었으니 그 세력이 얼마나 떨치고 있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덕며은 최시형 교주가 표방하는 비폭력의 교단방침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의 3월 봉기에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과 함께 백산기포 때 주력을 이루었다. 공주 패전 후 전봉준과 원평으로 후퇴하여 재차 거사를 기도했으나 11월 25일 원평싸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그리고 27일 태인 싸움을 최후로 해산하고 향리로 돌아와 금산면 장흥리 안정사동에서 은거하다가 1895년 1월 1일 태인 수성군에 체포되었다. 이 때의 보고서에 "김덕명은 원평점에 도소를 설치하고 공전과 공곡을 받아들였다."고 하였다. 1895년 3월 29일 법무아문 재판소에서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51세였다.
김봉곡 (1575∼1661)
본명은 동준. 봉곡은 호. 현 김제군 백산면 하리 진다동에서 김희지의 아들로 출생.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19세에 학문에 뜻을 두어 4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인조반정 뒤에 의금부도사에 천거되어 사헌부감찰, 양성현감, 한성판관 등을 역임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그는 척화에 앞장서는 한편 인조를 수종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하게 하였다. 그 뒤 세자사전, 사헌부지평, 의정부사인 등 여러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1년 동안 상웅도찰방을 했을 뿐 출세의 길에서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 후학의 양성과 한문야학으로 여생을 보냈다.
김일부 (1826∼1898)
본명은 항. 일부는 호. 1826년 10월 28일 지금의 노산군 양촌면 남산면에서 부친 인로와 모친 대구 서씨사이에서 장남으로 탄생. 유소시대와 청년시대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얘기가 거의 없고 36세에 연담 이운규와 사제를 맺으면서 역의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연담선생은 천문·역산·시문에 ·능통한 사람으로 한때 수운 선생과 남학의 창시자 김광화도 같은 문하에 있었다. 하루는 이선생이 일부를 불러 말하기를 "그대는 쇠하여 가는 공자의 도를 이어 천시를 받들 것이니 이제 예서만 자꾸 볼 것이 아니라 서전을 많이 읽으소. 그러노라면 자연 감동이 되어 크게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요 후일 정녕코 책을 지을 것이니 그 속에 나의 글 이 한 수만 넣어 주소." 하고 내준 것이 그 유명한 "觀淡은 莫如水요 好德은 宣行仁을 影動天心하니 勸君尋此眞하소." 라는 글귀인데 이것을 남겨 놓고 홀연히 사라졌다 한다. 이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조선조의 인습적인 유학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진리를 찾고자 서전의 정독과 다독, 주역의 연구, 그리고 심법수련과 수행에 의한 정신력의 고양을 위하여 피나는 노력과 끊임없는 정진을 계속했다. 일심으로 매진하던 중 기묘년 이후로 눈앞에 이상한 팔봉 획이 나타나더니 점점 커져서 나중에는 천지가 이 낯모르는 팔괘의 획으로 뒤덮여 보였다. 3년 동안 이 이상한 괘상을 응시한 선생은 주역을 여러 차례 살펴보았으나 복희 괘도 아니고 문왕괘도 아닌 생전 처음 보는 괘상이었다. 문득 공자가 설한 설괘전에서 "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신이라는 것은 만물의 묘한 변화를 일컫는 것이다.라는 구절과
"故水火相逮 雪風不相悖 山澤通氣 然後能變化 旣成萬物也" 水火가 서로에게 기운을 주고 雪風이 서로 어그러지기 않으며 山澤이 氣가 서로 통한 연후에 능히 변화가 일어나니 이에 만물이 이루어진다.라는 구절에 이르러 눈앞에 나타난 괘도와 부합함을 발견하고 재종질을 시켜 그리게 하니 이것이 정역팔괘이다. 정역팔괘는 문자 그대로 선천의 타원운동을 하던 우주가 정도운동을 하게 되는 후천의 천지 일월의 변화원리를 상징화시켜 놓은 것이다. 그 후 괘상을 그려 놓고 깊이 연구한 결과 정역을 완성하게 되었다. 일부 선생의 평소의 생활태도는 평상시에도 의관을 정제하여 추호도 해이한 빛이 없어 밤이 깊어도 취침 전에는 ㄴ는 일이 없었으며 낮잠은 더더욱 없었다. 아침에는 항상 일찍 일어나고 극히 짧은 시간을 자는데 그것도 앉은 채로 잠깐 졸고 마는 경우가 많았다. 항상 두 무릎을 꿇어 단좌했으며 밥상을 받으면 정좌를 하고 주 손으로 상을 약간 잡는 듯이 가볍게 대고 식고를 올린 뒤에 천천히 음식을 들며, 제사 음식인 경우에는 경견한 마음을 갖고 먹었다 한다. 또한 집안일을 돌보지 않고 주야를 불문하고 정역 연구에만 몰두하자 집안 사람이나 동네 사람들이 미쳤다고 할 뿐말 아니라 정역을 완성하자 문중에서는 사문난적이라 하여 족보에서 지운 일조차 있었다. 선생은 다음과 같이 그 심정을 토로했다.
"六十平生 狂一夫는 自笑人笑恒多笑라 笑中에 有笑하니 笑何笑리요 能笑其笑하고 笑而歌하노라."
60평생 동안 진리탐구에만 몰두한 미친 일부는 스스로도 웃고 세상사람도 웃으니 웃음도 많구나. 웃음 중에는 진리를 깨친 환희의 웃음이 있으니 그 웃음이 어찌 비웃음이겠는가. 능히 그 비소를 웃어넘기고 흔쾌히 노래 부르리라.
이와 같이 일부 선생은 평소의 생활태도가 구도자다운 풍모가 짙고 진리를 위해서는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헤쳐나가는 불굴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 위의 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세속의 비웃음에 초연했던 일부 선생은 또한 생존시에 상제님을 만나 뵈었던 몇안되는
인물 중의 한 분이기도 하다. 일부 선생은 1897년에 상제님을 뵙고 그 이듬해(1898)에 영면하였다.
l 최수운은 내 세상이 올 것을 알렸고, 김일부는 내 세상이 오는 이치를 밝혔으며, 전명숙은 내 세상의 앞길을 열었느니라.
l * "전명숙은 조선 명부, 김일부는 청국 명부, 최수운은 일본 명부를 각기 주장케 하여 명부의 정리공사장으로 내리라." 하시며, 날마다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라.
노자 (?∼?)
B.C 6세기경 중국 도가 사상의 제창자. 성은 이, 이름은 이, 자는 백양, 시호는 담. 공자보다 약 50년 전, 혹은 100년 후의 사람이라고 하나 모두 분명치 않다. 하남성 녹읍현 사람. 주왕을 섬겼으나 뒤에 관직을 버렸다. 관에 이른 후, 관령 윤희의 의뢰로, '도덕경 2편 81장 5000언'을 저술했다고 전한다. 내용은 상식적인 인의와 도덕보다 무위를 주장한 것으로, 만사를 포함하는 대도는 무위이며, 무위로 돌아가면 난리도 없다는 것으로, 그의 사후 B.C 3세기 중엽 편찬된 듯하고, 후세인의 가탁의 글도 혼입되어 잇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는 중국에 있어서 우주 일체에 대해 생각한 최초의 사람으로 우주의 본체는 허무이며 만물은 모두 이것에서 발생하고, 인간의 이상은 이 허무에 일치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는 후세에 도교의 시조로 불려지며 그의 사상은 노장사상으로 발전하여, 유교와 더불어 중국정신 사상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에 대한 연구서에 위의 왕 핑의 『왕주노자』, 무내의웅의 『노자원시』등이 있다. 그는 유교에서 말하는 예제나 실천 도덕 등은 쓸데없는 것으로서, 세상이 어지러워지는 것은 사람들이 지식을 지나치게 구하는 때문이라고 하여, 자아를 버리고 무위자연의 '도'에 따르면 사회는 평화롭게 되며 사람들은 행복하게 된다고 설하여, 자급자족하는 작은 나라를 이상으로 하기 때문에 '황노의 도' 라 이르며, 도를 설하므로 도가라 이르고, 장자가 이를 이어 받았으므로 노장사상이라 일컬어진다.
당태종 (598∼649)
중국 당나라의 제2대 황제(제위 629∼649). 성명 이세민. 북방 민족의 피가 섞인 무인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천성이 총명하고 사려깊었다. 또 무술병법에 뛰어난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소년시절부터 사람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수나라 양제이 폭정으로 내란의 양상이 짙어지자, 수나라 타도의 뜻을 품고 태원방면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하여 거병시켜 장안을 점령하고 당나라를 수립하였다. 그 뒤 군웅을 평정하고 국내 통일을 실현시킨 것은 20세 안팎인 그의 활동에 의한 것이며, 이를 질투한 형 황태자 건성 및 동생 원길과 다투어 마침내 그들을 쓰러뜨리고, 626년 아버지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정관의 치' 라 칭송받았고,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좋은 후계자를 두지 못하였고, 만년에 고구려 외의 대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그가 죽은 뒤에는 정권이 동요하게 되었으며, 마침내는 측천무후의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는 휘하에 '24장' 이라 일컫는 용맹한 장수들과 지혜로운 문관들을 거느렸다. 용맹한 중수로
는 현무문에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하고 왕세충 토벌에 공을 세운 용장 위지경덕과 두건적을 생포한 백사양과 정지절, 단지현, 진숙보 등이다. 그리고 위징, 방현령, 두여회, 장손무기, 장행성, 배구 등의 문관들이 그를 좌우에서 충실히 보좌하여 전쟁중에 재빨리 사태를 판단하고 전술을 세웠을 뿐 아니라 당나라 건국 후에도 각종 정책을 실행하게 하는 데 공헌하였다.
두문동칠십이현
여말선초에 이씨 조선에 협조하기를 거부하고 두문동에 은둔하여 산 72인.
두문동은 개경 서북쪽 만수산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이성계가 경덕전에서 과거를 개설하고 인재를 초유하고자 하였으나 조의생·임선미·맹호성·성사제·신규·고천상·서중보·신순·신흔·신우 등 73명은 관직을 그만두고 그 앞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들은 유학의 대의명분인 충절을 지키고자 한 사람들로 성균관의 태학
생이 중심이 되었다. 이들은 만수산으로 들어가서 울타리를 세우고 문에 두문동이라 명명하고 은둔하였으나, 후에 이성계에 의해 살해되었다. 영조 16년에 능행차 왕이 개성에 왔다가 이 유적지를 둘러보고 '고려충신부조현' 이라는 글자를 고개에 새기게 하였으며, 27년에는 두문동에도 비석을 세우고 제문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두보 (712∼770)
당나라 때의 시인. 자는 자미이고 양양 지망에서 출생하였다. 장안 동남쪽에 있던 소흥에서 지낸 적이 있었기 때문에 소릉야로라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칭하였는데, 후세에는 두소릉이라고 불리웠다. 두보의 조부는 두심언인데 역시 당대에 이름난 시인이었다. 어릴 때 두보는 조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시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7세에 봉황시를 지었는데 매우 걸작이었다.
두보는 20세 약관의 나이에 강소와 절강과 산동. 하북 지역 등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시를 지었으며 장안에서 개최하는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말았다. 그 후에 장안의 권력층들에 대한 염증을 느끼고 돌아다니던 이백을 만났는데 이백은 두보보다 11세 연상이었으나 그들은 막역지우 같이 지내면서 서로의 우정을 나누었고 서로의 내면 세계를 잘 이해하고, 서민의 한을 시와 술로써 달래었다. 이백을 시선, 두보를 시성이라
일컫는다.
등우 (2∼58)
중국 후한 광무제의 명신. 자는 중화. 남양신양 사람. 소년시절부터 광무제를 알고, 왕망의 난 때, 황제를 도와 국내 통일에 노력, 크게 공을 세웠다. 대사도가 되고, 양후로 봉군되었다.
마성 (?∼82?)
중국 후한의 무장. 하남 사람. 광무제를 섬기고, 뒤에 누진하여 양무장군에 임명되었다. 이헌 등을 치고, 마원과 함께 티벳을 토벌, 북방 방비에 종사했다.
■ 관련 말씀
* 마성을 부른 뒤에 일본지면이라 읽고, 또 그와 같이
마속 (192∼228)
중국 삼국 시대 촉한의 장수. 재주가 뛰어나고, 병략에 밝아 제갈량의 중명을 받고 일군의 통수가 되었다. 촉한의 요지 가정의 싸움에서 위나라 장수 장합에게 크게패하여, 중원 공략의 웅대한 계획도 허사로 돌아가게 되어 제갈량은 그를 애석히 여기면서도 조정내부와 군내부에서 패전의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소리가 높아 '눈물을 흘리며' 목을 베었다.
■ 관련 말씀
또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모든 일에 삼가 조심하여 무한유사지불명하라. 마속은 공명의 친구로되 처사를 잘못하였으므로 휘루참지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맹상군 (?∼서기전 279?)
중국 제나라의 공족, 전국시대 말기의 '사군' 의 한 사람. 성명은 전문. 맹상군은 시호라고도 하고 봉호라고도 한다. 선왕의 서제였던 아버지의 뒤를 이은 다음, 천하의 인재들을 모아 후하게 대접하여 그 명성과 실력을 과시하였다. 진나라 소양왕의 초빙으로 재상이 되었으나, 의심을 받아 살해되려고 했을 때 좀도둑질과 닭울음소리를 잘 내는 식객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이것이 '계명구도"의 고사이다. 후일 제나라와 위나라의 재상을 역임하고 독립하여 제후가 되었다.
맹자 (서기전 372경∼289경)
중국 동주시대의 사상가. 유학자. 산동성 추현에서 출생. 이름은 가, 자은 자여 또는 자거. 유가의 아성으로 불린다.
추현은 공자의 출생지 노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사숙했다. 어머니는 삼천지교, 단기지훈 등르로 유명한 현모로서, 어머니의 감화도 크게받고, 자사의 제자에게 배웠다. 학업을 마친 후, 양·제·송·노 등의 여러 나라를 편력, 제후에게 왕도를 개진했다. 제의 선왕, 양의 혜왕, 등의 문공의 정신적인 공명을 얻었을 뿐 실제 정치에 용납되지 못하여, 귀국 후에는 제자인 만장 등과 시·서 및 공자의 뜻을 조술, 그것이 현행 『맹자』7편이라고 한다. 그의 학설은 여러 제후의 공감을 얻지 못했으나 공자의 인의설을 확장하고, 유학의 이론적인 기반을 수립하여 높이 평가받는다.
■ 관련 말씀
* 상제님께서 다시 큰 소리로 맹자를 부르시어 "맹자야, 이 역적놈아!" 하고 꾸짖으시니 한 성도가 여쭈기를 "맹자를 역적이라고 꾸짖으시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거늘 말씀하시기를 "마음속에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있다면, 임금을 임금 같지 않게 볼' 수가 있겠느냐. 신하가 임금을 원수같이 보았으니 해하여도 무방하니라."하시니라.
명성황후 (1851∼1895)
고종의 비. 본관은 여흥. 여성부원군 치록의 딸. 8세에 부모를 여의고 가정이 빈한하여 고생이 많았으나, 재주가 비상하여 일가에 알려졌다. 1866년(고종 3년) 세도정치의 기반을 없애기 위하여 고종비의 물색에 골몰하던 차 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16세에 고종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 후 고종은 궁녀 이씨를 총애하고 민비를 돌보지 않았으나, 민비는 예의범절에 밝아 대단한 칭송을 받았다. 궁녀 이씨가 서자 완화궁을 낳고 대원
군이 이를 대단히 기뻐함을 보고 민비는 불만과 질투가 폭발하여 정치적 수완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대원군의 반대세력으로 자기 세력을 규합하는 한편, 고종의 사랑을 독차지하려고 애쓰던 차에 마침내 1874년(고종 11년)에 왕자 척을 낳았다. 그러나 민비의 척족일파가 득세하여 집정하려는 기미를 알아챈 대원군은 완화궁을 태자로 정하려 하였다. 이에 분개한 민비는 드디어 대원군과의 투쟁을 시작, 대원군의 장자 재면과 현 이퇴
용과 연락하고 조두순. 이유원 등 대원군의 집정에 불만를 가지는 세력과 연결을 맺어 민비 중심의 일파를 만든 다음, 산림유생 최익현을 선동하여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한 탄핵을 올리게 하였다. 이리하여 1873년 (고종 10년)에 대원군이 하야함으로써 그 일파가 물러
나고, 고종의 친정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1894년 일본의 강압정책으로 이루어졌던 갑오경장으로 민씨가 세력을 잃게 되자 친러책을 써서 일본을 압박하였다. 1895년 9월 이노우에의 뒤를 이어왔던 일본 공사 미우라는 민비의 친러책과 정면충돌을 하게 되었으며, 결국 이오우에와 미우라의 계획적인 주도에 의해 동년 4월 8일 시해되었다. 1897년 민비는 명성황후로 추책되어 남청량리에 묻혔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 경기도 미금시 금곡동 홍릉에 이장하였다. 경복궁에 명성황후 조난비가 있다.
■ 관련 말씀
* 민중전이 각처의 사찰에 빠짐없이 기도하였으나 오직 금산사에는 들지 못하였느니라.
무왕 (서기전 ?∼1116)
성은 희, 이름은 발이다. 문왕의 둘째 아들. 재위 19년 (서기전 1134∼1116). 문왕이 치세 50년 동안 주나라의 부강을 위해 절치부심 노력한 끝에 결실을 얻지 못하고 붕어하자 그의 아들인 태자 발이 즉위하니 이가 곧 무왕이다. 무왕은 붕어한 선왕을 문왕이라 추존하였으며,
태공망을 사부로 모시고 상보라 불렀으며 크고 작은 대소사를 그에게 물어 같이 결정하였다. 또한 그의 동생 주공 단이 빈틈없이 그를 보좌하여 주고, 소공 석과 필공 고 등의 일족의 수장들과 산이생과 굉요라는 어진 신하들과 많은 사람들이 무왕을 도와 은나라 타도의 준비를 차근차근 진행시켜나갔다. 무왕 역시 문왕 못지 않게 선정을 베푸니 주나라 백서은 물론이고 많은 제후들도 그의 덕과 어진 정치에 동조하여 점점 그의 명성은 천하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주왕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고 민심을 잃자, 마침내 문왕의 위패를 모시고 출정하여 폭군 주왕을 내쫓고 주왕조(서기전 1122∼249)를 개창하였다.
문왕 (?∼?)
중국 고대 주왕조의 기초를 닦은 명군. 성은 희, 이름은 창. 50년간 재위했고 97세까지 살았다.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은 제곡고신씨의 아들로 요, 순, 우의 삼대 동안에 출세하여 농사를 맡은 농사가 되었다. 그 후 문왕의 할아버지인 고공단보가 주원에 거처하였으므로 국호를 주라고 하였다. 문왕은 후에 추존한 칭호이고, 당시에 은나라의 폭군 주왕의 신하로서 서쪽 지방의 제후들을 통솔하는 서백으로 있었다. 문왕은 후에 은나라 서방에서 크게 덕을 베풀고 강국으로서 이름을 떨쳤던 부왕 계의 업을 계승하여 점차로 인근의 적국들을 격파한 후, 위수를 따라 동진하여 현재의 서안의 남서부에 있는 고경에 국도를 정하였다. 은나라의 마지막 천자 주가 산동반도의 동이족 정벌에 여념이 없는 틈을 타서 인근 제후의 지지를 받아 세력을 길러 황하를 따라서 동으로 내려가 화북평원의 일각으로 진출, 그 도하점 맹진을 제압하여 은나라를 공격할 태세를 정비하였다. 문왕은 만년에 강태공의 도움을 받아 더욱 덕치에 힘썼는데 후에 그 실력이 인정되어 은왕조로부터 서방 제후의 패자로서서백의 칭호를 사용하도록 허락받았다. 문왕은 은나라와의 사이에 시종 평화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였으며
우·에 등 두 나라의 분쟁을 중재하여 주면서 더욱 제후들의 신뢰를 얻어 천하 제후의 3분의 2가 그를 따르게 되었다. 문왕의 사후 그의 아들 무왕 발이 즉위하여 은나라를 쓰러뜨리고 주왕조를 창건하였다.
■ 관련 말씀
*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문왕은 유리에서 384효를 해석하였고
* 또 문왕과 이윤의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리라. 미물 곤충이라도 원망이 붙으면 천지공사가 아니니라.
민영환 (1861∼1905)
조선 문신. 순국지사. 자 문약, 호 계정. 본관은 여흥. 1877년 동몽교간에 임명되고 이듬해 정시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1881년 동부승지가 되고,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이 해 생부 겸호가 임오군란으로 살해되자 벼슬을 버리고 3년동안 거상하였다. 이후 1884년에 다시 벼슬을 하여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쳤다. 빈번한 해외여행으로 새 문물에 일찍 눈을 떠 개화사상을 실천하고자 정치·경제·문화·사회·교육 등의 제반제도의 개혁을 건의하였으나 군제의 개혁만이 채택되어 원수부를 설치하여 육군을 통할하게 됐다. 1896년 독립협회를 적극 후원하여 시정의 개혁을 시도하다가 민씨 일파들에게 미움을 사 파직되기도 하였다. 또 다시 기용되어 1904년 내부·학부대신을 지내고 대훈과 이화장을 받았으나 친일파 관료들과 대립하여 일본의 내정 간섭을 성토하다가 시종무관장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1905년에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조병세와 백관을 인솔하여 궁궐에 나가 이를 반대했으나 일본 헌병들의 강제해산으로 실해했다. 다시 종로 백목전도가에 소청을 열고 상소를 의논하던 중 이미 대세가 기울어짐을 보고 전동 이완식의 집에 가서 유서 3통을 남기고 자결했다.
박영효 (1861∼1939)
정치가. 자 자순, 호 현현거사. 13세 때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결혼하여 금릉위가 되고 유대치를 중심으로 김옥균·홍영식·서광범 등 개화당요인들과 결속하여 정치적 혁신을 부르짖고 일본의 세력을 이용하려 했다. 1882년에 수신사로 도일하여 일본조야를 시찰하고 돌아와 개혁을 시도했으나 수구파들의 정권 장악으로 실패했다. 이에 한성부 판윤으로서 개화당 요인들과 협의하여 1884년 10월 17일 갑신정변을 일으켜 수구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3일 만에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1885년 잠깐 도미했다가 일본으로 되돌아와 유학생들의 기숙사인 친린의숙을 경영하다가, 1894년 갑오경장으로 사면되어 귀국, 제2차 김홍집내가게 내무대신으로 기용되어 자주
적 개혁을 추진했으나 1895년 반역음모사건으로 인해 다시 일본에 망명했다. 1907년 박제순내각의 알선으로 귀국, 사면괴고 이완용내각의 궁내대신에 임명되었다가, 대신 암살음모사건으로 1년간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910년 일제강점 이후 일본 정부에 의해 후작이 되었으며, 뒤에 중추원고문을 거쳐 일본 귀족원의원이 되어 말년에 친일적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복희 (?∼서기전 3413)
우리 나라의 국기 태극기의 팔괘를 처음 그었으며 동양 역철학의 시조이다. 성은 풍, 이름은 방아 또는 창아. 재위 115년(서기전 3528∼3413).고대로부터 그는 동이족의 성왕으로 공인되어 왔다. 배달의 5대 태우의 환웅천황의 열두번째 막내아들로서 신시에서 태어난 복희씨는 후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진으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수인씨를 이어 왕이 되었고, 진에 도읍을 하였다. 또한 풍산에서 살게 되어 성을 풍씨로 하였다. 또는 배달의 동방 구이족 가운데 풍이족 출신이기 때문에 풍씨라고 하였다고 한다. 복희씨는 태호라는 칭호에서 알 수 있듯이 환정신을 밝혔고, 처음으로 글자를 만들어 '문자의 시조'가 되며, 한 남자외 한
여자(정음정양)의 '혼인제도'를 제정하였다. 그리고 역도의 효시인 복희팔괘를 그어 우주의 변화원리를 음양논리로 처음 밝혀 놓았다. 또한 그물을 만들어 고기잡이와 사냥법을 가르치고, 가축을 희생용으로 길러 천신과 지신, 조상에게 제사지냈으며, 풍씨성을 가져 인류 성씨의 원조가 된다. 이 때에 이르러 백관들이 서고, 왕도가 생겨났으며, 예의문물이 시작되었다. 이와 같이 태호 복희씨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륜도덕의 푯대를 세우고, 우주 삼신의 창조원리(신교 삼신신앙의 우주관)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밝혀내 정립한 인도문명사의 첫 개벽자이다.
■ 관련말씀
* 세상에 성으로 풍가가 먼저 났으나 전하여 오지 못하
고 다만 사람의 몸에 들어 체상의 칭호로만 쓰이게 되
어 풍신, 풍채, 풍골 등으로 일컫게 되었을 뿐이요
사마소 (211∼265)
중국 3국 시대 위의 권신. 자는 자상. 위의 대장군. 대도독. 260년에 위제 발을 멸망시키고 원제를 영립하였으며 촉한을 멸망시켜 진왕에 봉립되었다. 위실 탈위의 야심이 있었으나, 265년에 사망하였다. 그의 아들 염이 원제의 선양을 받아 진국을 세웠다.
석가 (서기전 1026∼?)
현재의 내팔 남부와 인도의 국경 부근인 히말라야산 기슭의 카필라성을 중심으로 석가족의 작은 나라가 있었다. 석가모니는 그 나라의 왕 정반왕과 마야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마야 부인은 출산이 가까와짐에 따라 당시의 습속대로 고향으로 돌아가던 도중 룸비니동산에
서 석가를 낳았다.석가모니는 29세 때 고의 본질 추구와 해탈을 구하고자, 처자와 왕자의 지위 등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였다. 그는 6년간을 고행한 끝에 고행으로서는 해탈이 불가능함을 알고 고행을 중단하였다. 산림을 나와 체력을 회복한 뒤, 다시 보리수 아래에 자리잡고 깊이 사색, 정진하였다. 그 과정에서는 악마의 유혹도 있었으나, 석가모니는 일념으로 사색에 몰두하여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을 정각이라 하며, 35세에 그는 깨달은 사람, 곧 불타가 되었다. 그의 가르침은 『아함경』『율장』등의 원시불교성전을 통하여 전하여지고 있다. 4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설법·교화를 계속한 석가모니는, 80세의 고령에 입멸하였다.
■ 관련말씀
* 매양 옛사람을 평론하실 때는 강태공, 석가모니, 관운
장, 이마두(마테오 리치)를 칭찬하시니라.
소옹 (1011∼1077) = 소강절
중국 송대의 학자. 시인. 자 요부, 호 안락선생, 시호 강절. 하남에서 살았으며 주렴계와 종시대의 사람이다. 이지재로부터 도서·천문·역수를 배워 인종의 가우 연간에는 장작감주부로 추대받았으나, 사양하고 일생을 낙양에 숨어 살았다. 사마 광 등의 구법당과 친교하면서 시정의 학자로서 평생을 마쳤다. 남송의 주자는 주렴계, 정명도, 정이천과 함께 소강절을 도학의 중심인물로 간주하였다. 강절은 도가사상의 영향을 받고 유교의 역철학을 발전시켜 뛰어난 수리철학을 만들었다. 이 철학은 독일의 라이프니츠의 2치논리에 힌트를 주었다고 한다. 그는 『황극경세서』62편을 저작하여 천지간 모든 현상의 전개를 수리로써 설명하였다.
■ 관련말씀
*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운가사에 새 기운이 갊아 있으니 말은 소장의 구변이 있고, 글은 이두의 문장이 있고, 알음은 강절의 지식이 있나니 다 내 비결이니라." 하시니라. (2편 39장)
소정묘 (?∼서기전 496)
중국 춘추시대 말기 노나라의 대부. 묘가 이름이며, 소정은 관직명이다. 공자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이 주살 사건은 『사기』「공자세가편」, 『공자가어』「시주편」, 『순자』「유좌편」등에 기록되어 있다. 노나라 정공 14년(서기전 496)에 공자는 나이 56세로 대사구가 된 지 7일째 되는 날, 정치를 문란시킨 소정묘를 죽여 그 시체를 3일간 궁정에 내걸었다고 한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은 소정묘를 인망이 높은 사람으로 생각하였으므로 공자의 행위를 힐난한 즉, 공자는 도둑 이회의 대악 다섯 가지를 들어 소정묘는 5대악을 겸하고, 더구나 도당을 짜서 대중을 현혹시켜 체제에 반항하는 조직을 만든 소인의 걸웅이므로 주살함이 마땅하다고 대답하였다.
공자가 소정묘를 죽인 진짜 이유는 일설에 의하면 소정묘가 공자의 정치사상에 어긋나는 신진 법가세력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 관련말씀
* 문득 공자를 부르시며 말씀하시기를 "공자야, 너는 소정묘를 죽였으니 어찌 성인이 되며 삼대 출처를 하였으니 어찌 제가하였다 하리요. 그대는 이곳에서 쓸데없으니 딴 세상으로 가거라." 하시고…
소진 (?∼?)
중국 전국시대 중엽에 활약한 종횡가. 하남성 낙양 사람. 장의와 함께 귀곡자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처음에 진나라 혜왕을 비롯하여 제후 밑에서 유세를 하였으나 채용되지는 않았다. 그 후, 강국인 진과 한의 두 나라가 서로 교전하고 있어서 산동지방의 제국들은 진나라의 침략을 두려워하고 있던 때이므로, 소진은 연나라의 문후에게 6국 합종의 이익을 설득하여 합종책을 성사시켰다. 다시 조·한·위·제·초의 여러 나라를 설복하는 데도 성공하여, 드디어 서기전 333년 연나라에서 초나라에 이르는 남북선상의 6국의 재상이 되었고, 스스로 무안군이라 칭하여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이 때문에 동방으로 진출을 꾀하던 진나라는 십 수년간 그 진출을 저지당했다.그러나 그의 합종책은 장의 등이 헌책한 연형책에 패배하여 실패하였다. 그 후 소진은 다시 제나라에 출사를 했으나, 제나라의 대부의 미움을 사서 암살당하였다. 소진이 일개 서생의 출신으로 지모변설로써 공명부귀를 얻어 그 이름을 천하에 떨쳤기 때문에, 지나라를 위해 연형책을 썼던 장의와 함께 전국시대 책사의 제 1인자로 병칭되고 있다.
■ 관련말씀
*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수운가사에 새 기운이 갊아 있으니 말은 소장의 구변이 있고, 글은 이두의 문장이 있고, 알음은 강절의 지식이 있나니 다 내비결이니라. " 하시니라
소하 (?∼서기전 193)
중국 전한조의 고조 유방의 재상. 한신·장량·조참 등과 함께 고조의 개국공신의 한 사람이다. 진나라의 하급관리로 있으면서 일찍이 한고조 유방이 무위도식할 때부터 접촉을 가졌다. 유방이 진나라 토벌의 군사를 일으키자 종족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객원으로서 이를 따르며 모신으로 활약하였다. 진나라의 수도 함양에 입성하자 진나라의 승상부의 도적문서를 입수하여 한나라 왕조 경영의 기초를 다졌다.
한나라 유방과 초의 항우의 싸움에서는 관중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고조를 위하여 양식과 군병의 보급을 확보했으므로, 고조가 즉위할 때에 논공행상에서 으뜸가는 공신이라 하여 찬후로 봉해지고 식읍 7,000호를 하사받았다. 천하를 통일한 뒤에 진 법을 모방하여 구장율을 제정하고 선정을 베풀었으나 만년에 한고조의 의심을 받아 불우한 생활을 보내다가 병사하였다.
■ 관련말씀
* 한고조는 소하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으나 너희들은 베풀 것이 없으니 오직 언덕을 잘 가지라.
손병희 (1861∼1921)
천도교 제3대 교주. 독립운동가이자 33인의 민족대표중의 한 사람. 초명 응구, 호 의암. 1882년에 동학에 입도하여 2년 후 최시형을 만나 수제자로 연성 수도하였다.
1894년 동학혁명 때 통령으로서 북접의 동학혁명군을 이끌고 남접의 전봉준 장군과 논산에서 합세하여 호남·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샐패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이 되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썼다. 1904년 진보회를 조직하고 이용구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하여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 회원에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일진회를 조직하여 을사조약에 찬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자 귀국, 일진회와 무관함을 밝히고 이용구등 친일분자 62명을 출교했다.
1908년 박인호에게 대도주를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하여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에서 죽었다.
■ 관련말씀
* 하루는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대인의 행차에 삼초가 있나니 갑오년에 일초가 되었고, 갑진년에 이초가 되었고, 손병희는 삼초를 맡았나니 삼초 끝에는 대인이 나오리라." 하시고 손병희의 만사를 지어 불사르시니 이러하니라.
知忠知義君事君이 一魔無藏四海民이라
孟平春信倍名聲이요 先生大羽振日新이라
의를 알고 충을 아는 그대가 임금을 섬기더니 일본놈의 마수에 사해백성이 숨을 곳이 없구나. 전국시대 사군자인 맹상군(제) 평원군(조) 춘신군(초) 신릉군(위)의 명성보다도 훨씬 뛰어난 그대가 조국을 보국함으로 민족의 시대정기가 새로워리라
* 어떤 사람이 여쭙기를 "조선 말에 민란이 있으리라 하오니 정녕 그러하옵니까? 하니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손병희는 영웅이라. 장차 난리를 꾸미리니 그 일을 이름이니라. 손병희가 선진주이나 박절하게 성돌 밑에서 턱을 고이고 앉아서 거사하므로 성사치 못하리라." 하시니라.
손빈 (?∼?)
중국 전국시대 제나라의 병법가. 손무의 후예. 제나라 위왕의 군사. 서기전 367년 경 위나라 군사를 계릉에서 대파하였고, 서기전 353년 초나라를 도와 위나라 군사를 재차 하남 대량에서 격파하여 병법가로 이름이 높았다.
방연과의 사이에 잘 알려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십팔 사략에 전한다.
방연이 위나라의 혜왕을 섬기고 있을 때다. 방연은 자기의 재능이 도저히 손빈을 따르지 못할 것을 알고, 손빈을 월형에 처하고, 그 이마에 입묵을 했다. 그 후, 제나라의 사신이 위나라를 예방했을 때, 사신은 몰래 손빈을 자기 수레에 태워 제나라로 데리고 돌아왔다. 이리하여 손빈은 제나라의 군사가 되어 위나라의 서울로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한나라에 침략군을 진군시키고 있던 위나라의 방연은 제나라 군사가 쳐들어 온다는 보고에 놀라, 한나라를 버리고 급히 귀국했다. 손빈은 계략을 꾸며서 자기의 군사에게 명령했다. 첫날에는 10만의 군사에게 솥을 걸어서 밥지은 자리를 남겨놓고 진군하고, 다음날은 5만의 솥을 걸었던 자리를 남겨놓고 진군하고, 세째날에는 더 줄여서 2만의 솥을 걸엇던 자리
를 남겨놓고 진군하게 했다. 이것을 본 방연은 크게 기뻐했다.
"제나라 군사가 하잘 것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마는, 정말 돼먹지 않았군, 우리 나라에 쳐들와서 이제 겨우 사흘인데, 도망한 군사가 반이 넘지 않는가!" 그는 자신만만해서 밤을 도와 제나라 군사를 뒤쫓았다. 손빈은 방연군의 행군속도를 계산해 보고서, 그 날 해질 무렵에는 마릉에 도착하리라 짐작했다. 이 곳은 길이 좁고, 험한 산이 양쪽으로 닥 있어서 복병을 두기에는 아주 알맞는 곳이었다. 손빈은 길옆에 선 큰 나무의 껍질을 벗기고는 거기에 '방연이 이 나무 아래에서 죽다' 라고 써 놓았다. 그리고, 제나라 정예 군사를 길 양쪽에 매복시켜 놓았다. 그리고 명령했다.
"해질녘에 불빛을 보거든 쏘아라"
과연 방연은 추격하는 군사를 휘몰아 해질녘에 마릉에 이르렀다. 그는 그 큰 나무 밑을 지나치다가 보니 무엇인가가 씌여 있었다. 방연이 불을 밝혀 그것을 보자, 제나라 복병들이 일제히 활을 쏘았다. 위나라 군사는 대번에 진형이 무너져서 뿔뿔이 헤어져 달아났다.
"기어코 그 더벅머리 아이놈에게 이름을 얻게 했구나!"
방연은 이제는 마지막이구나 생각하고 스스로 목을 베어 죽었다. 이리하여, 제나라는 위나라 군사를 크게 쳐 부수고, 태자 신을 사로잡았다.
■ 관련말씀
* 손빈은 방연으로 하여금 해질 무렵에 마릉 땅에 이르게 하였느니라
손화중 (1861∼1895)
이름은 정식. 자 화중. 호 초산. 본관은 밀양. 1861년(철종 12) 6월 22일 정읍군 정주읍 과교리에서 아버지 손호열 어머니 평강 채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임진란에 전주 사고의 왕조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으로 이안한 태인 출신 한계 손홍록의 후예이기도 하다.
어력서 이웃 음성리로 이거하여 유족한 가정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일람첩기하는 총명이 비범했을 뿐 아니라 성장함에 기우가 헌앙하고 상모가 괴위하였다.
처남 유용수를 따라 경상도 청학동으로 승지를 찾아갔다가 때마침 경상도에서 요원의 불꽃처럼 펴져 나가고 있던 동학에 입교하게 되었다.
입교 2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포교에 전력하였으니 처음에는 부안에 우거를 정하고 포교하다가 그 후 정읍으로 옮겨 정주읍 농소리에서도 잠깐 머물렀으나 관헌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다시 입암면 신면리로 옮겼다. 그 후 얼마동안 음성리 본가로 돌아와 있다가 본거지를 무장현으로 옮겨무장읍 김모의 집에 잠시 포교소를 두었다가 다시 이웃 성송면 괴치리 사천 마을로 옮겼다.
이 무렵 무장을 비롯한 전라도 서남부 지방에서 그 명성을 떨치고 있었는데 선운사 암벽 불상 속에서 검단대사 비결록을 꺼냈다는데서 더욱 신비의 인물로 여겨졌다.
그는 비폭력 무저항을 표방하는 교단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전봉준의 혁명론에 동감하여 마침내 3월 봉기의 주력으로 전봉준과 함께 갑오동학혁명을 이끌었다.
그는 전주 해산 후 나주, 장성 등지에 머물고 있었던 것 같다. 전봉준은 8월경 전라관찰사의 부탁으로 나주에 내려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장성에서 손화중과 만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전봉준이 손화중에게 전주로 동해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신병을 요양한 후 전주에 들르겠다고 하였다.
9월 봉기에 일본군이 나주 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설이 있어 북상에 참가하지 않고 최경선과 같이 나주에 머물고 있었다. 11월 전봉준의 공주 패전 후 나주성을 포위하고 공격을 시도했으나 태인 전투를 최후로 대세가 재기불능에 이르자 11월 27일 광주에 입성했다가 12월 1일 몸을 피하여 고창군 부안면 안현리 이모씨의 재실에 있다가 12월 11일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되어 전주감영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비장한 일화 한토막이 있다.
죽음을 같이 하기로 맹세한 전봉준, 김개남이 이미 관군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손화중은 실의한 나머지 재실지기 이봉우에게 말했다.
"네가 나를 고발하여 후상을 받아라. 그 동안 너에게 진 은혜를 갚겠다."
그리하여 이봉우는 관에 고발하여 후상을 받고 증산(황해도)군수로 제수되었다.
손화중은 서울로 압송되어 1895년 3월 29일 전봉준, 김덕명, 최경선, 성두환과 함께 최후를 마치니 향년 35세였다. 손화중은 여러 혈족들이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희생자가 많았다. 손익중, 손여옥이 12월 25일 정읍에서 관군에 처형당하였고 손순경, 손무경, 유용수가 또한 희생되었다.
이밖에 1895년 1월 16일 체포령이 내린 사람 가운데 손덕로, 손춘익, 손치경, 손치수가 있었다.
그리고 부하인 기포장 최서중과 그 마부인 고창 우복록은 광주에서 곤장수, 정정칠은 12월 4일 손덕수와 함께 장성 북하면 용두동에서 김락주, 서상옥 등 민병들에게 붙잡혀 일본군에 의하여 장성 장터에서 효수되었다.
송구봉 (1534∼1599) = 제갈공명에 비견
조선 시대의 학자. 자 운장. 이름은 익필. 시호 문경. 구봉은 호. 본관 여산. 서출이라 벼슬은 못했으나 이이·성혼 등과 학문을 논하여 성리학과 예학에 통달했다.
문장에도 뛰어나'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으며 시와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고양에서 후진 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김장생·김집을 비롯한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다. 지평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구봉집』이 있다.
일찍이 고청 서기가 "그대들이 제갈공명을 알고자 한다면 구봉 선생을 보면 족할 것이다. 나는 제갈공명이 구봉 선생 같은 분이라고 생각한다." 라고 말한 바 있다.
또 송구봉은 이순신이 병법을 공부하고 있을 때 직접 찾아가 다음과 같은 시구를 잘 기억하라고 일러 주기도 하였다.
월흑안비고 (月黑雁飛高) 선우야둔도 (禪于夜遁逃)
그리고 한참 지난 후에 다시 찾아와 또 하나의 의미심장한 시를 던져주었다.
독룡잠처수갱청(毒龍潛處水更靑)
후에 이 시들은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왜구를 격파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 관련말씀
* 크고 작은 일을 물론하고 신도로써 다스리면 현묘불측한 공을 거두나니 이것이 곧 무위이화니라. 이제 신도를 조화하여 모든 일을 도의에 맞추어 무궁한 선경의 운수를 정하리니 제 도수에 돌아닿는 대로 새 기틀이 열리리라.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의 책임을 '최퐁헌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이 맡았으면 여덟 달만에 끌렀으리라' 하니 이는 선도와 불도의 법술이 서로 다름을 이름이라
송시열 (1607∼1689)
학자. 노론의 영수. 자 영보, 호 우암. 본관은 은진. 김장생.김집 문하의 문인이다.
일생을 주자학 연구에 몰두한 거유로 이이의 학통을 계승하여 기호학파의 주류를 이루었다. 여러 관직을 거친 후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효종과 함께 군사력의 강화와 군포의 증액 등으로 북벌 계획을 추진했으나 이듬해 효종의 갑작스런 병사로 북벌계획은 중지되었다. 이 때 효종의 장례로 자의대비의 복상문제가 제기되자, 삼년설을 주장하는 남인에 대하여 기년설을 건의하여 이를 채택케 함으로써 남인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동시대에 남인의 지도자였던 허미수와 효종사후 예론으로 첨예한 대립을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친분관계를 유지하였다. 우암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우암은 약처방을 허미수에게 부탁하였는데 허미수는 비상 세푼을 달여 마시라고 하였고, 우암은 이를 의심치 않고 달여 마시어 병에서 회복되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만년에 정계에서 은퇴하고 청주 속리산 화양동에 은거하였다. 우암의 사후 이 화양동에 그의 유언에 의하여 만동묘가 세워졌다.
저서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 : 여기서의 송자는 우암을 말함),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관련 말씀
* 상제님께서 차마 보지 못하시고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 눕히시고 배를 만져 내리시며 허공을 향해 큰 소리로 "미수 시켜 우암을 부르라." 외치신 뒤에 침을 흘려서 죽은 아이의 입에 넣으시니 죽은 아이가 문득 항문으로 추깃물을 쏟으며 큰 소리를 치고 홀연히 살아나거늘 미음을 쑤여 먹이시고 걸어서 돌아가게 하니라.
* 임인년 겨울에 형렬이 상제님을 모시는데 마침 큰 눈이 오거늘 형렬이 아뢰기를 "전설에 '송우암이 거처하는 지붕에는 운이 쌓이지 않고 녹았다'하니 진실로 천지의 지령지기를 타고난 사람인가 합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그러하니 이제나 있는 곳을 살펴보라." 하시므로 형렬이 밖에 나가 보니 날이 차고 눈이 많이 내려 쌓였으되 오직 그 지붕에는 눈 한 점 없고 맑은 기운이 구름을 뚫고 하늘에 뻗쳐 푸른 상공이 보이더라. 이 뒤로 형렬이 앙상 유의하여 살피니 언제든지 상제님께서 머무시는 곳에는 반드시 맑은 기운이 푸른 하늘에 통하여 구름이 가리지 못하며 비록 큰 비가 올 때에도 그러하더라. (9편 5장)
순 (?∼?)
유우씨 또는 우순이라고도 칭한다. 성은 요. 이름은 중화.
재위 48년(서기전 2255∼2208). 고수의 아들. 맹자는 순이 동이인이라 하였는데, 이는 현대의 중국 사학자들의 공인된 정설이다. 요임금 재위 70년에 발탁되어 섭정에 오르고, 요가 죽자 제위에 올랐다. 순임금은 포판에 도읍하고, 일찍이 요임금도 등용하여 쓰지 못했던 팔원팔개의 유덕한 현자들과 설, 고요, 후직, 익, 백 등 우수한 인물들을 새로 임명하여 정사를 돕게 하고 정치제도를 완비함으로써 요의 무위의 정치에다 문물제도를 더하고 형벌제도를 정비하였다. 또 순은 요의 신하인 공공, 환두, 곤 등을 귀양보내거나 죽였다. 그는 만년에 남방을 순회하다가 창오에서 병을 얻어 죽으니 구의산 아래에 묻혔다. 일설에는 만년에 순은 9년 홍수를 다스려 인망을 얻고 실권을 장악한 우의 핍박을 받아 제위에서 밀려나고 창오로 쫓겨나 비명횡사하였다고 전한다.
■ 관련 말씀
* 세상에서 우순을 대효라 일러 오나 순은 천하의 대불효니라. 그 부친 고수의 악명이 반만년 동안이나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요. 세상에서 요순지치를 일러 왔으나. 9년 홍수는 곧 창생의 눈물로 일어났나니….
신농 (서기전 3218∼3070)
성은 강, 이름은 궤 또는 석년. 제위 140년. 화덕에 의해 임금이 되어 염제라 부르고, 처음으로 농사법을 가르쳤기 때문에 신농씨라고 하였다. 신농씨의 아버지 소전이 배달의 8세 안부련 환웅천황의 명을 받고 강수에서 군병을 감독하였는데, 신농씨는 이 강수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성을 강씨로 하였다. 그는 후에 염산으로 이주하여 그 곳에서 기반을 닦고 크게 흥하였다. 그리하여 복희씨 왕조가 끝나자, 그 뒤를 이어 임금이되었다. 처음에 진에 도읍하고 후에 곡부로 천도하였다. 염제 신농씨의 나라는 8대 마지막 임금 염제 유망에 이르기까지 520년 동안 지속되었다. 신농씨는 처음으로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준 '경농의 시조'이며, 모든 풀을 맛보아 처음으로 의약을 발명한 '의학의 아버지'이다.
또한 시장을 창설하여 상업을 발명하였고, 삼으로 천을 짜 의복을 제작하였으며, 악기를 만들고 도자기를 만들었다. 기록에 의하면, 신농씨는 만년에 남방을 순시하면서 한편으로는 민정을 살피고 일면으로는 풀을 맛보아 약을 채집하면서 백성의 병을 치료하던 중에 극독의 단장초를 잘못 맛보아 독에 중독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온다. 현재의 중국 산서성 성양산리에 신농의 소산이 있다. 또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의 신부감에 전설적인 신농의 약솥이 있다. 그의 릉은 지금의 호남성 영현에 있으며, 중국 역대의 왕조에서 특사를 파견하여 염제 릉에 제사를 지냈다.
■ 관련 말씀
* 신농이 농사짓는 법과 의술로 천하만세를 윤택하게 하였고 태공이 병법과 정치로써 천하만세에 은혜를 주었나니 이제 하늘과 땅이 성공하는 가을철을 맞아 천지간의 모든 신들이 그들을 높이 받들어 모시느니라
* 신농이 온갖 풀맛을 보아 의약을 짓고 농사짓는 법과 백곡을 정함으로써 천하만세에 그 은택을 입혔으며 강태공이 제잔금폭의 묘략과 부국강병의 술법을 전수함으로부터 천하가 그 덕으로 대업을 이루어 왔느니라. 그러나 세상 사람들이 신농의 업적과 태공의 공으로 살아가면서도 그 은덕을 보답지 않고 다만 디딜방아에 '경신년 모월 모일' 이라 써 붙일 뿐이니 어찌 도의에 합당하리요. 이제 해원시대를 당하여 모든 신명이 신농과 태공의 은혜에 보답하게 되리라.
신릉군 (?∼서기전 244)
중국 전국 시대 말기 위나라의 정치가. 문하에 식객 3,000명을 두었으며 제나라의 맹상군·초나라의 춘신군·조나라의 평원군과 함께 전국 말기의 사군으로 알려져 있으며 왕은 그의 현능함을 두려워하여 국정을 맏기지 않았으나, 당시 진나라는 국세가 왕성하여 서기전 257년에 조나라를 공격, 조나라의 도읍 한단을 포위하였다. 신릉군의 누이는 조나라 왕의 아우인 평원군에게 출가하였으므로, 그는 그 우의로 조나라를 구하려고, 식객 후영의 꾀로 왕의 허락 없이 군을 움직여, 진군을 치고 한단을 구하였다. 신릉군은 위왕이 노하리라는 것을 알고, 조나라에 10년을 머물렀으며,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급히 돌아가 고국을 구하였다. 훗날 진나라의 반간으로 위왕에게 의심을 사게 되자 병을 청탁하고 들어앉아 식객과 더불어 술을 마시는 생활 속에서 병사하였다. 진나라는 그의 죽음을 알고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 위나라는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
■ 관련 말씀
* 의를 알고 충을 아는 그대가 임금을 섬기더니일본놈의 마수에 사해백성이 숨을 곳이 없구나.
전국시대 사군자인 맹상군(제) 평원군(조) 춘신군(초) 신릉군(위)의 명성보다도 훨씬 뛰어난 그대가 조국을 보국함으로민족의 시대정기가 새로워지리라.
소전(신농씨 부친)
에서 갈라져나간 별파에 공손씨(공손씨)가 있었는데, 헌원은 그의 후손이다.일설에는 소전의 처남인 욱(욱)의 10대 자손이 헌원이라고 한다. 염제유망이 망한 후에 중국의 천자가 되려고 탁록(탁록: 하북성 북경 서북의 탁록현)에 도읍하였다. 염제 신농씨 나라의 8대 마지막 임금인 유망이 배달의 치우천황에 의해 패망당하자, 유망의 제후로 있던 헌원이 대신 천자가 되려는 야망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대항해 왔다. 그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저 유명한 탁록 대전투가 벌어져 10년 동안 73회의 공방전이 벌어졌는데 마침내 이 전투에서 치우천황에게 사로잡혀 신하가 되었다. 그 뒤에 황제는 배달의 청구(청구)에 와서 치우천황 대의 국사(국사)인 자부(자부)선사로부터 신교의 대도의 가르침을 받고 [삼황
내문(삼황내문)]을 전수받아 갔다. 그리하여 황로학(황로학)이라 불리는 도교의 시조가 되었다.
위징 (580∼643)
당나라 초기의 정치가. 학자. 24장의 한 사람. 일찍이 아버지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되었으나 책 읽기를 매우 즐겼다. 태종 때 간의대부, 검교시주의 벼슬을 지냈고 북조와 수나라의 역사를 편집하는 책임을 맡아 정죽공이 되었다. 그는 비록 얼굴이 못생겼지만 담이 크고 결단성 있게 황제에게 간언하였기 때문에 신뢰가 두터웠다. 세상 인심에 아부하지 않고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한 말로 임금에게 상소하기 무려 2백회가 넘었다. 위징이 죽었을 때 황제는 "나는 하나의 거울을 잃었다"고 말하며 탄식하였다 한다.
■ 관련 말씀
* 위징은 밤이면 상제를 섬기고, 낮이면 당태종을 도왔다 하나 나는 사람의 마음을 빼었다 찔렀다 하노라.
유령 (221∼300)
중국 위나라의 시인. 자 백륜. 용모는 아주 못생겼으나 성격은 방자했다. 항상 자그마한 우주로서 만물을 다스릴 것을 마음 먹었다. 죽림칠현 중의 한 사람으로 원적, 혜강 등과 어울려 자연을 벗삼아 고담준론을 즐기며 술을 마셨다. 항상 녹거에 타고 술 한병을 휴대하였으며 또 호미를 지닌 하인을 동반했다. 그는 하인에게 "어디라도 내가 죽는 곳에 매장해도 상관없다." 고 하였다. 그런데 그의 부인이 울면서 간하자 그는 "좋아 하늘에 맹세하고 술을 끊어야지" 라고 답하였다. 이윽고 그는 신전에 꿇어 앉아 축원하였다. "하늘이 유령을 낳음에 술로써 이름을 삼았도다. 한 잔 두 잔 마시며 다섯 말에 이르러야 술이 깬다. 주녀자의 말을 어찌 듣지 않을 수 있으랴." 그의 『주덕송』은 널리 사람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술의 찬미가이다.
■ 관련 말씀
* 詩中李白酒中伶인데 一去靑山盡寂蓼라
又去江南楊進士니 자고芳草雨蕭蕭구나
시로 말한면 이태백이요 술 잘 마시기로는 유령이 뛰어
난데 한번 죽어 청산에 들어가니 모두 소식없네.
또 강남의 양진사도 죽어 저승 사람 되니 자고새는 슬
피 울고 풀잎에는 고적한 비바람만 뿌리는구나
유방 (서기전 256 또는 247∼195)
중국 전한의 고조, 재위 기간은 서기전 202∼195년. 자는 계. 패현 출신 서기 209년 진승이 진을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 그도 이에 참여하여 이어 소하·조참·번쾌 등의 도움을 얻어 패를 습격, 패공이 되었다. 그 후 다시 장량·진평·한신의 도움으로 마침내 진나라를 대신하여 천자가 되고 국호를 한이라고 하였다. 그는 진나라의 제도를 이어 받아 중앙집권제도를 실시, 동성의 왕에게 영토를 분봉하고 한신·팽월·영포 등 이성의 제후를 제거하였으며, 육국의 귀족과 지방의 호족을 중앙으로 옮겨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였으며. 유랑민에 대한 배려와 보예해방·부세경감 책을 실시하였다. 소하에게 명하여 『한률』9장을 제정하게 하였으며, 한신에게는 군법을, 장창에게는 장정을, 숙손통에게는 예의를 제정하게 하였다. 또 소하를 국상에 임명하여 황로사상에 의한 무위이치의 통치정책을 채택하고, 검박하게 정사를 처리할 것, 큰 일을 하는 데에는 구례를 따를 것, 헌령은 율령에 따라 변경하지 못하게 할 것 등을 제창하였다. 한편 흉노에 대해서는 화친 정책을 실시하였다.
■ 관련 말씀
* 한고조는 소하의 덕으로 천하를 얻었으나 너희들은 베풀 것이 없으니 오직 언덕을 잘 가지라.
* 너희는 진정한 통정을 한번 해 보라. 한신이 한고조가 자기 밥을 밀어주어 먹이고 자기옷을 벗어 입혀준 은혜에 감격하여 괴철의 말을 듣지 않았나니 한신이 한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고조가 한신을 저버렸느니라.
유정 (1544∼1610) = 사명대사
조선의 고승. 속성은 임. 자 이환, 호 송운, 사명. 13세에 황여헌에게서 사사하다가 황악산 직지사에 들어가 신묵화상에게 선을 받아 승려가 되었고, 거기에서 불교의 오의를 깨달았다. 1561년 선과에 급제하고 박사암·허하곡·임백호 등과 교제하였다. 1575년 선종의 주지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에 들어가 청허대사에게서 수업받고 크게 각성하였다. 금강산 보덕사에서 3년을 지내고, 다시 팔공산·청량산·태백산 등을 유람했으며, 43세 때 옥천산 상동암에서 하룻밤 소낙비에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문도들을 해산시킨 다음 오랫동안 참선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순안에 가서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1604년 국서를 휴대하고 일본에 가서 토쿠가와이에야스를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로 잡혀 갔던 3,500명을 데리고 이듬해 돌아왔다. 서산이 입적한 이듬해로 묘향산에 들어가서 스승의 영탑을 예하고 치악산에 들어갔다. 선조의 부보를 듣고 서울로 달려와 배곡한 후 병을 얻어 가야산에 들어가 조치하다가 사망했다.
안록산 (705∼757)
중국 당나라의 장군. 돌궐족 출신. 30대에 유주절도사 장수규를 섬겨 무관으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윽고 영주에 본거를 두는 평로절도사로 발탁되었다. 해, 거란, 실위, 말갈 등 동북 여거 민족의 진압과 위 무에 노력하여 실적을 올림과 동시에, 중앙에서 파견된 사자를 뇌물로 농락하는 일에 능하였기 때문에, 변경의 방비에 번장이 중용되는 시류를 타고, 급속히 현종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이렇게 하여 744년 범양절도사, 751년 하동절도사를 겸임함으로써, 당의 국방경비군 전체의 3분의 1에 가까운 병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는 반대파의 재상 양국충과 맞서 755년 범양(지금의 북경)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낙양에 들어가 대연황제라 칭했다. 이것이 '안사의 난'의 시초로, 그의 군사가 창안까지 점령했지만 둘째 아들 경서의 손에 죽고 이 난은 안록산의 부장 사사명, 사조의 부자에 옮겨져 당나라 쇠망의 원인이 되었다.
■ 관련 말씀
* 형렬이 다시 "대전에 끌려와 있던 죄수는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그와 같이 엄하게 다스리는 것입니까?" 하고 여쭈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죄인은 안록산이니라." 하거늘 형렬이 여쭈기를 "안록산이 배은망덕한 죄를 지은 것이 이미 천여 년 전의 일인데 지금까지도 미결수로 남아 있다는 말씀이옵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나라를 그르친 큰 죄인은 그 죄가 워낙 크기 때문에 백 년에 한번씩도 신문하게 되느니라." 하시고…
안중근 (1879∼1910)
조선의 의사. 황해도 해주 출생.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고, 14세 때 신천에 와 있던 프랑스 신부 밑에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1907년 7월 강원도에 들어가 의병을 거쳐, 노령 블라디보스톡에 망명했다. 1909년 이범윤, 최재형과 함께 의용군을 조직하고 좌익장군이 되어 두만강을 건너 경흥에 들어와 일본군 50명을 사살, 회령까지 진격하며 적과 교전했다. 이 해 10월에 우리 나라 침략의 주도적 인물 이토오 히로부미와 러시아 장상 코코프체프와 만주 하르빈에서 만나기로 되었다. 안중근은 이 기회에 그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10월 26일 하르빈 역에 닿아 일본 사람을 가장하고 경계망을 뚫은 후 10보 이내의 거리까지 접근하여 권총으로 이토오 히로부미을 쏘아 죽인 후 하르빈 총영사 카와카미,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만철이사 타나카를 중상케 했다. 안중근은 거사의 성공을 기뻐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로 태연히 포박을 당하였다. 10년 여순감옥에 수감되어 끝까지 굽히지 않고 절개를 지키다가 다음 해 3월 26일 상오 10시에 사형을 당하였다.
양사언 (1517∼1584)
조선 시대의 문신. 서예가. 호 봉래. 본관 청주. 시와 글씨에 모두 능했는데 특히 초서와 큰 글자를 잘 써서 안평대군, 김구, 한호와 함께 조선전기의 4대 서예가로 불린다. 저서에 『봉래시집』이 있다.
■ 관련 말씀
* 또 남원 양봉래의 자만시를 외워 주시니 이러하니라.
詩中李白酒中伶인데 一去靑山盡寂蓼라
又去江南楊進士니 자고芳草雨蕭蕭구나
시로 말한면 이태백이요 술 잘 마시기로는 유령이 뛰어
난데 한번 죽어 청산에 들어가니 모두 소식없네.
또 강남의 양진사도 죽어 저승 사람 되니 자고새는 슬
피 울고 풀잎에는 고적한 비바람만 뿌리는구나
여동빈 (640∼?)
이름은 암, 자는 동빈. 당의 정관(당태종 재위시의 연호) 14년 하중의 영락현에서 출생. 노산에서 화룡진인으로부터 천둔검법을 전수받고 64세에 종리권운방으로부터 10회의 시범을 거친 후 드디어 진선이 되었다고 한다. 여동빈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당팔선에 포함되었는데, 당팔선은 여동빈을 비롯하여 종리권, 장과, 감채화, 한상자, 조국구, 이원중, 하선고 등이다.
■ 관련 말씀
* 세상에 '짚으로 만든 계룡'이라는 말이 있나니 그대로 말해 주는 것을 사람들이 모르느니라. 또 나의 일은 여동빈 (여동빈)의 일과 같으니 동빈이 사람들 중에서 인연 있는 자를 가려 장생술(장생술) 을 전하려고 빗 장사로 변장하여 거리에서 외치기를 " 이 빗으로 빗으면 흰머리가 다시 검어지고, 굽은 허리가 펴지고, 쇠한 기력이왕성하여지고, 늙은 얼굴이 다시 젊어져 불로장생하노니 이 빗 값이 천 냥이오." 하며 오랫동안 외쳐도 듣는 사람들이 모두 '미쳤다' 고 허망하게 생각하여 믿는 자가 없더라. 그 중에 한 노파가 그 빗을 사서 시험하니 과연 흰 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가 나는지라. 그제야 모든 사람이 다투어 사려고 모여드니 여동빈이 드디어 승천하였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Jesus Chrrist) (서기전4?∼서기 29?)
예수는 그리이스어로 "구세주"란 뜻으로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뜻이다. 예수는 기독교의 창시자로 기독교인들이 예배하는 구세주다. 예수의 생애에 관한 일반의 지식은 신약성서 중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4복음서 중 특히 처음의 3서 즉 공관복음서에서 유래한다. 예수의 생몰년을 명확하게 알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학자는 대개 그 탄생을 서기전 4년으로 보고 죽은 해는 서기 29년으로 본다. 따라서 33년 살아있었던 셈이다. 전승(전승)에 의하면 그의 출생지는 베들레헴이며 유년기는 나사렛에서 지내고 그의 아버지는 목수 일을 하였다. 아버지 요셉이 사망하였을 때 예수는 아직 어렸고 어머니 마리아는 반대로 장수(장수)하였다. 신약 성서의 기록에 따른다면 예수는 몇 명의 동생과 누이가 있었다. 예수는 나이 30에 또는 그 이상이었을 때 전도를 시작했다. 예수 시대의 팔레스티나는 알렉산더 대왕의 제패이래 마카베야시대에 일시 독립의 자유를 얻었지만 얼마 후에 외국의 지배를 받고 헤롯왕의 전제하에 들어간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땅은 로마 총독의 관할을 받았다. 게다가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지도적 위치에 있던 바리새파의 학자와 사두개파는 서로 대립하고 무력한 민중에게 완전히 유리하여 그들의 곤경에 대해서 아무런 배려가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은 세계의 구제자 메시아를 대망하게 된다.
이 때에 "광야에 외치는 소리"의 주인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신의 심판의 날이 가까왔음을 예고하고 민중에게 회개의 세례를 인도한다. 예수의 공(공)생활은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받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세례를 받은수 잠시 유다의 황야에 은서(은서)하여 악마의 여러 유혹을 극복하고 갈릴리 가버나움 등의 여러 거리로 간다.그의 주변에 소수위 제자가 모이지만 그들은 거의 다 일하는 계급에 속했다. 그들은 직업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다. 이것이 열 두 제자다(마태 10:2).
예수는 따랐다. 예수는 3년간 전도에 힘쓰고 민중에 설교를 한다. 산상(산상)의 수훈(수훈)은 그 유명한 예의 하나다. 하늘나라의 교의(교의)를 간단한 비유로 설명하면서 제자들을 교육하는 한편 또 다가오는 현세의 황손(환손)과 하늘나라의 여명(여명)을 예고한다. 그러나 예수가 말한 하늘나라(천국)의 뜻은 다의적(다의적)으로 해석되어 논쟁을 일으키고 오해를 산다. 당시의 종교 당국자들은 예수가 일으킨 운동에 위협을 느껴(바리새·사두개 두 파는 예수를 여러번 모함하고 비난하였다) 신에 대한 모독과 소요 선동을 이유로 고발을 획책하고 본디오 빌라도 앞에 예수를 끌어내어 총독으로 하여금 이 "선동자"를 극형에 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복음서는 예수의 말로를 간결 장엄하게 기록하고 있다.
고루에서의 최후의 만찬, 재판, 정죄, 태형, 가시면류관,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난의 길 좌우 양쪽의 두 도둑 사이에서의 책형, 죽기 전의마지막 고통, 죽음, 이러한 과정을 밟는다. 십자가 밑에 선 예수의 제자와 여인들은 이것으로 만사가 끝나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유월제의 이른 아침, 예수를 묻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예수가 죽음의 사슬을 끊고 무덤에서 나와 영광의 부활을 한 것을 확신한 것으로 전한다. 그리스도는 여러 번 제자들 앞에 차례로 나타나고 40일 후에 승천한다. 기독교의 교리에 의하면 하늘의 아버지 하느님니 정한 시기에 생자와 사자를 심판하기 위하여(최후의 심판) 또 세계와 재생의 인류를 지배하기 위하여 재림하기로 되어 있다.
■ 관련 말씀
* 하루는 성도들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오한 (?∼?)
후한 광부제 때의 28장 중의 한사람. 광무제는 영평 3년에 한조 중흥의 큰 사업을 보좌한 공신 28장군의 초상을 하늘의 28수에 맞추어 배치하였다.
■ 관련 말씀
* 오한을 부른 뒤에 조선지면이라 읽어서 28장과 24장을 다 맡기기까지 종이 조각을 집으니 그 종이 수효가 맞는지라.
요 (?∼?)
성은 이기, 이름은 방훈이다. 재위 100년(서기전 2357∼2258). 제곡고신의 아들이며 황제헌원의 5대손이다. 요는 처음에 도에 봉해졌고, 다시 당에 봉함을 받았다. 그래서 그를 도당씨 또는 당요하고 부른다. 고신씨를 이어 제위에 오른 지임금 당시에 천하가 대 혼란에 빠지자 당후인 요는 복종하지 않거나 반한을 일으킨 제후들을 차례로 정벌하였다. 수많은 정벌전쟁을 통해 실권을 장악한 요는 자신의 형인 지임금을 몰아내고 선위 형식을 빌려 제위에 올랐다. 요임금은 평양에 도읍하고, 덕있는 유능한 인물들을 모아 무위의 정치를 하였다. 그리하여 후세에 요순시대의 태형치세를 이룬 이상적인 성군으로서 그의 성덕을 높이 칭송하였다. 요임금 말기에 9년홍수가 일어나고, 또한 만년에 이르러 정치에 싫증이 나고 덕이 쇠한 요는 순을 발탁하여 두 딸을 시집보내고, 3년간 시험한 뒤에 국사를 섭정하게 하고 자신은 통치의 일선에서 물러났다. 일설에 만년에 덕이 쇠한 요는 순에 의해 갇히고 평양으로 쫓겨나 제위를 탈취당했다고 한다.
■ 관련 말씀
* 원한의 역사의 처음인 당요의 아들 단주가 품은 깊은 원을 끄르면 그로부터 수천년 동안 쌓여 내려온 모든 원한의 마디의 고가 풀릴지라. 대저 단주를 불초하다 하여 천하를 맡기지 않고 요가 그의 두 딸과 천하를 순에게 전하여 주니 단주의 깊은 원을 그 누가 만분의 하나라도 풀어주리요. 마침내 순이 창오에서 죽고 두 왕비는 소상강에 빠져 죽었느니라. 그러므로 단주 해원을 첫머리로 하여 이제 해원의 노정으로 나가게 하노라.
* 상제님께서 이어 말씀하시기를 "요순시대에 단주가 세상을 다스렸다면 시골 구석구석까지 바른 다스림과 교화가 두루 미치고, 오랑캐의 이름도 없어지며 만리가 지척같이 되어 천하가 한집안이 되었을 것이니 요와 순의 도는 좁은 것이니라. 단주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깊이 한을 품어 순이 창오에서 빠져 죽고 두 왕비가 소상강에 빠져 죽는 참상이 일어났나니 이로부터 천하의 크고 작은 모든 쌓여서 마침내 큰 화를 빚어 내어 세상을 진멸할 지경에 이르렀느니라. 그러므로 먼저 단주의 깊은 원한을 풀어 주어야 그 뒤로 쌓여 내려온 만고의 원한이 다 매듭 풀리듯 하느니라. 다가오는 선경세계에서는 단주가 세운을 통할하게 하느니라." 하시니라.
* 그러므로 단주 해원을 첫머리로 하고 ..천하를 건지려는 큰 뜻을 품었으나 시세가 이롭지 못하여 구족이 멸하는 참화를 당해 의탁할 곳이 없이 환을 머금고 천고에 떠도는 모든 만고역신을 그 다음으로 하여 각기 원통함과 억울함을 풀고, 혹은 행위를 바로 살펴 곡해를 바로잡으며, 혹은 의탁할 곳을 붙여 영원히 안정을 얻게 함이 곧 선경을 건설하는 첫 걸음이니라
우 (?∼?)
하 왕조의 시조. 성은 사, 이름은 문명. 재위 8년(서기전 2205∼2198). 곤의 아들이며 전욱의 손자이다(혹은 전욱의 6대손이라고도 한다). 부친 곤은 요임금 당시에 9년홍수의 치수사업을 맡았으나 실패하여 순에 의해 우산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순의 명령으로 우가 계속 치수를 맡았다. 우는 13년 동안 밖에 있으면서 세 번 자신의 집 앞을 지났으나 들어가지 않은 일심의 공덕을 들여 마침내 치수에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민심을 크게 얻고 실권을 장악하여 순을 이어 왕위에 오르고 17대 440년간 지속된 하왕조(서기전 2205∼1766)를 열었다. 일찍이 우는 9년 홍수의 치수를 위해 열린 도산회의에 참가하여 당시에 고조선의 단군성조께서 파견한 부루 태자로부터 홍수를 다스리는 '오행치수법'을 전수받아 마침내 치수에 성공하게 되었다. 우는 죽을 때에도 도산에서의 큰 은덕을 잊지 못해 자신을 도산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여 이곳에 묻혔다.
■ 관련 말씀
* 우가 구년홍수를 다스릴 때에 삼 년 동안 자기 집 문앞을 지나면서도 들르지 않았음은 내 한 몸의 괴로움으로 천하의 백성을 편안케 하고자 함이었느니라.
이등박문 (1841∼1909)
일본의 명치시대의 정치가. 요시다 쇼오인의 문하에 들어가 존왕양이운동에 참가했으나 이노우에와 같이 영국 유학 중 양이론을 포기하였다. 1881년 정변으로 오오쿠마를 추방한 후 정부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 자유민권운동을 탄압, 절대주의 정부를 확립, 제국헌법의 작성에 전력을 다했다. 1885년 내각 제도를 창설하고 초대 내각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 해 우리 날 갑신정변후의 대청 교섭 때문에 전권대사로 청나라에 들어가 천진조약을 체결했다.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대하여 조선에 있어서의 일본 세력 확보를 위해 러시아와의 협상을 주장하였다. 러일전쟁 후 주한 특파대사로서 1905년에 을사보호조약을 강제로 성립시키고 초대 조선통감에 취임하여 강점의 기초를 마련했으며 1909년 사임하고 다시 추밀원 의장이 되었다. 그 해 10월 만주 시찰과 러시아와의 협상차 만주 하르빈역에 도착하여 안중근 의사의 권총에 총살당했다.
이마두 : 마테오 리치 (Mtteo Ricci) (1552∼1610)
마테오 리치 신부가 태어날 당시의 유럽은 종교개혁의 결과로 북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등 튜턴계 북유럽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영향하에 들어가고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와 라틴계 남유럽은 카톨릭 교회로남게 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에서는 광범위한 혁신 운동이 일어났다.
대표적인 혁신운동의 하나가 예수회의 설립이다. 예수회의 목적은 카톨릭 신안의 방위를 위해서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을 위해 예수회가 벌인 사업은 청소년 교육 신앙심의 확립 선교활동 군주제후에 대한 봉사를 통한 국제 정치상의 외교활동 등이었다.
예수회의 활동은 성공적이어서 폴란드의 대부분 카톨릭 교도들을 회복하였고 바바리아, 벨기에, 아일랜드 등의 카톨릭 세력을 유지하고 남아메리카, 중국, 일본 등지에 선교하였다. 또한 15세기에는 지리상 발견의 물결에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고, 특히 15세기 중기를 전후한 회교도들의 진출 및 근동지방에 있어서의 오스만 터키족의 세력과 종극적인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은 이미 진행시켜오던 서방측의 전도 사업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마테오 리치 신부는 1552년 10월 6일 이탈리아 안코네(Ancone)주 마체라타(Macerata)에서 9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국명은 이마두이고 자는 서태이다. 마테오(Matteo)는 그의 세례명이다. 부친 요한은 마체라타시의 시장을 지냈고, 어머니 요안나는 신덕이 두텁고 마음이 착한 현덕한 부인이었다. 리치의 어머니는 13남매를 혼자 다 양육할 수 없어 장남인 리치는 조모에게 맡겨 양육하게 하였다. 리치 신부는 신체가 건강하고 곱슬머리에 벽안의 미소년이었다. 성격이 활달하고 총명하였으며 특히 기억력이 우수하여 책을 한 번 읽으면 즉시 암기할 정도였다. 리치는 가정교사 니콜로 벤치베니 (Nicolo Bencivengni)에게 라틴어를 배웠는데 리치가 7세 되던 해 그 가정교사는 예수회에 입회하였다. 리치는 평소에 존경하던 스승이 예수회에 입회하여 충격이 컸다. 리치는 신부가 되어 중국에서 선교할 때까지도 그 가정교사를 잊지 못하여, 고스타 신부에게 보낸 서신 중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니콜로 벤치베니 선생님은 내가 명오가 열리기 전 나를 자애로 교육시키셨습니다. 그 분의 지도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내가 될 수 있었습니다. "
벤치베니와 헤어진 2년 후, 예수회에서는 마체라타 시에 학교를 설립하게 되었다. 리치의 어머니는 리치를 예수회에서 경영하는 그 학교에 입학시켰다. 리치는 이 학교에서 라틴어와 희랍어를 배우게 되었고 그의 뛰어난 어학의 재능은 이 때부터 드러났다. 그의 아버지는 후에 주지사까지 지냈으며, 아들을 명문대학에 보내 위대한 정치가로 만들겠다는 것이 그의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래서 마테오가 16세가 되자 중학교를 졸업한 뒤 로마에 있는 명문대학 법과에 진학시켰다.
1570년, 고향 마체라타를 떠나 모라에 와서 공부한 지 3년째 되던 해. 그는 기쁘게도 로마대학의 문을 들어서게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그의 평생을 몸담을 예수회에 입회하여 성안드레아 수사관으로 입주했다. 그의 필생의 꿈이 영글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곳에서 그는 학문을 잠시 미루어두고 헌신 생활의 기초인 간절한 기도생활을 하며, 순명과 겸비에 대하여 배우는 수사가 되었다. 이태리는 카콜릭의 본고장이며, 그의 집안 또한 천주교 집안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루이대한 정치가로 만들겠다는 그의 아버지 요한 리치의 간절한 염원도 저버리고, 그는 19세의 청소년기에 자기의 전공학과를 그만두고 그의 아버지에게 아무런 한마디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예수회에 가입하였다. 나중에 그 소식을 편지로 전해 받은 아버지의 노여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를 잘 설득하여 결국 허락했다고 한다.
고향을 떠나 인도를 전도 여행에 나서기 전에. 그는 '이 길이 내 생애의 마지막 길이다. 이제 땅에서는 부모도 형제도 영원히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예수회 신부들은 종교개혁의 물결을 타고 중국이나 인도쪽으로 전도 여행을 떠나는 것이 천주님의 가장 위대한 은혜라고 여겼다. 그러한 소명의식을 가지고 여행을 떠나는데, 20∼30명이 떠나면 5명도 살지 못하고 대부분 항해하는 과정에서 과로에 시달리며 병에 걸려 죽었다. 고국을 떠나 26세에 인도의 수도인 고야에 와서 신부수업을 더 받기 위해 바오로 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29세에 사제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30세(1582년)에 중국 마카오에 와서 중국어를 공부했다. 이 때 리치 신부는 불과 3개월 동안 중국어를 배웠을 뿐인데도 3년 동안 배운 동료 루지에리 신부를 능가할 정도의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한번 책을 읽으면 그냥 줄줄 외워버리는 어학의 귀재였다. 이곳 마카오에서 두 신부는 머리를 삭발하고 회색승복을 착용하고 전도생활에 들어갔다.
리치 신부가 중국에 와서 복음을 권할 때의 생애는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그는 마카오에서 남창에서 북경으로 와서 (1601∼1610) 중국 예수회 관구장에 취임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애 그의 숙원대로 북경 자경문에 앉아있는 황제를 만나 전도의 길을 뚫게 된다. 이리하여 리치 신부는 서양의 학술·천문학·수학 등 당시에 싹트고 있던 근대문명을 중국에 소개하였다. 또한 리치 신부는 중국에 살며 중국의 문화를 공부하는 중에 유교, 불교, 도가, 양자, 묵자 등을 주욱 훑어 내리면서 자기가 모시고 있는 천주와 유교의 하늘과 상제님 신앙이 맥이 통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래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유교의 관습은 어떤 종교적인 행위라기 보다 조상을 공경하는 예법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리치 신부는 유불선을 공부하여 동양문화에 대한 안목으로 스스로 자기 신앙관에 결단을 내렸다. 그래서 리치 신부는 조상을 숭배하는 제사문화도 인정하게 된다. 리치 신부가 마침내 천상에서 상제님을 뵐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자기의 신앙의 성숙과정에서 동양문화에 상제님 신앙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국에 와서 30년 동안 일하는 가운데 동서문화의 다양성에 눈을 뜬 그는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구도자가 된다. 그래서 동양을 무대로 한 번 『천주교 중심의 천국』을 건설해 보겠다고 하는, 기독교 역사상 그 누구도 감히 품어보지 못한 실천적 대이상을 품게 된다. 리치 신부는 이 과정에서 실로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중국 문화를 공부하고 나서 성서를 라틴어로 번역하고, 『천주실의』,『교우론』등 많은 저서를 펴냈으며, 세게지도도 그려내고, 피아노 소나타를 작곡해서 직접 황제 앞에서 연주까지도 한, 진실로 천주교의 복음 전파에 일심하는 구도자적 생활을 한다. 워낙 고생이 많아서 50대 후반에 이르러 세상을 뜨기 직전에는 이미 머리가 백발이 되어 있다. 44세에 남경에 들어가(1595년 5월) 전도할 때는 승려들처럼 머리를 빡빡 깍고 승려복을 입고 전도하던 생활을 청산하고, 유학과 손을 잡는 것이 가장 좋다고 판단하여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나면 30분씩 시간을 들여가며 머리를 올리고 옷도 유학자들처럼 입고 다녔다. 그의 성격은 대단히 개방적이어서 아주 폭넓은 인간관게를 맺고 있었다. 당시의 중국 유학자들은 리치 신부를 대단히 존경하였고, 그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평생을 바쳤던 리치 신부는 대단히 존경하였고, 그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한평생을 바쳤던 리치 신부는 1610년 5월 11일 저녁 6시에 운명하였다.
■ 관련 말씀
*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에만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를 길러 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 모든 죄악을 꺼림 없이 범행하니 신도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천도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지라. 이에 이마두는 원시의 모든 신성과 불타와 보살들과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 이마두가 천국을 건설하려고 동양에 왔으나 정교에 폐단이 많이 쌓여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고 죽은 뒤에 동방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느니라. 이마두의 공덕이 천지에 가득하니 천지간에 신명계의 영역을 개방하여 동서양의 신이 서로 자유롭게 넘나들게 한 자가 이마두니라. 선천에는 천지의 신이 각기 제 경역을 굳게 지켜 서로 왕래하지 못하였으나 이마두가 이를 개방한 뒤부터 지하신이 천상에 올라가서 천국의 문명을 본떠 사람들의 지혜를 열어 주었나니 이것이 오늘의 서양 문명이니라.
* 매양 옛사람을 평론하실 때는 강태공, 석가모니, 관운장, 이마두를 칭찬하시니라.
* 이마두(마테오 리치)의 공덕을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나 천지신명들이 그를 떠받드나니, 이마두는 신명계(神明界)의 주벽(主壁)이니라. 항상 내 곁에서 나를 보좌하여 모든 것을 맡아보고 있나니 너희는 마땅히 공경할지니라. 이마두가 24절(節)의 역(曆)을 만들어 때(時)를 밝히고 백성들이 그 덕(德)을 입어왔으나 이 뒤로는 분각(分刻)이 나리니 분각은 우리가 쓰리라.
이순신 (1545∼1598)
조선 선조 때의 명장. 자는 여해, 시호는 충무. 서울 건천동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용맹하여 전쟁놀이에는 항상 대장이 되었으며 동네에 못마땅한 일이 생기면 그가 나서서 해결지었으므로 동네 사람이 다 두려워하였다. 장성하면서 뜻을 무예에 두어 기사를 연습, 훌륭한 재능을 연마하였다. 1576년 무과에 급제하여 47세 되던 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이 해 그는 전쟁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미리부터 군사를 훈련하고 장비를 갖추고 특히 거북선을 만들어 전쟁에 대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패장 원균의 요청을 받아 함대를 이끌고 적의 수군과 싸워 도처에서 격파하였다. 즉 제1차는 옥포·전진포에서, 제2차는 사천·당포·율포에서, 제3차는 한산도·안골포에서, 제4차는 부산포에서 적선을 모
조리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한산도와 부산포의 싸움은 세계 해전 사상 유명한 것으로 이로 인하여 일본군은 결정적 타격을 받고 순신은 완전히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공으로 정헌대부의 벼슬을 주고 최초로 수군통제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순신의 공을 시기하는 원균 일파와 일본의 이간책으로 1559년 2월 서울에 압송되어 고문 끝에 사형을 받게 된 것을 정탁의 반대로 사형이 면제되어 4월 1일 권율의 휘하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원균의 패배로 수군이 전멸상태에 빠지자 사태의 긴급함을 느낀 조정에서는 다시 이순신을 통제사로 임명, 적을 막게 하였다. 이 때 그는 모친상을 당했으나 이를 돌볼 겨를도 없이 임지에 도달하니 남은 배는 겨우 12척 뿐이고 군대의 사기는 완전히 저하되어 있었다. 정부에서는 이 병력으로 적을 대항하기 어렵다 하여 수군을 폐하라는 영을 내렸으나 순신은 아직도 12척의 배가남았으며 내가 죽지 않는 한 적이 감히 우리의 수군을 넘보지 못할 것이라는 비장한 결의를 표하고 다가오는 전투를 기다렸다. 이리하여 그러나 8월 15일 적의 대부대를 명량에서 대파하여 다시 제해권을 장악하고 명나라의 진인이 거느린 5척의 수군과 함께 위세를 떨쳤다. 적은 곤궁에 빠져 명나라 장군에게 뇌물을 보내 화의를 꾀하였으나, 순신은 이를 반대하고 도요토미가 죽어 일본군이 철수하자 마지막 결전을 시도하여 11월 18일 노량에서 적을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의 유탄을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치니 나이 54세였다.
■ 관련 말씀
* 하루는 형렬이 아뢰기를 "고대의 명인은 지나가는 말로 사람을 가르치고 확실하게 지적해서 일러 준 일은 없었습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실례를 들어 보아라." 하시니라. 형렬이 여쭈기를 "율곡이 이순신에게는 '두보의 시를 천 번 읽으라.' 고 권하여 '독룡이 숨어 있는 곳에 물이 곧 맑네.'라는 구절을 스스로 깨닫게 하였을 뿐이요, 임란에 쓸 일인 것을 일러 주지 아니하였고 백사 이항복에게는 '섧지 않은 울음에는 고춧가루 싼 주머니가 좋다.' 고 말하여 직접 지시함이 없이 임진왜란 때에 청병에 대처하도록 하였습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들으시고 "나도 그와 같은 영재가 있으면 역시 그와 같이 가르칠 것이니라." 하시니라.
이윤 ( ) (?∼?)
이윤의 이름은 이이며,윤은 관명이다. 개국중신이며 5대를 연이어 상왕을 보좌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100세를 살았으며 천수를 다하여 박땅에 묻혔다. 이윤은 원래 하왕조 말년에 유신씨 부락의 가노였으며 지략이 풍부했다. 후에 몸종노예가 되어 신씨 여자를 따라 상탕이 있는 곳으로 가서, 탕의 명에 의하여 주방에서 일하였으며 재주와 지혜로서 탕의 눈에 들어 하나라로 보내어져 하의 걸을 보필하였다. 그는 하의 걸에게 오랫동안 간언을 하였으나 걸이 권고를 듣지 않는 것을 보고 천명이 탕에게 있음을 짐작하였다. 그래서 이윤은 장차 하나라가 망할 것이라 예측하고, 상나라로 돌아와 탕을 보좌하였다. 그는 탕임금을 위하여 계획을 짜고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하나라를 공격하여 무너뜨리고 상왕조의 토대를 닦았다. 탕이 죽은 후에도 계속 탕의 아들 와병, 중임 두 아들을 보좌하였으며 또한 탕의 손자 태갑을 왕으로 받들어 태갑에게 탕의 공덕과 하의 걸이 폭정으로 망한 사실을 가르치고 정사에 힘써 잘 다스릴 것을 권하였으나, 태갑은 정사에 태만할 뿐이었던 충언을 듣지 않아서 단호히 태갑을 동궁으로 보내어 자성케 하고 스스로 섭정했다. 3년 후 태갑이 과오를 뉘우치자 이윤은 그를 국가의 도읍으로 모셔 와서 자신은 재상으로 물러나 마음을 다하여 그를 보좌했다.
■ 관련 말씀
* 桀惡其時也요 湯善其時也니라
걸(桀)은 그 때에 악정을 하고 탕(湯)은 그 때에 선정을 편지라.
天道敎桀於惡하고 天道敎湯於善하니
桀之亡과 湯之興이 在伊尹이니라
천도(天道)가 걸에게는 악을 가르치고 천도가 탕에게는 선을 가르쳤나니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함은 모두 이윤(伊尹)에게 있었느니라.
이이 (1536∼1584)
이조 중엽의 대학자. 호는 율곡, 본관은 덕수. 찰방 원수의 아들이고 어머니는 신사임당이다. 강릉 출신. 어려서 어머니에게 학문을 배우고 1548년(명종 3) 13세로 진사 초시에 합격했고 16세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19세에 금강산에 입산하여 불서를 연구하다가 다시 유학에 전심하여 23세 때 퇴계 이황을 찾아가 만났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식년문과에 모두 장원, 구도장원공이라 일컬어졌다. 1573년에 직제장원이 되고, 이어 동부승지로서 참찬관을 겸직, 다음해 우부승지·병조 참지·대사간을 지낸 후 병으로 사퇴했다. 그후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나 다시 사지, 율곡과 석담에서 학문연구에 전심하다가 1581년 다시 불려 대사헌·예문관 제학을 겸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
이조판서에 이르러 동서분당의 조정을 추해 힘쓰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조선 유학사에서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루는 대학자로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장구의 분석적 해설보다 근본원리를 자유롭게 종합적으로 통찰하는 방식으로 탐구하였다.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설을 근본 사상으로 이통기국을 주장, 이 사상의 차이가 당쟁과 관련되어 오랫동안 논쟁의 중점이 되었다. 학문을 민생문제와 직결시켰고, 당젱의 조정, 10만 군대의 양성 및 대동법과 사창의 실시에 노력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조자양의 체를 습득했으며, 그림에도 뛰어났다.
이태백 (701∼762)
당나라 때의 시인. 태백은 호. 어려서부터 시서에 능하였고, 민산에 숨어 종획책사의 술을 즐겼으며, 후일 조래산에 살며 술을 즐겨 6일의 한 사람이 되었다. 742년에 강남 회계에 갔다가 친구의 천거로 한림학사가 되었으나 방종하여 진관이 되지 못하고 다시 각지에 순유하였다. 안사의 난 당시 양주절도대사의 막하에 있다 모반에 연루되어 야랑 지방으로 귀양갔다가 후일 사면되었다. 시인이 배출된 현종시대에 시선의 일컬음을 받았으며 중국 역대를 통하여 뛰어난 존재가 되었다. 자유분방으로 한번 붓을 들면 곧 시가 되었다고 한다. 사상에 있어서는 도교적 색채가 엿보였다. 『이태백 시집』30
권이 전한다.
■ 관련 말씀
* 詩中李白酒中伶인데 一去靑山盡寂蓼라
又去江南楊進士니 芳草雨蕭蕭구나
시로 말하면 이태백이요 술 잘 마시기로는 유령이 뛰어난데
한번 죽어 청산에 들어가니 모두 소식없네.
또 강남의 강진사도 죽어 저승 사람 되니 자고새는 슬피 울
고 풀잎에는 고적한 비바람만 뿌리는구나.
이항복(1792∼1868)
조선 선조 때의 대신. 호는 백사. 고려의 명상 제현의 후손. 어려서 악동으로 골목대장 노릇을 하다가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학문에 힘썼으며 16세에 어머니가 죽은 뒤 제복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이 더욱 이루어져 당대에 명성을 떨치자 대신 권철의 아들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1580년 문과에 급제했다. 당시 사화가 일어나 정철이 수과로 몰리게 되었는데 찾아가는 친구들이 없었으나 항복이 꺼림없이 방문했으며 승지때 정철의 죄안을 처리하는 데 태만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파면되었다. 1592년 임진홰란 때 도승지가 되어 왕을 모시고 천신만고 끝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에 이르러 이조참판이 되고 오성군에 피봉되었으며 두 왕자를 호위하여 먼저 평양에 이르러 형조판서에 특진하였다. 조정에서는 왕에게 함흥으로 피난하기를 청했을 때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에 피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한 이덕형과 더불어 명나라에 속히 구원을 청하기를 주청하였다. 왜군이 평양에 미치자 왕을 모시고 의주에 이르러 명나라에서 돌어온 황응양에게 조선과 일본이 합력하여 중국을 치려 한다는 유언비어에 대한 의심을 품게 하고구원군이 이르게 하였다. 광해군 때 임해군을 변호하다가 정인홍의 탄핵을 받았으며, 영창대군을 구원하려고 힘썼고 폐모의 논이 일어나자 적극 반대하다가 북청에 귀양가 적소에서 죽었다.
자사 (서기전 483?∼402?)
중국 고대의 학자. 이름은 급, 자사는 자. 공자의 손자이며, 4서의 하나인 『중용』의 저자로 전한다. 전 생애를 주로고향인 노나라에 가서 살면서 증자의 학을 배워 유학의 전승에 힙썼다. 맹자는 그의 제자의 제자이며,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이 학통은 송학에서 특히 존중된다. 자사학파의 사상을 전하느 책으로 『자사자』가 있다. 과불급이 없는 중용을 지향하는 실천적인 일상 윤리가 그의 사상의 중심이다.
십팔사략에 자사가 위후에게 충고했던 이야기가 전한다.
전국시대 때 자사가 위공을 섬기고 있었다. 그가 위공에게 권했다. "구변을 장군으로 등용하십시오."
그러니까 위공은 "구변은 전에 관리로 있을 때, 한 집에 달걀 두 개씩을 배당해서 거두어 먹은 일이 있소. 그러므로 그를 쓸 수 없소."위공이 내어 놓은 계략은 아무리 타당하지 않은 것이라도 모든 신하가 일제히 입을 모아 찬성한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자사가 말했다.
"성인이 사람을 쓰는 것은 마치 목수가 재목을 다루는 것과 같아서, 그 좋은 점을 살리고 나쁜 점을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자(버드나무와 가래나무)따위 아름드리 좋은 재목에 몇 자 썩은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훌륭한 목수는 결코 이것을 버리지 않습니다. 주상께서는 이 전국시대에 처해 가시는 데, 겨우 두 개의 달걀 때문에 나라를 지킬 장수를 버리려 하십니까? 이것은 이웃나라에 알리지 못할 일입니다." 자사가 계속 말했다.
"주상의 정치는 나날이 그릇된 방향으로 기울어질 것입니다. 주상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면 스스로 이것을 타당하다고 하시고,경이니 대부도 다 그 잘못을 감히 바로잡는 사람이 없습니다. 또 경이나 대부도 자기가 한 말을 스스로 옳다고 하며 학사나 서민은 그것이 옳지 않아도 감히 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에도 '스스로 성인이라고 하면 잘잘못조차 분별 못하네 주가 까마귀의 자운을 알랴' 했습니다" 후에 지나라가 천하를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라 일컫고 이세황제가 위공 군각을 폐하여 평민을 만들었다.
■ 관련 말씀
* 성인의 말은 한 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나니 옛적에 자사가 위후에게 말하되 '약차불이면 국무유의라.' 하였으나 위후가 그 말을 쓰지 않았으므로 위국이 참혹하게 망하였나니 나의 말도 또한 땅에 떨어지지 않으리니 오직 너는 나의 말을 믿으라.
장량 (?∼서기전 168)
중국 한의 공신. 한나라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한을 멸망시킨 진시황제를 박랑사에서 저격했으나 실패하여 은둔하다가 황석노인으로부터 병법을 배운 뒤 유방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에 종 1백여명을 데리고 그를 따랐다. 그는 유방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도록 정치적인 전략적인 지혜를 잘 써서 통일을 이룩하고 강소의 유후에 올랐다. 한신·소하와 함께 한나라 창업 3걸 중의 한 사람이다.
■ 관련 말씀
* 바둑도 한 수만 높으면 이기나니, 남 모르는 공부를 하여 두라. 이제 비록 장량, 제갈이 두름으로 날지라도 어느 틈에 끼인지 모르리라.
장의 (?∼서기전 309)
중국 시대의 모사. 종횡가의 비조. 위나라 사람. 합종책을 제창한 소진과 더불어 귀곡선생에게서 사사하였다. 처음에 초나라에 가서 벽을 훔친 혐의를 받고 태형의 벌을 받은 뒤에 추방되었으나, '내 혀가 있는 한….' 하고 아내에게 장담하며 제후에 대한 유세를 계속하였다.
이후, 소진의 주선으로 진나라에서 벼슬살이를 하게 되어 혜문왕의 재상이 되었다. 그는 연형책을 주창하면서, 위·조 ·한 등 동서로 잇닿은 6국을 설득, 진을 중심으로 하는 동맹관계를 이룩하는 등 활약이 컸으나, 혜왕이 죽은 후에는 실각하였으며, 위나라로 피신하여 재상이 된 지 1년만에 죽었다.
주자 (1130∼1200)
중국 남송 시대의 대유학자. 주자학의 창시자. 이름은 희. 천부적 자질이 뛰어나 다섯 살에 벌써 효경을 암기하였으며 학문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14세 되었을 때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부친은 운명하기 전에 선생에게 호헌과 백수 유면지와 병산 유자휘 선생 등에게 학문을 배우라는 유언을 남겼다.
19세에 과거에 급제, 49세 때에는 진남강군이 되어 백녹동서원을 세워 서원교육의 시초를 열었다. 그 후에도 지방관으로서 사회법을 제정하는 등 치적을 올렸으나 반대파인 한탁주의 책동으로 공직에서 추방되어 70세로 죽을 때까지 문하생 양성에 전념했다. 그의 신유학은 유가의 고경전에 있는 어휘를 자료로 하면서 성을 중심으로 하여 기와 이와의 체계를 생각하고 이 새로운 체계에 의해 고경전을 다시 해석하는 것이며, 도학·이학·이기학 등으로 부른다. 종래의 유학이 공자가 선택한 고전 오경을 의거한 것에 대해 직접 공자 본인을 규범으로 하고, 공자의 언행록인 논어를 중심으로 한 사서를 보다 읽기 쉬운 고전으로 제공한 것은 당시 시민세력의 증대에 부응한 것이다. 내용은 전세기 북송의 주돈이 정이 정두로부터 시작되는데, 그 종합자는 바로 주희이며 또한 가장 업적이 많았다.
그의 철학설은 독서에 의한 실증에서 출발했으며, 같은 시대의 육구연, 명조의 왕수인이 너무 사변적인 데데 대하여 이를 반대했다. 한편 또 역사론 『通鑑綱目』에 나타난 바와 같은 엄격주의가 청대의 재진 등 관용주의자들에 의해 반론되었으나, 이 반주자의 학자들도 출발점으로 한 것은 역시 그의 학설이었다. 주자의 저서에는 주자 혼자 집필한 것으로는 『대학장구』와 『중용장구』, 『논어강령』, 『맹자집주』, 『정씨외서』등이 있다. 후세학자들이 주자의 학문을 이어받아 저술한 책들에는 『주자대전집』과 『주자서절요』, 『주자심학록』, 『주자유서』 등이 있다.
■ 관련 말씀
*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몸가짐과 의관을 바르게 하고 공경스런 마음으로 성령의 조화세계를 바라보라. 마음을 고요히 하여 일심(一心)경계에 머물면 상제님을 뵈올 수 있느니라.”“통치자 하느님 제(帝)는 우주의 창조원리인 리(理)를 맡아 다스리시는 분이라.”하고‘무엇이 주재가 되느냐’는 물음에 다시 말하기를 “하늘에는 스스로 주재의 자리가 있나니…언어로 능히 다 말할 수 없느니라. 사람들이 다만 주재(主宰)로서 제(帝)를 설명하고 그 형상이 없다고 이르나 참으로 바르게 깨닫기가 어려우니라. 이 주재 자리가 세상에서 이르는 옥황대제(玉皇大帝)와 같나니…배우는 자 모두 능히 답할 수 없도다.” 하니라.
* 유가의 인물들이 흠이 많으나 주회암은 흠잡을 데가 없느니라. (4편 12장)
증자 (서기전 506∼436?)
중국 춘추시대의 유학자. 증점의 아들로 이름은 삼. 산동성 출신. 공자의 고제로 효심이 두텁고 내성궁행에 힘썼으며, 노나라 지방에서 제자들의 교육에 힘썼다.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나의 도는 하나로서 꿰뚫는다. "고 말했을 때 다른 제자들은 그 말의 참뜻을 몰라 생각에 잠겼으나, 증자는 선뜻 "부자의 도는 충서 뿐" 이라고 해설하여 다른 제자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효경』의 작자라고 전해지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현재 전하는 『효경』은 진한시대에 개수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증자의 사상은 『증자』 18편 가운데 10편이 『대대례기』에 남아 전하는데, 효와 신을 도덕행위의 근본으로 하고 있다. 그는 공자의 도를 계승하였으며, 그의 가르침은 공자의 손자 자사를 거쳐 맹자에게 전해져서 유교사상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관련 말씀
* 우는 대학경문의 일장이니 대개 공자의 말씀을 증자(曾子)가 기술한 것이요 전문(傳文) 십장(十章)은 증자의 뜻을 그의 문인이 기술한 것이니라. 그러나 옛책(舊本)에 잘못된 내용이 있으므로 이제 정자(程子)가 정한 것에 따라 경문(經文)을 다시 살펴서 바로잡으니 그 차례와 순서가 다음과 같으니라
진묵(眞默) (1592∼1633)
조선 중기의 고승. 본명 일옥(一玉). 전라도 만경현 불거촌(佛居村) 출생. 진묵조사가 태어난 출생. 진묵조사가 태어난 후 만경평야에서는 3년 동안 산천초목이 말라 시들었다고 한다. 성품이 지헤롭고 자비로워서 사람들이 "불거촌에 부처님이 났다"고 하였다. 7세에 출가하여 전주 봉서사(봉서사)에서 불경을 읽었는데, 한 번 읽으면 곧 암송하고 내용을 통달하였으므로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다. 또한 봉서사 주지가 어린 진묵에게 아침저녁으로 신중단에 소향예배하는 소임을 맡겼는데 어느 날 신중들이 그 주지승에게 현몽하여 이르기를 "우리 소신들이 어찌 감히 부처님께 예를 받을 수 있는가. 원컨대 다시는 아침 저녁으로 소향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는 일생을 통하여 수많은 신이(신이)를 남겼지만, 그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조선 후기의 중 초의가 지은 [진묵대사 유적고]에 열여덟가지 이적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미 시절 창원의 마상포를 지나갈 때 한 동녀가 사랑을 느꼈으나 따를 수 없었으므로, 그녀는 죽어서 남자가 된 뒤 다시 전주 대원사(대원사)에서 만나 기춘이라는 시동이 되었다. 대사가 그를 각별히 사랑하였는데 이것을 대중들이 비난하였다. 대사는 그것이 이락삼매행(일체의 즐거움에 대한 애착을 떠난 삼매행)임을 보여주기 위해 기춘을 시켜 국수로 대중공양을 하겠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대사는 대중에게 발우를 펴게 한 뒤 기춘으로 하여금 바늘 한 개씩을 발우 속에 넣게 하니, 대사의 발우 속의 바늘은 국수로 변하여 가득 채웠으나, 다른 숭려들의 발우에는 여전히 한 개의 바늘만이 있었다.
2. 늙은 어머니를 외막촌에서 봉양하고 있을 때, 여름날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산신령을 불러 모기를 쫓게 한 뒤로는 이 촌락에 영영 모기가 없어졌으며 어머니가 죽자 제문을 지어 위령하였다.
3. 곡차라고 하면 마시고 술이라 하면 마시지 않는 것이 평소의 계행이었는데, 어느날 한 중이 술을 거르고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이냐?" 고 세 번을 물었으나, 그 중이 대사를 시험하기 위하여 모두 술이라고 대답하였으므로 금강역사가 나타나 타살하였다.
4. 대사가 변산 월명암에 있을 때 다른 승려들이 모두 출타한 뒤 홀로 [능엄경]을 읽다가 수능엄삼매에 들어 문지방에 놓고 있던 손가락이 바람 때문에 열리고 닫히는 문에 부딪혀 피가 난 것을 잊은 채 며칠 밤을 보냈다.
5. 월명암에 있을 때 매일 밤 한 줄기 밝은 빛이 멀리서 비치어 왔으므로 대사는 이것을 발견하고 목부암으로 옮겨가서 원등암이라 개칭하였다. 이 곳은 원래 십육나한의 도량으로, 그들이 항상 대사를 시봉하는 마음에서 월명암으로 등광을 비추었다.
6. 전주부에서 관물을 축낸 죄인 하나가 도망을 가려고 대사에게 인사하러 왔을 때, "도망가는 것이 어찌 장부의 할 짓인가?" 그러지 말고 나에게 공양을 올려라." 하였다. 그를 돌려보낸 다음 대사는 주장자를 가지고 나한당에 들어가 차례로 나한의 머리를 세 번씩 때리며 "관리 아무개의 일을 잘 도와 주라" 하였다. 그 이튿날 밤에 나한이 그 관리의 꿈속에 나타나서 "네가 구하는 바가 있으면 직접 우리들에게 말할 것이지 어째서 대사에게 말하여 우리를 괴롭히느냐? 너의 소행을 보아서는 돌봐 주지 않아도 되나 대사의 명령이시니 좇지 않을 수 없다."하고 그를 구해 주었다.
7. 대사가 길을 가는데 소년들이 냇가에서 생선을 끓이고 있으므로 탄식하면서 "이 무고한 고기들이 화탕(화탕)의 고생을 하는구나"하니, 한 소년이 희롱하여 말하기를 "스님도 먹고 싶지 않은가?" 하였다. "나도 잘 먹는다."하면서 그 고기를 몽땅 먹은 뒤 냇가에 가서 뒤를 보니 무수한 고기가 살아서 헤엄쳐 갔다.
8. 진묵대사가 봉서사에 있을 때, 진묵대사는 자주 해인사를 왕래하며 대장경을 공부하였는데 하루는 해인사 대장경각 옆에서 불이 나 도저히 끌 수 없게 되었다. 이때 봉서사에 있던 진묵대사가 솔잎에 물을 적셔 불길이 번지는 곳에 몇 번 뿌리자 갑자기 폭우가 내려 불길을 잡아 대장경판을 구하였다.
9. 대사가 하루는 목욕, 삭발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문을 나가 시냇물을 따라가다가 지팡이를 세우고 서서 손가락으로 자기의 그림자를 가리키며 시자에게 이르기를 "이는 석가모니의 그림자니라."하니, 시자가 "이것은 화상이 그림자입니다."하였다. 대사가 이르기를 "너는 화상의 가(가)만 알뿐 석가의 진(진)을 모르는 구나."하였다.현재 봉서사에는 그를 기리는 부도와 조사전 비가 건립되어 있다.
관련말씀
*봉곡이 이로부터 더욱 시기하더니 그 뒤에 진묵이 상좌승에게 8일 동안 방문을 잠가 둘 것을 부탁하고 범서와 불법을 더 연구하려고 시해(시해)로 서역(서역)에 갔음을 알고 절에 가서 그 방문을 열고 '어찌 시체를 방에 숨겨두고 혹세무민하느냐!'고 꾸짖어 화장하게 하였더니 8일이 지난 뒤에 진묵이 돌아와서 육체가 없어졌음을 보고 공중에서 소리치며 말하기를 '이는 봉곡의 짓이라. 내가 각 지방 문화의 정수를 거두어 모아 천하를 크게 문명케 하고자 하였더니, 이제 봉곡의 질투로 인하여 헛되게 되었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리요! 나는 이제 이 땅을 떠나려니와 봉곡의 자손을 대대로 호미질을 면치 못하리라.' 하고 동양의 도통신(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갔느니라."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진묵이 봉곡에게 죽음을 당하고 동방의 문명신(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건너가 서양의 문명을 열었나니 이제 다시 진묵을 동토로 불러와서 선경을 건설하는 데 역사하게 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내 세상에 진묵의 소임이 막중하니 장차 천하 사람들이 공경을 받으리라." 하시니라.
*지난 임진왜란에 정란(정란)의 책임을 '최풍헌이 맡았으면 사흘 일에 지나지 못하고 진묵이 맡았으면 석 달을 넘지 않고 송구봉이 맡았으면 여덟 달만에 끌렀으리라' 하니 이는 선도와 불도와 유도의 법술(법술)이 서로 다름을 이름이라. 옛적에는 판이 작고 일이 간단하여 한 가지만 따로 쓸지라도 능히 난국을 바로잡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판이 넓고 일이 복잡하므로 모든 법을 합하여 쓰지 않고는 능히 혼란을 바로잡지 못하리라.
*진묵이 천상에 올라가 온갖 묘법(묘법)을 배워내려 좋은 세상을 꾸미려 하다가 김봉곡에게 참혹히 죽은 뒤에 원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건너가서 문화 계발에역사(역사)하였나니 이제 그를 해원(해원)시켜 고국으로 돌아와서 선경 건설에 역사하게 하리라.
*사람들의 근접을 일절 금하시고 공부하시는 중, 어느 날 밤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광명이 번쩍이는 가운데 크게 호령하시는 소리가 들리는지라. 금곡이 이튿날 아침에 나가보니 칠성각에 봉안된 진묵대사의 영정이 마당에 떨어져 있고 또 칠성각을 보니 건물의 방향이 틀어져 있더라. 증산께 이 사실을 고하니 "그러냐."고 답하시는 순간에 건물의 방향이 원래대로 회복되니라.
진시황제(진시황제) (서기전 259∼210)
중국의 통일을 완성한 진(진)나라의 황제. 이름은 정(정). 서기전 259년 그의 아버지(후에 진나라 장양왕)가 조(조)나라의 인질로 있을 때 조의 수도 한단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친은 원래 거상(거상) 여불의(여불의)의 애첩이었으므로 실부(실부)는 여불위라는 설도 있다. 여불위는 장양왕의 즉위를 주선하였으므로, 장양왕이 죽고 정(정)이 13세로 왕위를 계승하자 승상(승상)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으나 얼마 후 실각하였다. 이 때부터 정의 독재군주시대가 시작되었으며 (23세), 그 후 50세에 죽을 때까지 눈부실 만큼 다방면의 사업을 단행하여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비자(한비자)와 함께 순자(순자)에게서 글을 배운 이사(이사)가 가장 충실하게 그를 보좌하였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중국을 통일함으로써 수백 년에 걸친 전란의 시대에 종지부를 직고 중국 최초의 통일 제국을 구축하였다. 통일을 완성한 시황제는 중국 전설에 있는 삼황오제(삼황오제)를 겸하였다는 뜻에서 황제(황제)라는 칭호를 썼으며, 짐(짐), 폐하(폐하). 제조(제조) 등의 말을 황제의 전용어로 제정하였다.
이밖에 아방궁(아방궁)을 짓고, 여산(여산)기슭에는 자신이 죽으면 묻힐 거대한 제릉(제릉)을 축조하였으며, 동방 해안지방을 순유(순유)할 때는 태산(태산)등 6개소에 자신의 송덕비(송덕비)를 세웠다. 이러한 모든 사업은 그 수 2000년 간에 걸친 중국 전제정치의 바탕이 된 것이었으나, 한편 지나치게 과격하고 성급한 통치방법은 결국 백성의 불만을 사게 되었으며, 통일 제국이 성립된 지 불과 15년만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 관련말씀
*구월에 진시황을 여산 아래에 장사하였다.하였으니 살지 못할 뜻을 표시함이로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구릿골에 계시는데 한 성도가 아뢰기를 "옛날에 진시황(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을 때에 돌을 채찍질하여 스스로 가게 하고 밤의 잔치에는 흘러가는 시간을 아까워하여 지는 달을 꾸짖어 머물게 하였다 하옵니다. 이것은 시황의 위세가 높고 커서 돌을 채찍질하고 달을 꾸짖는 권능을 가진 것 같았다는 것이니 후세의 지어낸 말이 아닙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러하냐. 이제는 판이 크고 일이 복잡하여 가는 해와달을 멈추게 하는 권능이 아니면 능히 바로잡을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이 때에 아침해가 제비산 봉우리에 솟아오르거늘 상제님께서 해를 향하여 손으로 세 번 누르시며 "가지 말라!" 하시고 담뱃대에 담배를 세 번 갈아 천천히 빨아들이시니 문득 해가 멈추어 더 이상 솟아오르지 못하는지라. 한참 후에 성도들이 아뢰기를 "사람들이 모여들어 '아침해가 가다 말고 멈춘 것은 천고에 듣지 못한 일이라.'하며 각양각설로 길조인가 흉조인가하여 매우 소란합니다."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론(세론)이 소동할까 염려되니 오래 하지는 못하리라." 하시고 담뱃재를 떠시며 "가라!" 명하시니라. 이 명이 떨어지자 해가 문득 몇길을 솟아오르니 모든 사람들이 놀라 이상히 여기니라.
진평(진평) (?∼서기전 179)
중국 한(한) 초의 공신. 처음에는 항우(항우)를 따랐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한나라 고조(고조)밑에서 가끔 기책(기책)으로써 첩자를 초(초)에 보내어 항우와 범증(범증)을 이간시키고, 한신(한신)이 모반하자 그를 생포하였다. 진평은 한고조가 항우에게 포위되었을 때 거짓항복하는 계략으로 여자 이천 명을 동원하여 한고조를 구해낸다. 고조가 흉노(흉노)에 의하여 평성(평성)을 포위당하자 기계(기계)로써 포위를 풀고 그 공으로 곡역후(곡역후)의 봉함을 받았다. 혜제(혜제)때에 좌승상(좌승상)이 되고, 후에 여씨(여씨)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주발(주발)과 함께 청려(청려)를 주살하여 한실(한실)의 위기를 구하였다.
■ 관련말씀
*사람을 쓸 때에는 남녀의 구별이 없나니, 옛날에 진평(진평)은 야출동문(야출동문) 여자 이천인(여자이천인)하였느니라.
진표율사(진표율사) (?∼?)
통일 신라시대의 고승. 한평생 불도에 매진하여 많은 중생들에게 불법을 전하였으며 미륵불의 강림을 예언하고 수많은 기행이적을 남겼다. 성덕왕(성덕왕)때에 전라도 전주 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벽골군 도나산촌 대정리, 현재의 김제군 만경면 대정리)에서 출생하였다. 부친 진내말(진내말)은 어부였고 모친은 길보랑(길보랑)인데, 태어날 때에 얼굴이 부처의 상(상)과 닮아서 동네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 천부적으로 총명하여 세 살 대에 부친이 보는 앞에서 불경을 읽을 정도였다.
율사가 11세 되던 해에 동네 아이들과 같이 산에 놀러가서 개구리를 열 마이 가량 잡아 작대기에 꿰어 개울 물 속에 담가 두고는 그만 잊어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듬해에 다시 산으로 놀러가서 보니 지난 해 잡아 두었던 개구리들이 죽지 않고 울고 있었다. 이에 율사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날부터 생사의 문제를 비롯한 인생의 본질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부친에게 출가할 뜻을 밝혀 허락을 얻어내고는 12세 때에 드디어 험난한 구도의 길을 떠났다.
율사는 근처에 있는 금산사(금산사)를 찾아가서 불심이 깊은 순제법사(순제법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불도를 닦기 시작했다. 스승인 순제법사에게 진표(진표)라는 법명(법명)을 받았다. 율사는 스승에게 사미계(사미계)법을 배웠으며, 또한 [공양차제비법(공양차제비법)]과 [점찰선악업보경(점찰선악업보경)]이라는 책을 받을 때 스승으로부터 수업을 열심히 하여 진실한 중새욱제의 법을 세상에 펼 것을 부탁받았다. 스승은 유달리 자질이 뛰어난 율사에게 "너는 내가 주는 두 개의 경을 열심히 공부해서 그 속뜻을 깨달은 후에 미륵불의 성전에 가서 그분들의 계법(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펴라."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율사는 그 길로 스승에게 하직인사를 드리고 물러나서 명산대찰(명산대찰)을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나 불도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수도하기에 전념하였다.
어느덧 율사의 나이 27세가 되니 돌아다니기를 중단하고 혼자 조용한 곳에서 수도를 하기 위해 보안현(보안현 :현재의 부안)변산에 있는 부사의방(부사의방)에 들어가 미륵불(미륵불)을 친견하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도를 구하였다.
율사는 3년 동안 정성을 들여 수도하였으나 여전히 미륵불의 현신을 볼 수 없었다. 이에 실망을 금치 못하여 스스로 죽을 것을 결심하고 근처의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그런데 율사가 땅에 떨어지려는 찰나 청의동자가 홀연히 나타나 그럴 가볍게 받아서 다시 절벽 위에 올려놓고 사라져 버렸다. 이에 큰 용기를 얻은 율사는 21일을 기약하고 이 동안에 생과 사를 걸고 망신참법(망신참법 : 온 몸을 돌로 찧으며 수행하는 방법)을 하며 혈심(혈심)으로 수도하였다. 얼마나 열심히 수도를 하였는지 그의 온몸의 살집이 터져 피가 흐르며 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였다. 죽음과 같은 고통에도 불구하고 육사는 굴하지 않고 여기서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집념으로 수도에 더욱 정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만신창이가 된 율사 앞에 지장보살(지장보살)이 현신(현신)하여 피투성이가 된 율사의 손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참으로 지극한 정성이로구나. 그대의 정성에 감동하여 이것을 내리노라.'하면서 율사에게 가사(가사)와 바리때를 내렸다.
율사는 용기백배하여 또 한 번 힘차게 수도에 몰입하였다. 내정한 21일째 되는 날 천안(천안)이 환하게 열려 미륵불(미륵불)이 장엄한 모습으로 찬란한 광채에 휩싸여 도솔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오시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드디어 그의 십수년 간의 노력이 열매를 맺은 것이다. 미륵불은 율사에게 "장하도다. 대장부여! 계(계)를 구하기 위하여 이같이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고 참회하다니 훌륭하도다." 하고 말하면서 율사의 머리를 만지면서 간자(간자)와 계본(계본 " 불제자들이 지켜야 할 것을 적어놓은 글)을 주었다.
"지금 주는 간자는 내 새끼손가락 뼈로 만든 것으로 시각(시각)과 본각(본각)을 나타내는 것이니라. 8자 본각은 성불종자(성불종자)를 뜻하며 9자 시각은 청정비법(청정비법)을 나타내는 것이다. 너는 이 몸을 버리고 대국왕(대국왕)의 몸을 받았다가 후에 도솔천에 나게 될 것이다."
이 말을 마치고 미륵불을 현신할 때처럼 다시 장엄하게 사라졌다.
@금산사를 창건하다.
율사는 금산사(금산사)를 창건하기 위하여 중생들의 정재(정재: 자신이나 불상을 건립하는데 바치는 재물)를 얻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전국에서 모은 쇠로 미륵불상(미륵불상)을 주조(주조)하기 시작하여 각고의 노력 끝에 결실을 보아 불상을 완성하게 되었다. 법사는 완성된 불상을 공사에 착수한 지 3년만에 금당(금당)에 봉안(봉안)하였다. 율사는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는데 금산사에서 소원을 빌면 묘하게도 성취되는 일이 많아서 이것이 널리 알려지자 전국에서 수많은 불제자들이 모여들었다.
율사는 금산사를 떠나서 새로운 절을 세우기 위하여 명소를 찾으려고 속리산(속리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가는 곳마다 율사의 영명이 널리 알려진 터라 너도나도 율사의 고귀한 불언(불언)을 들으려고 많은 사람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율사는 이들을 모두 교화하며 길을 갔다. 속리산에 도착하여 길상초(길상초)가 수북이 난 동굴 옆에서 잠시 머문 후 다시 금강산으로 발걸음을 옮겨 강릉으로, 다시 강릉을 지나 금강산으로 가면서 중생을 교화했다. 금강산에 도착한 율사는 고성군(고성군)에 위치한 금강산(금강산)에 발연사(발연사)를 짓고는 7년 동안 머물면서 불법을 전하기에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에 명주 지방에서 흉년이 들어서 그곳 주민들은 나무 껍질과 풀뿌리로 연명해 나가는 처지였다. 율사는 이것을 안타깝게 여겨 명주해변에 다시 가서 불공을 올리고, 동해바다를 향해서 계법(계법)
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바다 속에서 수많은 물고기 떼와 자라들이 해변가에 올라오니 그 양이 작은 동산을 이룰 정도였다. 그리하여 명주지방의 주민들은 이것들은 식량으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지방의 사람들의 쌀과 맞바꾸어 흉년을 무사히 넘기게 되었다 한다. 어느 날 율사에게 찾아와 계법을 전수해 주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이에 율사는, 그들의 불법을 얻으려는 간절한 마음에 감동을 하여 스승인 순제법사에게 받은 두 권의 책과 가사와 바리를 그들에게 주고는 자신의 법통을 계승시켰다. 율사는 그들에게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자라는 옆에 동굴 근처를 찾아서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불법을 널리 전하도록 하여라"고 대덕영심들이 해야할 일을 일러
주었다. 그 길로 대덕영심 일행은 율사에게 책과 가사와 바리때를 공손히 받아가지고 율사가 가르쳐 준 곳에 절을 지어 길상초가 있는 곳이라 하여 길상사(길상사)라 절명을 작성하고는 점찰법회(점찰법회)를 열었다. 율사는 만년에 고향에 두고 온 아버지가 그리워져서 고향으로 가서 금강산 발연사로 부친을 모시고 와서 돌아가실 때까지 지극한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율사는 자신의 죽을 날을 알고는 절 동쪽에 있는 거암(거암)위에 올라가서 마지막으로 기도를 한 후에 조용히 입적(입적)하였다. 율사가 입적하자 그 제자들은 율사의 육신을 그대로 모셔두고 공양을 올리다가 세월이 흘러 뼈만 남게
되자 그것을 거두어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율사의 무덤에서는 소나무가 솟아났는데 수명이 다해 죽으면 다시 그 뿌리에서 다른 소나무가 자라나 계속하여 소나무가 생겨났다고 한다.
율사의 제자들로서는 대덕영심(대덕영심)과 보종(보종), 진선(진선), 석충(석충), 진해(진해), 신방(신방)등이 있다.
■ 관련 말씀
*내가 서양 대법국 천개탑에 내려와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둘러보며 천하를 대순하다가 이 동토(동토)에 그쳐 중 진표가 석가모니의 당래불(당래불) 찬탄설계(찬탄설계)에 의거하여 당래의 소식을 깨닫고 지심기원(지심기원)하여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30년을 지내면서 최수운에게 천명(천명)과 신교(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진표(진표)는 나에게 큰 인연이 있느니라.
전봉준 (1855∼1895)
자 명숙. 호 해몽, 이름은 영준. 봉준은 초명. 본관은 천안. 그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고부 이평면 조소리에서 살기 시작한 때는 늦어도 23세(1877) 이후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가 오랫동안 거처한 이곳 옛집(지금의 정읍군 이평면 장내리 조소부락 485번지)을 1974년에 보수할 때 '무인 2월 26일' 이라는 상량문이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인생의 절반인 17년 (23세∼40세) 간의 청장년 시절을 고부에서 보냈음을 알 수 있다.
일찍이 그의 부친 전창혁이 홍덕 소요산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소요산 만장봉이 목구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아들을 낳았다고 한다. 전봉준 장군의 얼굴빛은 희고, 안광이 형형하여 사람을 쏘는 듯했다. 지금 전하는 사진에 사형당한 후의 얼굴모습만 보아도 가히 그러한 기품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부친을 닮아 웅혼한 기상과 뛰어난 재기를 그대로 타고났다. 작은 5척 단신의 몸집에 단단한 체구가 아래위를 찍은 듯하므로 녹두라는 별호가 붙었다. 농사짓지 않은 순수한 선비로서 평소에 과묵하였으며 서당의 훈장노릇을 하였다.고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전봉준 장군은 평소에 동학교도인 정읍의 손화중(정읍 접주) 김개남(나주포의 접주) 등과 가까운 친구로 사귀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은 동학의 거두였다. 그리고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은 온건파인 북접의 지도자 최시형과
강경파 김개남 사이의 중도파였다. 그의 유년기 10여 세 전후는 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던 때이다. 지방의 탐관오리, 토호들의 착취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봉기하여 지방관리를 타도하고 혹은 환곡장부를 불사르며 난을 일으켰다. 이런 민란 속에서 수운 최제우가 동학을 창도하였으며 이 동학은 민중의 소망을 집약한 것인 만큼 급속히 그 세력을 확장하였다. 전봉준은 1888년 동학 내부에서도 가장 혁명적인 인물인 서장옥의 부하 황해일의 소개로 동학에 입도하였다. 서장옥은 최시형 교주 밑에서 교단의 총무를 맡고 있던 사람으로 갑오년에는 충청도 교인을 거느리고 전봉준과 호응 활약한 사람이다. 수운 최제우의 순교 후 한때 침체했던 동학교세는 2대 교주 최시형의 열성으로 다시 그 세를 만회하여 국내 유일 최대의 민간단체로 자라났다. 그들은 처음에는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투쟁을 전개하였다. 1892년 전주에 집결하여 감사에게 교조신원을 요구한 것을 필두로 1893년 3월에는 약 4천
명이 광화문에서 복합상소를 벌였다. 3일 만에 "소원대로 시행할 것이니 귀향하여 생업에 힘쓰라."는 왕명에 따라 일단 귀향하였지만 지방관리의 박해는 더할 뿐이었다. 교주 최시형은 동원령을 내려 충청도 보은에 교인들을 집결시켰다. 접주들이 교인들을 인솔하여 속속 모여드니 이해 5월 초순에는 그 실세 2만을 헤아렸으며 이 때 전봉준도 고부군 접주로서 보은집회에 참가하였다. 이 보은집회에는 종래의 교조신원 뿐만 아니라 '척왜·양이·보국안민' 으로 변모하였다. 당시 한국을 에워싼 국제정세는 한국침략을 노리는 일본의 동향으로 집약된다. 1890년 일본의 최초의 국회에서 산현유봉수상은 금후 일본의 군비는 주권선을 지킬 뿐만 아니라 이익선까지 방위할 것을 목표한다고 하여 조선지배를 위하여 청국과의 전쟁에 대비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었다. 일본이 이와 같이 한국침략을 위하여 대청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1894년 1월 전봉준은 농민을 이끌고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거하여 억울한 사정의시정을 촉구하다가 2월 15일 농민과 함께 군아를 습격하여 군수를 쫓고 세미를 돌려주고 만석보신보를 헐어버렸다. 동학혁명의 결정적인 폭발 계기는 사태를 무마하는 임무를 띠고 온 안핵사 이용태의 행위에 있었다. 이것을 보고 당시 전라감사의 군사마 최영년은 이렇게 통탄하였다.
"슬프도다! 호남의 난은 조필영으로 시작되어 중간에 조병갑의 난을 거쳐 마지막에 이용태가 저질러 놓은 것임이 만고불역의 정론일 것이로다."
이용태의 무모한 행패는 동학접주들과 군인들을 격분시켜 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참다 못한 전봉준은 4월 하순 손화중, 김개남 등 인근 접주에게 통문을 돌려 궐기를 호소하였으며 곧 수천 군민이 고부군 백산에 모였다. 백산은 고부군 고을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봉수대가 있는 언덕이다. 4월 25일 전장군과 동학접주들은 '백산맹약'이라 불리우는 다음 4개조를 강령으로 정하였다.
1. 不殺人 不殺物
2. 忠孝雙全 濟世安民
3. 逐滅倭洋 澄淸聖道
4. 驅兵入京 盡滅權貴 大振紀綱
入定名分 以從聖訓
그런데 이 당시 청국과 일본은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사태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으들은 조선침략에서 지배의 종주권을 탈취하기 위해 시시각각으로 정세분석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 당시 일본의 이등박문 내각은 극복하기 어려운 곤경에 직면하고 있었다. 야당은 영국과의 조약개정 샐패의 책임을 규탄하였으며 중의원은 153대 139로 정부불신임안을 가결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명치유신 이래의 정치적 위기이며 최대의 반정부 운동이었다.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5월 31일은 바로 일본국회가 정부불신임안을 가결한 날이요, 동시에 민씨 세도의 한국 정부가 경솔 무모하게도 동학군 진압을 위하여 청군의 출동을 요청한 날이기도 하였다. 한국정부가 청국에 출병을 청하였다는 서울발 전보는 일본의 이등박문내각에 있어서는 구원의 복음이었다. 이등박문은 이 소식을 듣고 하늘의 도우심이라고 기뻐 길길이 날뛰었다. 청군이 출동하면 일본군도 천진조약에 의해 출병할 명분을 얻은 셈이기 때문이었다. 일본군부는 6월 하순부터 출동 준비에 착수하고 있었으며 6월 1일 전함의 집결을 명령하고 6월 5일 제5사단에 동원령이 내리자 6월 16일까지 7천명의 일본군은 인천에 상륙을 끝내고 있었다. 놀라운 스피드였다. 일본군 출동에 놀란 한국정부는 전장군에게 협상을 제의하였으며 전장군은 이것이 장차 나라를 위기로 이끈다는 판단에 협상에 임하였다.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에세 반봉건적인 민폐의 개혁을 요구하는 13개 조항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전주성에서 입성 10만인 5월 5일과 6일에, 전주성에서 철병하여 며칠 후에 곧 해산하였다. 6월초에 전봉준 장군은 새로 부임한 전라관찰사 김학진과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 전장군은 삼베옷에 큰 갓을 쓴 모습으로 이 회담에 임했다. 이 화담이 이른바 전주화약이다. 전주화약으로 청일양군은 주둔의 명분을 잃었다. 이에 일본은 개전의 구실을 얻고자 청국이 수락할 리 없는 한국의 내정개혁을 공동으로 지도하자는 안을 내놓고, 한편으로 가와까미 중장의 밀명을 받은 내전양평 등은 천우협이라는 특무대를 조직하여 동학군에 대한 공작을 하려다 실패하였다. 일본군 특무대들의 목적은 개전 구실을 만드는 것이었다. 내정개혁 문제로 예정한 대로 전쟁은 일어나고 그 직전 일본정부는 숙망의 대영조약 개정에도 타결을 보아 러시아의 간섭에 외교적으로 대처하면서 청군에 대하여 연전연승을 하고 있었다. 청군은 거의 북양군벌 이홍장 휘하에 한정된 것이어서 그 질과 훈련도는 낮았고 전의도 없었다. 청일전쟁은 격전다운 격전도 없는 전쟁이었다. 8개월간의 전쟁에서 일본군이 전투에서 입은 인명손실은 전사자 약 5천 명에 불과하였다. 전장군이 전주성에서 물러난다음 경군은 서울로 철수하고 전라감영의 병력은 이미 와해되었으며 전라도 전역은 동학군의 세력권에 들어 그들은 군마다 집강소를 두고 이곳이 군내의 모든 일을 처결하는 권력기관이 되었으며, 각군의 집강소에서는 탐관오리의 숙청, 청춘과부의 개가의 허용, 왜와 내통하는 자의 엄벌 등 이른바 폐정개혁안건 12조를 강령으로 만사를 즉결하여 혁명적 분위기는 호남 전역을 덮고 있었다. 일본군도 개전에 앞서 경복궁을 점령, 친일내각을 조직하였으며 1894년 8월 20일과 이해 8월 26일의 두 차례에 걸쳐 맺어진 한일간의 협약에 의하여 경인, 경부간의 철도부설권을 얻고 한국이 일본군의 작전 및 식량공급을 위하여 모든 편의를 제공할 것 등을 강요하였다. 대의를 위해 언제나 생명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는 전장군의 성격은 외세에 기울어가는 금일의 국운은 가만히 앉아서 방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한 당시에 전장군은 대원군과 혁신파인 갬개남 등의 동지로부터 나라를 건져야 한다는 열화와 같은 독촉을 계속 받았다.
드디어 이 해 10월 초순에 전주 북방 완주군의 삼례에서 동학군의 수뇌회동이 이루어졌다. 삼례는 역촌이 있는 교통의 요지이며, 일찌기 1892년에는 동학신도의 대집회가 열린 곳이기도 했다. 이 회의에는 교주 최시형과 손병희도 참석했다. 전장군과 최시형과의 만남이었다. 처음에 해월 최시형 선사는 '마음을 지켜 하늘을 공경하고 정기를 바르게 한다'는 동학의 교리를 내세워 반폭력, 반혁명을 주장했다. 이로부터 남접과 북접 사이에 갈등이 시작되었다. 교주 해월 선사가 주로 활동한 보은 중심의 호중(충북) 이북을 북접이라 하고 전장군이 이끄는 호남 이남을 남접이라 하였다. 처음에 해월선사는 혁명이 일어나자 "도로써 난을 지음은 불가함이니 전봉준은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의 난적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리하여 손화중 장군으로부터 일찌기 도를 받았던 중도파 인물인 동학사의 저자 오지영은 남북접 화해책을 가지고 삼례에 있는 전봉준 장군의 대장소와 보은에 있는 해월선사의 거처를 각각 찾았다.
"의를 드는 것도 도를 위하여 함이요, 난으로써 하지 말자고 하는 것도 또한 도를 위하여 함이다. 우리가 모두 도를 위하여 다투다가 도리어 도를 해롭게 하는 것은 취할 바가 아니다."
"도인은 도인끼리 합하여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미 대세가 기울어져가고 있는 판국에 이 조화책이 받아들여짐으로써 봄, 여름부터 골칫덩어리가 되어온 남북접의 대립이 종식되게 되었다. 그러나 북접의 태도결정이 늦어짐에 따라 호남 동학군의 서울 진격이 20여 일이나 늦어져 공주영을 관군에게 먼저 점령을 당하는 비극을 초래하였다.
동학군의 거병에 약 3백만 명이라는 미증유의 대중이 호응, 궐기하였다. 음력 9월 18일 전주 교외 삼례역을 출발항 동학군은 논산에 이르렀다. 당면 공략목표는 공주성이었다. 동학군의 주력부대는 일본군 및 관군과 운명의 우금치전투에서7일 동안의 대격전 끝에 일본군의 신식 화력을 당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만다. 전장군은 우금치에서 괴멸상태에 빠진 동학군을 수습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순창에 피신하여, 동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과 재거를 모의하던 중 피노리에서 휘하부대의 배신으로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호송되었다. 전봉준 장군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갈 때 호남에는 언제부터인가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동요가 소리없이 전설처럼 퍼져가고 있었다. 세상은 전봉준 장
군을 동학대장 전녹두라고 불렀다.
동학의 3거두 중 한 인물일 김개남 장군은 청주에서 패한 후 태인의 매부 집에서 은거하다 체포되었다.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된 다음 악형과 위협 속에서 조선의 영웅적인 혁명가로서의 기개를 보이며 1895년 3월 29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죽음에 다다라 다음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謀
愛民正義我無失
爲國丹心雖有知
때 만나서는 천지도 내편이더니
운이 다하니 영웅도 할 수 없구나.
백성사랑 올바른 길 무슨 허물이더냐.
조국과 민족을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 관련 말씀
* 전명숙의 동(動)은 곧 천하의 난을 동(動)케 하였느니라
* 날마다 명부공사를 행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명부공사의 심리(審理)를 따라서 세상의 모든 일이 결정되나니 명부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세계도 또한 혼란하게 되느니라.”하시고“전명숙은 조선 명부, 김일부는 청국 명부, 최수운은 일본 명부를 각기 주장케 하여 명부의 정리공사장(整理公事長)으로 내리라.” 하시며, 날마다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라. (4편 4장)
* 이 해 갑오(甲午 : 道紀 24, 1894)년에 태인 동골사람 전봉준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악정에 분개하여 보국안민(輔國安民) 곧‘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동학 신도들을 모아 고부에서 혁명을 일으키니 온 세상이 들끓는지라. (1편 20장)
정염 (1506∼1594)
조선의 학자. 호는 북창. 본관은 온양. 1530년 사마시에도 정통하여 장악원 주부로서 가곡의 장단을 지도하는 한편, 천문·의술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관상감, 혜민서교수를 겸임했다. 뒤에 포천 현감이 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고 양주 괘라리, 광주 청계사, 과천 관악산 등지를 전전, 스스로 약초를 구하면서 요양했다. 유교·도교·불교는 물론 복서, 한어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통했다. 문장, 산수화에도 능했다. 사후 제학에 추증되었다.
■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용호대사의 기운을 너에게 붙여 시험해 보았더니 그 기운이 작도다." 하시니라. (4편 67장)
제갈량 (181∼234)
중국 삼국시대 촉한의 명재상이자 뛰어난 전략가. 자는 공명. 낭야군 양도현 사람. 호족 출신이었으나 일찍이 아버지와 사별하여 형주에서 숙부 제갈 현의 손에서 자랐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하여 사관하지 않았으나 명성이 높아 와룡선생이라 일컬어졌다. 건안 12(207)년 위의 조조에게 쫓겨 형주에 와 있던 유비로부터 '삼고초려'의 예로써 초빙되어, '천하삼분지계'를 진언하고 '군신수어지교'를 맺었다. 이듬해 오의 손권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조조의 대군을 적벽의 싸움에서 대파하고, 형주·익주 땅을 유비의 영유로 하였다. 그 후에도 수많은 전공을 세웠고, 장무 1(221)년 한의 멸망을 계기로 유비가 제위에 오르자 재상이 되었다. 유비가 죽은 후에는 어린 후주 유선을 보필하여 재차 오와 연합, 위와 항쟁하였으며 생산을 장려하여 민치를 꾀하고 운남으로 진출하여 개발을 도모하는 등 촉의 경영에 힘썼으나, 위와의 국력 차이는 어쩔 수 없어, 국세가 기울어 가는 가운데 위의 장군 사마 의와 오장원에서 대전 중 병사하였다. 위와 싸우기 위하여 출진할 때에 올린 『전출사표』『후출사표』는 천고의 명문으로 이것을 읽고 울지 않는 자는 충신이 아니라고까지 일컬어진다.
■ 관련 말씀
* 바둑도 한 수만 높으면 이기나니, 남모르는 공부를 하여 두라. 이제 비록 장량(張良), 제갈(諸葛)이 두름으로 날지라도 어느 틈에 끼인지 모르리라. (7편 24장)
* 내 일을 하다가 곤란은 있을지언정 그릇 죽지는 아니하리라. 천하사 하려다가 좀 갇히는 것이야 무서울 것이 있느냐. 천하사를 하는 자는 집안 일을 돌보기 어려우니 제갈량(諸葛亮)이 성공치 못한 것은 유상팔백주(有桑八百株)로 인함이니라.
* 事之從容도 自我由之하고
事之紛亂도 自我由之하나니
일이 조용하게 되는 것도 나로 말미암고
일이 시끄럽게 되는 것도 나로 말미암느니라
* 병가(兵家)의 묘략(妙略)이 공명(孔明)은 능히 조조(曹操)로 하여금 화용도(華容道)로 오게 하였고
조조 (155∼220)
중국 삼국시대 위왕조를 세운 인물. 패국의 초사람. 환관의 양자의 아들인데, 황건란 평정에 공을 세우고 두각을 나타내어 마침내 헌제를 옹립하고 종횡으로 무력을 발휘하였다. 화북을 거의 평정하고 나서 남하를 꾀했는데, 건안 13년 손권, 유비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싸워 대패하여 이후에는 그 세력이 강남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는 정치상의 실권은 잡았으나 스스로는 제위에 오르지 않았고, 연강 1(220)년 정월 낙양에서 죽었다. 조조는 또한 문학을 사랑하여, 많은 문인들을 불러들였으며, 자신도 그 아들 조비, 조식과 함께 시부의 재능이 뛰어나, 이른바 건안문학의 홍륭을 가져오게 하였다. 후세에 조조는 간신의 전형처럼 여겨져 왔는데 근년에 이르러 중국 사학계에서는 그의 재평가를 둘러싼 논쟁이 일기도 하였다.
최시형(최시형) (1827∼1898)
동학의 2대 교주. 본관 경주. 호 해월(해월). 5세때 어머니를, 12세때 아버지를 여의게 되어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고, 17세부터 제지소(제지소)에서 일하며 생계를 도모하였다. 19세때 밀양 손씨를 맞아 결혼한 뒤 28세 때 경주 승광면 마복동(마복동)으로 옮겨 농사를 지었다. 이곳에서 마을 대표인 집강(집강)에 뽑혀 6년동안 성실하게 소임을 수행하다가 33세때 자신의 농토로 농사를 짓기 위하여 검곡(검곡)으로 이주하였다.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 (철종 12) 6월 동학을 믿기 시작하여, 한달에 서너 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 집에 돌아와 배운 것을 실천하고,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았다. 1861년 11월 최제우가 호남 쪽으로 피신한 뒤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고 몸에 익히기 위하여 보인 정성과 노력은 많은 일화로 남아 있다. 1863년 동학을 포교하라는 명을 받고 영덕. 영혜 등 경상도 각지를 순회하여 많은 신도를 얻게 되었고, 이 해 7월 북도중주인(북도중주인)으로 임명되어 8월 14일 도통을 승계받았다. 이해 12월 최제우가 체포되자 대구에 잠입, 옥바라지를 하다가 체포의 손길이 뻗치자 태백산으로 도피하였고, 이어 평해와 울진 죽변리에 은거하면서 처자와 최제우의 유족을 보살피다가 동학의 재건을 결심하고, 교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영양(영양)의 용화동(용화동)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이곳에서 1년에 4회씩 정기적으로 49일 기도를 하고 스승의 제사를 지내기 위한 계를 조직하여 신도들을 결집시켰고, 경전을 다시 필사하고 편집하여 신도들에게 읽게
하였다.
이와 같은 교세의 재건은 1871년(고종 8)진주민란의 주모자인 이필제(이필제)가 최제우의 기일인 3월 10일에 영해부(영해부)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다시 탄압을 받게 되었다. 관헌의 추격을 피하여 소백산으로 피신하면서 영월. 인제. 단양 등지에서 다시 기반을 구축하여 1878년 개접제(개접제), 1884년 육임제(육임제)를 마련하여 신도들을 합리적으로 조직하고 교리연구를 위한 집회를 만들었다. 1880년 5월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세워 [동경대전]을 간행하였고, 1881년 단양에도 경전간행소를 마련하여 [용담유사]를 간행하였다. 이와 같이 신도의 교화 및 조직을 위한 기틀이 마련되어 교세가 비약적으로 증가하게 됨에 따라 1885년 충청도 보은군 장내리로 본거지를 옮겼다. 동학교도들의 활동이 활발하여지자 그에 따른 관헌의 신도수색과 탄압이 가중되었는데 동학의 교세도 만만하지 않게 성장하여 1892년부터는 교조의 신원(신원)을 명분으로 한 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여 나갔다. 제 1차 신원운동은 1892년 11월 전국에 신도들을 전주 심례역에 집결시키고, 교조의 신원과 신도들에 대한 탄압중지를 충청도, 전라도 관찰사들에게 청원하였으나 여전히 탄압이 계속되자 1893년 2월 서울 고아화문에서 40여명의 대표가 임금에게 직접 상소를 올리는 제 2차 신원운동울 전개하였다. 그러나 정부측의 회유로 일단 해산하였으나 태도가 바뀌어 오히려 탄압이 가중되자 제 3차 신원운동을 계획, 3월 10일 보은의 장내리에 수만 명의 신도들을 집결시켜 대규모 시위를 감행하였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어윤중)을 파견, 탐관 오리를 파면하자 자진 해산하였다. 당시 많은 신도들은 무력적인 혁신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시기상조를 이유로 교세 확장에 몰두하였다. 일본군의 개입으로 1894년 12월 말 동학운동이 진압되자 피신생활을 하면서 포교에 전력을 다하였고 향아설위(향아설위). 삼경설(삼경설). 이심치심설(이심치심설). 이천식천설(이천식천설). 양천주설(양천주설) 등의 독특한 신앙관을 피력하였다.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2일 교수형을 당하였다.
최제우(최제우)(1824∼1864)
호 수운(수운)또는 수운제(수운제). 아명 복술(복술). 본관 경주. 경상북도 월성군(월성군) 견곡면(견곡면) 가정리(가정리)에서 1824년(순조 24) 10월 28일에 출생. 먼 선조에 고운(고운) 최치원(최치원)이 있었고, 7대조인 최진립(최진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용맹을 떨쳤던 장군으로서 조정으로부터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정무공)이라는 시호를받았다. 그리하여 최진립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870년 때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이름은 용산서원(용산서원)이라고 하였다. 최제우는 이 용산서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한다. 또한 최치원 선생은 유언에 "우리 동방 나라에 도기운(도기운)이 어려있어 나로부터 25세 후에 반드시 세상을 개조(개조)할 큰 성인(성인)이 나올 것이다." 라고 했다한
다.수운의 부친은 최옥(최옥 :1762∼1840)이었으며 호는 근암(근암)이었다. 근암공은 성리학에 깊은 지식을 지녔으며 인품도 출중하여 경상도일대에 널리 알려졌으나 벼슬길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당시의 국내상황은 1841년 겨울에 질병이 전국적으로 창궐하여 숱한 백성들이 목숨을 빼앗겼으며 1846년 9월에는 수해가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이어서 1851년 7월에도 물난리가 나서 수 개월 동안 그 피해가 계속되어 백성들의 삶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또한 당시 조선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서양 열강의 후원을 업은 천주교는 1831년에 한국에 교구를 세운 뒤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였다. 그래서 1839년에는 전국적으로9천명의 신도를 확보하였다. 국외적으로는 1840년에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아편전쟁이 일어나 청나라가 크게 패하여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게 되는 둥 당시 국제 정세는 큰 변화의 흐름 속에 놓여 있었다. 1845년부터는 동해와 서해, 남해에 서양 배들인 이양선이 나타나 조선정부를 긴장시켜서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으로 강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서양세력의 후광을 업고 있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하여, 김대건과 8명의 교도를 처형하였다. 최수운은 13세에 울산출신의 박씨라는 규수와 혼인하였다. 혼인한지 4년 후에 근암공이 돌아가신 후 최수운은 인생의 한 획을 긋는 본격적인 방랑생활을 시작한다. 수운이 세상을 구제할 뜻을 굳히게 되는 본격적인 계기는 을묘천서 사건이다.
1855년 암자에서 독서를 하고 있던 수운은 밖에 낯선 스님이 와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운이 스님을 바라보자, 스님은 수운에게 다가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저는 금강사 유점사에서 온 사람으로, 무슨 일로 하여 백일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마지막 날에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고 보니 탑 위에 이상한 책이 놓여 있어서 이리저리 살펴보았으나 도무지 그 뜻을 알 수 없었습니다. 범상한 책이 아닌지라 주인을 찾아주기 위하여 각처를 둘아다니다가 오늘 우연히 이 곳을 지나다가 선생님을 뵙고 느낀 바가 있어서 실례를 하였습니다.
부디 이 책을 선생님께 전하고자 하니 받아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을묘천서 사건이다. 이 뒤로 더욱 수도생활에 전심하던 중 1860년 4월 5일 수운이 37세 되던 해 우주의 하느님으로부터 도를 전해 받는 '천상문답' 사건이 일어났다. 이 날은 조카의 생일이었다. 조카의집에 다녀온 후 하느님께 정성껏 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온몸이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지며 상제님의 천명을 전해 받는다. 수운은 상제님과의 감응에서 도를 나타내는 글과 도를 닦는 법을 마련하라는 명을 들었다. 이렇게 생겨난 주문이 시천주이다. 그 후 일년 동안 도를 펼칠 방법을 구상하다가 드디어 1861년부터 포덕을 하기 시작한다. 당시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하였던 때였다. 그러던 차 수운이 자신이 믿는 우주의 하느님을 '천주'라고 하는데서 수운이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 소문에 의하여 조정에서는 수운을 체포하려 하였다. 이후 1862년 3월부터 다시 포덕을 하기 시작하여 11월에는 각지에 접소를 설치하고 접소마다 접주를 두어 그 관내동덕을 통솔, 교화하는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어서 1863년 8월 13일 해월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수운이 전한 동학사상의 핵심은 시천주사상과 개벽사상으로서 우리 민족의 근대화에 결정적이 분수령을 형성하며, 당시의 도탄에 빠져있던 민중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안겨 주었다.
■ 관련 말씀
*한 성도가 여쭈기를 "최수운이 서자(서자)로 태어난 것이 원한이 되어 '한평생 서자와 상놈의 차별을 없애고자 하였다.'하오니 그러합니까?"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묵은 하늘이 그릇 지어 서자와 상놈의 원한이 세상을 병들게 하였느니라.
*최수운에게 천명(천명)과 신교(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밖에 벗어나 진법(진법)을 들춰내어 신도(신도)와 인문(인문)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신미(신미)년에 스스로 이 세상에 내려왔나니 동경대전(동경대전)과 수운가사(수운가사)에서 말하는 '상제'는 곧 나를 이름이니라.
*임인(임인 : 1902)년 4월에 상제님께서 김형렬의 집에 머루르실 때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시속에
어린아이에게 개벽쟁이라라고 희롱하나니 이는 '개벽장(개벽장)이 날 것을 이름이라. 내가 삼계대권을 주재(주재)하여 천지를 개벽하여 무궁한 선경의 운수를 정하고 조화정부를 열어 재겁에 싸인 신명과 민중을 건지려 하니 너는 마음을 순결히 하여 천지공정(천지공정)에 수종하라."하시고 날마다 명부공사를 행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명부공사의 심리(심리)를 따라서 세상의 모든 일이 결정되나니 명부의 혼란으로 말미암아 세계도 또한 혼란하게 되느니라."하시고 "전명숙은 조선 명부, 김일부는 청국 명부, 최수운은 일본 명부를 각기 주장케 하여 명부의 정리공사장(정리공사장)으로 내리라." 하시며, 날마다 글을 써서 불사르니라.
*하루는 성도들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고 동학 신도는 최수운의 갱생을 기다리나니 '누구든지 한 사람만 오면 각기 저의 스승이라'하여 따르리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하루는 여러 성도들을 앉혀놓고 말씀하시기를 "최수운이 성경신이 지극하기에 내가 천강서(천강서)를 내려 대도를 열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그 기운을 거두고 신미년에 직접 강세하였노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지금은 천지도수가 정리(정리)되어 각 신명의 자리가 잡히는 때라." 하시며 천지공사를 행하시니라.
*나의 일은 비록 부모 형제 처자라도 알 수가 없나니 나는 서양 대법국 천개탑 천하대순이로다. 동학 주문에 '시천주 조화정(시천주 조화정)'이라 하였으니 천지간의 모든 신들이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나에게 탄원하므로 내가 천조(천조)의 대신(대신)들에게 '하늘의 정사(정사)를 섭리하라.'고 맡기고 천개탑에 내려와서 천하를 둘러보고 만방의 억조창생의 편안함과 근심걱정을 살피고 너의 동토(동토)에 인연이 있는 고로 이 동방에 와서 30년 동안 금산사 미륵전에 머물면서 최제우에게 천명(천명)과 신교(신교)를 내려 주었더니 조선 조정이 제우를 죽였으므로 내가 팔괘갑자(팔괘갑자)에 응하여 신미(신미 :도기1, 1871)년 9월 19일에 세상에 내려왔노라.
* 조선과 동양민족이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폭압에 침몰당해 가려 할 무렵, 하늘에서 동방의 이 땅에 이름 없는 한 구도자를 불러 세워 새 시대의 여명이 열림을 선언토록 하셨나니 그가 곧 동학(동학)의 교조 수운(수운) 최제우 대신사(대신사)니라. 경신(경신 :1860)년에 인류의 새 세계를 알리라는 하느님(한울님)의 천명과 신교를받고 도통을 받았나니 이것이 곧 우주사의 새 장을 열어 놓은 천주님과의 천상문답 사건이라. 그해 4월 초닷샛날, 천주님의 성령이 그,에게 임하여 말씀하시기를"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상제)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너에게 무궁무궁한 도법을 주노니 닦고 다듬어 수련하여 글을 지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법을 정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케 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하시니라. 그가 상제님의 천명은 다 이루지 못하였으나 4년 동안 (1860∼1864) 천주님의 동방땅 조선 강세와 후천개벽으로 열리는 새 생명세계를 천하에 알렸나니 그 장엄한 인류구원의 외침은 바로 이러하니라. "한울님이 내 몸 내서 아국운수 보전하네."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 보냐." "만고 없는 무극대도(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너는 또한 연천(연천)해서 억조창생 많은 사람 태평곡 격양가(격양가)를 불구에 볼 것이니이 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런가." "어화 세상 사람들아 무극지운(무극지운) 닥친 줄을 너희 어찌 알까 보냐." "무극대도 닦아 내니 오만년지 운수로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최익현(최익현) (1833∼1906)
조선시대 문신. 삭자 의병장. 호는 면암(면암), 본관은 경주(경주) 포천(포천)출신.
이항로(이항로)의 문인. 조선물기의 거유(거유)로서 1855년 정시문과(정시문과)에 병과(병과)로 급제, 1868년 장령(장령)으로서 토목공사로 인한 국민 부담의 가중, 당백전의 발행에따른 재정의 파탄 등을 들어 흥선 대원군의 실정을 상소하여 대원군의 노여움을 사 돈령부 도정에 전임되었다가 사직, 양주직곡(양주직곡)에 은거했다. 1873년 동부 승지로 기용되어 다시 전국의 서원을 대폭적으로 철폐한 사실과 흥선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하였고, 공조 참판에 승진하여 승선대원군과 정권을 다투던 민비(민비)의 후원을 받아 더욱 강경한 논조로 대원군을 탄핵,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으나 군부를 논박했다 하여 형식상 제주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1875년풀려나왔다가 이듬해 일본과의 통상이 논의되자 5조(조)로 된 격렬한 척사소를 올려 조약 체결의 불가함을 역설하다가 다시 흑산도에 위리 안치되었다. 1879년 석방되어 1894년 갑오경장으로 단발령이 내리자 이를 반대하다 한때 투옥되기도 했다. 1898년 궁내부 특진관이 되고, 뒤에 중추원 의관, 의정부찬정, 경기도 관찰사들의 발령을 모두 사퇴, 국내에 대소사건이 있을 때마다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하여 배일(배일)과 매국역신의 토멸을 강력히 주장하여 여러 차례 체포. 구금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제자 임병찬(임병찬), 임낙(임낙), 정시해(정시해) 등 80여명과 함께 전라도 태인(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일본의 배신 16조를 따지는 의거소략(의거소략)을 배포한 후 순창(순창)에서 약 4백 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일본군에 대항하여 싸웠으나 패전, 체포되어 대마도(대마도)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 단식을 계속하다가 유소(유소)를 구술(구술), 임병찬에게 초(초)하여 올리게 한 뒤 굶어 죽었다.
■관련 말씀
* 최익현(최익현)이 고종 부자의 천륜을 해하였으므로 죽어서 죄가 되어 나에게 하소연하는 것을 볼지어다.
*최익현이 순창에서 잡히거늘 말씀하시기를 "일심의 힘이 크니라. 같은 탄환 속에서 정시해(정시해)는 죽었으되 최익현은 살았으니 이는 일심의 힘으로 인하여 찬환이 범치 못함이라. 일심을 가진 자는 한 손가락을 퉁겨 능히 만리밖에 있는 군함을 깨뜨리느니라." 하시니라
춘신군(춘신군)(?∼서기전 238)
중국 전국시대 초(초)의 정치가. 성은 황(황)이름은 헐(헐). 외국에 유학하여 발탁되어 관계로 진출, 진(진)의 소양왕(소양왕)을 설득하여 그의 공격을 막았다. 그 후 초의 태자 완(완)과 더불어 볼모가 되어 진에 있다가 꾀를 내어 탈출에 성공하였다. 완이 즉위(효열왕)하자 헐은 재상에 올라 춘신군이라 칭하였으며, 그 수 20년 간 권세를 휘둘렀다. 식객 3000명을 모았다는 말을 들었을 정도의 문화보호자로서 그가 살아 있을 때 순자(순자)도 초에 갔었다. 효열왕이 죽자, 권신 이원(이원)에 의하여 그 일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치우(치우) (?∼?)
배달의 제14대 환웅(환웅)인 자오지 천황. 치우(치우)는 세속에서 부르는 별칭이다. 이분은 머리에 최초로 철두갑을 만들어 써서 동두철액(동두철액 : 구리머리에 무쇠이마)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당시에 채광주철(채광주철)을 하였으며 치우천황이 갈노산. 옹호산의 쇠를 캐내 투구. 갑옷.칼.창 등을 만들었다. 자오지 천황은 신농의 마지막 후예인 8대 임금 염제 유망(유망)이 쇠퇴하는 것을 보고 서방으로 출정하였다. 처음에 유망이 대패하여 수도인 공상(공상0으로 도망가자 이를 일거에 멸한다. 이때 자오지 천황의 공상 입성 소식을 듣고 서방의 한족문화권을 통합하려는 웅지를 품고 있던 황제 헌원이 천자의 뜻을 나타내며 대군을 일으켰다. 이에 자오지 천황과 헌원과의 사이에 탁록에서 일대 대결전이 벌어졌다. 이 전쟁은 당시 10여년간 73회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는 치열한 격전이었다. 치우천황은 법력이 고강하여 큰 안개를 잘 지었다. 탁록의 싸움에서는 헌원이 치우천황의 안개술법에 대항하기 위해 방향을 가리키는 지남차(지남차)를 만들어 싸웠다. 이때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치우비)가 급공을 하다가 오히려 진중이 몰살당하였고 이에 노기 충천한 치우천황은 '비석 박격기'를 최초로 제작하여 헌원의 군사들이 항전을 못하게 하여 황제의 항복을 받고 그를 신하로 삼았다.
치우천황은 수천 년 동안 한민족은 물론 한고조 유방과 진. 한시대의 중국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중국 진. 한 대의 백성들이 치우천황에게 해마다 시월에 제사를 지내면 '붉은 기운이 반드시 뻗쳤다'고 한다. 이를 사람들은 치우기(치우기)라고 불렀다. 중국인들이 동방 배달민족을 동이(동이)라고 부른 것은 치우천황이 큰 활을 만들어 쓴 이때부터이다.
탕(탕) (?∼?)
상(상)왕조(서기전 1766∼1122)의 시조. 성탕(성탕), 대을(대을), 천을(천을)이라고도 하며, 근세에 발굴된 은나라의 갑골문자(갑골문자)에서는 당대을(당대을), 고조을(고조을)이라고 하였다. 성은 자(자), 이름은 리(리). 재위 30년(서기전 1783∼1754). 상(은)나라의 시조인 설(설)의 14손이다. 제곡고신의 아들인 설은 요순 당시에 백성의 교화(문교)를 담당한 사도(사도)의 직책을 맡았고 상(상 : 하남성 상구현)에 봉해졌다. 그의 후손인 성탕은 명재상 이윤(이윤)의 보필을 받아 역성(역성)혁명을 일으켜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 폭군 걸(걸)을 쫓아내고 상 (상)왕조 곧 은(은)왕조를 열었다. 상나라는 30대 마지막 왕인 폭군 주(주)에 이르기까지 645년 동안이었다.
■ 관련 말씀
*천도(천도)가 걸에게는 악을 가르치고 천도가 탕에게는 선을 가르쳤나니 걸이 망하고 탕이 흥함을 모두 이윤(이윤)에게 있었느니라.
평원군(평원군) (?∼?)
전국시대 말기의 인물로서 조나라(조국) 무령왕의 아들. 이름은 승(승). 평원(평원)에 봉군(봉군) 되었으므로 호를 평원군이라 함.
사군자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으로서 전국 시대 말기에 천하 통일의 야먕에 불타는 진나라(진국)와 대적해야만 했었다. 조나라는 장평에서 크게 패해 40만에 달하는 조나라 군사들이 모조리 항복하여 진나라 군사들에 의해 생매장 당하고 수도인 한단이 함락직전에 놓이게 된다. 그러자 평원군은 초나라의 춘신군과 위나라의 신릉군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의 군대를 공격하게 하여 조나라를 구하게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평소에 어질고 선비를 좋아하여 그의 문하에 모여든 빈객들도 제나라의 맹상군에 못지않게 많아서 수천 명에 달하였다.
■ 관련 말씀
*의를 알고 충을 아는 그대가 임금을 섬기더니 일본놈의 마수에 사해백성이 숨을 곳이 없구나. 전국시대 사군자인 맹상군(제) 평원군(조) 춘신군(초) 신릉군(위)의 명성보다도 훨씬 뛰어난 그대가 조국을 보국함으로 민족의 시대정기가 새로워지리라
한신(한신) (?∼서기전 196)
중국 한고조(한고조) 유방의 신하. 회음(회음 : 강소) 사람. 가난한 집에 태어났으나, 고조의 승상 소하(소하)에게 발탁되어 장재(장재)를 발휘하고 대장군에 이르렀다.
서기전 250년 고조의 통일대업을 도와 조(조). 위(위), 연(연).제(제) 등을 공략하여 멸망시키고, 대공(대공)에 의하여 초왕(초왕)에 봉해졌다. 한 3걸 중의 하나라는 칭송을 받았으나 후에 고종의 열수(열수) 억멸책(억멸책)에 의하여 반신의 누명으로 모살되었다.
■ 관련 말씀
*대세가 넘어가 와르르 무너져내리는 사왕은 한신(한신)같은 병선(병선)도 또한 어찌할 수 없느니라.
*너희는 진정한 통정을 한번 해 보라. 한신(한신)이 한고조(한고조)가 자기 밥을 밀어 주어 먹이고(추식식지) 자기 옷을 벗어 입혀 준(찰의의지)은혜에 감격하여 괴철(괴철)의 말을 듣지 않았나니 한신이 한고조를 저버린 것이 아니요, 한고조가 한신을 저버렸느니라.
허목(허목) (1592∼1682)
조선 후기의 문신. 자 문보(문보), 호 미수. 젊은 시절 대부분을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만에 사임하였다. 뒤에 공조좌랑, 용궁현감, 공조정랑 등을 임명받았으나 모두 사임하다. 1657년 지평에 초임되어 이듬해 장령이 되었다. 1660년(현종 1) 자의대비의 제1차 복상문제, 1675년(숙종 1) 제2차 복상문제 때 남인의 지도자로서 3년설을 주장하며, 서인의 지도자인 송시열의 기년설과 논쟁을 벌였다. 제2차 복상문제 때 삼년설이 채택되어 남인이 집권하게 되었다. 1675년에 이조참판,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거치지 않고 유일하게 삼공(삼공)에 올랐다.
■ 관련 말씀
*상제님께서 차마 보지 못하시고 죽은 아이를 무릎 위에 올려 눕히시고 배를 만져 내리시며 허공을 향하여 큰 소리로 "미수 시켜 우암을 부르라." 외치신 뒤에 침을 흘려서 죽은 아이의 입에 넣으시니 죽은 아이가 문득 항문으로 추깃물을 쏟으며 큰 소리를 치고 홀연히 살아나거늘 미음을 쑤어 먹이시고 걸어서 돌아가게 하시니라.
황제헌원(황제헌원) (?∼?)
중국 한족이 실질적인 시조로 받들고 있는 중국 고대 삼황(삼황)의 한사람. 성은 공손(공손), 이름은 헌원(헌원)이며, 희수(희수)에서 오래 살아 성을 희(희)로 고쳤다. 재위 100년(서기전 2692∼25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