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구름. 그리고 별과 달
具忠書
I. 序曲
일찌기 베토벤은 「自然만이 나의 유일한 벗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은 베토벤이 무슨 자연예찬론자 여서 한 말은 아닐 것이다. 하늘, 구름, 그리고 별과 달 --- 이들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나의 Drama는 엮어져 나왔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追憶의 보고에 간직되어, 돌이켜 봄으로써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歷史를 이루고 지나간 것이다.
이제 司法試驗 合格한 이 時點에서 當爲의 하늘을 날기 위하여는 孤獨의 날개를 달기를 서슴치 않을 것을 다짐하면서, 그간의 나의 司法 準備 生活을 간단히 적어보고자 한다.
II. 하나의 Drama
大望의 大學一年生이 되자마자 데모에 나서게 되었으니 돌이켜보면 우리들 大學生들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歲月들이었다. 이때부터 大學 4年間 계속되는 데모에 大學은 무허가 판잣집처럼 언제 철거당할지 모르는 立場에 處하게 되었으니 Drama를 위한 背景은 이렇게 하여 설정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 중에서도 Aspen Club에 들어 영어회화를 배우는 척도 하였고, 「Club의 밤」에 연극을 해보기도 하였으며, H와의 안타까운 추억을 남기기도 하였다. 一學年은 위수령과 學會선배의 제적, 軍入隊로 끝을 맺게 되었고 겨울방학을 지나 2학년이 되었다.
데모에 나서느니보다 江을 건너는데 必要한 한 가닥 밧줄을 마련하는 것이 空虚한 英雄에서 추악한 英雄으로의 변신을 막아주는 길이라 判斷하고 司試를 치르기로 하였으니 이때가 2學年初, 도서관의 考試界에 실린 合格記를 모조리 읽어보고 短期2年, 長期 3年이면 가능하다는 결론을 얻었으나 2~3年에 合格하려면 다소 무리가 있지 않겠는가 하여 3年後, 합격하도록 하자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가장 理想的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는 全科目의 旣出問題를 整理하였고, 三回分의 여백만을 남겨두고 卒業時 合格을 다짐하였다.
일단 세워진 계획을 수행하는데는 최선을 다할 일이었다. 도서관에 자리도 하나 정하는 등 부지런히 할려고 노력했고 그해 여름방학 때도 釜山 D大 도서관을 이용하였다. 그리고 가을의 十月維新을 겪으면서 2학기도 끝나고 겨울방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분위기를 일신하여 겨울방학을 有用하게 보낸다고 하숙을 옮겨 정하고 원남동 3층옥상의 단칸방에서 그 겨울을 나게 되었다.
아침에 자고 일어나면 그야말로 벽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유리문에는 성에가 하얗게 앉아 아침햇살에 반짝이곤 하였다. 이리하여 2年을 끝마칠 때까지 헌법, 민법, 형법을 3回讀 정도하였다.
이 원남동 하숙집을 이야기하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이때 한 여인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Drama는 여자까지 등장하게 되어 제법 그럴듯 해진 것이다.
그녀와 더불어 명동 지리를 익히고 다니기 시작했고 田園, 엠파이어, 아마존 등을 애용했고 북악스카이웨이를 드라이브하기도 하였으며 소원까지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司試를 忘却할 수는 없었으니 꾸준한 讀書는 可能하였다.
이렇게 2年을 끝내고 3年이 되었다.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창경원의 나무가 연두빛을 띠기 시작하고 봄바람이 훈훈해지자 컨디션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도무지 책이 읽히지 않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冊한권을 읽지 못할 상황에서 마침 5月에 실시된 第15回 司試에 응시하여 1차에 合格함으로써 완전한 空白은 면할 수 있었다. 이어 二次에서 첫 시간에 구경삼아 들어가서 좌우를 기웃거리다가 감독으로 부터 주의를 듣기도 하면서 답안지의 매수와 칸수를 헤아려 보기도 하고 如何히 답안지를 구성할 것인가를 構想해 보기도 하였으나 두 시간을 기다리느라 지루함을 참기 어려웠었다.
이해 여름방학은 컨디션도 좋지 않고 하여 해수욕이나 하면서 보내고 2學期를 맞게 되었다. 9月부터는 民訴를 읽기 시작했고 商法, 行政法, 刑訴 등을 2회독 정도하고 겨울방학이 되었다. 이 겨울의 2月 25日부터 실시된 第16回 司試試驗에 1차를 다시 치르지 않고 한번 덤벼본다는 기백으로 응시하게 되었다. 원래 계획은 이번 16回에서 1차를 다시 한번 치고 二次는 탐색전으로 그치고, 17回에서 1차없이 그것만으로 끝을 보겠다는 것이 었으나 父母님의 권유에 못이겨 一次포기, 2차應試를 택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내가 釜山에서 大學시험을 치르러 上京했을 때 투숙하였던 大光여관으로 숙소를 옮겨 정하고 約 50日을 全力投하기 시작하였다. 약간의 감회를 느끼며 공부에 전념하려 했으나 너무 공부한게 적은 상태에서 무리가 아니겠느냐하는 생각이 공부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같이 공부해 오던 兄을 찾아가서 良心的 合格論을 상호 피력하면서 급기야 明洞 술집 방문으로 良心守護를 하곤 하였다. 그러나 헤어지면서는 서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결국 應試까지 全科目 4回讀 정도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치른 16回 司試의 結果는 놀라운 것이었다. 3학년 同期가 6명 合格하였고 나의 점수 또한 과히 나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合格點 57.2점에 56.08로서 商法 47點이 不合格의 原因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行政法은 66으로서 거의 최고점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었다. 良心的 合格論 때문에 여관에서 集中的인 50日을 보내면서도 최후까지 최선을 다하지 못하고 시험장에서조차 성실하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가슴을 쳤으나 不合格의 原因은 어디까지나 공부의 부족에 있는 것이지 다른데 있을 수 없는 것이었다.
16回에서 얻은 소득은 어느 정도하면 어느 정도 점수가 나온다는 것을 알았고 특히 행정법 66점은 큰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여 이제껏 신비의 베일에 싸여있던 司試가 그 정체를 조금 들어낸 것 같이 느껴졌던 것이다. 이렇게 16回司試는 막을 내렸으나 이 겨울 大光여관의 50日은 참으로 많은 추억거리를 남겼으니 그 중의 하나를 소개하면 이 大光여관 내 房의 창문으로 효제국민학교 운동장이 내려다 보였는 바, 1月의 눈내린 운동장에 아침마다 기동경찰이 新學期 데모에 대비하여 곤봉으로 節度있게 구령에 맞추어 加擊練習을 하고 있는 것을 구경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 조금은 희극적이었다. 그 구령소리가 그치고 2月이 되어 開學을 하니 이제는 그 운동 장위에 꼬마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것이었다. 이 妙한 對比는 참으로 인상적이었으며, 눈 덮이는 것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는 나의 모습과 함께 나의 司試공부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이 삼자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그러나 내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 4학년이 되자 全科目을 차근 차근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고 여름방학 때는 처음으로 仙岩寺라는 절에 입산하였다. 山寺의 추억 몇가지와 民法의 정리를 마치고 告别酒로 맥주. 파티를 벌리고는 하산하였다.
2學期가 되어서는 연희동에 아파트를 한 칸 사주셔서 學校에 나가지 않고 6個月 獨居하며 大學 4年을 끝내기로 하였다. 더구나 그동안 여러 가지로 괴롭혀 주기만 했던 그녀도 돈을 좀 더 벌겠다는 자기 나름의 계획을 위하여 海外로 나가게 되었으니 그 겨울은 모든 것이 끝나는 季節이었다.
1月7日 그녀는 떠났고, 1月 28日 시험을 치렀으며, 2月 20日, 21日 大學院 시험을 치렀고, 大學院이 끝나던 날, 즉 2月21日 1차合格發表가 있었으며, 2月 25日부터 28日까지 2차 시험을 치렀고, 2차시험을 마치는 28日에 大學院合格을 확인하였다.
이리하여 목욕을 하고 단잠을 자고 일어나니 3月 1日, 시험 마지막날 쏟아지던 눈도 그치고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2차 시험동안 上京하여 격려하시고 지켜주시던 어머님과 함께 쌓인 눈을 밟으며 새벽길을 걸어 조계사에 이르렀을 때는 나는 무조건 幸福하였었다. 모든 것이 다 끝나고 이제 홀가분한 마음으로 결과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발표 때까지는 목욕과 온천으로 휴식을 취하면서 집에 내려가 쉬다가 결과를 직접 보기 위하여 上京하였다. 考試界社로 돌리는 전화가 계속 통화 중이어서 考試界社로 직접 찾아갔다. 내 이름이 있는 명단과 없는 명단을 머리속에 상상하며 명단을 들추어 보니(이때가 짜릿한 순간이었다) 거기 내 이름이 있었다. 순간 「있구나!」하는 외침과 함께 연희동 아파트로 taxi를 달렸으니 하나의 Drama는 이렇게 끝나게 된 것이다. 애당초 계획대로 卒業時 合格을 성취하였고, 1次 大學院, 2차 어느 것 하나 어긋남이 없이 모조리 合格하였으니 멋진 순간이었다. 달리는 taxi 車 너머 늦은 겨울의 석양이 西山에 지고 있었으니 참으로 Drama의 마지막 場으로서는 이 아닐 수 없었다.
이때까지의 讀書量은 7~8回讀 정도였다는 것을 덧붙인다.
III. Eplogue
우리가 참으로 바라는 바는 어린 少女의 아름다운 꿈이 꺽이지 않고 곱게 자라 한송이 소담스런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러한 土壤의 社會를 이루어 보자는데 다름 아닌 것이다. 아무쪼록 他人의 지도자가 되려는 者는 따뜻한 마음의 所有라야 할 것이며, 大韓民國 自己의 뜻을 펴기 위한 素材로서 存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리라.
모름지기 人間社會를 弱肉强食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관계로서 動物的으로 파악하지 않는 限, 人間社會에 있어 힘이란 또 다른 「法」에 의하여 통제되고 制限되어야 하며 그러므로써 人間사회는 보다 인간다워지는 것인 바 이처럼 힘과 투쟁하여 힘을 法이 統制下에 두는 것이 法學徒의 임무가 아닌가 생각하면서 그 보람과 긍지를 느낄 듯하다.
후배들께 한마디 말씀드린다면, 司試準備를 하면서 法院에 가서 재판하는 것도 한번 구경하고, 과연 잘하고 있는지 생각도 해보고 변호사나 검사나 판사들이 쓴 수필집도 사서 읽어 보고하면서 과연 무엇이 되어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서 공부를 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생각한다. 예컨대 韓勝憲 변호사님의 法과 人間의 抗辯이라든지 徐柱演檢事님이 하셨던 「검사의 체온」이라든지 하는 책을 읽으면 좋지 않을까 한다.
마지막으로 孫子의 合格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祖父님께 合格의 소식을 전하오며, 試驗準備를 위하여 必要한 조건을 모두 갖추어 주시고 오늘의 합격이 있게 해주신 父母님께 이 합격을 바칩니다.
1975年 9月 1日
司法研修院 入所前日에
略歷
◇ 釜山 出生
◇ 서울大 法대 졸업
◇ 第17回 司法試驗 合格
출처 : 고시를 향한 집념, 법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