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르쳐 주신 세 분의 스승
김 중 위
이제는 정초라고 해도 찾아가 새해 인사를 드릴만 한 어른이 계시지 않다. 누구로부터 덕담을 들으면서 꿈에 부풀어 발길을 옮기는 어깨에 힘이 들어갔던 순간도 경험할 수가 없어 서글픈 생각마저 드는 요즈음이다.
젊은 날에 나는 매년 정초에 세배를 드렸던 어른이 세 분 있었다. 한 분은 훗날 대학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나의 지도교수였던 김상협 교수였고 한 분은 정치인 이재형 국회의장이었다. 또 한 분은 사상계 시절 사장님으로 모셨던 장준하 선생 후임의 부완혁 선생이었다. 이제는 세 분 다 돌아가고 계시지 않아 정초가 되어도 갈 곳이 없어졌다. 세배를 드리러 갈 곳이 없어졌다는 것이 이렇게도 허전한 것인지를 최근에 와서야 비로소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김상협 교수는 학부 시절에는 정당 논과 모택동 사상 그리고 독일어 강독을 담당해 주셨고 대학원 시절에는 지도교수였다. 그의 모택동 사상은 당시 대학가에서는 그만의 유일한 강좌로 어느 대학에서도 개설한 바가 없는 그만의 독특한 전매특허품의 강좌였다. 교과서도 그가 쓴 <모택동 사상> 한 권뿐이었다. 특히 그의 독일어 강독은 천하일품으로 구수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독해는 누구도 감히 따라갈 수 없는 강의가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유난히도 많은 제자가 따랐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말하면 많은 제자들이 그를 따르게 된 것은 그의 강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소탈 담백한 그의 인품 때문이라는 것이 더 옳은 얘기가 아닐까 싶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후덕함이 가득 배어 나오는 느낌을 주었다.
정초에 그의 집에 가고 싶은 안달이 생기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자리에 가면 그를 찾아와 세배드리는 사람 중에는 내가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선배들도 있다는 사실과 개성 출신의 사모님이 해주시는 개성 음식을 맛볼 수 있다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뿐인가? 아니다. 재수가 좋으면 용돈도 조금은 벌 수 있다는 기대감도 발동하기가 일쑤다. 십수 명의 제자들과 이런저런 덕담을 나누다가 적당한 시간이 되면 그는 “그럼 이제부터 섯다 판이나 벌리지” 하면서 돈을 몇만 원씩 나누어 준다. 이때 잘하면 며칠 쓸 용돈이 생길 수도 있고 그렇지 않으면 왔던 주머니인 채로 그대로 가는 수도 있지만, 어느 경우에도 손해 보는 일은 없게 마련이다. 점심때가 되어 안방으로 건너가면 사모님이 정성스럽게 차려 놓은 개성 음식이 밥상 그득히 넘쳐난다. 개성 음식은 짜고 매운 것이 거의 없이 담백하다. 떡국은 먹기 좋게 새알처럼 동글동글하게 빚어놓은 것이고 술은 쉽사리 얻어먹을 수 없는 양주가 주로 나왔다. 우리는 염치도 좋게 배불리 먹고 용돈까지 타 나오는 형국으로 그 집을 나와 한 해를 시작하곤 하였다.
대학원 학위 논문을 들고 동료학생과 함께 찾아간 그는 대충 논문을 훑어보고 나서 “김 군이 이 학생 논문 손 좀 봐줘!” 그리고는 그만이다. 그만큼 그는 대범하였다. 학자가 될 사람도 아닌데 꼬치꼬치 따져 논문을 지도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사상계에 근무하던 어떤 날 그로부터 나를 보자는 전갈이 왔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대뜸 묻는 말이 “자네 춘추필법이 무엇인지 아나?”였다. 잘은 모르지만 들어 본 바는 있어 “예! 들어본 적은 있습니다마는··”하고 말을 얼버무렸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는 말일세, 절대적인 악의 정부나 절대적인 선의 정부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쓸 때는 부정과 긍정을 몇 대 몇으로 하느냐의 문제이지 100% 부정으로 쓸 수 있는 정부는 없는 것이네. 아무리 독재 정부라 하더라도 평가 해주어야 할 부분은 어느 정도 있는 것이 정상이네! 말하자면 부정 7에 긍정 3 아니면 부정 6에 긍정 4 이런 식으로 써야 하네. 자네 요즈음 쓰는 글을 보면 전부가 부정이야! 그건 춘추필법이라고 말할 수는 없네”
등이 오싹 할 정도로 혼찌검이 난 순간이다. 내 나이 30대 초반에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마구잡이로 사상계에 발표한 글을 어느새 그는 읽고 나에게 따끔한 지침을 주는 것이었다. 그의 이 집필지침은 내 평생의 지침으로 내 몸속에 자리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에 덧붙여 조선일보 주필 출신으로 당대의 논객이었던 부완혁사장은 또 어느 날 나에게 이런 지침을 주었다.
“글이란 언제나 단정적으로 쓰지 않는 게 좋아요. 예를 들면 ‘해야 한다보다는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다’보다는 ‘그럴는지도 모른다‘ 또는 ’그런 것 같다‘와 같이 말이죠. 어쩌다 글로 감옥에 갈 일을 만날 수도 있을 텐데 그럴 때 빠져나갈 길은 언제나 만들어 가면서 글은 쓰는 겁니다.”
그 이후부터 나는 글을 쓸 적마다 재판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염두에 두고 썼다면 남들은 비겁하다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어느새 습관이 되다시피 되었다.
운경 이재형 의장 얘기로 이 글을 끝내야겠다.
신군부가 권력을 쥐고 한창 창당을 서두르는 민정당이라는 새로운 정당의 대표역을 맡아 동분서주하고 있을 무렵 나는 그를 찾아갔다. 나는 말 없이 눈빛으로 요즈음 그가 하는 일을 잘하는 일인가 아닌가를 묻고 있었다. 그는 내 마음을 알고나 있는 듯 묻지도 않는 말을 띄엄띄엄 내뱉는다. “늙은이는 말이야! 젊은이들이 등을 대 달라고 그러면 대주는 거야! 그게 늙은이들이 할 일이지!” 그래서 나는 물었다. “전두환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에요?”
호두알을 손안에서 만지작거리다가 처연한 표정으로 “참 여백이 많은 사람이지!”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이런 절묘한 표현도 있구나!” 하는 탄성을 짓지 않을 수 없는 말이었다. <여백이 많은 사람!> 조금 모자란다는 뜻도 되고 관용이 많은 사람이라는 뜻도 된다. 자신이 도와주면 그 여백을 채울 수 있을 것이라는 뜻도 된다. 5공 참여의 변(辯)으로는 더 적절한 말이 없을 성싶다. 나는 그가 그 여백을 메꾸는 일에 함께 하지 않겠느냐는 그의 권유로 정가의 말석에 끼어 앉기 시작했다.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